'2007/12'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07/12/31 감사패
  2. 2007/12/29 교양인 고종석
  3. 2007/12/27 공연
  4. 2007/12/26 안온한 성탄절
  5. 2007/12/25 성탄 편지
  6. 2007/12/21 권민호의 그림
  7. 2007/12/18 신기루
  8. 2007/12/17 왜 사람들이 이명박에게 몰려갈까요?
  9. 2007/12/16 누구를 찍는 게 좋을까요?
  10. 2007/12/15 고누
  11. 2007/12/14
  12. 2007/12/13 오락가락전
  13. 2007/12/12 비폭력주의
  14. 2007/12/11 역사의 터널
  15. 2007/12/10 송년회
  16. 2007/12/09 붉은악마를 부추기지 말라
  17. 2007/12/08 얀과 빈
  18. 2007/12/07 고장난 지성
  19. 2007/12/06 동지 김규항께
  20. 2007/12/02 할머니 생일
2007/12/3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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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밤, 고꿈세에서 조중사에에 감사패를 주었다. 조중사의 즉석 소감.)

제가 43년 살아오면서 처음 상을 받습니다. ㅎㅎ

아내에게 고맙습니다.
고래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지난 4년 동안 가정 경제에 거의 기여를 못했는데
돈 문제로 원형탈모증이 생길 만큼 힘들 때도 아내는 저를 원망하거나
못마땅한 내색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저는 고래 일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감사패 고맙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제가 고래에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사람으로서 배워야 할 것의 대부분을 고래에서, 고래를 만들며,
배웠습니다.
2007/12/31 23:58 2007/12/31 23:58
2007/12/29 23:56
뒤늦게 읽은 대선에 관한 고종석의 글 두개. 내가 그를 처음 알았을 때 그는 현실사회주의는 물론이려니와 거의 모든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해 고른 반감을 보였었다. 아마도 그건 그가 대학시절과 초기 한겨레의 기자 시절 운동권의 집단문화에 입었을 모종의 상흔과 관련 있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지금 그는 어떤 민노당원보다 설득력 있게 신자유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정치세력의 성장에 대해 역설한다. 그가 사회주의자가가 된 것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의 교양이 세상의 변화에 반응하고 있을 뿐. 세상은 ‘복거일의 제자’를 자처하던 한 우파 교양인을 ‘거의 사회주의자’로 만들 만큼 사악해지고 있다.


미래를 위한 사표(死票)

정파 분열과 후보 난립이 겹쳐, 17대 대선 당선자는 1987년 대선 이래 가장 낮은 득표율에서 결정되리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이번 대선에서 나올 사표(死票)의 비율이 87년 대선 이래 가장 높으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이 던진 표가 사표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될 사람 밀어주자는 식의 부화뇌동, 곧 밴드왜건효과의 심리적 바탕도 그것이고, 지난 16대 대선 막판에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을 망설이게 했던 정치적 연산의 바탕도 그것이다.
그러나 사표에 정치적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번 대선 때 유효표의 51%가 넘었던 사표는 유권자 과반수가 노무현 후보 반대편에 서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면서 노 정권의 행보를 일정하게 제약했다.
그 사표 가운데 민노당 권영길 후보가 받은 표는, 비록 유효표의 4%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선거공학의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사회민주주의 신념을 드러내고자 하는 유권자들이 바로 그만큼은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번 대선에서도 민노당에 던지는 표는 사표일 가능성이 100%다. 다시 말해 권영길 후보가 당선할 가능성은 0%다. 그러나 권영길씨에게 던져질 사표는 다른 사표들과 그 정치적 의미가 다르다.
지금 빅쓰리라 불리는 정동영 이명박 이회창씨 가운데 두 사람에게 던져질 사표는 어떤 인물이나 패거리에 대한 호오를 드러낼 뿐, 가치나 이념의 차이를 드러내지는 못한다.
이것은 빅쓰리가 일종의 연예인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들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대한민국의 앞날이 크게 다른 경로를 걷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네거티브 캠페인 탓에 정책선거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한탄이 곧잘 나오고 있지만, 과연 이들 빅쓰리의 정책이 그렇게 서로 다른가? 아니 설령 지금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는 정책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그 다름이 집권 이후의 실천으로까지 이어질까? 그럴 것 같지 않다. 그런 양두구육은 때깔 좋은 언어를 내세워 집권한 노 대통령이 지난 5년간 충분히 보여준 바 있다.
선량한 범여권 지지자들은 이명박씨나 이회창씨가 집권하는 걸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대북정책이 지금의 화해협력 노선을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이회창씨의 가장 격렬한 언어조차 극보수 유권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사탕발림일 뿐이다. 막상 집권했을 때, 그에겐 지금까지의 화해협력 정책을 뒤집을 힘도 의사도 없을 게다.
현단계에서,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미국 정부와 한국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니 말이다. 선량한 범한나라당 지지자들 역시 정동영씨가 집권하는 걸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노무현 정부가 정신분열적 태도로 증명했듯, 가상의 정동영 정부 역시 말은 어떨지 몰라도 그 몸뚱이는 재벌-관료 동맹 위에 얹혀 부익부 빈익빈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매진할 테니 말이다.
물론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권력잔치의 초대장에 박힌 이름은 달라질 것이다. 이명박씨나 이회창씨가 집권하면, 그 잔치에 그들의 친구가 초대될 것이다.
이 잔치에, 선량한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낄 자리는 없다. 정동영씨가 집권할 경우엔, 그 잔치에 정동영씨의 친구들이 초대될 것이다. 이 잔치에도, 선량한 범여권 지지자들이 낄 자리는 없다. 지지자와 친구는 다르다. 대통령 선거의 격렬함은 이 잔치에 끼고자 하는 예비 파워 엘리트들의 욕망의 결렬함이다.
민노당은 그 잔치를 모두의 잔치로, 특히 서민과 소수자의 잔치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섣불리 믿을 일은 아니겠으나, 그간 이 정당이 복지와 분배와 평화와 인권 감수성에서 다른 정당들과 질적 차이를 보여온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민노당에 던지는 사표가 여느 사표와 다른 이유다. 그 사표는 이념의 사표이자 가치의 사표다. 미래를 위한 사표다.


