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6 10:02
고래가그랬어 페이스북에 고래 만들며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연재하기로 했다. 제목은 ‘규항 삼촌의 고래 이야기’. 대략 한주에 한편씩 올릴 생각이다. 그 첫 번째 편은 ‘고래가그랬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사연.

2014/10/16 10:02 2014/10/16 10:02
2014/10/13 23:27
카카오톡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은 다음카카오 경영진의 안이한 반응이 불을 붙인 면이 크다. 여기에서 안이함은 어떤 철학에 관한 게 아니다. IT산업 자본가가 기존 산업의 자본가와는 다른 철학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IT산업 자본가들의 선전에 포획된 결과다. IT산업은 단지 이윤을 추구하는 장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엘리트에 점유된 지식과 정보를 대중이 쉽게 접근하게 함으로써 민주주의에 공헌하는 어떤 숭고한 산업이라는 식의 선전 말이다. 그 선전은 굴뚝과 공장이 아닌 이른바 창의력과 혁신으로 대박을 친 신흥 부자들에 대한 대중의 선망과 결합하면서 다시 IT산업 자본가의 자아도취를 만들었다. 진보라는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나 안철수를 시대의 지도자로 떠받드는 상황까지 갔으니 오죽할까.

IT산업은 과연 인간의 삶에 공헌했는가. IT산업은 오히려 인간의 삶에서 적정한 속도와 최소한의 여백을 소거해버림으로써 인간의 삶을 훨씬 더 각박하고 공허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IT산업은 모든 지식과 정보를 마음껏 향유하고 있다는 지식과 정보의 불감증을 만들어냄으로써 오히려 지식과 정보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사유에서 멀어지게 했고 지식과 정보의 껍질만 허화하게 오가게 만들지 않았는가. 그 모든 상황을 IT산업 자본가들에게 들씌울 일은 아니다. 그러나 IT산업의 숭고함은 과장된 것이다. IT산업은 새로운 산업이되 다른 산업은 아니다. IT산업의 본질은 모든 산업이 그러하듯 철학이 아니라 이윤이다. 다음카카오 경영진의 안이함은 바로 그 안이함, 이윤에 대한 안이함, 즉 상인으로서 안이함이었다.

개인적으로, 카카오톡 논란과 관련하여 좀 더 인상적이었던 건 다음 창업자 이재웅씨의 견해다. 그는 SNS에서 이루어진 토론에서 말했다. “국가권력의 남용을 탓하지 않고 시민 혹은 기업을 탓하는 이런 자세는 정말 구태다. 예전에는 의식이 없다고 동료 학우들을 탓하던 바로 그런 어쭙잖은 엘리트 의식과 뭐가 다른가.” 앞의 말은 수긍할 만하다. 그런데 뒤의 말은 영 간단치 않다. 그 말엔 앞서 말한 IT산업 자본가의 과도한 자기도취와 함께 옛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오랜 피해의식이 담겨 있다. 예수의 비유가 떠오른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 즉 ‘새로운 세상’을 늘 비유로 설명하곤 했다. 그 중 하나가 ‘겨자씨의 비유’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할까, 혹은 무슨 비유로 그것을 표현할까? 겨자 씨앗과 같습니다. 그것이 땅에 뿌려질 때는 땅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작습니다. 그러나 뿌려지면 자라서 어떤 푸성귀보다도 크게 되어 큰 가지들을 뻗칩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됩니다.”(마가 4장 30~32)
겨자씨로 번역되었지만 우리가 아는 겨자와는 다른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 많던 ‘시나퍼’라는 변종 겨자다. 씨앗은 어떤 풀씨보다 작지만 자라면 3미터가 넘게 커지는 나무다. 예수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당대에는 언제나 작고 미약해보이지만 결국 그들의 헌신과 투쟁으로 이루어진 변화한 사회는 그들 자신은 물론 그들을 비현실적이라 냉소하던 사람들, 심지어 그들을 적대하던 사람들까지도 함께 누리게 된다.’ 한국의 민주화도 물론 그와 같다. IT산업 자본가는 그 각별한 수혜자들이다. 정치적 자유가 없었다면 그들이 검색 사업으로 번창했겠으며 이메일 사업으로 번창했겠는가.

민주화운동을 한 게 벼슬이어선 안 된다. 제아무리 의미있는 사회적 성취라 해도 그 성취를 한 인물에 돌리면 그 성취는 사유화하게 된다. 사유화한 사회적 성취는 좀 더 심각한 사회적 해악을 만들어낸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이 아수라장이야말로 그 사례다. 민주화운동 이력을 훈장으로 정치는 물론 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기득권 세력이 되어 두 번의 집권을 하며 사회를 신자유주의 아가리에 바침으로써 돈 귀신 들린 세상을 만든 사람들, 소박한 행복을 꿈꿀 뿐인 사람들의 삶을 궁지에 몰아넣고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며 살아가게 만든 사람들, 결국 이명박을 불러들이고 박근혜를 불러들이고도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이명박과 박근혜 욕하는 것일 뿐인 ‘진보’ 파렴치한들 말이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는 건 아니다. 민주화 이후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바람에 맞서 다시 새로운 씨앗을 심고 가꾸며 살아온 사람들도 적지 않고 사회가 진즉 파국에 이르지 않은 것도 그들 덕이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우리는 인물이 아니라 행위에 집중해야 한다. 행위는 지금 이 순간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과거의 행위들이 그랬듯이 비현실적인 몽상이라는 평가와 냉소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러나 결국 그 행위들은 다시 크고 깊은 시나퍼의 그늘을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행위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건 없다. 인간의 세계는 늘 그렇게 굴러왔고 또 그렇게 굴러갈 것이다. 하지만 사회와 내 삶에 그런 행위의 맥락이 담겨 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는 건 무지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재웅씨만의 무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무지다.(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4/10/13 23:27 2014/10/13 23:27
2014/10/08 11:19
연대란 많은 사람이 제 주체와 개성은 그대로 인 채 어떤 의미있는 일을 위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집단은 많은 사람이 제 주체와 개성을 죽이고 하나가 되는 것, 즉 하나의 뇌만 사용하는 것이다. 연대는 고귀하고 강건하지만 집단은 천박하고 허약하다. 인간은 연대의 능력과 집단의 속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다. 종종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하며 특히 '내가 속한 집단'을 연대라 착각하곤 한다. 나는 지금 연대의 일원인가 집단의 일부인가?
2014/10/08 11:19 2014/10/08 11:19
2014/10/07 14:17
'박근혜 비판'과 '박근혜 핑계'의 경계는
생각보다 얇다.
2014/10/07 14:17 2014/10/07 14:17
2014/10/04 14:16
'잊지 않겠습니다.'는 말은 단지 죽은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겠다는 다짐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을 여전히 살아있는 인격으로 대하겠다는 다짐, 내 삶에 대해 이 사회에 대해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대화하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2014/10/04 14:16 2014/10/04 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