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4/03/19 그 즈음
  2. 2014/03/19 철수 농담
  3. 2014/03/18 축소된 세상과 인간의 첫 질문
  4. 2014/03/13 그에 대한 말
  5. 2014/03/10 활동가 박은지
  6. 2014/03/05 안철수
  7. 2014/03/05 모순
  8. 2014/03/03 민족, 계급, 친일파
2014/03/19 13:48
한 인권운동가의 페북에서 수원시장 염태영 씨가 종종 언급되기에 옛 글을 꺼내 읽었다. 염태영은 이 글에 나오는 진보 교회의 청년부 회장이었다. 당시 수원 지역의 학생운동은 오래 전부터 있던 서울대 농대에 몇해 전 서울에서 옮겨온 한신대가 보태어진 형국이었는데, 염태영 은 나보다 두어 살 많은 서울대 농대 학생이었다. 그는 학생운동을 했고 시민운동(환경운동)을 했으며 노무현 정권에서 청와대에서 일했고 수원시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오늘 한국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매우 전형적인 행로를 걸어왔다. 두달 만에 교회에 나타난 나에게 ‘네 무책임함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질책하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의 질책은 정당했지만 우정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날 교회를 나오는 나를 쫓아와 소주를 사준 C형이 생각난다. C형은 식품회사에서 노조를 만들다 해고된 후 복사가게를 하며 지역 노동운동에 열심이었다. 염태영의 '모범적 처신'에 늘 씁쓸해 하던 C형은 이젠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른다. 한 사람은 운동으로 제도에 진출했고 한 사람은 운동으로 제도에 스러져갔다. 돌이켜보면 두 사람의 다른 현재는 그 즈음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내가 사적으로 알지 못한 수많은 운동권들의 다른 현재도 그 즈음에 다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오늘 역시 많은 것들이 정해지고 있다.
2014/03/19 13:48 2014/03/19 13:48
2014/03/19 01:06
여전히 안철수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정말 안철수에게 더는 실망하지 않길 기대하는 걸까. 혹시 그들은 앞으로도 안철수에게 거듭 실망하길, 안철수에 대한 실망감의 토로를 통해 제 알량한 사회의식을 거듭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하는 건 아닐까.
2014/03/19 01:06 2014/03/19 01:06
2014/03/18 09:58

개인적으로 지난 10여년 이상을 ‘고장 난 라디오처럼 동어반복을 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한 이야기에 집중해왔던 것 같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주도한 개혁세력이 진보를 참칭하고 대중의 눈과 귀를 막음으로써 좌파가 축소되고 사회가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그런 이야기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현실의 전모를 말하진 않는다. 그런 기만적인 상황만 아니었다면 좌파는 대중과 호흡하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행로를 걸을 수 있었을까? 차이는 있겠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적다.

좌파의 축소는 단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럽처럼 좌파가 융성했다가 축소되었는가 한국처럼 미처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는가의 차이가 있지만, 남미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좌파의 축소는 전지구적인 현상이다. 대중은 좌파의 이상과 가치, 즉 계급의식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극복과 사회주의적 전망, 인간해방의 신념 따위에 전처럼 호감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이전 시기의 좌파에 대한 반감이나 적의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이전 것이 역설적인 의미이라 해도 존중이라면 이젠 무시에 가깝다. 좌파는 어느새 제 이상이나 가치를 정색을 하고 말하려면 ‘낡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걸 감수해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 이것은 좌파만의 상황은 아니다. 우파는 제 이상과 가치들을 말하기 좋아졌는가? 국가, 충성, 명예 같은 것을 말한다는 건 이제 ‘재수없는 영감’으로 낙인찍히겠다는 뜻이다. ‘자유 시장이 낙원을 만든다’는 오랫동안 써먹던 설레발도 더는 통하지 않는다. 정치 영역을 떠나 문학이나 예술도 마찬가지다. 작품에 어떤 이상이나 가치를 담는 것은 ‘철지난 작가’로 여겨지기 십상이며, 작가는 좌든 우든 제 세계관을 작품이 아니라 작가로서 행동 차원으로만 표현한다. 대학이 진리 탐구의 전당이라는 말은 대학이 더는 진리 탐구의 전당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판하는 기사에서나 등장한다. 부모들은 더 이상 제 아이에게 ‘인생이란’ ‘사람이란’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다. 그런 이야기들이 아이를 ‘현실적 위험’에 빠트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속성, 인간의 삶을 완전히 포획하여 인간 정신과 영혼의 말단까지 재구성하는 악마적 속성은 모든 인간의 삶을 축소해 왔다.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심지어 신자유주의의 수혜자인가 피해자인가마저 무관하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세상을 운영하는 1%는 예외일까? ‘플루토크라트’라 불리는 현대의 왕족인 그들은 이전 시기 어떤 지배계급보다 안락해 보인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들에겐 지배계급의 가장 중요한 특권인 ‘유한함’이 없다. 그들은 일을 노예나 노동자에게 맡기고 예술 감상이나 사랑 놀음을 구가하며 살아가는 게 아니다. 그들은 그들 덕에 가난해진 그 어떤 사람보다 더 바쁘다. 완벽한 양육조건과 교육환경에서 키워지는 그들의 아이들은 부모의 얼굴조차 보기 어려운 ‘실제적 고아’다.