투표

대선 후보 합동토론회에 나온 권영길씨는 다섯 해 전과 다름없었다. 논리 전개는 허술했고, 음절 경계는 흐리터분했다. 그 알아듣기 힘든 언어는 게다가 구체성의 살을 발린 채 관념의 뼈대로 앙상했다. 동문서답도, 썰렁한 유머도 여전했다. 요컨대 권영길씨는 다섯 해 전처럼 공부 없이, 준비 없이 토론에 나온 것이 분명했다. 그 배짱이 그를 설핏 신참자 이명박씨와 닮아 보이도록 했다. 아무런 사전정보나 선입견 없이 토론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권영길씨와 이명박씨를 우등생 넷 사이에 낀 열등생들로 판단했을 것이다. 끝끝내 텔레비전 토론을 거부한 채 대통령이 된 김영삼씨가 텔레비전 토론이라는 것을 했다면, 아마 권영길씨나 이명박씨 식으로 해치웠을 것이다. 메떨어진 억양과 빈약한 가용어휘로 말이다. 그러니 민주노동당에 미련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권영길씨가 아니라 심상정씨나 노회찬씨가 앉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한다 해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아니, 권영길씨와 이명박씨를 제외한 나머지 네 후보 중 누구라도, 그가 권영길씨 자리에 놓였다면, 한결 더 효과적으로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가치를 유권자들에게 소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중도우파 세력의 지지 기반이 무너져 진보정치의 공간이 외려 넓어질 수도 있는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제 후보를 잘못 골랐다는 뜻이다. 주류 정치세력 후보들 모두를 선택지에서 제쳐놓은 유권자들도 권영길-민주노동당에 선뜻 마음을 열지 못하는 눈치다. 뭔가 개운치 않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뭔가 개운치 않은 것이 꼭 권영길씨 개인의 매력이 모자라서만은 아니다. 정작 개운치 않은 것은 권영길씨를 아슬아슬하게 민주노동당 후보로 만든 정파의 이념적 봉건성이고, 좀처럼 화해하기 힘들어 보이는 민족지상주의자들과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의 당내 혼거 상황이다. 이질적 정파의 이 혼거는 갈등을 조정할 당내 정치력의 부족으로 자주 파열음을 낳고, 그 파열음은, 보수정당에서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사소한 추문들과 맥놀이를 만들어내며, 기호 3번에 표를 주기를 머뭇거리게 만든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다면적이고 상대적이다. 권영길씨는 다른 후보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 그 다른 삶은, 진보 유권자들 처지에서는, 존경할 만한 삶이었다. 신문기자로 일할 때 그가 얼마나 노동계급 지향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는 지난 20년간 한국 노동운동의 한복판에, 또는 그 전위에 있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경선을 거쳐서 그 당의 후보로 뽑혔다. 그것은, 이번이 몇 번째 출마든, 그가 한국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로서 정통성이 있다는 뜻이다.
기호 3번에 투표하는 것이 권영길씨 개인에게 투표하는 것이라기보다 민주노동당에 투표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자주와 통일 담론에 대한 완고한 집착이 이 당의 노동계급 정체성을 많이 흐려버리기는 했으나, 민주노동당이 제도권 안에서 한국 노동계급을 대표해온 유일한 정당이라는 사실은 엄연하다. 법적 출발로만 따져도 민주노동당은 한나라당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지닌 정당이지만, 민주노동당의 사회·정치적 역사가 2000년 1월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 정당에는 군사파쇼 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졌던 노동운동의 흐름들이 합류했고, 해방기까지 올라가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의 흐름들이 합류했다. 그러니까 기호 3번에 투표하는 것은 한국 노동계급의 역사와 그 미래에 투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은, 그 근본이 조직노동자들의 정당이긴 하나 적어도 다른 정당들에 견줘서는 우리 사회의 순정(純正) 아웃사이더들에게까지 눈길을 건네왔다.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은 최근 “80만 조합원이 각자 10명씩을 조직하여 800만 표를 노동자 후보에게 몰아주자”고 호소했다. 꼭 10명씩이 아니라, 조합원 모두가 제가끔 가족 친족 유권자들만 설득해도 민주노동당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미증유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조직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자들 자신이 지역을 비롯한 이런저런 연고에 이끌려 표를 ‘반-노동자적으로’ 행사했기 때문일 테고, 민주노동당 안의 이른바 자주파마저 수구세력 집권 저지라는 대의와 민족주의 열정에 휘둘려 중도우파세력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실천했기 때문일 테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보수정치세력이 힘을 얻고 있는 데다 그 보수세력이 민생은 몰라도 민족주의 열정은 살려낼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지금은, 비판적 지지를 철회하고 계급투표를 하기에 딱 좋은 계제다. 물론 그런다고 권영길씨가 대통령에 당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얻은 표는 내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치를 시험의 모의고사 점수 노릇은 하게 될 것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든 범여권이 재집권하든 한국 노동계급에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득표율은,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한국 노동계급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2007/12/29 23:56 2007/12/29 23:56
2007/12/27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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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길옆작은학교 인형극패 칙칙폭폭이 공연을 한다. 많이들 가서 보시라. 혹시 내용은 좋은데 극적 완성도는 떨어지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굳이 언급하면 <길 동무 꿈>은 2007 춘천 아마추어 인형극 경연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기차길옆작은학교 최솔비와 이모삼촌들이 보내온 예쁜 성탄카드.)
2007/12/27 17:22 2007/12/27 17:22
2007/12/26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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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에 안상수 선생 부부와 밥을 먹는 게 연례행사가 되었는데 이번엔 안 선생 집에서 만났다.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집에서 예나님이 정성들여 차려낸 식사를 하며 도란도란 담소했다. 아이들은 집 안과 마당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대형견 두 마리(밤밤, 또물) 덕에 더 즐거웠다. 안 선생 집을 나와선 5분 거리의 목리네 집에 들러 살구네 배박사 들과 저녁 늦게까지 다시 술과 식사.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안온한 성탄절 하루였다. (안 선생의 선물을 풀어보는 김단, 김건.)
2007/12/26 23:37 2007/12/26 23:37
2007/12/25 10:44
(어떤이가 보내온 성탄 편지)

