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상수 선생에게서 “접지 마시오”라고 적힌 커다란 봉투가 배달되어 왔다. 뭔가 싶어 열어보니 사파티스타 사진이다. 멕시코 벗에게서 선물 받은 거란다. 어디에다 붙여놓을까..
'2006/02'에 해당되는 글 22건
2006/02/28 20:52
2006/02/27 23:24
여러분의 공식적인 임무는 아이들을 체제순응적인 인간으로, 이기적이며 숙명론을 좇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교대의 설립목적이고 국가가 여러분에게 혜택을 부여하는 이유입니다.
(경인교대 신입생 강연에서) 2006/02/26 19:47
2006/02/25 11:15
이장혁의 스무살. 들은 지 오래지만 이제사 가사를 곰곰이 들어보았더니.. 가슴 아픈 노래였구나.
내가 알던 형들은 하나 둘 날개를 접고 아니라던 곳으로 조금씩 스며들었지 난 아직 고갤 흔들며 형들이 찾으려했던 그 무언가를 찾아 낯선 길로 나섰어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의 수상한 질서 하지만 난 상관없는 듯 너는 말이 없었고, 나는 취해있었어 우리에겐 그런 게 익숙했던 것처럼 귀찮은 숙제같은 그런 나를 보면서 더 이상 어떤 말도 넌 하기 싫었겠지 내가 말한 모든 건 내 속의 알콜처럼 널 어지럽게 만들고.. 밖으로 밖으로 너는 나가버리고 안으로 안으로 나는 혼자 남겨져 밖으로 밖으로 널 잡고 싶었지만 안으로 안으로 나는 취해만 갔어 어둡고 축축한 그 방안 그녀는 옷을 벗었고 차가운 달빛아래 그녀는 하얗게 빛났어 나는 그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창 밖이 밝아 왔을 때 난 모든 걸 알았지 그녀가 예뻤냐고, 그녀의 이름이 뭐냐고 가끔 넌 내게 묻지만.. 밖으로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고 안으로 안으로 그녀는 잠들어있어 밖으로 밖으로 달아나고 싶었지만 안으로 안으로 우린 벌거벗었어 밖으로 밖으로 눈부신 태양은 뜨고 안으로 안으로 날 비추던 햇살 밖으론 밖으론 난 아무렇지 않은 듯 안으론 안으론 하지만 난 울고 있었어 난 울고 있었어 난 울고 있었어 2006/02/24 18:45
미루어 두었던 무버블타입 3.2 업그레이드를 했다. 20분이 채 안 걸리는 간단한 작업일 줄이야. 도움말을 준 이정환 형께 감사.
2006/02/23 11:30
일흔을 넘긴 내 어머니 아버지를 보면, 노인들은 곧 도인들이구나 싶다. 보장된 살날이 고작 십년 남짓이고, 그 십년도 몸이 늙어서 돌이켜 뭘 할 수도 없는 처지에, 회한이나 낙심에 젖기는커녕, 하루하루를 이웃 걱정 자식 걱정으로만 보내는, 그것도 애써 웃는 얼굴로만 보내는, 그들은 말이다.
2006/02/22 13:10
운동은 시절을 거스름으로써 시절을 이끈다. 90년대 이후 운동의 주인을 '민중'에서 '시민'으로 바꾼 운동들은 한 시절 호황을 누려왔다. 그리고 이제 그 운동들은 보다시피, 매우 빠른 속도로 흡수되거나 소멸하는 중이다. 시절을 거스르지 않는, 시절을 좇는 운동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런 음울한 풍경 속에서 '소수자'와 '계급성'을 결합한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존재는 들불처럼 빛난다. 정태수 열사 4주기 추모토론회. 나도 말석에 앉아 공부하기로.
![]() 2006/02/21 18:03
며칠 전 내 독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경찰이 편지를 보내왔다. 아래 링크한 폭력경찰에 대한 글과 관련하여 소통을 하고 싶다고 했다. 두어 차례 편지를 교환했는데 그의 편지에 비해 내 답장이 너무 날림이라, 오늘은 “천천히 소통하자”고 편지를 했다. 방금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봤다. 그는 우리가 체제의 경비대로서 경찰이라는 조직과 직업이 경찰인 개인들을 구분해야 한다는 걸 되새기게 하는, 경찰이다.
2006/02/20 17:30
“그냥 눈 딱 감고 하시죠.”
시사저널에서 교육(육아) 칼럼을 해보자고 해서 1주일 후 연락하자고 해놓고는 결국 거절하려 했는데 어수선한 지하철에서 받은 담당기자의 전화 말 한마디에 홀랑 넘어갔다. “눈 딱 감고..” 그 말에 순간 모든 게 싱거워졌다. 희한하다. 내가 말 한마디에 흔들릴 만큼 감각적인 사람도 아니고 게다가 “눈 딱 감고..”는 내가 싫어하는 말인데.. 요즘 내가 뭔가 달라지고 있다. 2006/02/16 23:28
우리가 겪은 대통령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면 그저 쪽팔려서 못 살겠다는 생각뿐이지만, '싸가지' 면에선 지금 대통령이 으뜸이다. 그는 이를테면 경찰이 사람을 쳐 죽인 일로 사과한다고 나와서는 "시민사회가 폭력시위를 방관하고 있다"고 뇌까리는 인물이다. 그런 대통령이 있으니 경찰폭력이 지속되는 건 당연한 일. 내 청년 시절 그 무지스런 백골단과 수없이 싸워봤지만 요즘 전경들 방패는 정말이지 새롭게 섬뜩하더라. 인권운동사랑방에서 경찰폭력 뿌리뽑기 기획기사를 마련했다. 꼭들 읽어보시라. 우리는 언제 목에 방패가 날아들지 모르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경찰폭력뿌리뽑기 프로젝트 2006/02/14 23:06
![]() 경희궁 근처 식당에서 예수전 2기 수강생들이 제 예수전을 나누었다. 스무명 가운데 절반 가량이 제 예수전을 제출했다. 차례로 제 것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고 박수를 쳤다. 몇번이나 목이 메어 더 읽지를 못할 땐 내가 대신 읽었다. 처음 예수전 강의를 하기로 한 이유는 예수전 원고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두 번째 강의를 마친 지금은 강의가 원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3월 중순부터 세 번째 강의를 한다. (사진 홍기표) 이충희의 예수전 김규항 선생님의 '나의 예수전' 강의를 듣는 2개월 동안은 약간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아마 기존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 개념에서 벗어나 ‘나만의 예수’를 만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아서였을 겁니다. 저는 이제 막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병아리 카톨릭 신자입니다. 세례를 받은 지는 4년 되지만 진지하게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평소에 김규항 선생님의 예수관에 대해 관심이 있던 바 이번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그닥 깊은 신앙이 있지 않은 저는 기존 교회에서 주입된 신앙 지식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편입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의 인간 예수에 초점을 맞춘 강의 내용은 부분적으로 제게 혼돈을 주기도 했습니다. 예수는 인간적인 면과 신적인 면모를 동시에 가진 분입니다. 그 자신 종종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썼듯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 할 때는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수난을 당하시고 고통을 당하실 때, 또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예언하실 때 종종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결국 인자는 사람의 모습으로 와서 사람과 함께 고통을 당하시고 비천하게 돌아가신 후에 신의 영광을입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 생애를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가지 연결고리 속에서 보아야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저는 종교를 일단 한 켠에 벗어놓고 인간에 초점을 맞춰 예수의 생애를 관찰할 수 있는 눈을 얻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때때로 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제가 본 인간 예수그리스도-나의 예수전에 대한 의견은 이렇습니다.우선 결론부터 말씀 드린다면 저는 예수를 바로 안다는 것은 제 삶을 돌아보며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예수는 그냥 안이하게 '나를 따르기만 하면 영생을 준다'고 하지 않았으며 그의 가르침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지 않으면 당신에게 도달할 수 없다는 힘든 가르침이었기에 종교적인 혼란 외에 저는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본론으로 들어가면 이렇습니다. 1. 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선생님은 강의 시간에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회변혁과 인간 해방을 강조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그러한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잘못 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요...