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15/11/30 사회 없는 사회의 복수극
  2. 2015/11/27 배설
  3. 2015/11/25 대의
  4. 2015/11/22 영삼 단상
  5. 2015/11/22 고래 편집자 찾습니다
  6. 2015/11/20 마음의 독재
  7. 2015/11/20 개탄
  8. 2015/11/20 사회 밖
  9. 2015/11/12 아이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이유
  10. 2015/11/10 42년
  11. 2015/11/09 딱지와 훈장의 얼룩들
  12. 2015/11/08 좀비
  13. 2015/11/05 귀와 눈
  14. 2015/11/04 모든
  15. 2015/11/03
  16. 2015/11/01 휴식
2015/11/30 22:07
몇해 전 트위터를 일년쯤 하다가 그만두었다. 누군가 연유를 물어오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람은 누구나 똥을 눈다. 하지만 남 앞에서 똥을 누진 않는다. 그런데 트위터에서 사람들은 남 앞에서 똥을 눠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트위터의 지나친 속도와 가벼움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 물론 이건 트위터라는 미디어가 본질적으로 어떻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게 트위터가 어떻더라는 이야기다. 그러고 일년쯤 후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대개 하루 한번쯤은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훑어보는데 근래 그곳엔 유명한 악귀가 있다. 그곳에서 박근혜씨는 나쁜 대통령을 넘어 악귀다.

2015/11/30 22:07 2015/11/30 22:07
2015/11/27 17:36
(어떤 이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

아가씨 혼자 있는 집에 옆집 조폭남자가 흉기를 들고 들어왔고, 남녀 간에 성관계가 있었다.

아가씨는 강간당했다며 병원에 입원해있고 남자는 아가씨가 유혹한 거라고 우기고 있는데, 아가씨의 여동생이 "언니 방에 반항한 흔적이 없는 점으로 봐서 남자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말했고, 옆집 사람들이 이 말을 동네에 퍼뜨리고 다녀서 아가씨는 행실 문란한 거짓말장이 여자가 되어버렸다.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묻는 가족들에게 여동생은 "옆집과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화가 치민 아빠가 "이 미친 년아. 네 언니가 강간당했다고 하는데 네가 왜 헛소리를 하고, 네 언니가 먼저 유혹을 했다는 놈과 어떻게 화해를 하냐!!"며 여동생의 귀싸대기를 때려버렸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종군위안부가 자발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내용의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쓴 박유하씨가 명예훼손죄로 검찰에 의해 기소된 것은 그렇게 아빠한테 귀싸대기를 맞은 것이다.