프레시안에서 손문상 화백의 '성탄' 을 보았습니다.
아주 오래 ... 멍하니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 졌습니다.
김규항이 알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그 청년'도 태안에 가 있을까
회사 게시판에 송년회 대신 태안에 가자는 글이 올라왔더군요
제목만 보고 내용은 읽지도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손이라도 더 보태야 인간이 벌려놓은 끔찍한 짓을 조금이라도
빨리 씻어낼 수 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태안 또한 우리 스스로 우리를 동원하는 것은 아닌가요
새만금에 침묵하고 천성산,부안에 고개돌리던 우리가
비굴한 양심 끄트머리 한 올 먼지 털어내듯 그렇게 기름 걸레질하며
스스로 죄를 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달려가야겠다는 마음에 앞서 그런 자괴감이 먼저 밀려옵니다.
늘 공권력으로부터 안전한 순간에만 '연대' 하며
보호를 받는 '광장' 에서만 '촛불'을 들고
그들이 조장해 줄 때에만 '분노' 하던 그들이 아니었습니까
그곳에 다녀오면 또 한동안 평온하게들 사시겠지요
그 '광장' 에서 '연대'하며 '분노'했던 그 추억을 힘으로 ..
'국민 여러분 ~ ' 으로 시작하는 다음 사이렌이 울릴 때까지 ~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당신의 '예수'도 그곳에 그들과 함께 있을까요
2007/12/25 10:44 2007/12/25 10:44
2007/12/2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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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brand new camera phone
841 x 1189, 트레이싱페이퍼에 연필. 2007

권민호의 포트폴리오. 매우 사회적인 그림들인데 정교하고 매카닉하면서도 수묵화의 여운이 있다.

"그냥 예쁘고 멋진 그림이 아니라 제가 속한 사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김규항 선생님 글을 읽고 생각해서 그린 것들은 만수대 쇼핑센터, 마이 브랜드 뉴 모바일 폰, 괜찮아요, 엄마, 5.18 광주, koreas, 사이공의 한 사형집행, 중국공이공장 등이에요. 만수대와 마이 브랜드 뉴 모바일 폰은 실제 크기로 보지 않으면 뭐가 들어 있는지 보이지 않아서 설명을 할게요.
만수대 쇼핑센터는 통일 후 평양의 만수대가 남한의 디벨롭퍼들에 의해서 쇼핑센터로 변하는 장면을 상상해서 그렸어요. 첫번째 장은 북한 만수대고 두 번째 장은 계획도에요. 큰 그림이라서 디테일을 보여드릴 수 없는데 오른쪽 밑에 무슨 건축 임대리 라는 서명도 적어 넣었어요 ㅎㅎ. 세 번째 장은 계획 후 쇼핑센터로 변한모습이에요. 반쪽 위는 앞쪽에서 본 모습이고 그 밑은 그 건물들의 도면들이에요. 제가 그리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일일이 다 글로 표현해서 적지는 못하겠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아요. 김일성 동상 위에 서 있는 이효리를 모델로 쓴 삼성 애니콜 전자 광고판, 위층은 교회고 아래층은 웨딩홀, 케이에프씨, 단란주점 등이 들어서 있는 북한국회 의사당이 떠올랐어요.
my brand new mobile phone 은 한국의 한 여자 아이하고 기름 때문에 일어난 분쟁의 희생자들하고 한 공간 안에서 만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라는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이에요. 유전펌프 거기서 기름과 같이 올라오는 시체, 그 위에 떠있는 명품의 실은 배, 그 안에 타고 있는 큰 여학생, 아이 러브 뉴욕 악세사리를 단 카메라 폰, 스타벅스, 푸들. 이런 것들이 떠올랐어요. 신기한 듯이 나뭇가지로 찔러 보면서 자기 카메라폰으로 사진 찍는 것이 그 여자애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지 않나 싶었어요."
2007/12/21 10:24 2007/12/21 10:24
2007/12/18 22:47
애석하게도 한국의 선거는 아직은 부르주아 선거이며, 부르주아 선거란 신기루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도둑 이명박을 막자는 비장한 말은 동시에 신자유주의자 정동영을 찍자는 요사스런 말이기도 한 것이다. 권영길을 찍는 것만으로 이 신기루의 공허를 견딜 수 없다면 다른 조용한 생산들을 보라. 이를테면 루시드폴 신보의 8분 21초짜리 히든트랙을 들어보거나, 김두수의 공연 티켓을 사라.
2007/12/18 22:47 2007/12/18 22:47
2007/12/17 10:57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통해, 특히 노무현 정권을 통해 ‘진보’에 질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젠 진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살림이라도 잘 할 사람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책임은 노무현 정권에게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아니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문제는 그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 진보라 선전되는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데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개혁에 인민들의 삶이 거덜 난 건데 인민들은 진보 때문에 거덜 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된 책임은 인민들에게 신자유주의 개혁을 진보라 착각하게 만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게 노무현 정권이 아닌가요?