즉 정치적인 신념 없이 종교에만 몰입하는 것은 예수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예수의 참된 가르침은 내 것을 내놓아 같이 나누라고 하셨는데 그 '내놓는다'라는 뜻은 내 것을 그냥 ‘나눈다’가 아니라 자기 것을'송두리째' 내놓아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산다는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어쭙잖은 기부 행위로영혼의 위안을 얻는 행위는 잘못됐다는 말씀이지요. 가난한 민중에 대한 연민과애정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 있는가. 저에게는 큰 딜레마입니다. 사실 저는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 종교에 입문했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가난한 민중에 대한 관심은 평균적인 수준인 저에게이 새로운 종교적 해석은 앞으로 제 삶을 통해 풀어가야 할 숙제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이 즈음해서 읽은 책의 한 부분에도 '풍요롭고 자족적인 교회에 안주하는 생활이 신앙의 전부가아님'을 깨달으라는 구절을 있었습니다. 나와 사회에 대한 관심 없이 그리스도의 핵심 사상을 깨달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이 단순한 구절들의 실천이 왜 이리도 힘든지요. 2.내 눈은 깨어있는가. 베드로를 위시하여 그의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고 그의 기적을 가장 옆에서 지켜보며 그와 먹고잠잤던 장본인들이지만 정작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던 못난 제자들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을 통해 제가느꼈던 몇 가지 중에서도 놀랐던 것은 '예수의 고독'이었습니다. 그와 가장 가깝다는 애제자들도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는 항상 홀로 외따로 떨어져 기도를 통해 마음의 안식을 취했습니다. 스승이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아 그의 후광이 자신들에게도 미칠 줄 기대했던 제자들은 참으로 깨어있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저는 생각합니다. 나 또한 그 제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요. 왜냐하면 저 또한 신앙을 가지게 되면 정말 마음의 안식과 평안을 얻을 줄 알았기 때문이지요. 아닐 그걸 바랬지요.그러나 예수는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라고 선언했으며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는데도 저는 제 나름의 허황된 생각만 가지고 왔던 거지요.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십자가의 고통을 따르고 이해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가장 낮은 모습으로 와서 가장 비천하게 죽임을 당한 예수의 생애에 대한 몰이해가 저의 눈과 귀를 닫았습니다. 3. 내 안의 예수의 말에 귀 기울여라.율법의 틀 안에 갇힌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맞서 예수는 당당히 싸웁니다. 때로는 회당도 뒤집어 엎어버립니다. 누가 예수를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합니까? 예수는 마냥 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닌 것에는 한 치도 용서가 없었던 분입니다. 김규항 선생님은 예수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이 땅에 내려오면 교회를 그냥 지나쳐 가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저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하고요...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율법을 자신들에 맞게 해석했듯이 지금 예수가 오신다면 우리에게 무어라고 할 지 궁금해졌습니다. 형식과 관습에 얽매인 교회의 모습에서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따르고 있는 것들-그것이 무엇인지 고민되고 어떻게 그것을 털어버릴까, 이것 또한앞으로 제 신앙생활의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나의 예수전-예수의 가르침은 고정되지 않고 현실적이며 생생하게 날 것 그대로 살아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데 안식일의 규정이 무엇이냐고 호통치고 때로는 안타깝다는 듯이 지긋이 바라보시는예수님의 모습을 저는 가슴 아프게 기억합니다. 가장 미천하게 취급 받던 창녀와 세리와 불구자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하시고 병든 곳을 고쳐 주시는예수님의 그 무심한 듯한 자비로움...나의 예수는 이렇듯 용감하고 이렇듯 따듯하고 이렇듯 멋진 사람이었음에...그의 가르침이 잘못되지 않도록 그의 뜻이 잘못 되지 않도록 나는 내 삶과 내 이웃의 삶과, 내 사회의 삶에 더 많은 관심과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2000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의 가르침은 유용하게 남아 제 마음을 흔듭니다. 박영복의 예수전 나는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이다. 친가도, 외가도 모두 다 철저한 신앙의 집안이다. 자연스레 교회에 가게 됐다. 고민과 성찰 따위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부모가 가니까, 삼촌이 가니까, 이모가 가니까, 사촌들이 가니까 따랐다. 튀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하는 걸 하는 것이 죽지 않는 길임을, 아주 어린 나이에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나보다. 고등학교 때는 여자를 봤다. 교회에 가니, 나의 남성을 채워줄 이성이 있었다. 문화제를 하며, 나는 나의 원초적인 남성에 화장을 해 위장했다. 결국 이성을 얻었다. 하나님과 예수의 이름으로 감사의 기도를 하며, 찬송을 불렀다. 고민과 성찰은 여전히 낄 자리가 없었다. 그런 시간이면 다른 남성에게 그 이성을 빼앗길지 몰랐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시험을 망쳤다. 결국 우리 집안 집사님들의 강력한 권유로 포항 땅으로 향했다. 그 곳은 자칭 ‘하나님의 대학’이라 했다. 그 곳에서 나는 방황했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변해야했는데, 나에게 요구되는 변장의 폭이 이전에 비해 너무 컸다. 겁이 났다. 홀거 하이데가 말한 것처럼, ‘가해자와 동일시되는 것’만이 살아남는 방법인 줄을 알았기에 더 그랬다. 어느새 눈을 감고 모든 가스펠을 따라 부를 수 있게 됐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 曰’ 할 수 있게 됐다. 죽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한다는 말을, 그래서 나는 믿는다. 고민과 성찰이 있다고 스스로 믿기로 했다. 졸업 후 군대에 가서 나는 비로소 ‘자유’를 느꼈다. 그 곳에선 그 동안의 내가 아니어도 누구도 정죄하지 않았다. 교회를 빠져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됐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불편했다. 박완서 선생의 소설에 나오는 엄마가 오빠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기독교’라는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교회를 찾았다. 전역 후 나는 자유롭게 됐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현재, 무엇을 할지 두려워 떨면서도 나는 자유를 느낀다. 철저히 혼자서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본다. 너무나 혐오스럽고, 괴롭고, 무서워서 자유로운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자유를 자유롭게 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제야 비로소 고민과 성찰을 시작한 것이다. 자유의 괴로움을 덜어내고자 쌍심지를 켜고 주변을 살폈다. 그렇게 김규항 선생의 『예수전』 수업을 듣게 됐다. 수업을 들으면서 두려움을 떨쳐내고자 했는데, 더 무서워졌다. 제길. 차라리 예전처럼 1주일에 한 번씩 예수의 이름으로 자위를 하는 게 더 쉬웠다. 죄책감을 느꼈지만, 잠시만 지나면 잊을 수 있었다. 안식일을 뺀 나머지 날들은 오히려 더 가뿐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다. 주일, 그것도 2~3시간 정도만 엄숙하면 됐다. 더구나 시간이 갈수록 죄책감의 한계효용도 줄어갔다. 그 쉬운 것을 우연찮게 듣게 된 수업으로 다시 못하게 되는 것이,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억울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항상 되뇌고 있었다. 그 길이 어렵다는 걸 알아 외면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분과 함께 했던 이들이 당시에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이들’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아니, 제대로 고민하지 않았다. 