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01 14:10
'사람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말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면 ‘여자는 시집을 가야 한다’는 말에 내가 어떤 태도를 갖는가를 참고로 삼을 수 있다. 후자가 전자보다 좀더 일찍 거부되기 시작했지만, 사실 우리 삶에서 두 말의 맥락은 같다. 우리는 언제나 '현실'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그런 말들 앞에 서며, 남들을 따라 순응하는가 내 스스로 사유하는가 사이에서 갈등한다.
2015/07/01 14:10 2015/07/01 14:10
2015/06/30 15:02
문학동네의 토론회 2차 제안문을 보고 ‘미쳤군’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황으로 보건대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오만하기가 창비는 저리가라구나 싶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들은 왜 미쳤다는 말을 들을 만큼 오만해졌을까. 사람이든 사람들이든 그렇게 되는 원인은 언제나 하나다. 지나친 숭상.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나치게 숭상해왔다. 그들을 숭상해온 사람들엔 지금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포함된다. 그 사람들은 왜 그들을 숭상했을까. 그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이라도 표절 작가를 감싸지 않고 적절한 예의만 갖춘다면 그들을 숭상할까.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한 '텅 빈 공간’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문학 정신’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인간에게 왜 필요하며 세계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라는 일련의 질문들로 지어지는 인간의 정신 말이다. 그 텅 빈 공간에서 표절과 염치없음과 오만과 숭상과 비난들이 뒤엉켜 피어나고 있다.
2015/06/30 15:02 2015/06/30 15:02
2015/06/27 23:50
창비나 문학동네 같은 문화권력을 비판하는 동시에, 내가 연루된 미시적 문화권력에 대해서도 예민해진다면 좋을 것이다. 폭력적이지 않고 권위주의적인 외양도 없이 친구로 지내지만 뭔가 부적절한 일이 있을 때 비판이나 충고가 어렵다면, 그래봐야 소용도 없고 불편만 치르게 될 거라 느껴진다면, 그건 그가 단지 비판이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문화권력이 작동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단지 비판이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얼마간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관계를 끝내면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문화권력의 내용이다. 두 사람 사이의 상황일 수도,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한 여러 사람 사이의 상황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기 어려운 인간 관계를 운영하면서 상대를 혹은 상대들을 '좋은 친구’ 혹은 ‘좋은 친구들’이라 부르곤 한다. 그는 우리 주변에 매우 많다. 내가 그에 지배되고 있거나 심지어 그가 나일 가능성도 많다는 뜻이다.
2015/06/27 23:50 2015/06/27 23:50
2015/06/24 17:07
칼럼 '포스트모던에의 질문'에서 백낙청에 관한 묘사를 불편해하는 이들이 있어 적는다. 나는 백낙청이 단지 문화권력이라서가 아니라 '진보적 수구'의 배후이자 좌장이기에 그에게 비판적이다. ‘수구’라는 말은 반드시 ‘보수’라는 말과 짝을 이룬다. 그러나 보수적 수구는 실은 수구의 절반일 뿐이다. 수구는 보수적 수구와 진보적 수구로 구성된다. 민주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진, 40대 이하의 어지간한 시민들에게 보수적 수구의 영향력이 극히 미미한 오늘 좀더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는 건 진보적 수구다. 진보적 수구는 ‘체제 변화’에 쓰일 모든 진보적 자원과 에너지를 ‘정권 변화’에 쓸어넣음으로써 체제를 수호한다. 보수적 수구가 경제적/사회적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이라면, 진보적 수구는 그에 더해 대중의 존경까지 누린다. 그들은 ‘수구보수 세력과 싸우는 의인’인 것이다. 예수 당시의 수구세력과 싸우며 의인으로 불리던 바리새인들처럼. 존경받는 수구. 얼마나 웃기는가, 아니 얼마나 악질적인가.
2015/06/24 17:07 2015/06/24 17:07
2015/06/22 21:59
인터넷과 SNS에서 집단적 분노와 비판이 늘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대상에 대한 빠르고 뜨거운 분노와 비판은 번번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해소되어버리곤 한다.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속도와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온도를 스스로 차단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땅콩회항 사건에서 분노와 비판은 조현아 개인에게는 충분히 표현되었지만 조현아의 그런 행동을 만들어낸 노동 구조에는 닿지 못했다. ‘다 좋은데, 함부로 욕하진 말아주세요’가 애초의 목표이기라도 했던 걸까.