그들만은 아닙니다. 사실 그들이야 자신들이 진보라고 하지, 진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력이라고 하겠습니까?

조중동 같은 수구 언론 때문인가요?

조중동이 개혁정권을 좌파로 왜곡한다고들 하는데 그건 한국의 극우파들을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곡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군사파시즘에 빌붙어 살아온 그들에게 민주화 운동하던 사람들은 모조리 빨갱이로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 이명박으로 옮겨간 사람들은 조중동에 사로잡힌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 누군 때문인가요?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과 미디어들입니다. 한겨레와 경향 그리고 그 신문들에 기고하는 ‘거의 모든’ 지식인들 말입니다. 메이저 시민운동 세력들, 창비니 민족문학작가회의니 민예총이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니 하는 곳들 말입니다. 그들이 인민들을 이명박에게 몰려가게 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다는 건가요?

그들은 언제나 개혁과 진보를 뭉뚱그려 말했지요. 지난 수년 동안 그들이 입이 닳도록 사용한 ‘개혁진보세력’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그래도 이명박만은 막아야 한다” 소리치고 있지요.

만일.. 그들이 개혁과 진보의 차이를 분명히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개혁정권에 실망한 사람들이 이명박에게 가는 게 아니라 진짜 진보를 찾아 가겠지요. 민노당이나 그보다 급진적인 정치세력으로 말입니다. 그랬다면 한국은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좌와 우가 균형을 이루기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로소 민주주의가 시작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강연에서 있었던 질의응답을 재구성한 것)
2007/12/17 10:57 2007/12/17 10:57
2007/12/16 23:03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글쎄 선택의 여지가 뭐 있겠나? 최소한의 양식이 있다면, 아니 미치지 않았다면 극우세력과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이명박, 이회창, 정동영, 이인제, 이수성, 정근모, 문국현)을 찍을 순 없는 노릇이고, 허경영이나 전관을 고려하는 건 지나친 장난이 되니, 남는 건 권영길과 금민뿐인데 둘 중에서 자신의 세계관에 좀 더 가까운 후보(당)을 찍으면 될 것이다. 물론 금민이 더 가까워도 ‘한국의 정치현실’을 고려해서 권영길을 ‘비판적 지지’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금민 찍는 걸 ‘사표’라고 주장해선 안 된다.”
2007/12/16 23:03 2007/12/16 23:03
2007/12/15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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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50호 부록으로 고누놀이판을 마련하기로 했다. 편해문 형과 인사동 찻집에서 만나 이면지에 놀이판을 그려놓고 놀아봤다. 재미있다.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재미가 없으면 쓸모가 없으니(놀이는 취지로 하는 게 아니니) 다행이다. 고래 발행인이라는 자가 이제야 고누놀이를 해본 게 스스로 딱하긴 하나..ㅎ
2007/12/15 23:32 2007/12/15 23:32
2007/12/14 22:30
.. 길에서 필요한 것은 그 뿐이다,
길은 사람들에게 자꾸 최소한을 요구한다.
성자들이 길에서 나온 이유가 거기 있다.

성기완
2007/12/14 22:30 2007/12/14 22:30
2007/12/13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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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가락전(五樂街樂展). 호감을 갖는 다섯 사람(김홍희, 류연복, 박남준, 임의진, 한희원)의 작품을 한번에 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김단과 다시 갔다. 의진 삼촌에게서 그림 이야기를 듣는 김단. 김단이 찍은 나.
2007/12/13 00:35 2007/12/13 00:35
2007/12/12 12:43
생명평화결사 겨울학교에 발제자로 참여하기로 했다. 작년에 이어 간디의 비폭력사상을 좀 더 깊이 공부한단다. 비폭력.. 내 오랜 고민이기도 하다. 이현주 선생 일도 있고 해서인지 사람들은 내가 ‘정당한 폭력’에 주로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정당한 비폭력’에 있다. 우리는 유약하고 관념적인 비폭력주의야말로 폭력의 가장 충실한 옹호자임을 잊어선 안 된다. 얼마 전 아무개 선생과 교환한 편지.


고래가그랬어 기사 내용 중에서 제 교육관과 사뭇 다른 내용도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컨대 "싸움질"과 "싸움" 관련의 기사에서 "의로운 싸움"이 가하다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저는 제 아이만큼은 그러한 말을 절대로 하지도 않고 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어린이 사이의 폭력 사용이 "의로울" 리가 없으며, 갈등이 생길 경우 이를 해결해줄 비폭력적 제도적 장치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쨌든 이 부분에 대해 세계관과 본인의 경험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지적하신 부분(비폭력 문제)은 저 또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내용인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에 폭력이 좋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전적으로 폭력으로 돌아가는 세상이지요. 부시 같은 폭력주의자도 폭력은 반대하는데 악의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단지 폭력은 나쁘다는 말이나 단순한 비폭력주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정당한 폭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 비폭력주의는 서재나 연구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당사자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폭력의 현장의 아픔과 당사자의 고통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비폭력주의는 폭력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옹호자이자 당사자에겐 폭력보다 더 가혹한 폭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비폭력주의는 언제나 저항하는 폭력보다 오히려 더 폭력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예수나 간디는 폭력에 의해 죽임 당했는데 왜 예수나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따른다는 사람들은 왜 일 년 내내 뺨 한번 맞을 일이 없을까요? 위협을 받기는커녕 폭력의 세력으로부터도 주저 없는 존경과 지지를 받을까요? 비폭력주의가 유약한 인텔리의 관념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아이들에게 폭력의 현장성에 대해 알려주고 비폭력의 힘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숙제일 것입니다.
2007/12/12 12:43 2007/12/12 12:43
2007/12/11 13:55
대개의 역사란 어떤 동기로든 대중의 계몽이 관건이 되는데 지금 한국은 지식인들의 계몽이 관건인 참으로 희한한 역사의 한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디워나 디빠를 둘러싼 지식인과 대중의(혹은 386과 청년들의) 대치 상태에 내가 ‘소수 의견’을 내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지금도 각별한 관심을 지속하는 이유는 그게 오늘 한국 사회의 상태와 앞으로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다음 녹색평론에 이 문제를 포함해서 한국 지식인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글을 쓰기로 했는데 메모삼아 잠시 적으면..

