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3/04 10:44
현재 시점에서 내 숙제를 요약한다면 급진성은 유지하면서 미래의 비전을 확보하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맑스주의, 예수, 생태주의라는 세 가지 틀을 사용하여 그 얼개를 잡아보려는 중이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취약한 게 생태주의다. 농촌 출신이긴 하지만 공군정비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도시를 전전하며 자란 탓인지 자연보다는 ‘기계’에 친근함을 느끼는 정서가 있다. 이를테면 나는 자동차나 최신 기계류나 따위는 한번만 봐도 그 계보를 줄줄이 읊으면서(오래 전, 어느 잡지에 ‘4WD의 역사’를 연재한 적도 있다) 풀이나 나무는 도감을 끼고 다니며 익혀도 잘 안 되는 것이다. 같은 자연을 관찰하더라도 망원경(이라는 기계)을 사용하는 버드워칭이나 천문 관측 쪽에 훨씬 더 재미를 느낀다. 그건 내게 일종의 콤플렉스이고 특히 아이들에게 몹시 미안하다. 그러나 생태주의란 단지 ‘풀이나 나무를 잘 알’거나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는’ 게 아니라 지속 불가능한 발전과 개발에 매달려 파국으로 달려가는 오늘 인류 문명에 대한 거시적 조망과 대안을 제시하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체계다. 생태주의자들, 혹은 생태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행색이나 분위기가 그들이 뭔가 비합리적이며 감성적인 사고 체계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주고, 이른바 과학과 합리적 근거를 내세우는 발전주의 혹은 개발주의자들은 그런 편견을 더욱 강조하려 애쓰지만, 실은 진정한 생태주의자야말로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다. 녹색평론은 그런 생태주의의 본령을 보여주는 잡지다. 어젠 ‘쓸 수 없는 원고를 억지로 쓰느라’(‘어려울 때 돕는 게 친구’라는 잘난 소신을 지키느라 며칠 째 녹아나고 있다.) 피폐해진 상태에서 녹색평론의 지난 기사 하나에 위안을 얻었다. 78호에 실린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좌담인데 제목이 시시해보여 읽지 않고 넘어갔던 기사다. 명쾌한 결론을 내리는 좌담은 아니지만 결론을 모색하는 그들(천규석, 신보연, 권혁범, 강수돌, 김종철)의 행간에서 나는 적지 않은 깨우침을 얻는다. 앞으론 빠트리지 말고 챙겨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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