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5 19:17
청년이란 이를테면 ‘난 어떻게 살고 싶은데 부모님이 반대한다’는 식의 고민을 토로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 청년들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토로한다. 청년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를 우리는 돌이킬 수 있을까?
2014/11/15 19:17 2014/11/15 19:17
2014/11/15 19:16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위선을 비판하면서 스스로는 ‘위선에조차 이르지 못한’ 위선적 상태에 머물곤 한다.
2014/11/15 19:16 2014/11/15 19:16
2014/11/13 11:16
이상주의적 신념을 분명히 하면서도 진영논리나 선악구도에 갇히지 않는다는 게 켄 로치 영화의 세련과 품격. 날라리 이상주의자를 그린 이번 영화(지미스 홀)는 한층 더 나아간다. 승리와 패배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희망과 절망에 대해 질문하며, 더 나은 노동을 위해 투쟁하는가 제대로 놀며 살기 위해 투쟁하는가에 대해 질문하며, 적의 품위를 인정하는 품위에 대해 질문한다. 미소를 남기는 영화.
2014/11/13 11:16 2014/11/13 11:16
2014/11/09 19:50
고래가그랬어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한 분, 해외에 계셔서 고래를 구경하기 쉽지않은 분, 최근 고래를 보고 싶은 고래이모 삼촌... 누구나 편히 살펴볼 수 있도록 고래 131호(2014년 10월 발행분)를 공개 e-book으로 만들었다. 도움을 주신 조영규 고래 삼촌(우리전자책)께 감사드린다.

고래가그랬어 e-book 내려받기

2014/11/09 19:50 2014/11/09 19:50
2014/11/03 23:15
빌 게이츠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서평을 썼다. 게이츠는 피케티의 기본적인 문제의식들(부의 불평등이 심각해지면 경제적 동기를 약화시키고 나아가 자본주의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으며 이를 교정하기 위한 소득 재분배 정책의 역할이 중요하다는)에 동의한다. 그러나 게이츠는 현재 세계의 빈부격차가 심화하고 있다거나 부가 세습되는 경향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한다. 게이츠의 주장에서 눈에 띄는 건 자본에 대한 세금보다는 어떤 자본이냐, 즉 불로소득이나 상속에 더 많은 세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게이츠가 가장 힘주어 말하는 건 사회적 재분배의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하고 있는 방법, 즉 기부라는 것이다. 게이츠를 비롯한 미국 부자들이 거액의 기부를 하는 일이 종종 화제가 된다. 미국에서 기부는 건국을 주도했던 청교도 정신을 기반으로 시작되어 일종의 사회분배 시스템의 기능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미국은 기부가 사회적 재분배의 바람직한 방법이 아님을 증명하는 사회다. 미국은 여전히 개인기부가 전체 기부의 73%에 이르는 ‘기부 선진국’이지만, 모든 선진국 가운데 부의 편중이 가장 심각한 사회다.

사회적 재분배의 방법으로 기부의 가장 큰 결점은 부자의 선의에 맡겨진다는 것이다. 내면 좋고 안 내도 강제할 방법이 없는 방법이 바람직한 사회적 재분배의 방법이 될 순 없다. 긴급하고 특별한 상황에서 기부의 유용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부가 사회적 재분배의 주요한 방법이 되어버리면 전체적이고 장기적인 기준에서 알량한 수준에 불과한 사회적 재분배를 과장하고 치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적 재분배를 차단하는 할리우드 쇼가 된다.

우직하고 집요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세습적 경향을 증명해냈다는 것 외에 피케티의 견해가 새로운 게 아니듯, 게이츠의 피케티 비판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부냐 세금이냐’로 요약되는 해묵은 논쟁이며, 미국식 자본주의와 유럽 사민주의 복지사회의 대립이기도 하다.

사민주의 복지사회 역시 자유 시장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시장에서 경쟁은 그 결과에서 격차를 만들 수밖에 없다. 격차가 없다면 누가 열심히 경쟁하겠는가. 주류경제학자들은 그런 격차가 결국 가장 공정하고 이상적인 부의 분배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격차가 경쟁의 출발점과 조건을 왜곡하면서 갈수록 더 큰 격차를 만들어낸다는 건 자본주의 역사를 통해 충분히 밝혀진 사실이다.

복지사회란 시장은 인정하되 시장에서의 격차가 삶의 격차로 직결되지 않도록 조정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부자는 세금을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은 세금을 적게 내거나 안 내면서, 복지 혜택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보편적으로 받는 방식으로 말이다.

알려진 대로 유럽 사민주의 복지사회는 신자유주의의 공격으로 적잖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복지병’이니 뭐니 사민주의 전체가 쇠퇴했다는 우파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제3의 길’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에 투항한 사민주의도 있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극복을 좇는 전투적인 사민주의도 있다. 규모는 다를 뿐 한국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의 사민주의 세력의 상당수는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민주당이라는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에 투항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신자유주의 세력과 선을 긋는 전투적 사민주의 세력이 있다.

부자들이 기부도 세금도 내려 하지 않는, 기부 미담의 주인공이 여전히 ‘평생 모은 돈을 쾌척하는 가난한 할머니’인, 세금에 대한 전향적인 의견과 토론은 즉시 ‘공산주의적 발상’으로 공격받는 사회에서 이런 논쟁은 해묵은 것이면서도 동시에 요원한 느낌이 있다. 그러나 폭주하는 자유주의와 또렷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회주의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럽식 사민주의 복지사회가 갈 길이라 말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복지사회를 말하는 게 어불성설이듯 민주당이, 혹은 민주당을 통해 복지사회를 말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그건 흔히 말하듯 그들의 정치윤리 문제도 정치인으로서 진정성 문제도 아니다. 그들의 세계관과 이념의 문제다. 사민주의는 ‘자유주의를 억지하는 현실적 사회주의 전략’인데 어떻게 자유주의를 통해 구현할 수 있는가.

유럽 복지사회가 현명하고 현실적인 사민주의자들의 아이디어에 전체 사회가 감화되어 만들어졌다는 생각 역시 총체적이지 않다. 유럽 복지사회는 강력한 사회주의 운동과 자본의 타협의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사민주의자들의 아이디어는 그 맥락에 결합되어 있다. 모든 사회에서 사민주의의 성장의 경로와 방법이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사회주의 세력조차 없는 사회에서, 즉 사민주의가 극좌인 사회에서 사민주의가 실현될 가능성은 없다.

진심으로 복지사회를 바란다면 몸을 일으켜 빠져나와야 한다. 정치적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사회주의 혹은 전투적 사민주의. 열정과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길이 안 보인다’ 한탄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로선 둘 다 지나치게 세력이 약하지 않으냐고?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당신이 지금 당장 그 세력의 일원이 되어야 할 이유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4/11/03 23:15 2014/11/03 2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