지식인 혹은 인텔리라 불리는, 그러니까 말과 글 위주로 살며 행동은 사이버 공간에서만 하는 유약한 책상물림들은 ‘군중의 출현’에 매우 민감하다. 그 거대한 신체의 에너지가 유약한 그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텔리들은 군중의 출현 앞에서 언제나 놀란 메뚜기처럼 ‘오버’한다. 군중이 제가 바라는 방향대로 움직이면 과도한 찬미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 과도한 혐오를 퍼붓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군중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위대한 민중이 되었다가 파시즘적 집단이 되었다가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80년대 말 울산과 거제에서 대공장 노동자들이 거대한 행진을 벌이자 그들은 ‘혁명 전야’를 노래했고 2002년 월드컵 때 군중들이 쏟아져 나오자 그들은 ‘광장을 접수한 민중’과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을 노래했다. 혐오는 예는? 디워나 디빠는 작은 시작일 뿐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한국 인텔리들이 보인 지독한 어리석음(김대중과 노무현에게 진보의 기대를 건) 덕에 지친 군중은 이미 거의 대부분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단지 문화적 차원은 아니다. 보다시피 20대 청년의 대다수가 이명박 대통령을 원한다!
이 거대한 물길을 되돌릴 수 있을까? 첫 단추는 인텔리들이 대중의 얼굴에 비친 제 혐오스러운 모습에 혐오를 퍼붓는 파렴치한 행동을 멈추고, 제 어리석음을 반성하는 것일 게다. “노무현이 변했다”는 치사하고 비굴한 변명이나 늘어놓는 사람은 차고 넘치는데 “내가 어리석었다” 말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운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이지만 말이다.
2007/12/11 13:55 2007/12/11 13:55
2007/12/10 23:45
이번엔 고꿈세 주최 후원의밤으로..
그나저나 가스메볼펜 밴드는 아직 선곡도 못했으니..ㅎ
2007/12/10 23:45 2007/12/10 23:45
2007/12/09 14:37
고장난 지성에서 언급한, 2002년 월드컵 때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표한 글. 검색으로 쉽게 찾아볼수 있는 글이지만, 함께 다시 읽어보자는 뜻에서 올린다.



<논평> '붉은 악마'를 부추기지 말라

월드컵 열기에 나라가 온통 미쳐 돌아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스포츠는 이미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상업화된 '섹스'와 함께 제국주의의 식민지에 대한, 혹은 독재정권의 대중에 대한 우민정책의 일환으 로 이용되면서 대중의 탈 정치화를 대규모로 진행시켜왔다. 지금 우리는 스포츠에 대한 대중의 열광이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지를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수만 명 단위로 전국 주요 거리를 메우며 열광하는 빨간 티셔츠의 물결은 우리 사 회의 풀뿌리 민주주의도 노동자·노점상의 생존권도 집회·시위의 자유도 순식간 에 삼켜버렸다. 우리는 '붉은 악마' 현상이 바야흐로 우리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붉은 악마' 현상을 두고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의 망발이 그칠 줄을 모른다.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이라느니, '6월항쟁에 나타난 민중 에너지의 재현'이라느니, 심 지어는 '우리 민족의 단결력과 애국심'을 과시했다는 따위 발언은 지식인의 진정한 소명을 벗어 던진 추악한 아부에 지나지 않는다. 감히 말하건대 '붉은 악마' 현상 에는 넘실거리는 국가주의와 맹목적 애국심이 있을 뿐이다. 정의에 대한 열망이 아닌 승리에 대한 열광이 있을 뿐이며, 체제에 대한 순응과 정치적 무관심과 인간 의 주체성을 죽이는 군중심리가 있을 뿐이다. '붉은 악마' 현상은 파시즘을 가능케 하는 병적인 현상이다.
'붉은 악마' 현상은 결코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지배세력이든 자신의 정통 성을 과시하고 대중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대중동원은 필수적이다. 군사 독재 시절에 그 동원은 민주인사, 언론, 국민에 대한 강제와 공포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든 통치가 비판세력의 대규모 체제내화를 통해 진행되는 지금, 대중동원 은 탄탄한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한 거대 매스컴을 통해 이루어진다. 거대 매체가 국민에게 국가주의를 부추기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현상이 가능하겠는가?
16강 진출로 인한 경제적 부수효과가 16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게다가 코리아 에 너지에 의한 '국민통합'의 효과까지 해서 선진국 진입이 눈앞에 있다고 법석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민의 정치적 사회적 무관심 속에 국가주의의 유령과 힘겹게 싸우 면서 이 사회에 인권을 실현해 나가야 할 우리는 월드컵과 '붉은 악마'가 이 사회 의 건강한 발전을 10년 이상 정체시켰다고 주장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더 이상 부추기지 말라.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필승'이 아닌 '인권'이다.