예수 주변에 여성들이 남성들만큼 많았으리라는 점도 알지 못했다. 아니, 내가 남성이니까 알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사람이 아니었던 바, 결국 예수는 사람도 아닌 이들과 함께 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근 30년이나!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환호하던 군중과 예수를 십자가형으로 몰아간 군중이 어떻게 다른지 이제 이해하게 됐다. 앞의 군중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됐다. 황우석이라는 사람 때문에 온 신경이 그 쪽에 가 있을 때, 부활이 ‘세포의 재생이라면 결국 다시 늙는 것 뿐’이 아닌가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태백산맥을 처음 읽었을 때처럼, 놀랐다. 내가 알던 것은 도대체 뭐였단 말인가, 허망했다. 그러면서 기뻤다. ‘부활’로 박제해버렸던 예수가 내 안에서 깨어나려 한다. 그러나 박제의 더께는 너무나 두텁다. 그걸 깨려면 내 안의 예수가 노력하는 것처럼, 밖에서 나도 무언가 한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와서 그들이 논쟁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 잘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첫째로 중요한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네 마음과 네 목숨과 네 뜻과 네 힘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은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계명은 없다.” (마가복음 12장 29~31절) 나는 스스로를 저 바리새인과 같다고 느낀다. 바리새인은 예수께 ‘맞다’ 대답했다. 예수는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예수께 ‘맞다’고 대답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저 때에 ‘맞다’함은 단순히 말 뿐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저리 살겠다, 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그건 너무나 힘든 여정을 내포한다. 이제 저 두 명제를 두고 싸우려 한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자유롭기 위해 싸워야 함을 안다. 이겨낼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겠다. 아직은. 그게 진심일 거다. 스스로 상찬해봐야 당장 ‘내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조차 가능한지 모르겠다. 그러할진대 ‘내 이웃’에 대함은 말할 것도 없다. 평생에 걸쳐 실패하고 또 실패할지도 모를 일이다.(지금도 나는 소위 사랑하는 내 주위 사람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는데!) 『나의 예수전』을 쓰겠다 했던 게 후회된다. 지금까지 ‘나의 예수’가 박제돼 있었는데, 뭘 얘기할 수 있을까. 더럽게 쪽팔린다. 여태 난 뭘 보고 기도하고, 울고, 웃었던 걸까.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마지막에 예수가 사탄에게 속았던 것처럼, 당했을라나. 그렇다 해도, 여전히 쪽팔린다. 예수한테, 나한테 모두. 더 이상은 쪽팔지 말아야지, 다짐해본다. 어찌될라나. 일단은 사과부터 해야겠다. 그동안 나의 자위를 받아주었던 예수에게. 예수여, 고맙고 미안하다. 이제 당신 말에 정식으로 귀 기울일게. 내 안의 당신 이야기는 이제 시작임을, 약속한다. 항상 함께 하고 지켜봐 주길. 당신의 부활이 내 몸 속에서도 이루어지길. 아멘. 홍기표의 예수전 백 몇 년 전 천주교 박해로 풍비박산 나 족보고 뭐고 없는 집안의 딸과 결혼하느라 나는 처음으로 교회에 갔다. 족보가 중요한 건 물론 아니다. 그런 건 나도 없다. 몇 대를 걸쳐 내려온 그들의 믿음이 내게 약간(?)의 강요가 되는 게 문제였다. 마뜩치 않았지만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광개토대왕 같은 장인에게 ‘제게도 종교의 자유는 있지요, 그것은 소중한 것이고요. 마음이 원할 때 다니게 해 주세요.’라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간은 알아서 갔고, 별 의미도 없이 그냥 멋으로 루가라는 세례명도 받았다. 그 후 일 년 남짓 교회에 나갔다. 어려움은 없었다. 몇몇 신부의 시대착오적 강론을 참는 아량만 있으면 되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정말 물리적으로만 교회에 갔을 뿐이다. 그런 내가 [나의 예수전]을 쓸 수 있을까. 몸이 쪼그라든다. 진공과 같은 공포다. 그래도 교회에서 만나지 못한 예수를 강의 내내 만나지 않았던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예수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지 않은가. 알량한 밑천이지만 나의 삶과 겹쳐서 생각할 수는 있겠지 싶다. 내게 예수란 또 [나의 예수전]이라는 강의란 무엇이었을까. 나는 고등학교 교사다. 그래서 어떤 글이나 말을 들을 때면 으레 직업과 연결시켜 생각하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경제적 계급과 사회적 위치를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말이다. 물론 공평하고 공정한 이해여야겠지만. 아무튼 나는 고등학교 교사고, 예수도 [나의 예수전] 강의도 거기서 출발해야겠다. 한국의 교회는 비교대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기업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슬픈 일이지만 한국의 학교 역시 마찬가지다. 교회가 믿음을 독점함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공고히 했고 부정한 현실을 은폐시킴으로써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면 한국의 학교 역시 교육을 독점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를 아무런 저항 없이 전파하였고 부정한 현실에 순응하도록 세뇌함으로써 온갖 명예와 물질적 이득을 취했다. 교회와 학교는 부정한 권력과 거래했고 그 역사는 유구하다. 교회가 믿음의 형태를 달리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듯 학교는 형태를 달리하는 교육자들을 장사꾼처럼 생각하고 사기꾼처럼 여김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세웠다. 장사꾼이라는 비판에 자신들도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말이다. 한줌도 안 되는 그들에게, 그들의 권위에 토를 달고 도전하는 사람들에겐 가혹한 응징이 가해졌다. 확실히 그들은 주님의 종도 교육자도 아니었다. 교회에서의 발언자가 오직 목사와 신부이듯 학교에서의 발언자는 오직 선생뿐이다. 교회에서 신도들이 높은 제단 위에 있는 목사와 신부를 일방적으로 올려다보듯이 학교에서 학생들은 높은 교단 위에 있는 교사를 일방적으로 올려다보아야 한다. 교회에서 이해와 납득에 앞서 믿음이 강조되듯이 제도 학교에서도 무조건적인 믿음과 복종이 강조된다. 상호 소통이나 신뢰는 버릇없는 생각일 뿐인 것이다. 또한 교회의 발언자들이 선전하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신념이 극악하고 옹졸하듯 학교의 발언자들이 선포하는 성공 역시 조잡하고 천박하기 짝이 없다. 한철 공부해서 좋은 간판을 걸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 성공한 삶, 훌륭한 삶이라니 얼마나 불쌍하고 애처로운가. 이런 공간에서 예수의 말처럼 이웃을 내 몸같이 생각하며 살라는 것은, 모든 차별과 억압을 거부하며 살라는 것은,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풍요롭게 존재하느냐고 묻는 것은,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의 말일 뿐이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학교 안에서 빛 좋은 개살구였다. 학교는 학교를 위해서 더 많이 존재했다. 예수 당시의 세밀한 율법이 이스라엘 민중을 죄인으로 만들었듯, 헌법 위에 군림하는 학교의 학칙이나 선도규정은 말끔하고 단정하지 않은 차림과 점잖고 예의바르지 않은 학생을 죄인으로 생산해냈다. 학교는 학생들의 행동과 의식 뿐 아니라 패션에도 관심을 가졌다. 단정하다 그렇지 않다, 학생답다 그렇지 않다는 조악한 기준을 가지고 말이다. 뿐이랴, 폭력은 일상화 되었고 때론 정당한 것이 되었고 온갖 방법으로 미화되었다. 부정한 교회를 변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부정한 학교를 변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교육에 대한 제안은 체제를 분열시키려는 몹쓸 짓이 되었고 빨갱이가 되었고 미꾸라지가 되었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막말이 예사가 되었다. 게다가 내게는 기간제 교사라는 비정규직의 딱지가 붙어 있었다. 나는 물러섰다. ‘그래, 정규직이 되었을 때는 다를 것이다. 그땐 분명 다를 거야’ 되뇌며 쫓기듯 여러 번 학교를 옮긴 끝에야 나는 드디어 정규직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간사한 놈이었다. 