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내 활동에서 작은 분기점이 될 것 같다. 지난 수년 동안 내가 '비판하고 올바름을 고수하는 일'에 머문다 싶어 아쉬워한 이들에게, 내 나름의 준비가 필요했다는 설명을 드리고 싶다. 비판을 하되 그 비판이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방편이 되도록 하고, 올바름을 고수하되 그 올바름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천천히 노력할 것이다. 고래는 고래연구소 진행과 함께 '고래운동'으로 확장해갈 것이고, 예수전이 발간되면 '나의 예수전 쓰기 운동'도 벌일 것이다. "개혁은 진보가 아니다"라는 앵무새 놀음을 끝내고 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실천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물론이다. 미루어진 책 서너 권도 모두 나온다. 그런 모든 것들이 지친 사람들이 웃음을 찾는 데 눈곱만큼이라도 기여하길 소망한다.
오늘 아침 김단은 편해문 삼촌 일행을 따라 네팔에 갔다. 한 달 예정. 그는 석 달 전 "입시 미술은 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냄으로써(결국,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의견을 냄으로써) 남은 청소년기를 여느 아이들과는 다르게 보내게 되었다. 이 여행에서 영감을 얻길..
사회진보연대에서 사회화와 노동 413권을 모은 합본호를 판매하고 있다. 사회화와노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지난 10년 동안의 세상에 대한 그리고 그런 세상에 반하여 싸우고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에 대한 가장 성실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막막하거나 좀 더 인간적인 세상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입할 만하다. 1, 2권 해서 송료포함 3만원이며, 바쁜 활동가들을 배려하여 '입금 후 연락'하는 방식을 권한다.
입금계좌: 하나은행 350-910028-38107 박하순
담당자: 02-778-4001~2, 010-2050-1871

김건은 악양 동네밴드 구경 갔던 날 형을 하나 사귀었다. 이상윤 형 둘째 아들 강희다. 방학하면 놀러오라고 했던 모양이다. 지리산에서 방학을 보낸다는 건 김건으로선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강희네 식구들에겐 폐를 끼치는 일이라 다시 의사를 확인해보니 고맙게도 두말없이 환영이라 했다. 오늘 하동행 버스에 실어보냈다. 캐리어 가방을 끌고 기타를 매고, 혼자 버스타고 멀리 가는 게 처음인데 싱글벙글 제법 여유롭다. 버스에 타기 전 잠깐 이야기를 했다. "즐겁고 재미있겠지만 하루이틀 있다오는 게 아니니 안 좋은 일도 있을지도 몰라." "응." "바로 그런 순간에 더 곰곰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알았어요, 아빠." 대답은 시원시원한데 과연?
(방금 휴게소에 내렸다고 전화가 왔다. 뭘 할거냐 물었더니 화장실 갔다가 핫바 하나 사먹을 거란다. 숨이 찬 게, 버스 놓칠까봐 꽤나 뛰어다니는 눈치.ㅎ)
온몸이 상처인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서
기에 빠지지도 말며
무릉도원 청학동을 찾아 헤매지도 마라
백태의 눈으로 천부경 삼일신고를 새기지 말고
명심하라 명산에 도인 없다 애시당초
진인은 사라지고 삼신산에는 사기꾼들만
살모사 살모사처럼 똬리를 트는 법
밤새 동의보감 본초강목 한글본을 읽으며
함부로 약초를 구하거나 처방을 내리지 마라
진정 네 업이 아니면 사기다
이제마의 사상의학 몇 줄에 기대어
툭하면 체질을 분별하거나 함부로
뜸과 부항을 뜨고 침을 놓지 마라
조금 아는 것이 사기다 정감록을
노래하지 말고 살아보지도 않고 풍수를 논하거나
도참비기를 꿈꾸지 마라 잘 모르면 사기다
기분에 따라 비운의 빨치산을 노래하고
머리로만 생태주의를 꿈꾸지 마라
살다보면 너무 많이 알아도 사기다
잘 못 고르면 지리산 녹차도 독이듯이
사기 천지 지리산에서 사기꾼을 면하려면
먼저 귀를 막아라 입을 꿰매어라
날마다 일찍 일어나 거울 속
자꾸 꺼칠해지는 너의 얼굴을 보아라
한동안 몸이 상하지 않으면 그것도 사기다
또 하루 살아남은 자신을 바라보며
마치 초상을 치르듯 천도재를 지내듯
날마다 거울 속으로 절을 하며 또 하루를 시작하라
최소한의 텃밭에 푸성귀나 가꾸며
내리 삼 년 아무 것도 하지 마라
절대로 굶어죽지 않으니
그저 산짐승처럼 지리산에 몸을 맞추어라
빈집을 구하는 아우야
전설 속의 청학동은 많이 상한 네 몸 속에 있다
(이원규)

노래는 단지 귀를 통해 들어와 뇌에서 인지하는 신호가 아니다. 만일 노래가 그런 거라면 우리는 노래가 우리 마음을 울린다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노래는 우리 마음에 그려지는 그림이다. 그래서 좋은 화가는 노래를 그림으로 그려낸다.