**


당연히 박유하의 견해를 비판할 수 있다. 학자가 책을 쓰는 것 자체가 비판과 토론을 위한 것이다. 다만 비판은 사실을 근거로 해야 한다. “자발적 매춘부”라는 말은 박유하의 말이 아니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일본 극우 세력을 비판하기 위해 박유하가 그들의 발언 중에서 인용한 말이다. 또한 비판과 토론은 민주적 공론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얼마든 비판하고 토론할 공간이 열려있는데 왜 법정에 내맡기는가. 그럴 거면 국정교과서는 왜 반대하며 세월호 사건도 법의 처분만 기다리면 되지 왜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이는가. 박유하의 견해에 비판적일수록 오히려 더 검찰기소를 반대하는 게 정당한 태도다. 그런 분별이 없다면, 스스로 비판이 아니라 감정적 배설을 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일본 극우세력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바로 그런식의 감정 배설을 위안부 문제를 뒤트는 데 애용해왔다. 좀더 냉정해지지 않으면, 좀더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 그들을 꿇릴 수 없다. 덧붙여, 근래 사회적 비판엔 끔찍한 수준의 성차별적 발언이 널리 용인되고 있는데 이글 역시 그렇다. 전체 비유도 그렇고.. 아버지는 딸을 미친년이라 욕해도 되고 뺨을 때려도 되는가? 말을 말자.
2015/11/27 17:36 2015/11/27 17:36
2015/11/25 13:16
그나마 민주노총이니까 이번처럼 대규모 집회도 치를 수 있다며 민주노총이 10퍼센트 노동을 대변한다고 비판하는 건 대의에 어긋난다고 말하는 노동계 인사들이 있다. 어리석은 조직보위 논리다. 중요한 건 민주노총이 10퍼센트 노동만을 대변하는 게 사실인가 아닌가이지 그 사실을 드러내는가 덮는가가 아니다. 사실이라면, 덮을수록 오히려 여론이 이반되어 민주노총은 보위되는 게 아니라 더 빠르게 힘을 잃게 된다. 보수 세력이 비슷한 논리로 민주노총을 비판하니 비판은 보수 세력을 이롭게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북한이 군부독재를 비판하니 군부독재 비판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거라던 옛 극우를 빼닮은 논리다. 세상에 사실을 덮어야 하는 대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대의는 사실에서만 출발하기 때문이다. 현재 민주노총과 관련한 유일한 대의는 민주노총을 전체 노동자, 특히 이미 일반적 상태가 된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개혁하는 것이다.
2015/11/25 13:16 2015/11/25 13:16
2015/11/22 23:25
김영삼이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라는 말을 굳이 부인할 건 없는 듯하다. 민주화 운동이 결국 무엇이 되고 말았는가 생각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민주화 운동은 정치적 독재와 싸웠지만 독재가 물러난 다음에 대한, 보다 정상화한 자본주의 상황에 대한 대비는 거의 없었다. 자유 자유 하느라 시장 자유에 경계심이 없었고, 세계화 세계화 들떠선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전략이 없었다. 오히려 시장 자유와 신자유주의 바람 속에 민주화운동 이력을 훈장삼아 신흥 기득권 세력이 되고 거듭 정권을 잡아선, 수십년의 피로 간신히 독재에서 빠져나온 사회를 고스란히 자본 독재의 아가리에 넣지 않았는가. 민주화 운동의 영웅들이 그 지경이었으니 이명박근혜야 오죽 했겠는가. 김영삼이 워낙 무지해서 그랬다고 욕을 할 거면, 신명을 다해 이어달린 김대중과 노무현은 알 만한 사람들이 그랬으니 뭐라 욕해야 할까. 죽은 김영삼을 비웃고 욕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과연 우리는 그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지 궁금하다.
2015/11/22 23:25 2015/11/22 23:25
2015/11/22 08:41
2015/11/22 08:41 2015/11/22 08:41
2015/11/20 22:49
조선일보가 '빈민'을 '인민'으로 잘못 알아듣고 문제 삼아서 말이 난 모양이다. 잘못 알아들은 걸 물고늘어지면 저들의 프레임에 걸려들게 된다. 인민이 어때서, 라고 받아쳐야 한다. 인민은 우리의 말인데, 우리의 말을 우리 스스로 찜찜해 하니 저들이 치고들어온다. 찜찜해 할 말은 '국민'이지 인민이 아니다. 아래는 전에 쓴 글.

**

한국에선 좌우를 막론하고 ‘국민’이라는 말을 상용하는데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다. 다들 ‘인민’(영어로 ‘피플’)을 상용한다. 국민이란 ‘국가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서 그 상용만으로 국가주의적인 정서가 내면화한다. 국가 안에서의 이해관계는 상충되는 경우가 많음에도(이를테면 정몽구의 이익과 현대자동차 비정규노동자의 이익은 전혀 상충된다) ‘국익’이니 ‘국가경제’니 따위 말도 안 되는 선동이 통하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이미 우리는 인민이라는 말을 얼마든 사용할 수 있다. 마음에 새겨진 극우독재가 우리를 막아설 뿐이다. ‘괜찮을까?’