새벽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한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또 다시 변혁의 순간이 왔을 때, 실천의 순간이 왔을 때 한발 비켜섰다. 절정에 서있지 못하고 한발 비켜 서있었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의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모래야 나는 얼만큼 적으냐....]를 읽는 것도 내겐 사치, 난 늘 몸과 마음이 달랐다. 염치없는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다가올 생계의 위기가 걱정되었을까?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는 게 귀찮고 싫었을까? 누군가에게 나쁜 놈으로 인식되는 게 무서웠을까? ‘이 정도면 됐어. 뭐 다 그렇게 사는 거지...내가 뭐 잘났다고’하며 둥글둥글 살고 싶었을까? 비정규직으로 떠돌던 그 5년간의 불안과 고통이 두려웠을까? 이천 년 동안의 외로움이라는 예수처럼 올바르게 사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걸 몰랐다. 나는 참 그렇게도 못 알아듣는 놈이었다. 알았어도 모른 척 했을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비타협적으로 싸웠던 예수의 삶은 외로웠지만 아름다웠다. 신념이고 뭐고 팽개치고 살았던 나의 삶은 편안했지만 비굴하고 비참했다. 책 몇 권 읽은 것과 블로그에 자주 들어가는 것, [고래가 그랬어]를 정기 구독하는 것만 믿고 나는 이 강의에 참가했다. 알량한 사회의식을 배설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허영으로 말이다. 당당히 아내까지 권유해서 쌍으로 말이다. 이게 나의 옹졸한 반항이었다. 하지만 강의를 들을 때마다, 예수의 삶이 다가올 때마다 살점이 뚝뚝 떨어지도록 내려치는 회초리를 맞는 기분이었다. 후회, 부끄러움, 태만, 나태, 나약, 소심, 비겁..... 교사로서 8년의 삶은 이런 단어들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마땅히 다르게 살아야 하겠다는, 똑바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의 삶은 내게 너무도 먼 곳을 가리키는 이정표 같다. 내 삶이 딱 그 정도 밖에는 안 되기 때문이겠지만. 그렇게밖에 살지 못한 나였기에 혹여 이 글이, 이 생각이 또 한 번의 몸짓에, 제스처에 그칠까 나는 두렵다. 또 한 발 물러서면 어쩌지. 회개란 말은 흔하지만 회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지금까지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겠다고 말하긴 쉽지만 그렇게 사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호기 넘치는 자신감으로 명쾌하게 말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나는 한없이 부끄러울 뿐이다. 손미영의 예수전 아래 글은 권정생 선생님의 우리들의 하느님이라는 책에서 옮겼습니다 ---- 어느날 아주머니가 몹시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귀찮아서 퉁명스럽게 지금은 바쁘니 다른 데나 가보라고 거지에게 박대를 하며 내쫓은 것이다. 그런데 그 거지가 돌아서 나가는 뒷모습을 힐끗 보니 놀랍게도 틀림없는 예수님이었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떠서 달려나가 보니 거지는 그새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옆집으로 또 옆집으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역시 허사였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의 눈에는 어떤 낯선 사람도 예수님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십년을 하루같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을 했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아주머니는,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예.”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렇게 서로가 섬기며 살라는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종의 몸으로 섬기러 왔다고 하셨고, 그 말씀대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찾아다니며 섬겼다 ----- 위의 권정생 선생님의 글을 인용한 것은 수업을 들으며 가장 가슴에 남았던 구절이 세상 가장 보잘것 없고 비루하고 남루한 자들을 예수님은 종의 몸으로 섬김을 하러 오셨다는 거였다 그리고 후에 웃을 수 있다, 행복할 수 있다, 배부를 수 있다는 김규항님의 글을 보면서 서툴고 어리숙한 나의 믿음 안에서 믿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나의 예수전 수업이 한없이 감사하다 나의 예수전 강의에서 놓친 부분도 많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은 것을 앞으로 계속해서 느끼고 알아가야 하겠지만 복닦이는 지금 삶이 지옥이지 뭐가 지옥이야 하는 중얼거리는 마음을 조금씩이지만 위안을 받을 수 있고 달리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음에 기쁘다 아주 많은 오랜 시절이 걸릴것이다 그러나 한줄한줄 읽어내려 갈 것이다 또한 내 안에 예수를 살려내는 과정과 모습을 내게 선물하고 싶어진다, 곁에서 예수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 웃을 수 있는 날이 기다려진다 양은정의 예수전 그이의 얼굴 가죽, 을 벗겨내고 싶네 그 가죽, 바람 품고 흔들리는 담양 대나무숲 꼭대기에 걸어 말려 진초록 대나무 이파리향 가득 스며들게 하고 싶네 바람소리 살갗에 부딪치게하고 싶어 나는 잠든 예수의 주름진 낯에 칼날을 들이댄다 이마 언저리에 칼날을 깊숙이 꽂아 그 경계를 따라 손목을 움직이면, 그이의 피묻은 살갗, 가죽이 벗겨질 것이네 살갗을 죽 벗기면 드러날 낯선 예수의 얼굴 그 끔찍한 낯, 그러나 그 가죽 담양 대나무숲에 한 열 달 건조시키면 그이의 주름 사이로 담양대나무 수천그루 자라겠지 담양일대 풍경, 낯빛에 담은 예수 홀로 울울창창 푸르러 낮은 바람소리 낼 것이네 속으로 흔들리며 덩실덩실 춤, 출 것이네 김현정의 예수전 남편의 권유로 듣게 된 ‘나의 예수전’ 백 년도 전, 박해를 받아 야반도주 하느라 족보고 뭐고 없는 구교 집안의 딸로 태어나 종교를 절대적인 신념으로 삼고 살아가는 집에서 원치 않아도 당연히 종교의 울타리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나이다.살아오면서 내 속에 자리 잡았던 몇몇 keyword를 중심으로 나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1.두려움... 종교가 사람의 영혼을 유혹하는 첫 번째 사과. 죄 지으면 지옥에 가... 거긴 고통스럽고 무서운 곳이야... 어렸을 적 나는 눈을 감으면 악마가 보이고 저승사자가 보였다. 깜깜한 곳을 죽도록 싫어했고, 밤에도 불을 끄면 잠을 자지 못했다...난 천당에 가기 위해선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순종... 난 욕심 많은 아이였다. 갖고 싶은 것도 많았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잘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런 나의 욕심을 기도하며 눌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3.위안... 욕심을 모두 채우기엔 난... 부족한 것이 많았고, 농사짓는 우리 부모는... 가진 것이 없었다. 세상 속에서 타협이 필요함을 알았고, 포기하는 방법을 배웠다. 욕심을 버리니 자학이 찾아왔다. 왜 나는 이렇게 보잘 것 없는지, 우리 부모는 왜 밤마다 농사일로 고된 몸을 뉘이며 에고지고 앓는 소리를 삼키며 살아야 하는지, 그렇게 고된 삶에도 왜 우리는 가난한지... TV엔 잘난 사람도... 부자도 많았다... 그런 나를 어둑한 성당, 십자가 상에 매달린 예수님 모습에서 위안 받았다... 예수님은 인자한 미소를 나를 안아주었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4.구원?! 20대 어느 날, 교회를 다니던 남자친구가 말했다. “천주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기독교에서는 가르쳐. 정말 그러니?” 참... 이상했다... 구원이라... 기독교의 본질은 곧 ‘구원’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묻고 싶었다. “구원이 왜 중요하지? 무엇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거지?” 스무 해가 넘게 그리스도교의 틀 안에서 살아왔지만, 내게 구원은 한 번도 목표인 적이 없었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성당에 나가지도 않았다. 내 안의 예수님은 한 번도 내게 구원을 속삭인 적이 없었고, 구원을 위해 기도하지도, 그럴 뻔뻔함도 내게는 용납되지 않던데... 그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이유가 단지 ‘구원’을 위해서란 말이야? 제도 교회가 없는 자의 편이라고 느낀 적도 없었지만, 그 말은 정말 실망이었다... #5.기도 구원? 천국? 난 그런 거 관심 없다. 