깊은 밤 고요한 숲 멀리서부터 '둥그렁뎅 둥그렁뎅'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이런저런 동물들이 차례로 춤을 추며 나타난다. 연필로 그린 섬세하기 그지없는 밤의 정경에 먹으로 그린 그림자들이 얹힌 이 아름다운 그림책은, 얼핏 도회 생활의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방문한 산사에서의 차 한 잔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책은 실은 오늘 세상, 즉 자본주의적 탐욕과 이기심으로 찢기고 뒤틀린 이 괴상망측한 세상에 대한 강렬한 은유다.
책은 일 년 내내 인간의 흔적이 거의 없을 듯한 깊은 숲 속, 그것도 인간이 모두 잠든 깊은 밤에나 부끄럽지 않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걸 알려준다. 그리고 제 노동에서 소외된 채 무작정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경쟁으로 인생을 소모하는 우리들에게, 그 동물들은 "생김새대로 잘하는 대로" 즉 적성과 재능대로 노동을 부여받으며 얼싸절싸 춤을 추며 노동한다. 세상은 비로소 조화와 평화를 찾고 그 조화와 평화의 기운은 달빛을 타고 온 우주로 퍼져나간다.
책 맨 앞엔 이렇게 적혀 있다. "달님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할머니께 드립니다." 행복의 기준을 돈과 물질로 바꾸어버린 우리에 의해 일찌감치 사람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키워지는 우리 아이들은, 나란히 앉아 달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조차 없는 이 아이들은 나중에 어떤 마음의 노래를 지을 수 있을까? (경향신문)
대우조선 노조 간부 교육. 아침 8시라 전날 오후 내려가 자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고속버스 예매한 걸 취소하고 자정 넘어 차를 몰고 갔다. 파주에서 거제, 멀긴 멀더라. 무주 부근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토막잠을 자고 일어나 얼마간 달리다 나도 모르게 아, 탄성을 질렀다. 왼편으로 얼핏 보인 파란 바다와 섬들. 그러고 보니 80년대 말 거제에 왔을 땐 저 풍경이 안 보였다. '그래, 풍경이 보이지 않는 시절이었지.'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도 사람이 보이는 시절이었지..'
28 그런데 율사 하나가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훌륭히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는 다가와서 그분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렇습니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인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네 온 마음으로, 네 온 영혼으로, 네 온 정신으로, 네 온 힘으로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31 둘째는 이렇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 계명들보다 더 큰 계명은 달리 없습니다." 32 그러자 율사는 예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훌륭하십니다, 선생님! 옳게 말씀하셨으니, 과연 주님은 한 분이시고 그 밖에 다른 주님은 없습니다. 33 그리고 온 마음으로, 온 슬기로, 온 힘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나 친교제사보다 더 낫습니다." 34 예수께서는 그가 현명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당신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더 이상 질문하지 못했다. (마가 12:28~34)
예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지만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라 해도 마음의 귀가 열린 사람은 아무 편견 없이 대했다. 예수는 이 율법학자와 이례적으로 보일 만큼 정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다. '계명'이란 하느님이 인간에게 명령한 혹은 당부한 삶의 방식이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이 계명이다. 예수는 그 계명의 첫째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 말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건 무엇인가? 종교적 제의나 예배 따위를 통해 하느님을 받들어 모시는 것? 다른 종교나 신을 무시하고 오로지 내 하느님을 주장하는 것?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뭔가를 말하기 전에 하느님이 누군가,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말해야 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하늘은 땅과 분리된 범접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였고 하느님은 그곳을 상징했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늘이란 일정한 방향을 가지거나 어떤 분할된 공간이 아닌 단지 지구의 대기권이거나 외기일 뿐이라는 걸 안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다고도 땅에 있다고도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모든 물리적 제한을 초월해 모든 곳에 동시에 있다고 말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롯 기독교를 중심으로 역사를 이어 온 서양세계에서 하느님은 우리 삶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외곽에서 절대적 힘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마음대로 관장하는 존재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런 존재라면,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은 그가 자행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묵인 아래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하느님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세속적인 탐욕에 초탈하여 진지하고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누구보다 종교적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 무신론을 선택한다. 오히려 현실적인 욕망과 이기심에 가득한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강퍅하게 주장하며 '주님, 주님' 부르짖곤 한다. 과연 하느님은 이런 정신적 참극을 벌이게 하는 그런 존재일까? 하느님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성서는 첫머리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창세기 1:27) 물론 여기에서 '모습'은 눈, 코, 입 같은 외적인 생김새를 말하는 게 아니라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은 하느님의 본성을 담아 지어졌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선 우리에게 지나치게 익숙해진 서양식 신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양 정신에서 특히 한국의 민간 사상과 종교에서 나타나는 신관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소중한 실마리를 준다. 하느님은 우리 삶과 세계의 외곽에서 우리를 절대적 힘으로 관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본디의 나'로 살아 있는 하느님인 것이다.