그리고 ‘동무’. 지금 우리는 친구라는 말을 상용하지만 옛날엔 대개 동무였다. 동무는 친구보다 훨씬 정겨운 말이고 어깨동무라는 말이 있듯 아이들에겐 동무가 친구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말이다. <고래가그랬어>는 2003년 창간 때 이 문제를 놓고 숙고를 거듭했다. 결국 <고래가그랬어>의 주인은 아이들이니 어려움이 있더라도 정당하게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독자들은 예상보다 쉽게 익숙해졌다. 이따금 새로운 독자부모들이 조심스레 문의해오면 ‘괜찮습니다’하며 같이 웃는 게 전부다.

‘인민’ ‘동무’는 제정신을 가진 모든 사회에서 상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들을 빼앗겼고 되찾기 위해 반세기의 시간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치렀다. 그렇게 되찾은 소중한 우리의 말을 우리는 여전히 남의 말인 양 꺼린다. ‘인민’ ‘동무’까지 갈 것도 없다. 지금 벽이나 책상 위의 달력에 5월 1일이 뭐라고 적혀 있는지 보라. 떡 하니 ‘근로자의 날’이라 적혀 있다. 근로자는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노동자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강요된 말이다.

마음의 독재를 몰아내자. 우리의 말을 우리의 말로 만들자. ‘나라의 주인은 부자와 권력자가 아니라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인민입니다’ ‘아이들이 공부에 짓눌리지 않고 동무들과 마음껏 뛰노는 세상을 만듭시다’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어색한가? 우리의 말을 우리가 사용하는 게? 그러니 상용하고 또 상용하자. (2011)
2015/11/20 22:49 2015/11/20 22:49
2015/11/20 11:59
'대통령이 저럴 수가 있는가' '저걸 대통령이라고' 따위 개탄엔 여전히 박근혜를 대통령이라 인정하는,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최선의 충성심이 들어있다. 그토록 박근혜가 싫다면 개탄 말고 부정하라. '난 단 한번도 박근혜를 대통령이라 인정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15/11/20 11:59 2015/11/20 11:59
2015/11/20 00:09
아무리 분노해도 상황이 여의치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분노에 공감하는 대중이 적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사회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 중요한 때도 있었다.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를 갈망하던 시절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늘 대중이 사회적 분노에 공감하지 않는 이유는 사회의 진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사회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 밖에 있다.
2015/11/20 00:09 2015/11/20 00:09
2015/11/12 19:00
"과거의 역사에 올바르긴 쉽다. 그 역사엔 내가 살아가지 않고 삶의 이해관계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올바른 게 ‘상식’이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 중인 역사에 올바르긴 어렵다. 내가 그 안에 끼어 살아가니 눈 밝혀 보기도 어렵고 갖은 이해관계와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지 잊어선 안 된다."

작년에 쓴 글. 며칠 전 쓴 '딱지와 훈장의 얼룩들'의 보론 혹은 전제로 읽어주시길.


2015/11/12 19:00 2015/11/12 19:00
2015/11/10 12:59
국정화 역사교과서가 확정될 무렵 경향신문 1면은 '42년 전 유신 시절로 역주행'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덮였다. 아마 한겨레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42년 전과는 분명히 다른 게 있다. '민주적' 상황이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현실이 42년 전보다 나을 게 없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패거리는 바로 그 힘으로 일을 벌인다. 그런 사람들에게 역사 왜곡을 말하며 비분강개하는 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그들을 우매한 사람들이라 치부하는 것 역시 단지 자신을 위로하는 일이다. 눈곱만큼이라도 변화를 바란다면 그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들로 하여금 역사 왜곡이니 민주주의니 정의니 진보니 하는 말에 극도의 회의와 반감을 갖게 만든 자들이 누구인지부터 찬찬히 살펴볼 일이다.
2015/11/10 12:59 2015/11/10 12:59
2015/11/09 21:48
“역사교육은 국가의 부정을 목표로 하는 좌파들의 영향력을 일소해야 한다. 역사는 ‘올바르게 해석된’ 공정성에 기초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누군가가 한 말일까? 나치 정권의 말이라 한다. 국정화 역사교과서를 반대하는 사람들로선 ‘역시 박근혜 정부는 나치와 다름없구나’ 탄식이 나올 만하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히 다른 게 있다. 과연 오늘 한국에 ‘국가의 부정을 목표로 하는 좌파들’이 역사 교육의 향방에 영향을 미칠 만한 수준으로 존재하는가?