그런 면에서 신경숙 표절 논란은 이례적인 경우다. 창비와 문학동네, 특히 노회한 문화 권력 백낙청의 사기업임에도 마치 진보문학의 공공재인 양 위세등등하던 창비의 아우라를 박살내버렸으니 말이다. 대중은 그들이 특별할 게 없는 장사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즉시 빠르고 뜨겁게 존경을 철회했다. 정치와 노동 등의 영역에서 SNS의 폐해나 한계는 더 냉정하게 분석되고 토론되어야 하지만, 그 폐해나 한계가 모든 영역에서 전적이진 않다는 걸 확인하는 일이었다.

문화 권력에 대한 타격과 더불어 나타난 건 ‘언어의 역전’이다. 문학동네 편집위원 신형철이 신경숙의 표절에 대해 “같은 것을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운율까지 맞추어 말했을 때 그 말은 평소처럼 세련되게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 걸맞지 않은 화려한 옷차림 같다고 할까. 반면, 이번 표절 논란을 촉발한 소설가 이응준의 글은 세련된 문체는 아니었다. 문단에서 고립을 각오한 비장하고 지사적인, 어쩌면 그 스스로도 평소라면 어딘가 구식의 언어로 느껴졌을 만한 것이었다. 그 언어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언어의 역전은 신경숙보다 20여년 아래인 비평가 한윤형의 데이트폭력 논란에서 좀 더 넓게 드러난다. 한윤형과 같은 노동당원이기도 한 음악가 단편선은 한윤형과 사적 친분이나 활동에 대한 존경과는 별개로 이 문제에 대한 당의 냉정하고 분명한 입장 표명을 촉구했다. 역시 노동당원이자 한윤형의 절친인 비평가 김민하는 “나는 그를 도울 것이다. 그 나름의 명성과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아니라 그가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조력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들의 언어는 평소보다 훨씬 더 소박했다. 이번 일에 대한 그들 세대 다른 사람들의 언어도 평소보다 훨씬 소박했다. 무례한 개신교도가 성경 구절을 들이밀듯 포스트모던 철학 용어가 들먹여지는 모습도, 난해하고 배배 꼬인 문화비평 언어가 괜스레 배치되는 모습도 없다. 다들 잠시 포스트모던을 접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한 언어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것을 되새기게 한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소박하고 진솔한 언어를 사용하길 꺼림으로써 그에 대응하는 현실들을 놓쳐버린 게 아닐까.

포스트모던의 바람 이후 우리는 분노, 용기, 양심, 성찰, 수행 같은 것들과 그 언어들을 낡고 지적으로 둔한 것처럼 치부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들이 단순화하고 교조화할 때 인간의 삶의 복잡성을 생략하고 이런저런 비인간적 폭력을 만들어낸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해결은 폐기가 아니다. 인간의 지혜와 사회 디자인 가운데 폐기될 건 없다. 끝없이 수정하고 보완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포스트모던 바람은 그렇지 않았다. 현실 사회주의 패망과 그 실체의 폭로 앞에서 공황 상태에 빠진 80년대 좌파들의 유력한 탈출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그들이 저주하던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같았다. 초가지붕을 알록달록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새마을이라 부르듯, 그들은 근대도 경험하지 못한 사회에서 탈근대 언어의 유행을 만들어냈다. 그 해악은 다음 세대 좌파들의 머리통과 언어에 새겨졌고, 지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의 부조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똑똑해 보이긴 하는데 존경심이 들진 않는다든가, 사회 변화에 대해 말하는데 정작 개인은 불안정해 보인다든가 같은 젊은 좌파 비평가들에 대한 모종의 공통된 인상은 그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 경향들이 데이트폭력의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순 없다. 역시 노동당원으로 데이트폭력 사건의 가해자인 비평가 박가분이 쓴 자기파탄적 해명 글(“천하의 ‘진보논객’ 박가분의 몹쓸 짓에 대한 의혹에 관한 저 자신의 입장”이라는 제목의)은 그런 관련성을 짙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언어의 역전은 그런 경향성과 함께 희망도 내포된 혼돈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꼰대질을 하려는 건 아니다. 한국적, 아니 새마을운동적 포스트모던의 원흉에다 이제 급진성은커녕 정권놀음에만 몰두하는 세대의 일원이 그럴 자격이나 있겠는가. 나는 그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다. 김민하가 그 말에 자신을 포함시켰듯 우리도 자신을 포함시키자는 것이다. 지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의 조화를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내 마음이 조화롭지 않은데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순 없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좌파는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5/06/22 21:59 2015/06/22 2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