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읽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정중히 부탁합니다.
천천히 한번 더 읽어주시길..
보수적인 부모는 당당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으로 밀어 넣고
진보적인 부모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으로 밀어 넣는다.
보수적인 부모는 아이가 일류대학생이 되기를 바라고
진보적인 부모는 아이가 진보적인 일류대학생이 되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가 금욕주의적으로 느껴진다는 사람들이 있어 더 설명을 할 필요를 느낀다. 세상을 아무리 둘러봐도 나만한 에피큐리언도 없는데 금욕주의적이라니.. 내 스스로 소름끼친다. 사실 내 모든 글과 이야기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더 즐겁게 살자는 것인데.. 흠.. 그런 오해 역시 내 숙제다.
14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하셨다.
로마가 이스라엘의 괴뢰 왕으로 헤로데를 세운 게 BC 41년이다. 헤로데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두매아인이었기에 선민의식에 가득 찬 순혈주의자들의 왕이 되기엔 부적절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헤로데는 로마에서 벌어진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권력투쟁의 틈바구니를 노회하게 줄타기한 끝에 유대의 왕이 되었다. 헤로데는 아내 두 명과 아들 셋, 처남들을 반역죄로 몰아 죽일 만큼 잔혹한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방인 폭군을 극도로 증오했다.
BC 4년 헤로데가 죽자 로마는 헤로데의 세 아들에게 팔레스타인을 나누어 통치하게 했다. 아켈라오에겐 유다와 사마리아를 안티파스에겐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그리고 필립보에겐 요르단 동부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그런데 아켈라오는 하도 통치를 못해서 10년 만에 폐위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순혈의 왕을 바랐지만 로마는 다시 왕을 세우지 않고 총독 코포니우스를 보내 이 지역을 직접 다스리기 시작한다.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한 본디오 빌라도는 5대 총독(AD 26~36)이다. 헤로데의 세 아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예수의 생애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그 아비의 노회함과 잔혹함을 쏙 빼닮았다는 갈릴래아의 영주 안티파스다.
요한은 결국 안티파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해진다.(6:17~29) 예수는 요한의 뒤를 잇기라도 하듯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직역하면 '하느님의 왕정')가 다가왔음을 알리며 회개를 촉구한다. 그런데 앞으로 예수의 입을 통해 거듭 전해질 하느님 나라는 세례자 요한을 비롯해 대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던 하느님 나라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로 만들어지는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이 준비하고 초대하는 잔치 같은 것이다.
예수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즉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말한 '회개'를 단지 종교적 회심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예수는 자신의 종교라 할 유대교 안에서 회심하라는 게 아니며, 아직 생기지도 않은 기독교 안에서 회심하라고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예수는 종교적 회심을 촉구하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인 회심을 촉구한다. 예수는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내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회개'로 번역된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는 '길을 바꾸다, 되돌아서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10 그리고 즉시 물에서 올라오면서 보시니 하늘이 갈라지고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에게 내려왔다. 11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 12 그리고 즉시 영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냈다. 13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예수는 신비체험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확인한다. 말하자면 예수는 '득도'한다. 예수는 광야로 나간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탈출한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40년을 광야에서 지낸 이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광야는 시련과 성찰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예수는 사탄에게서 유혹을 받는다. 모든 세속적인 욕망들을 접고 세상을 바꾸는 삶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한 지 오래지만, 한 인간으로서 마지막 번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의 따뜻한 품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도, 오순도순 식구를 건사하며 평화롭게 일생을 보내는 범부의 삶도 이제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예수는 40일 동안 광야에서 지내면서(「마태복음」, 「누가복음」에는 "금식하면서"라 되어 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이런저런 욕망의 찌꺼기들을 씻어내고 몸과 마음을 추스른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에는 아버지의 권위와 사명을 받아 마땅한 '아들'(딸이 아닌)이라는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들어 있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마가복음」이 지어질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가부장적 사고가 인간의 보편적 양식과 어긋난다는 걸 아는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그런 점을 감안해야 한다. 예수가 남성이었다는 걸 부인할 이유는 없지만, 예수가 여성이었더라도 하느님의 권위와 소명을 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거리낌 없이 인정되어야 한다.
(최근 글들에 참고가 되는 내용이라 순서를 바꾸어 먼저 싣는다.)
26 그리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경우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묻고 27 밤과 낮에 자고 일어나는데,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씨가 돋아나고 무럭무럭 자랍니다. 28 저절로 땅은 열매를 내는데, 처음에는 줄기, 다음에는 이삭, 다음에는 이삭에 가득한 낟알을 냅니다. 29 그리고 열매가 익으면 그 사람은 즉시 낫을 댑니다. 추수(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30 그리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할까, 혹은 무슨 비유로 그것을 표현할까? 31 겨자 씨앗과 같습니다. 그것이 땅에 뿌려질 때는 땅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작습니다. 32 그러나 뿌려지면 자라서 어떤 푸성귀보다도 크게 되어 큰 가지들을 뻗칩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됩니다." 33 그리고 이와 같은 많은 비유로써 그들에게 말씀을 설파하셨는데,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하셨다. 34 비유가 아니면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고, 당신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 싸우고 헌신하는 사람이 싸우고 헌신하는 그만큼 세상이 변화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면, 그래서 시시각각 보람과 기쁨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세상은 늘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며 또 포기하곤 한다. 지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면 이미 그 문턱에 다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걸 염두에 두고 예수는 말한다. 씨를 뿌린 사람도 못 알아차리는 사이에 어느새 싹이 돋고 이삭이 패고 마침내 알찬 낟알이 맺힌다고.
예수가 말한 "겨자"는 당시 팔레스타인에 많이 자란 '시나퍼'라는 변종 겨자다. 시나퍼의 씨앗은 그 어떤 풀씨보다 더 작지만 다 자라면 3미터가 넘어 어지간한 나무보다 크고 무성하다. 변화의 씨앗은 언제나 작고 보잘것없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변화를 좇는 사람들을 존경하기보다는 비웃거나 조롱한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그런다고 세상이 변하나.' 좀더 진지하고 양식 있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저 보잘것없는 세력이 어느 세월에 세상을 바꾼단 말인가.' '승산도 없는 싸움에 힘을 소모하기보다는 최악이라도 막는 게 최선이지.' 그들은 '변화를 위한 보다 현실적인 선택들'을 제시한다. 그런 선택들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는다. 그런 선택들은 대단한 변화를 일으키는 듯하지만 실은 현실의 모순을 순화하고 인민들의 정당한 분노를 누그러트림으로써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되곤 한다.
변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사람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던 세상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일어난 혜택은 시나퍼의 그늘처럼 모든 사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적대하고 탄압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역사에서 보듯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래 왔고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었다'는 건 자신의 제자와 여느 사람들을 차등했다는 게 아니다. 앞서 말했듯 '열두 제자'란 상징적인 의미이거니와, 여기에서 '제자들'이란 어떤 자격이나 임명의 의미보다는 여느 사람들보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라 인정된 자들이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 마음의 귀가 닫힌 사람에게 지나치게 연연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그것은 성실한 계몽의 태도가 아니라 '나는 열심히 하고 있다'는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그렇게 쉽게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다면 이미 변화가 필요 없는 세상일 것이다. 예수는 낙관적이지만 터무니없는 몽상가는 아니다. 예수는 대개 많은 사람에게 제한 없이 말하지만, 동시에 변화는 들을 귀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진행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그들을 집중해서 가르친다.

댓글 ::
음.. 네좀 어려운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여기에 여쭤봐도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