아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나보다 더 간절히 주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먼저 돌아보아 달라고 기도한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으므로... #6.예수전을 듣다 예수 안에서 살았지만, 예수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갖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이 강의를 선택했다.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면서... 나는 기뻤다... 예수님은 2000년 전 십자가를 선택해 죽었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내 안에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예수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의 삶을 살기엔 난 자본주의에 뼈 속까지 찌들은 나약한 인간이지만, 예수의 삶을 항상 기억할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소외받은 이들의 친구였던 예수님. 나도 그들의 친구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 이상용의 예수전 초등학교 3학년? 4학년? 때에 나는 혼자서 성경책을 읽었다. 우리 집에서는 굉장히 희귀한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 우리 가족 중 누구도 교회나 성당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우리 집안의 문화는 유교적 현실주의였고 기독교와는 거리가 있었다. 가족들은 성경을 읽는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다(지금 내가 생각해봐도 신기하다). 알아듣기 힘든 말투, 어려운 말들로 가득 한 신약성경을 나는 물어볼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읽곤 했다.사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와의 첫 만남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집에 있던 그렇고 그런 위인전집 중 1권이 ‘예수 그리스도’였다.예수가 행한 이적들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예수가 다른 위인들과는 좀 다른 것 같다고 느꼈고 흥미로웠다. 갈색 수염과 흰 피부, 인자한 눈매를 가진 예수의 그림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중학교 사춘기 무렵에 나는 다시 예수를 읽었다. 그때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을 어찌할 수 없어서 매달린 것이었다. 아무도 그러라고 시키지 않았건만(그때에도 우리 가족 모두 ‘무교’였고, 나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예수의 이야기를 읽으면 마음이 평화로왔다. 이러고 보면 예수와는 인연이 꽤 깊은데도 게으른 천성 탓에 한번도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은 없었다.‘믿으면 복이 온다’는 식의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교회에는 가고 싶지 않았고 예수가 멀리했던 자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가 미친(그리고 미치고 있는) 부정적인 면들은 교회에 가볼까,하는 마음을 가로막았다. 교회는 그랬지만 예수는 달랐다. 나는 지금도 직장동료 몇몇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틈틈이 요한복음, 마가복음을 읽는다. 하지만 예수는 여전히 내 삶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지 못했고 여전히 나의 삶의 방식은 나의 욕망에 끌려다니는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래, 나는 회개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차에 <나의 예수전>을 듣게 되었다.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잘못 알려진 사람, 예수의 입장에서 보면 참 쓸쓸하겠다...첫 시간에 선생님이 ‘2000년의 외로움’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나는 마음에 어떤 느낌을 갖게 되었다. 꽤 오랫동안 예수라는 사람을 알았지만 그동안 예수를 제대로 느낀 적이 없었다. 예수는 나에게 그저 편안함과 위로와 필요할 때 나의 기도를 들어 주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예수를 나와는 전혀 다른 신적 존재로만 여겼고, 거기에는 어떤 구체성을 띤 역사도 없었다. 그러니까 예수는 예수, 내 삶은 내 삶인 채로 따로따로였다.나는 내 안에서 박제화된 예수를 되살려 느끼지 않고는 진짜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마가복음을 읽는데 그렇게 눈물이 흘렀다. 약간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까지 내 멋대로 예수를 생각해버리고 써먹었었는데 어느 순간 예수의 마음이 느껴졌다고 해야할까. 먼저 깨달은 자가 운명처럼 떠안아야하는 고독과 슬픔, 그리고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볼 때 느껴지는 애처로움과 연민이 어떤 것이었을지 헤아려졌다.예수가 피로써 이루고자 했던 것,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완벽하게 스승을 버렸던 제자들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그동안 멋대로 예수를 들먹거렸던 나를 보면서도 예수는 쓸쓸하셨겠구나...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하느님의 뜻은 버리고 인간의 전통을 지키기에만 급급한 굳은 마음,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예수를 판단하고 이용하는 이기심, 깨어있으라는 스승의 말을 한순간도 지키지 못하는 연약함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었다. 조금 전에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약속을 바로 다음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완벽하게 어기는 베드로가, 혼자 살겠다고 예수를 아무 망설임없이 버리고 벌거벗은 채로 달아나는 제자가 바로 나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치던 군중들과 두려움에 싸여 도망치던 사람들이, 유혹에 너무도 쉽게 넘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나였다. 내가 예수를 죽이고 지금도 죽이고 있구나. 이제서야 진짜로 예수가 삶과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전하고자했던 하느님의 뜻이 알고 싶어졌다. 가난한 자들을 편애하고, 자신의 선택과 관련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버렸던 예수, 죄인을 가여워하고, 모두가 그렇다고 할 때도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분노하고 싸우는 예수, 어리석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처참하게 모욕당하며 죽으신, 그리고 부활하여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 예수의 뜻이 궁금해졌다. 저 멀리 계신 예수가 아니다. 나도 예수를 오랫동안 외롭게 했다. 내가 서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예수를 따를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해야겠다. 그리고 예수가 보셨으면 뭐라 했을까, 예수라면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을 위해 싸우셨을까를 기도하며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꽤 오랫동안이었던 나와 예수의 인연의 방향을 이제부터 조금씩 틀기 시작해야겠다. 여미숙의 예수전 나는 ‘B급 미싱사’였다. 공부를 썩 잘했지만 그러저러한 이유로 진학하지 않았다. 나의 하나님이 공장에서 나를 곧 구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분노하는 나를 보면서 내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난 그렇고 그런 기복 신앙자였던 것이다. 그 후 더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가끔 기도할 때도 있었지만 그건 그저 나와의 대화였다. 본받고 싶은 사람을 찾았다. 그 무렵 예수가 사회주의자란 말을 들었다. 머릿속이 맑아졌다. 마음이 설렜다. 내 삶의 근간이 되길 바랐던 예수가 사회주의자라니, 예수전을 듣고 그 말을 확신하고 싶었다. 불성실한 신앙인이었음에도 강의를 듣는 내내 걸림돌이 된 건 신으로서 예수였다. 그 예수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예수는 너무 오래 전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전에서 만난 예수는 지금껏 알던 예수가 아니었다. 예수는 비천한 자들을 사랑할 줄 알았고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것을 위해 자존을 버렸다. 