<논평>「'붉은악마' 현상을 부추기지 마라」에 부쳐

<'붉은 악마' 현상을 부추기지 말라>는 논평에 대한 많은 분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논평>의 본래 취지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된 질타와 비판, 또는 우리에 대한 단순한 인식공격적 비난과 비아냥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논평> 발표를 계기로 '붉은 악마' 현상을 차분히 되돌아보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소중한 장이 마련된 점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장,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소중한 자산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애초 논평에서 표명된 저희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다만, 지면상의 한계로 논평에서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던 논거들을 보강하여 제시함과 아울러, 이번 논평의 내용에 대해 여러 분들이 제기하신 비판과 질의에 답함으로써 좀더 생산적인 토론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1. 우리의 비판 대상은 거리응원을 즐기는 시민들이 아닙니다

축구 사랑이라는 개인적 취향으로 모인 동호인 조직으로서의 '붉은 악마', 그리고 그저 한판 걸판지게 놀아보기 위해 거리응원에 나선 시민들이 <논평>이 비판하고자 한 대상은 아닙니다.
고단한 삶, 지루한 일상, 더러운 정치판이 쏟아내는 각종 비리소식에 지친 시민들이 월드컵과 거리응원을 축제로서 즐기고자 하는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더 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금의 붉은 악마 현상이 진정으로 '순수한' 자발성에만 기초해 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국민 모두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논평>은 온 국민이 '붉은 악마'가 될 것을 종용하고 '대~한민국'을 외치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사회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자들, 그러한 '붉은 악마 현상'을 부추기고 거리에서 생산되는 자생적 문화를 특정한 방향으로 구성해나가고자 하는 '의도된 손'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그 기획자들은 다름 아닌 자본과 권력과 언론이며, 그에 동조하여 추악한 아부를 서슴지 않는 지식인들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장하시는 그 '순수한' 열기가 자본과 권력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오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분들이 칭송하시는 그 '해방의 에너지'가 오히려 '위로부터의 동원 메커니즘'인 파시즘의 제물로 바쳐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금 이 현상의 배후에 작동하고 있는 힘과 이 현상을 통해 생산되는 반(反)인권적 담론들에 일침을 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2. 춤추는 국가주의의 망령에 주목해야 합니다

월드컵은 기본적으로 국가 대 국가의 대항전이기 때문에 국가주의를 고취시키는 요소를 그 자체 내에 내재하고 있으며, 이를 강렬하게 부추기는 것은 바로 언론입니다.
일본 대표팀의 나카타 선수가 '기미가요'(일본의 國歌)를 제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 우익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아야 했으며, 바로 이러한 순치 과정을 거쳐 기미가요를 따라부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우리 언론도 예외가 아닙니다. 언론은 각종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적 수사를 남발하면서, 스포츠와 열띤 응원이 이루어내는 집단적 일체감을 국가주의로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축구는 "총성없는 전쟁"이 되고, 한국대표팀 선수들은 어느새 축구선구가 아니라 "태극전사"가 되며, 독일과 한국의 준결승전은 "독일 폭격기와 국산 요격기의 대격돌"이 되고, 한국-스페인전은 "막강 무적함대 스페인호를 격침시킨 광주대첩"으로 명명되며, 한국의 4강진출은 "남부유럽을 점령"한 것이 됩니다.
또한 언론은 한국팀의 선전이 "12번째 선수가 함께 뛰기 때문"이라고 거듭 칭송하면서, 5천만 국민 모두가 '붉은 악마'가 될 것을, '태극전사'들과 함께 뛸 것을 종용합니다.
그 속에서 무엇을 위한 '하나됨'인지, 가슴뭉클한 애국심을 고취시켰던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과연 어떤 공동체의 모습을 열망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들은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반면 "붉은 용광로" 속에 녹아들기를 거부하는 자들, 즉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월드컵기간에 한사코 '노사평화'를 깨뜨리는 한심한 노동자나 즐기라는 축구는 즐기지 않고 생존권 보장하라며 떼쓰는 노점상들, 혹시 오심(誤審)이 있지 않았을까 의심하는 말많은 사람들은 어느새 국가통합을 해치는, '한국을 떠나야 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개인의 존엄과 권리,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배려, 현실 구조에 대한 비판과 토론의 마당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언론이 호명하고 있는 국가주의라는 망령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 광기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정복'과 '승리'가 가져다주는 환희에 도취되고, '필승'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지금의 흐름은 지나친 국가주의와 파시즘적 정서와 몰이성에 가속 페달을 달아줍니다.
오판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나라들은 어느새 '우리의 승리'를 도둑질하려는 상종 못할 '적국'(敵國)으로 매도되고, 한국의 편을 든 나라들은 자연스레 '우방'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장 비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와 불투명한 재정운영으로 지탄받아온 국제축구연맹(FIFA)은 한국팀의 '4강진출 음모설'을 일축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새 가장 공신력 있는 기구로서 추앙됩니다.
그 무엇보다 우리처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신 혹 중국이나 스페인, 이탈리아 사람 아니냐"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지게 되는 이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우려했던, 인권과 화합할 수 없는 맹목적 애국심의 실체를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3. 자본-권력-언론의 삼위일체, 그들은 왜 붉은 악마 현상을 '기획'하는가?

