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2/10 12:25
저는 개인 사정으로 한 번 수업을 빠졌는데, 그 때 '부활'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부활에 대한 부분이 궁금합니다. 블로그에 부활에 관련한 글을 남기셨고, 지난 수업에서도 살짝 언급하셨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많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의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였던 것인지요? 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육신의 부활이라는 것이 세포의 재생에 불과하고, 세포가 재생했더라도 결국 늙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말씀을 듣고 놀랐지만, 이내 인정하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당시 제자들이 보았거나, 믿었던 '부활'은 어떠한 것이었을지 궁금합니다. 그것 역시 결국 나중에(교회에 의해)만들어진 것인가요? 사실은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 특히 예수가 다시 부활하시고 하는, 이 원래 마가복음에는 없던 구절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러하다면, 원래 마가복음은 예수의 부활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나, 하고 말이죠.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잡히는 순간 모조리 도망칩니다. 심지어 수석 제자라는 베드로(초대 교황이기도 한)는 밤사이에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런데 이 연약하고 비굴한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그 변화에 부활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에 우리의 본능적인 욕망(육체가 죽고 싶지 않아하는)을 투영해선 안 됩니다. 예수의 육체가 재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육체가 살아난 것을 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와 동행하면서도 못 알아보지요. 그리고 예수에게 자기들 스승 예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이 나중에 예수인줄 알았을 때 예수는 홀연히 사라집니다.(누가 24:13~) 우리는 한 사람의 실체를 생각할 때 육체라는 껍데기, 이른바 색(色)의 차원을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껍데기가 아니라 실체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죽는다고 하는 건 육체, 실체를 잠시 담고 있던 껍데기의 죽음을 말합니다. 죽은 육체가 살아나는 건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담는 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그 자체론 매우 특별한 신비현상, 대단한 마술일 뿐입니다. 누구도 마술을 보고 가치관과 인생을 바꾸진 않습니다. 감탄할 뿐이지요. 우리가 가치관과 인생을 바꾸는 유일한 경로는 깨달음을 통해서입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했던 건 스승의 육체가 재생했는가, 아닌가가 아닙니다. 예수의 육체가 재생해도 그게 제자들에게 단지 놀라움만 주었다면, 그들의 인생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건 부활사건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육체의 목숨이 진정한 목숨이 아니”라는 스승의 말을 어느 순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육체의 죽음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천국'이 궁금합니다. 예수전을 들으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보다 많은 전문적 지식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선생님의 신앙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짐작하기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천국'은 모두가 평등해지고, 하나님의 이미지 본연인 인간의 모습을 되찾게 되는 때인 것 같은데 이것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흔히 말해지는 영혼의 의미와 성령의 의미, 내세의 의미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도 궁금해집니다.

영혼, 성령은 흔히 어떤 비현실적이고 신비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고는 이른바 근대 이후 서구식 합리주의가 만들어낸 매우 억지스런 사고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귀신이나 영의 세계를 현실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귀신과 영은 다른 방식으로 늘 우리와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귀신과 영에게 기도하고 대화하고 그들을 통해 삶을 성찰했습니다. 뭔가 신비스런 체험을 하고 희한한 행동을 하는 게 영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런 차원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신비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현실적인 차원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대단한 신비적인 체험(부흥회나 간증집회에서 신의 역사의 증거로 제시되는)을 하는 게 어려울까요, 자본주의적 욕망을 씻어내고 새롭게 사는 게 어려울까요? 저는 단연 후자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가치관을 전복하고 회개했다면 그는 영적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영원히 살아 소통한다면 그걸 우리는 영혼이 영원히 산다, 천국에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죄지은 형제들을 지옥으로 보낸 사람들이 즐거움과 안락함만 누리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오감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즐거움도 없고 불편함이 없다면 안락함도 없습니다. 그 오감의 최대 만족치를 천국으로 가정하는 건 단지 육체적 목숨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반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내세는 육체의 목숨이 진 다음의 목숨,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목숨에서 육체를 포함하는 아주 짧은 기간 다음의 목숨입니다.