이 식상한 말이 오래 남는 건 이것들을 실천하며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서다. 이 깨달음은 예수보다 더 산 덕이다. 지금껏 비천한 자들과 나를 구별 짓기 위해 노력했다. 그건 내 삶의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미싱을 돌리다 펜대를 굴리면서 그 증상은 더해졌다. 사실 난 그들인데,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들일 수밖에 없는데 어리석게도 나는 그들과 다른 말을 쓰고, 다르게 입고, 먹으려 했다. 이 허위의식을 몰랐을까. 모른 척했을 뿐이다. 예수전의 예수가 오랫동안 외면했던 내 모습을 마주보게 했다. 나한텐 ‘깡’이 있다. 어릴 적부터 난 잘 싸웠다. 대개의 싸움에 아주 성실히 최선을 다해 싸웠다. 나의 성실함(?)은 그런 데서 돋보였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불의한(?) 일에 맞서는 내 모습이 때때로 대견스러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내 자존에 관한 일에만 들고 일어섰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던가. 몇 달 전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행사장에 참석한 일이 있다. 전쟁 때문에 다친 아이들 사진이 슬라이드 필름으로 이어졌다. 모두 훌쩍였다. 난 울지 않았다. 왜 난 아프지 않은가, 행사가 끝날 때까지 나에게 거듭 물었다. 예수가 나와 피부색이 다르고 다른 말을 쓰고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음식을 먹었다는 이유로 실존 인물로 여길 수 없었던 것처럼, 피부색이 다른 그 아이들을 나는 사물처럼 바라보았던 것이다. 난 병자였다. ‘자발적 가난’. 이 말의 정확한 뜻을 알았을 때 내가 성경 속 그 부자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방법은 그들처럼 사는 것이다. 이 진부한 진리라니, 그런데 왜 난 이 말에 주저앉고 싶었을까. 월급 일부를 사회단체와 개인에게 후원하는 것을 자부해왔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덜어내야 하다니, 방금 가난한 동네에서 벗어난 나더러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라니 좀 억울하기도 하다. 강의 중 가장 ‘자극적인’ 말이 회개였다. 지금까지 내 삶을 밑바닥부터 뒤집어엎는 것. 삶의 전복. 회개할 수 있을까. 자발적 가난이란 말에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방법에서 나는 여전히 주춤거리고 있다. 채송아의 예수전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눈여겨 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막10장 중에서) - 나의 예수전을 쓰기 위해 마가복음을 다시 들춰보며, 나는 이 부자 젊은이의 모습에서 바로 나의 모습을 본다. 나의 부모님은 당신들이 이룩한 사회적 성취와 부를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늘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성취가 나의 미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성장기의 나는 부족한 것 없이 자라왔다. 그러다 자의식이 자라면서부터 이웃들의 물질적 궁핍과 사회의 불균형을 목격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중학교 시절의 한 장면이 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강남 반포에 있었는데, 중학교 2학년 때였던가 우리들 가운데 한 친구가 수업시간에 토론을 하다가 ‘우리의 존재 만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통이 된다.’라는 말을 하자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술렁거렸다. 선생님은 한 동안 빙긋이 웃으시더니 그 친구의 말을 부드럽게 긍정하셨다. 그렇다. 나는 나의 존재만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통이 되는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 몰라 늘 답답하곤 했다. 그러다가 만난 예수님은 참으로 명료한 삶의 지침을 제시한다. ‘하느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적어도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살지 않으며, 맘몬을 섬기며 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언제나 거기에서 머무르곤 한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니,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지 나는 갈 곳을 모르고 서성이기만 하고 있다. 스스로 가난해지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버리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회사 동료들과 점심을 먹을 때마다 매일같이 화제에서 떠날 줄 모르는 집을 사야만 돈을 번다는 것과 증권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속마음은 슬며시 나도 집을 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빈번해지곤 한다. 함께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주고 있는 사회 단체에 기부금을 내는 것으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면죄부를 대신하는 것 같아 요즈음은 그런 일들마저 회의감이 든다. 매달 일정한 돈을 벌어, 할 수 있는 최대한 저축하고, 그 중 일부를 떼어 기부하고 자연을 생각하며 적게 쓰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내가 현재 살고 있는 모습이다. 난 이런 내 모습이 지극히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쇼핑백을 들고 카페를 전전하며 사회주의를 떠드는 이들이 바로 너와 나의 모습 아닌가, 우리는 그저 일하기 싫어서 자본주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닐까. 지난 주에는 병점 역 화장실에서 두 아주머니의 대화를 들었다. 그곳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한 달에 75만원을 받는다는 아주머니와, 아들 사업이 망해서 59살 나이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일을 해 본다는 다른 아주머니는 식당 일을 하고 있는데 하루 12시간 근무에 150만원을 벌 수 있다며 식당 일이 낫겠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힘들고 거친 일을 하는 노인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 구걸을 하는 사람들, 그러한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자기 삶으로 안고 사는 이들을 볼 때마다 일어나는 안타깝고 불편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8번의 강의를 들었다고 해서 무슨 도깨비 방망이 같은 해법을 얻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오늘도 나의 예수는 이렇게 고민만 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계시지 않을까. 서형석의 예수전 풀집 강좌 중 많이 고민하면서 선택한 강의, “나의 예수전” 미술사를 들을까, 서양 고전사상강좌를 들을까하다가 예수전의 강좌라기보단 김규항선생의 강좌라니까 하는 마음에서 골라본 강의였는데 이제껏 수강했던 외부강좌중에서 가장 열심히 참여한 강의였고 지적인 희열감도 들었던 기회였다고 생각된다. 지난 20여년동안 가톨릭 성당의 세례자로만 이름을 올리고 띄엄띄엄 나가서 기도하고, 봉사단체에 기부하는 정도로만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위하며 생활해온 나에게 성경읽기란 너무나 가까이 하기에 멀기만 하고,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들에게만 점유된 종교행위라 치부하면서 금기시해왔던 것 같다. 지난 5년간 나에게 도미노처럼 몰려온 개인적 불행, 직장에서의 해고, 집사람의 암 선고와 투병, 사망,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찾아온 태풍 루사로 인한 시골에 계신 부모님의 사망 등 신이 내게 모든 것을 앗아간 엄청난 개인적 고통 앞에서도 성경책 한 자 읽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고, 기복신앙적으로만 종교를 대하면서 예수 또한 내가 기대고 의지할 신적 대상으로만 존재매김 했을 뿐, 김규항 선생의 표현대로 성당 안에 박제화된 예수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신앙행위의 우월성과 기득권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의 교리에 관한 한 열등감과 자괴감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그들이 정의내린 예수가 진정한 예수의 모습은 아닐 수도 있을 거란 마음 한켠의 기대감도 갖고 언젠가는 차분히 성경을 읽으면서 내 나름의 예수상을 정립하겠다란 의지를 갖고는 있었던 것 같다. 