언론이 이처럼 '붉은 악마 현상'을 조장하고 국가주의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상업적인 이해 때문입니다.
각 방송사는 국제축구연맹(FIFA)에 수백억대의 중계료를 지불하는 대신, 막대한 광고수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각 방송사는 개막 이전부터 월드컵 총력체제에 돌입하여 16강 진출을 온 국민의 숙원으로 만들어내고, 연예인들을 동원하여 '붉은 악마 현상'을 자극하고, 지금도 각종 묘기대행진을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SK Telecom을 비롯한 자본 역시 '4천만이 붉은 악마가 되라'는 캠페인을 주도하고, 거리응원 마당을 제공함으로써 간접광고 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과 언론이 국가주의와 기꺼이 영합하여 월드컵 과잉 열기를 주조해내는 근본 동력입니다.
이러한 붉은 악마 현상은 국가권력과 우리 사회의 보수지배세력들의 이해에도 봉사합니다.
물론 지배세력들이 과거 군사독재시절처럼 공포정치와 강제명령에 의해 국민들을 사주하거나 직접적으로 동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가 변하고 국민들의 의식이 성장한 만큼 지배세력의 대중통치술도 더 더욱 세련되고 교묘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억눌려 있는 기성정치에 대한 혐오와 현실 구조에 대한 불만이 해방과 사회 변혁의 에너지로 승화되지 않도록, 스포츠를 통한 스트레스 해소와 집단적 환희를 체험하는 수준에서 만족하도록 유도합니다.
'스포츠는 깨끗하다'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역전의 드라마와 축구영웅들이 가져다주는 감동을 반복 재생함으로써, 지루하고 진흙탕같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과 무관심을 더욱 부채질합니다. 또한 스포츠를 통해 생산·강화되는 국가주의는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비판세력들을 소수로 몰아붙일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기에 지배세력들에게는 더더욱 좋은 선물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월드컵을 적극적으로 유치한 또 다른 이유이며, 시청앞 광장을 붉은 악마들에게 선뜻 내주는 이유이며, 그러면서도 질서 캠페인을 끊임없이 벌이는 이유인 것입니다.
지금도 언론사 데스크에는 수십 수백, 아니 수천 건의 주요한 사건들이 보류되어 있다고 합니다. 경희의료원과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투쟁은 월드컵 보도에 밀려 참담한 외면을 당해야 했으며, 축구장과 거리와 인터넷에 넘실댔던 국민들의 반미감정에도 불구하고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두 여중생의 죽음은 사회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월드컵을 제외한 모든 영역의 사안들이 정지되어 있는 셈입니다. 월드컵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그런 '불편한' 이야기들은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고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관심영역 또한,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역동적인 힘에 의해 자발적으로 응원에 참여했다고 믿는 시민들도 과연 자신이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지를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물론 '승리'가 아니라 경기 자체를, 축구가 아닌 축제의 마당을 즐기기 위해 거리응원을 나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수많은' 열광들이 '하나의' 의도된 열광으로 발전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현실의 대립하고 있는 관계들이 '하나라는 신화' 속에 모두 함몰되고 있지는 않은지 되짚어보아야 합니다.

4. 지식인들은 낯뜨거운 아부를 멈춰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붉은 악마 현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진보의 색깔까지 덧씌우려는 지식인들의 태도는 가히 낯이 뜨거울 정도입니다.
우리가 지식인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일반 대중보다 더 '유식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회의 공기(公器)인 언론의 지면을 독점하고 있는 존재로서 우리 사회에 최소한의 '양식'을 환기시킬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금 국가통합 이데올로기를 선동하고, 민족적 우월감을 자극하며, "붉은 악마의 핏속에는 민족과 국가라는 유전 인자가 자리잡고 있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논평>에 대한 유감(?)을 "빨갱이들보다도 더 못한 놈들"이라는 욕설로 퍼부어대는 현실에서, 레드 콤플렉스를 빨간'색'에 대한 혐오와 곧바로 등치시키고 붉은 옷의 물결을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이라 단언하는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의 인식 수준은 가히 천진스러울 정도입니다.
갖은 수사를 동원하여 지금의 '붉은 악마 현상'을 칭송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지금 거리에서 발현된 에너지가 과연 어떻게 진보와 해방의 에너지로 '질적 전환'될 수 있다고 보는지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근거없이 찬사를 늘어놓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식을 스스로 내던지는 행위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월드컵이 끝난 후, 온 국민에게 붉은 옷을 입을 것을 격려하는 우리 사회가 과연 '원색 옷은 학생답지 못하므로 안된다'는 전근대적 교칙을 앞장서 바꿀 것인지, 한국은 살 곳이 못된다며 이 땅을 떠나는 대대적 이민현상은 사라질 것인지, '아시아의 자존심'을 살렸다는 한국이 우리와 함께 응원했던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 단속과 추방을 멈출 것인지, 시청 앞 광장을 선뜻 내주었던 국가가 1인 시위까지 금지하려는 집시법 개정을 그만둘 것인지, 지금의 반미감정이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의 개정으로 이어질 것인지, 지금의 '하나됨'의 환희가 파업 노동자들과 장애인들과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의 고통에 기꺼이 연대하는 진정한 '하나됨'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말입니다.
권력과 자본과 언론이 부추기는 '국익'이나 '민족적 에너지'의 환상은 우리의 이런 고민에 결코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5.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을 외쳤던 그때, 광주와 6월항쟁의 거리에 '자발적'으로 나섰던 그 '순수한' 열정들은 그들이 희구하는 그 가치만으로 군사독재에 신음하는 다른 제3세계 민중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에 넘실대는 '타는 목마름으로 4강으로 가자'와 같은 '필승'의 구호들 속에서는 우리 사회의 억눌린 노동자와 민중은 물론, 다른 나라의 민중들과 기꺼이 연대하려는, 자국의 이해가 아니라 인류의 공존을 모색하려는 열린 가치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붉은 악마 현상'에 모두가 몰입해 있는 지금,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가통합 이데올로기가 똬리를 틀고 들어앉고 있으며, 민주적 권리들에 대한 후퇴와 인권에 대한 공격을 감행되고 있습니다.
역사가 후퇴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대륙에 불고 있는 극우파시스트 세력들의 광풍으로부터 한국은 예외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축구는 축구일 뿐'이라는 주장에 우리가 딴지를 거는 이유이며, '축구를 축구로서 즐기고자' 하는 분들도 작금의 현실에 비판적 개입을 시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 세~계최강'을 연호하는 필승의 열망도, '온 국민이 하나'라는 신화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진정한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고 파시즘의 발호를 경계하는 인권의 감수성과 실천입니다.