박근혜 정권이 좌파라 지칭하는 대상은 주로 새정치민주연합을 중심으로 한 야권이다. 그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십년 전 국가의 부정을 목표로 하는 좌파였던 건 사실이다. 그 일부는 북한 체제에 호감을 가지거나 신봉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신봉자로 전향한 건 오래전 일이다. 그들은 국가를 부정하는 좌파가 아니라 국가 안에서 권력과 헤게모니에 집중하는 우파다. 그들은 여권과 적대적이지만 그 적대성은 이념적 적대성이 아니라 정권과 헤게모니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적대성이다.

국가의 부정을 목표로 하는 좌파들이 없다는 말이냐? 물론 있다.(이른바 ‘자유 민주주의 사회’라면 있어야 당연한 거 아닌가?) 종북 세력? 있다 뿐인가. 북한과 연루된 간첩도 있다. 그러나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기엔 턱도 없는 영향력을 가질 뿐이며, 국가를 부정하는 혹은 종북이라는 본연의 활동은 고사하고 제 존재를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형편이다.

어지간히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왜 만날 야권이 국가의 부정을 목표로 하는 좌파들인 양 말할까? 물론 그들 패거리엔 수십년 전 눈과 뇌가 콘크리트처럼 굳어 우파적 상식조차 빨갛게 보는 가련한 사람들(최근 사례로는 방송문화재단 이사장 고영주씨처럼)도 있긴 하다. 그러나 여권 주류가 그런 건 아니다. 설사 정서적으로는 그렇더라도 그걸 그리 즉자적으로 정치적 행동에 옮길 만큼 어리숙하진 않다. 두 번이나 집권 중이고 한쪽에선 사람 취급을 못 받으면서도 여전히 상당 수준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능력자들 아닌가. 그들은 철저한 계산과 전략 아래 이 놀음을 벌이는 것이다.

이상한 건 오히려 야권이다. 그런 거짓 딱지놀음을 당하면서도 딱히 반발하거나 항변하지 않는다. 수십년 전 박근혜씨의 아버지와 그 후계자들 앞에선 극구 좌파가 아니라 항변하던 사람들이 왜 지금은 짐짓 그 놀음을 즐기는 얼굴들일까. 수십년 전 좌파 딱지는 그들을 곤경에 몰아넣고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딱지는 그들을 좀 더 야권스럽게, 진보스럽게 치장해주는 훈장이다. 그런 딱지놀음을 통해 두 세력은 ‘싸우는 여야’의 모양도 만들고 ‘대립하는 좌우’의 모양도 만들면서 ‘적대적 공생관계’를 구가한다.

지난 100여년 한국 역사에서 주요한 지배 체제는 대략 셋이다. 일본제국주의 체제, 극우독재 체제, 그리고 신자유주의 체제. 앞의 두 체제에서 두 세력은 적대적인 편이다. 특히 두번째에서 그렇다. 그러나 세번째, 오늘 우리 삶을 경제는 물론 사회 문화, 인생관과 교육관과 영혼의 말단까지 규정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두 세력은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오히려 야권이 두 번의 집권 시절 체제의 기틀을 잡고 여권이 이어받았다는 게 객관적 사실관계다.

결국 교과서 논란은 현재 지배체제의 두 분파가 노동악법 등 대다수 사회 성원의 삶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을 무리 없이 돌파하려는 전략에 이용되고 있는 셈이다. ‘야권이 국정화 교과서 논란에 말려들어 민생 현안을 도외시한다’는 비판은 거꾸로 된 말이다. 야권은 민생 현안에 집중하면 할수록 ‘야당 같지 않은 야당’이니 ‘2중대’니 하는 비난에 처할 수밖에 없다. 야권의 소망은 무엇이든 야당스럽게 보일 수 있는, 여당과 치열하게 싸울 수 있는 소재를 찾는 것이다. 국정화 역사 교과서는 그들에게 여권이 제공한 고마운 선물이다.