김규항선생의 나의 예수전 중 마가(마르코)복음을 읽으면서 성경을 이렇게 읽어야하는구나 하는 성경독법에 대한 방법론도 공감하면서 당시 시대상과 사회상 속에서 예수의 행적과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면모를 차분히 확인해보는 수확이 있었던 것 같다. 김규항선생의 강의를 따라 이제 마가복음을 1독해 본 처지에서 나의 예수전을 말한다는 것이 매우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되지만 예수의 인민에 대한 애정과 기득권층을 향한 질타 및 불의에 대해 과감하게 대처하는 용기있는 행위를 엿볼 수 있었고, 마지막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의 인간적 고통에 대해서는 가슴찡한 연민도 느낄 수 있었다. 예수처럼 제자들에게 혹은 제사장계층에게 치열한 논쟁과 설파, 용기, 불의의 저항 등의 행위는 신성을 지닌 신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아닌 인간 예수로서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경외심을 느끼게 하며 아울러 오늘날과 같이 엄청난 物神과 資本의 시대에 과연 예수가 있었더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지, 神만을 경외하며 현실을 긍정하며 사는 것이 과연 현명한 삶의 길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또한 부활, 영생이란 영원히 시대를 관통해 소통하며 의미를 주는 것이므로 현실의 삶을 처절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 한다면, 현실 속에서 희망없이 살아가는 대다수 인민들에게는 내세의 희망조차도 가질 수 없는 영생론보다는 차라리 내세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나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 나의 예수전 수강을 계기로 틈나는 대로 성경책을 읽으며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천착해보면서 영생의 길을 위해 열심히 고민해보려 하며 성경속의 예수독법의 눈을 띠게 해준 김규항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2006/02/12 14:58
2006/02/11 13:22
2006/02/10 12:25
저는 개인 사정으로 한 번 수업을 빠졌는데, 그 때 '부활'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부활에 대한 부분이 궁금합니다. 블로그에 부활에 관련한 글을 남기셨고, 지난 수업에서도 살짝 언급하셨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많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의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였던 것인지요? 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육신의 부활이라는 것이 세포의 재생에 불과하고, 세포가 재생했더라도 결국 늙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말씀을 듣고 놀랐지만, 이내 인정하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당시 제자들이 보았거나, 믿었던 '부활'은 어떠한 것이었을지 궁금합니다. 그것 역시 결국 나중에(교회에 의해)만들어진 것인가요? 사실은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 특히 예수가 다시 부활하시고 하는, 이 원래 마가복음에는 없던 구절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러하다면, 원래 마가복음은 예수의 부활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나, 하고 말이죠.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잡히는 순간 모조리 도망칩니다. 심지어 수석 제자라는 베드로(초대 교황이기도 한)는 밤사이에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런데 이 연약하고 비굴한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그 변화에 부활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에 우리의 본능적인 욕망(육체가 죽고 싶지 않아하는)을 투영해선 안 됩니다. 예수의 육체가 재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육체가 살아난 것을 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와 동행하면서도 못 알아보지요. 그리고 예수에게 자기들 스승 예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이 나중에 예수인줄 알았을 때 예수는 홀연히 사라집니다.(누가 24:13~) 우리는 한 사람의 실체를 생각할 때 육체라는 껍데기, 이른바 색(色)의 차원을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껍데기가 아니라 실체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죽는다고 하는 건 육체, 실체를 잠시 담고 있던 껍데기의 죽음을 말합니다. 죽은 육체가 살아나는 건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담는 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그 자체론 매우 특별한 신비현상, 대단한 마술일 뿐입니다. 누구도 마술을 보고 가치관과 인생을 바꾸진 않습니다. 감탄할 뿐이지요. 우리가 가치관과 인생을 바꾸는 유일한 경로는 깨달음을 통해서입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했던 건 스승의 육체가 재생했는가, 아닌가가 아닙니다. 예수의 육체가 재생해도 그게 제자들에게 단지 놀라움만 주었다면, 그들의 인생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건 부활사건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육체의 목숨이 진정한 목숨이 아니”라는 스승의 말을 어느 순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육체의 죽음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천국'이 궁금합니다. 예수전을 들으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보다 많은 전문적 지식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선생님의 신앙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짐작하기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천국'은 모두가 평등해지고, 하나님의 이미지 본연인 인간의 모습을 되찾게 되는 때인 것 같은데 이것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흔히 말해지는 영혼의 의미와 성령의 의미, 내세의 의미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도 궁금해집니다. 영혼, 성령은 흔히 어떤 비현실적이고 신비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고는 이른바 근대 이후 서구식 합리주의가 만들어낸 매우 억지스런 사고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귀신이나 영의 세계를 현실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귀신과 영은 다른 방식으로 늘 우리와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귀신과 영에게 기도하고 대화하고 그들을 통해 삶을 성찰했습니다. 뭔가 신비스런 체험을 하고 희한한 행동을 하는 게 영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런 차원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신비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현실적인 차원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대단한 신비적인 체험(부흥회나 간증집회에서 신의 역사의 증거로 제시되는)을 하는 게 어려울까요, 자본주의적 욕망을 씻어내고 새롭게 사는 게 어려울까요? 저는 단연 후자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가치관을 전복하고 회개했다면 그는 영적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영원히 살아 소통한다면 그걸 우리는 영혼이 영원히 산다, 천국에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죄지은 형제들을 지옥으로 보낸 사람들이 즐거움과 안락함만 누리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오감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즐거움도 없고 불편함이 없다면 안락함도 없습니다. 그 오감의 최대 만족치를 천국으로 가정하는 건 단지 육체적 목숨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반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내세는 육체의 목숨이 진 다음의 목숨,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목숨에서 육체를 포함하는 아주 짧은 기간 다음의 목숨입니다. 