2002년 6월 26일 / 인권운동사랑방
2007/12/09 14:37 2007/12/09 14:37
2007/12/08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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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던 녀석은 새로 온 녀석에게 관심이 많은데 정작 새로온 녀석은 영 냉랭하기만 하다.
아직은 인지, 성격인지.. ㅎ
2007/12/08 00:18 2007/12/08 00:18
2007/12/07 04:09
타인의 취향은 <디워>나 디빠에 대해 이야기한 글이 아닙니다. 나는 <디워>라는 영화를 굳이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평소에 아동용(가족용) 오락영화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그 영화가 사회적 화제가 되었다고 해서 굳이 그 영화의 예술성을 논하고 심지어 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논하는 건 싱거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디빠의 행태에 대해선 대부분의 비판적 의견에 ‘당연히’ 동의합니다. 알다시피, 한국 네티즌의 행태에 대해 이미 오래 전부터 누구보다 비판적인 생각을 피력해왔습니다.
타인의 취향은 <디워>나 디빠가 아니라 <디워>나 디빠에 냉소와 혐오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한국 지식인들과 그들의 고장난 지성에 대해 쓴 글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디빠의 행태에 그토록 냉소와 혐오를 보인 지식인들은 왜 붉은악마엔 그렇지 않았을까요? 디빠와 붉은악마는 다르지 않습니다. 집단주의, 애국주의, 인터넷 기반, 폭력적 태도 등등 골격과 멘탈리티는 거의 같고 굳이 비교하자면 붉은악마가 좀 더 심각했습니다. 궁금하다면, 2002년 월드컵 때 ‘붉은악마를 부추기지 말라’라는 성명을 냈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과 그들의 홈피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아보기 바랍니다.
그런데 왜 지식인들의 태도는 그리 달랐을까요? 붉은악마에게 공감과 찬사를 바쳤던 그들은 왜 디빠엔 그토록 냉소와 혐오를 보인 걸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월드컵엔 지식인들도 함께 흥분했지만 <디워>엔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월드컵은 그들의 취향에 부응했지만 <디워>는 그들의 고급한 취향을 거슬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성은 월드컵에선 작동을 멈추었고 <디워>에선 정상 작동한 겁니다. 제 취향을 거스를 때만 작동되는 지성, 우습지 않습니까? 나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한 겁니다.
지식인들은 대중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대중을 비난해선 안 됩니다. 대중이 비난받을 만한 상태에 있는 책임이 바로 지식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인들의 지성과 실천이 모자랐기 때문에 대중이 그 지경인데 그 경과에 대한 성찰은 없이 대중의 상태만 똑 떼어 내어 비난하는 건 무책임하고 염치없는 일입니다. 한국의 교육시스템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국가주의에 대해 애국주의에 대해 파시즘에 대해 제대로 배울 기회가 있습니까? 바로 지식인들이 할 일입니다. 카페나 술집에 모여앉아 ‘천박하고 어리석은’ 대중과 자신들을 구별짓기나 하는 게, 앞장 서 대중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을 ‘용기있는 지식인’이라 말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지식인의 일이 아닙니다.
다들 애국주의, 애국주의 하는데 그 애국주의의 정체가 뭘까요? 돈입니다. 황빠나 디빠나 그 애국주의의 내용은 ‘돈’입니다. 진실이고 예술이고 간에 돈이 되니까 황우석이 자랑스럽고 심형래가 자랑스럽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이 우리 사회를 장악하게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로 지식인들입니다. 개혁과 진보도 구분 못한 채 10여년 동안 우리 사회를 신자유주의에 찢겨 발겨지게 한 사람들이, 그래서 대중들이 진보고 정의고 인간적 위엄이고 다 팽개치고 돈귀신에 들려 이명박에게 몰려가게 만든 사람들이, 그러고도 모자라서 다시 비판적 지지 이야기나 하는 사람들이 대체 누굴 냉소하고 혐오한단 말입니까?
나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제 고장 난 지성에 대해 생각하기 바랍니다. 지성이 작동하려는 바로 그 순간, 지성이 작동을 멈추었던 순간을 되새겨보길 바랍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좀 더 겸손해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냉소와 혐오가 아니라 애정과 연민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랍니다. 오죽하면, 대체 얼마나 삶이 보잘것없었으면 고작 월드컵이나 <디워> 따위에서나 제 나라에 대한 사랑과 자부를 느꼈겠는지, 대체 얼마나 짓밟히고 캄캄했으면 이명박 같은 사람에게나 희망을 걸겠는지 고민하면서 말입니다.
(강의와 술자리에서 한, 타인의 취향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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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강연 마치고 광주로 올라와 최명진, 김영헌, 김혜일 목사들과 합류, 늦은 저녁 담양 회선재(임의진 목사집)에 갔다. 임목사가 혼자 일 년이나 걸려 지었다는 아름다운 흙집에서 새벽녘까지 차와 술을 마시며 유쾌하게 담소했다. 임목사가 그의 유화 한 점을 선물했다. 넘실대는 파도 속을 헤엄치는 고래 두 마리.. 들여다보노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림 뒤에 적힌 말. “고래등산 외딴집에서 반가이 만난 동지 김규항께 어깨춤 임의진”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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