물론 국정화 역사교과서를 반대한 모든 사람이 그런 더러운 정치놀음에 가담한 건 아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반대의 함성에 그친다면 필시 동원되고 놀아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역사 교육에서 좀 더 주인이 되어야 한다. 나쁜 교과서에 아이들이 풀빵처럼 찍혀나오는 것처럼 생각하는 건 천박한 교육관이다. 국정화를 반대한다고 검인정이 목표가 되어서도 안된다. 더 대안적인, 더 다양한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는 노동자의 관점에서, 평화주의자는 평화의 관점에서,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역사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노동악법을 비롯한 문제들은 한번 밀리면 좀처럼 돌이켜지지 않는다. 저들도 그걸 잘 알기에 저러는 것이다. 순정한 분노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저들이 저리 교활하기에 좀 더 현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5/11/09 21:48 2015/11/09 21:48
2015/11/08 21:23
'남이 보기에 내가 어떤가'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만드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혼 없는 좀비가 되지 않는 비결은 '내가 보기에 나는 어떤가'를 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두가지가 필요하다. 혼자일 수 있는 시간과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힘.
2015/11/08 21:23 2015/11/08 21:23
2015/11/05 10:46
귀는 실은 머리통 옆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 있는 기관이다. 마음의 귀가 닫혀 있으면 모든 소리를 듣고도 아무 것도 듣지 못한다. 눈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눈이 닫혀 있으면 모든 걸 보면서도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2015/11/05 10:46 2015/11/05 10:46
2015/11/04 09:02
가끔 아이가 고래를 재미없어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부모를 만난다. 고래는 '재미있고 좋은 잡지'인데 혹시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나는 웃는 얼굴로 구독 중단을 권하며 '개성은 기뻐할 일'이라 말한다. 만일 모든 아이가 고래를 재미없어 한다면 그것처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아이가 고래를 재미있어 한다면 그것처럼 무서운 일도 없을 것이다.
2015/11/04 09:02 2015/11/04 09:02
2015/11/03 16:48
얼마 전 세계문자심포지아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한국적 민주주의'니 '현실적 진보'니 식으로 말의 본디 의미를 흐트러트리는 일에 매우 비판적이다. 말이 흐트러지는 건 실은 말에 담긴 세계가 흐트러지는, 정치적이고 계급투쟁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건 말의 의미, 혹은 말에 의미를 담는다는 것 자체가 편견이라는 사실이다. 그걸 잊는 순간 말은 죽은 교조가 된다. 고정된 진리의 말, 정의의 말 같은 건 없다. 의미를 담은 모든 말은 편견이며 우리는 이순간 어떤 편견이 좀더 공공의 이해에 부합하는가를 유동적으로 고민할 뿐이다. 말은 잡히긴커녕 손가락으로 가르키기도 어려운, 쉬지 않고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과 같다.
2015/11/03 16:48 2015/11/03 16:48
2015/11/01 20:35
근래 이런저런 일들로 심적 피로가 상한선에 달했다 싶어 주말은 용건 없이 지내기로 했다. 어젠 경향신문에 전화해서 월요일 마감인 칼럼 휴재를 부탁하고 저녁엔 친구와 소주를 먹고 후배와 가볍게 한잔 더 했다. 오늘도 예정했던 일정을 취소하고 미루어둔 새 사무실 내 공간을 정리했다. 느릿느릿 책상 자리를 잡고 오디오를 설치하고 뒤엉킨 전선을 정리하고 몇가지 집기들을 놓고 등등. 오디오 소리가 궁금했는데 공간이 넓으니 양감이 전혀 다르다. 리게티, 말러, 트래비스, 찰리 헤이든, 테르예 립달에 이어 지금은 필립 글래스 교향곡 8번. 충분하다.
2015/11/01 20:35 2015/11/01 2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