소위 말하는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사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다원주의는 합리적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결국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도 이어질 수 있지 않은건지,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는 그러한 관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그 부분도 잘 떠오르지가 않네요. 개신교에선 ‘하나님’이라는 말을 씁니다. 유일한 신이라는 말인데, 나는 오히려 그 말이 인간이 만든 종교체제가 하느님을 독점하려는 욕망으로 읽힙니다. 예수 당시 성전 체제가 신과 인간의 소통을 독점하고(신이 성전 지성소에 산다는 전제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걸 우리는 배웠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 문제와 싸우다 죽임을 당했지요. 그런데 오늘 교회가 바로 예수 당시의 성전체제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엔 하느님을 섬기려는 게 아니라 독점하려는 그들의 욕망이 배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온 우주의 주인이라면 교회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한 가지 방식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교회체제가 없는 곳은 하느님이 없는 곳이 되는데 제국주의 침략사에서 실제로 그런 논쟁이 있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백인과 같이 하느님이 만든 인간으로 보는가 아니면 짐승으로 보는가, 였지요. 원주민들이 오래전부터 그들 나름대로 하느님과 소통해왔다고 주장하는 극소수의 성직자들은 ‘매국노’로 몰렸습니다. 그 논쟁은 실은 ‘국익’ 논쟁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만나왔습니다. 예수는 종교체제의 굴레에 갇힌 하느님을 구출하여 인민과 직접 만나게 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환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가 죽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바로 그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 역시 하느님의 딸 아들들입니다. 예수가 전태일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보지요. “너는 나를 창시자로 하는 기독교의 구원절차를 거치지 않았기에, 또 자살이라는 죄를 지었기에, 나와 같은 맥락의 실천을 했지만 지옥에 가야 한다” 예수가 그럴 것 같다고 생각된다면 그런 예수를 믿으면 될 것입니다. 나로선 그런 예수는 개자식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으셨던 것 같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관점도 이번 강의를 계기로 고민하게 된 부분인데, 그렇다면 전능하신 그 분은 이 세상 어디까지 관여하시는건지도 궁금합니다. 어떤 학자는 창조 이후 하나님이 전능성을 상실하셨다고도 말했다는데, 그 이유는 전능한 하나님의 손길이 어째서 이 세계의 온갖 부조리를 내버려두셨나는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는, 성경이라는 것에도 이 세상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결국에는 미쳤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방법이, 알수는 없지만, 결국 옳다는 논리겠지요.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감정적으로까지 부정하기엔 아직 무리가 따르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부분도 궁금합니다. 강의 중에 표현했듯, 하느님을 흰수염을 휘날리며 구름위에 앉은 巨漢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안됩니다. 하늘은 고대인들에겐 땅과 분리된 범접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였지만, 이젠 우리는 하늘이 지구의 대기권이거나 외기이며 우주의 공간에선 일정하게 분할된 공간도 아니라는 걸 압니다. 이제 하느님이 있는 곳은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곳, 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곳에 있습니다. 성서 첫머리에서 하느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다. 동학에서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심' 혹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외곽에서 우리를 관리하고 처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정의, 선, 따뜻함은 바로 우리 안의 하느님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 힘의 전부, 모이는 한 점을 상상해보십시오. 그게 결국은 이 추악한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힘, 전능하신 하느님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늘 되풀이 되는 듯하지만 길게 보면 언제나 인간해방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역사에 관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은 자본주의라는 가장 곤란하고 강력한 적과 싸우는 중입니다. 2006/02/09 13:06
이런저런 이유로, 규항넷의 방문자수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는데 딱히 감출 이유도 없고 해서 밝힌다. 서버회사의 로그분석에 따르면 현재 하루 방문자는 5천, 페이지뷰는 1만 가량이다.
2006/02/08 20:09
2006/02/07 00:23
스크린쿼터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7년 전에 염치라는 글을 썼었고 그 후 새로 보탤 이야기는 찾지 못했다.” 그나저나 ‘한국영화인들’과 ‘한국영화계’는 그 후 7년을 어떻게들 살아왔다더라..
2006/02/06 18:40
2006/02/05 23:23
지난 시간은 설 연휴 끝이라 많이들 빠졌습니다.
이메일이 없는 분도 있어서 여기에 공지하는바.. 내일 8강은 그 동안 공부한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본디 8강에서 하려 했던 ‘나의 예수전 나누기’는 다음 주에 한번 더 모여서 합니다. 2006/02/03 12:42
![]() 김단에게 다시 물었다. “만일 뭐든 키울 수 있다면 제일 좋은 건 뭐야?” “고양이.” “그 다음은?” “개.” “토끼는 고양이나 개를 키울 수 없으니까 대신 키우려했던 거지?” “응.” “그럼 아예 고양이를 목표로 해보지 그래?” “정말?” “기왕 키울 바엔 그렇게 하는 게 낫지 않겠어? 토끼를 키울 수 있다면 고양이도 키울 수 있을 거야. 건이하고 의논해봐.” 나는 김단이 전학오기 전에 제 용돈을 털어 학교 앞에 사는 도둑고양이 다섯 마리를 걷어먹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다음날 김건이 그랬다. “난 개가 더 좋지만 누나가 고양이를 너무 많이 좋아하니까 고양이 키워도 좋아.” 그렇게 ‘토끼 문제’는 ‘고양이 문제’로 전이했다. 남은 문제는 그의 어미와 아비가 가진 고양이에 대한 편견이었다. 우리 세대에게 고양이는 ‘재수없는’ 동물이다. 그나마 나는 권윤주(스노우캣)와의 오랜 토론으로 어지간히 나아진 상태지만 아내는 그렇지 못했다. “집에 고양이하고 둘이 있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줄인 건 선태네 집에 들어온 개다. 선태 아내 승은은 짐승이라곤 붕어 새끼도 질색하는 사람인데 얼마 전 유기된 닥스훈트 한 마리를 집에 들였다. 키울 사람이 없으면 도살된다는 말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단다.(좋은 사람!) 그들은 건강상태가 안 좋은 개한테 ‘달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식구처럼 지내고 있다. 그 모습이 아내를 많이 누그러트린 모양이다. 설 연휴 직전 전원합의가 이루어지자 나는 석달 된 러시안블루 수컷을 얻어왔다. 아이들은 고양이 이름을 ‘얀’이라 붙였다.(나는 ‘얼’을 제안했는데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름을 제안했을까?) 첫날, 얀은 집안을 탐색하느라 이리저리 구석만 찾아다니더니 다음날부턴 식구들에게 와서 몸을 비비고 장난도 치기 시작했다. 불러도 자기가 오고 싶을 때만 오는 태도는 내 마음에 쏙 든다. 훈련시키지 않았는데도 똥오줌을 잘 가리고, 밥도 먹을 만큼만 알아서 먹고, 개와는 다른 은근한 애교와 장난끼, 야생동물의 습성이 살아있는 행동거지, 볼수록 신비스러운 외모, 어느 것 하나 거슬리는 게 없다.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다니. 이럴 줄 누가 알았는가. (김단 배 위에서 잠든 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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