소위 말하는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사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다원주의는 합리적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결국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도 이어질 수 있지 않은건지,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는 그러한 관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그 부분도 잘 떠오르지가 않네요.

개신교에선 ‘하나님’이라는 말을 씁니다. 유일한 신이라는 말인데, 나는 오히려 그 말이 인간이 만든 종교체제가 하느님을 독점하려는 욕망으로 읽힙니다. 예수 당시 성전 체제가 신과 인간의 소통을 독점하고(신이 성전 지성소에 산다는 전제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걸 우리는 배웠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 문제와 싸우다 죽임을 당했지요. 그런데 오늘 교회가 바로 예수 당시의 성전체제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엔 하느님을 섬기려는 게 아니라 독점하려는 그들의 욕망이 배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온 우주의 주인이라면 교회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한 가지 방식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교회체제가 없는 곳은 하느님이 없는 곳이 되는데 제국주의 침략사에서 실제로 그런 논쟁이 있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백인과 같이 하느님이 만든 인간으로 보는가 아니면 짐승으로 보는가, 였지요. 원주민들이 오래전부터 그들 나름대로 하느님과 소통해왔다고 주장하는 극소수의 성직자들은 ‘매국노’로 몰렸습니다. 그 논쟁은 실은 ‘국익’ 논쟁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만나왔습니다. 예수는 종교체제의 굴레에 갇힌 하느님을 구출하여 인민과 직접 만나게 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환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가 죽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바로 그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 역시 하느님의 딸 아들들입니다. 예수가 전태일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보지요. “너는 나를 창시자로 하는 기독교의 구원절차를 거치지 않았기에, 또 자살이라는 죄를 지었기에, 나와 같은 맥락의 실천을 했지만 지옥에 가야 한다” 예수가 그럴 것 같다고 생각된다면 그런 예수를 믿으면 될 것입니다. 나로선 그런 예수는 개자식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으셨던 것 같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관점도 이번 강의를 계기로 고민하게 된 부분인데, 그렇다면 전능하신 그 분은 이 세상 어디까지 관여하시는건지도 궁금합니다. 어떤 학자는 창조 이후 하나님이 전능성을 상실하셨다고도 말했다는데, 그 이유는 전능한 하나님의 손길이 어째서 이 세계의 온갖 부조리를 내버려두셨나는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는, 성경이라는 것에도 이 세상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결국에는 미쳤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방법이, 알수는 없지만, 결국 옳다는 논리겠지요.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감정적으로까지 부정하기엔 아직 무리가 따르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부분도 궁금합니다.

강의 중에 표현했듯, 하느님을 흰수염을 휘날리며 구름위에 앉은 巨漢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안됩니다. 하늘은 고대인들에겐 땅과 분리된 범접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였지만, 이젠 우리는 하늘이 지구의 대기권이거나 외기이며 우주의 공간에선 일정하게 분할된 공간도 아니라는 걸 압니다. 이제 하느님이 있는 곳은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곳, 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곳에 있습니다. 성서 첫머리에서 하느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다. 동학에서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심' 혹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외곽에서 우리를 관리하고 처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정의, 선, 따뜻함은 바로 우리 안의 하느님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 힘의 전부, 모이는 한 점을 상상해보십시오. 그게 결국은 이 추악한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힘, 전능하신 하느님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늘 되풀이 되는 듯하지만 길게 보면 언제나 인간해방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역사에 관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은 자본주의라는 가장 곤란하고 강력한 적과 싸우는 중입니다.
2006/02/10 12:25 2006/02/10 12:25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716

  1. Subject: ?덉닔 1

    Tracked from baboddongko;諛붾낫?κ섕; 2006/02/12 02:51  삭제

    媛쒖떊援먯뿉???섑븯?섎떂?숈씠?쇰뒗 留먯쓣 ?곷땲?? ?좎씪???좎씠?쇰뒗 留먯씤?? ?섎뒗 ?ㅽ엳??洹?留먯씠 ?멸컙??留뚮뱺 醫낃탳泥댁젣媛€ ?섎뒓?섏쓣 ?낆젏?섎젮???뺣쭩?쇰줈 ?쏀옓?덈떎. ?덉닔 ?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