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을 자행하거나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 속에서 함께 고통 받는 분인 것이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이런저런 종교적 형식에 기대어 나를 초월적인 상태로 끌어올리는 행위가 아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지금 내 삶을 지배하는 온갖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들을 씻어내고 내 본디 모습으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 명예나 세속적인 성공 따위에 대한 사랑을 나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는 삶을 끝내고 나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이다. 하느님은 내 안에 존재하며 또한 모든 내 안에 존재한다. 내 아내에게도 내 자식에게도 내 부하나 노예에게도, '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모든 낯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은 존재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이자 동시에 모든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자선이나 적선은 실은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과는 다르다. 나와 내 식구가 충분히 먹고살면서 여력이 되는 대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은 끝없이 더 가지려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에 비추어 선량한 행동임에 틀림없지만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 그 돈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 역시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예수의 말 그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을 경계 지어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다.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게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 것과 남의 것의 철저한 분리, 즉 엄격한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가 틀림없다. 자본주의를 지지하며 예수의 이웃사랑을 실천한다는 건 모순된 일이다. 예수의 이웃사랑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태도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주의가 반 예수적인 경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맑스 이래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독교라는 종교 체제가 현실에서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지배체제의 앞잡이였거나 지배체제 자체였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기독교와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데 그들이 굳이 예수를 기독교에서 분리시켜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어쨌거나 자본주의가 예수의 이웃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이며, 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사회주의의 기본 정신이 예수의 이웃사랑에 닿아 있다는 건 분명하다. 예수의 이웃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오늘 한국의 부모들은 대학졸업장이 인생의 질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물론 여기에서 '인생의 질'은 전적으로 경제적 기준에 의한 것이다. 간혹 '경제적 기준이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기준일 수 있는가?' 반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 역시 제 아이의 교육문제에서는 그런 기준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들 말한다. "잘못된 건 알지만 현실이..." 그런데 그 현실주의는, 오늘 한국의 부모들이 입술을 깨물며 다짐하는 그 현실주의는 정말 현실적일까?
지금 아이들이 대략 한 해에 60만 명이다. 대학정원이 늘어나서 안전하게만 지원하면 대학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앞서 말한 '인생의 질'과 관련지어 유의미하고 즉각적인 효력을 갖는 대학과 학과는 그 극히 일부다. 서울대의 일부, 연고대의 더 적은 일부, 그리고 몇몇 대학의 그보다 더 적은 일부가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걸 다 해서 3만 명이라고 해보자. 60만 명 가운데 3만 명이면 5퍼센트다.
그런데 그 3만 명이 전국에서 고루 나오는 건 아니다. 올해 연고대 인문계열 신입생 가운데 외고 출신이 40퍼센트를 넘겼다는데, 이런저런 특목고들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로 본다면 지금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대학에 들어갈 무렵이면 그 3만 명의 적어도 절반 이상은 특정 지역 혹은 특목고 출신이 차지할 것이다. 결국 보통의 아이들이 대학입시를 통해 유의미하고 즉각적인 '인생의 질'을 확보할 확률은 2.5퍼센트 이하인 셈이다.
2.5퍼센트 이하의 가능성은 어떤 것인가? 이를테면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살 가능성이 2.5퍼센트 이하입니다."라고 말할 때, 혹은 "살지 못할 확률이 97.5퍼센트 이상입니다."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는가? 그런 가능성을 두고 맘껏 뛰어놀아야 할 초등학교 적부터 감옥의 수인들처럼 학원을 돌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부모들은 줄잡아 10~20년을 잔업특근에 메이고 노래방 도우미까지 해가며 아이들 '옥바라지'를 하며 사는 게 과연 현실적일까?
비슷한 이야기로, 한국의 직업이 대략 1만개다. 우리 아이들은 나중에 1만개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부모들이 제 아이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생각하는 직업은 몇 개인가? 10개? 기껏해야 20개 안쪽이다. 1만개의 직업을 갖고 살아갈 아이들에게 20개의 직업만을 생각하며 몰아붙이는 부모들을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오히려 9,980 가지 직업을 갖고 살아갈 아이들을 인생의 낙오자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닐까?
오늘 한국의 부모들은 너나없이 교육문제에 대해 가장 현실적인 태도를 가진다고 믿지만 실은 현실이 주는 공포와 불안, 즉 '이런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내 새끼가 도태되면 어쩌나' 하는 공포와 불안에 짓눌려, 최소한의 계산도 못한 채 아이들과 자신의 소중한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이 지옥이 지나면 행복한 미래가 도래할까? 인생은 그렇지 않다. 지금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줄 모른다.
우리는 이 지옥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 출발은 우리가 현실주의라는 이름의 몽상을 버리고 현실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이가 대학을 갈 수도 있지만, 가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고민하는 것이다. 아이가 제 재능과 적성을 일찌감치 발견하여 대학을 가지 않고도 자존감을 유지하며 진정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게 되겠냐고? 왜 안 되는가? 2.5퍼센트의 가능성이 97.5퍼센트의 가능성으로 바뀌는데, 20개의 직업에 대한 집착이 자그마치 9,980개의 선택으로 바뀌는데.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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