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24 23:55
아이가 주변적인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분투하는 건 부모의 본능에 가깝다. 용기가 필요한 일은 아이가 제 나름의 이유로 주변적인 삶을 선택할 때조차 존중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2015/05/24 23:55 2015/05/24 23:55
2015/05/23 12:16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에 대해 쓴 글.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읽어보면 오늘 현실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지 싶다. 읽는 데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 '진보'는 요즘 통용되는 진보가 아니다. 이 글에서 요즘 통용되는 진보에 해당하는 말은 '개혁적 보수'다. 그런 변화와 정치적 퇴행에 대해서는 새로 쓸 계획이다.

2015/05/23 12:16 2015/05/23 12:16
2015/05/21 20:51
'굳이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을 상대하지 않는 것'은 품위 있는 삶의 핵심 요소다. 인터넷 세상, 특히 SNS 세상은 모든 사람을 촉새처럼 조잘대게 함으로써 거의 모든 것들을 상대하고야 말게 만든다. 그래서 시답지 않은 일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 되고 말도 안되는 인간이 유력한 인물이 되기도 한다. 최고의 촉새는 시대의 현자로 추앙된다. 사회는 더욱 미궁으로 빠져든다.
2015/05/21 20:51 2015/05/21 20:51
2015/05/20 20:51
지난 대선까지만 해도 '정권 교체가 미래의 희망을 연다'고 말하던 이른바 진보인사들(진보교수, 진보논객 따위)이 야당의 정체가 더 공공연히 드러나자 '야당이 집권한다고 해서 천국이 오진 않겠지만 지옥은 벗어날 수 있다'고 고쳐 말한다. 물론 그 말의 진의는 '야당이 집권한다고 해서 대부분의 사람이 지옥을 벗어날 순 없겠지만 나에겐 천국이 온다'는 것이다. 그놈의 요망한 입은 도대체 끝이 없다. 그 요망한 입에 여전히 홀리는 사람들이 있는 한.
2015/05/20 20:51 2015/05/20 20:51
2015/05/12 16:14
누구나 특별히 불쾌감을 느끼거나 거부감이 드는 소리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엔 ‘아저씨들 떠들어대는 소리’다. 아저씨들이 모이는 곳엔 되도록 가지 않으려 할 만큼 난 그 소리를 싫어한다. 동무들과 식당이나 술집을 고를 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 소리, 혹은 그 소리의 가능성 여부다. 그게 확인되면 제아무리 마음에 드는 게 많은 곳이라도 지체 없이 다른 곳을 찾는다. 아저씨들 떠들어대는 소리엔 개인이 뭉개진 집단, 수구 반동적 세계관, 권위와 아집, 애초에 있긴 했었나 싶은 윤리적 불감 등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온갖 악취들이 원액으로 담겨져 있다.

아저씨는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른다.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남에 대해서도’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른다. 나의 껍데기에 대해서만, 남의 껍데기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말한다. 아저씨들에게 그의 직업, 사회적 지위, 명성이나 지명도, 학벌, 집안 따위는 그 자체이며 그의 가치의 전부다. 콤플렉스의 향연이자 콤플렉스의 줄서기다.

남보다 한 칸이라도 앞에 있음을 확인하고 드러내려는 발악은 제 앞에 있는 존재에겐 비굴함으로, 제 뒤에 있는 존재에겐 가혹함으로 표현된다. 줄의 끄트머리에 있는, 제 껍데기를 툴툴 털어도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아저씨들은 남의 껍데기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그들은 늘 ‘내가 누굴 안다’ ‘내가 누굴 만났다’고 말한다. 그마저도 안되면 ‘내가 누구와 통화했다’고 말한다.

아저씨는 고갈된 자의식, 말라붙은 영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최종 답변이다. 아저씨들 떠들어대는 소리보다 역겨운 건 없다. 한때 그 역겨움은 주로 보수적인 아저씨, 한줌의 기득권을 갖고 행세하는 아저씨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진보가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이 되고 보수와 적대적 공생 체제를 이루면서, 진보의 목표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정권 교체로 다시 한 번 저희 세상을 만들어보는 것으로 바뀌면서 역겨움은 진보의 것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의 경계가 무의미해졌다’는 말은 보수 아저씨와 진보 아저씨가 ‘개저씨’로 대통합된 사실에 관한 말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아저씨들의 문제다. 아저씨들이 사회라는 신체 구석구석에 덕지덕지 낀, 피를 더럽히고 핏줄을 막아 결국 뇌 어디에선가 터지게 만드는 기름덩어리다. 그러나 아저씨는 더 이상 ‘중년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경계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아저씨는 사회적 산물이며, 사회란 분절되지 않는 유기적 생명체이기에,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하나일 순 없듯 사회의 어떤 사람도 완전한 예외로 존재할 순 없다. 누구든 조금씩은 아저씨다. 이를테면 박근혜라는 여성은 이명박이라는 아저씨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아저씨임을 매일 소름끼치도록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박근혜가 ‘포스터 속의 흑인 농구선수’ 같은 사례라면 조금은 까다로운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한겨레에 김민기 선생의 인터뷰가 실렸다. 인터뷰를 잘 안 하는 분이기도 하거니와 그의 말엔 역시 경청할 만한 대목이 많았다.

특히 ‘돈 안되는 일만 한다’는 그의 말은 그가 군사독재를 넘어 자본독재의 시절에도 여전히 ‘아저씨 아님’을 웅변했다. 그러나 그의 인터뷰에 감동하는 독자들은 대개 아저씨로 보였다. 그들은 그가 젊은 시절 막노동을 하고 농사를 짓고 공장에서 활동을 한 것에 새삼스레 감동했다. 그렇다면 그가 있기 전에도 그가 떠난 후에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두드러질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의 실체를 관념의 잣대로 벌목해버리는 것처럼 아저씨적인 건 없다.

아저씨의 핵심인 이른바 386의 대학 진학률은 20%가 채 안된다. 동세대의 다섯 중 하나일 뿐인 그들은 30년 이상 서로에게 학번을 질문함으로써 80%를 배제하며 살아왔다. 그들은 출발부터 아저씨였으며 ‘대다수 노동자 시민의 삶과 무관한 진보’는 신자유주의 이후의 비평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들에게 내포되었던 셈이다. 자신의 말, 자신화한 말을 하지 못하고 최신 유행하는 유럽 지식인의 말을 짜깁기해 번역후기 아닌 번역후기만 써대는 인문학자 아저씨는 또 어떤가. 그들의 충직한 후원자 노릇을 하는, 최근 수입된 어려운 개념어가 간간이 나와 주지 않는 글은 촌스러운 글이라 여기는 인문독자 아저씨는 또 어떤가. 대학 졸업생의 거개가 비정규나 알바인 걸 알면서도 아이를 밤 늦도록 학원으로 몰아대며 ‘내 아이는 시킬 수 있을 만큼 시키고 싶다’는 주문을 외우는 엄마 아저씨는 어떤가. ‘야당은 여당의 2중대에 불과하다’ 소리 높여 욕하다가도 결국은 정권 교체에만 목을 매는 민주 시민 아저씨는 또 어떤가.

아저씨들 떠들어대는 소리로 잠식되어버린 사회를 누가 구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여전히 내 껍데기가 아니라 나에 대해, 그의 껍데기가 아니라 그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 유일한 가능성일 것이다.

섣불리 희망을 말하려 들지 않지만, 근사하게 살긴 진즉에 글러버린 세상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지만, 그래도 아저씨가 되진 않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하는, 가만히 세련된 사람들 말이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5/05/12 16:14 2015/05/12 1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