좌파의 축소는 좌파만의 축소가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전체 인간의 전적인 축소 현상의 일부다. 전체가 축소된다는 건 변화의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기존의 권력과 기득권은 유지되어야 할 근거 없이도 유지되며(2008년 공황 이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건재해야 할 근거를 잃은 채 건재하다) 변화를 추구하는 좌파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좌파는 어떻게 다시 힘을 얻고 대중과 호흡할 수 있을까. 많은 진지한 좌파들이 그에 대해 고민하고 이런저런 노력과 시도를 한다. 그러나 적어도 대중의 호감을 얻으려는 노력들, 노골적으로 말해서 좌파가 더 이상 낡은 사람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이런저런 궁리와 문화적 포장들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다. 그런 노력들이 대중의 일시적 호감(혹은 측은지심)을 만들어낼 순 있겠지만 전체 인간의 전적인 축소라는 문제의 본질을 건드릴 순 없다. 사람이란 어떤 문제로 고민하면 할수록 오히려 미궁에 빠져드는 속성이 있다. 그 문제의 본질을 잊게 되기 때문이다. 자나 깨나 교육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는 교육문제의 미궁에 빠지게 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첫 질문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자나 깨나 돈버는 일만 고민하는 사람은 돈의 미궁에 빠지게 된다.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첫 질문에서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좌파의 처지 역시 마찬가지다. 좌파는 유독 자신들만 끝도 없이 축소되어 가는 듯한 세월에 떠밀리고 쏟아지는 투쟁 현안들에 치여 사느라 ‘좌파의 미궁’에 빠져버렸다. 오늘 좌파의 할 일은 쫓기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좌파는 무엇인가’라는 첫 질문을 하는 것이다. 좌파의 첫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간의 첫 질문에 닿을 수밖에 없다. 좌파의 첫 질문은 실은 인간의 첫 질문의 실천일 뿐이었다. 좌파와 좌파의 공간은 더 이상 누구도 하지 않는 인간의 첫 질문이 넘쳐나는 사람이자 공간이어야 한다. 모든 인간이 축소된 세상의 실마리는 누구도 하지 않는 인간의 첫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4/03/18 09:58 2014/03/18 09:58
2014/03/13 01:41

첫인상에 반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지만, 사람이란 수십년을 함께 해도 전모를 알기 어려운 다면적이고 복잡한 존재다. 현명한 사람은 '그의 행동이 어떻다' 말할 뿐 ‘그는 어떤 사람이다’ 말하지 않는다.

2014/03/13 01:41 2014/03/13 01:41
2014/03/10 11:43
일 때문에 몇 번 만났을 뿐이지만 참 야무진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제 삶을 마치기로 한 사연을 난 제대로 알지 못한다. 흘러다니는 이야기들을 함부로 꿰어볼 생각도 없다. 그든 나든 사람이란, 삶이란 얼마나 복잡다단한 것인가.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가 활동가(진보정당 당직자를 포함한)를 더 이상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생애의 마지막 시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예전엔 보수적인 사람들도 활동가를 존중했다. 물론 반대하고 적대했지만 그 반대와 적대엔 활동가의 존재 의미에 대한 역설적 존중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보수는 물론 진보라는 사람들도 활동가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저 무시한다. 쳇바퀴 속의 다람쥐처럼 보수 양당의 틀 안에서만 사고하는 그들에게, 그 틀을 넘어서려는 활동가들은 존재할 필요가 없는, 아니 존재해선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존중하는 사람은 일년 내 분투하는 활동가가 아니라 활동가의 현장에 이따금 손길을 내미는 ‘개념 유명인’ ‘착한 기득권 인사’이다. 오늘 한국의 활동가들은 그런 어리석고 경박한 사람들에게서 어떻게든 희망을 만들어내야 하는 곤란한 처지에 있다. 활동가는 몹시 고단하다. 그리고 활동가의 고단함은 한치의 어김없이 한국 사회의 고단함으로 돌아오고 있다. 활동가를 존중할 줄 모르는 사회엔 희망이 없다. 활동가 박은지. 애 많이 쓰셨다. 아픈 사연일랑 잊고 부디 쉬시길.
2014/03/10 11:43 2014/03/10 11:43
2014/03/05 18:04

오랫동안 질리도록 '나쁜 정치'만 경험한 사람들이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런 갈망이 단지 '새로운 정치'를 '좋은 정치'로 착각하게 만드는 심리적 변이 현상이다. '안철수 현상'은 그런 현상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정치'는 당연히 '새로운 좋은 정치'일 수도 '새로운 나쁜 정치'일 수도 있다. 이번 창당 사태는 안철수가 어떤 쪽인지를 거듭 보여준다.

2014/03/05 18:04 2014/03/05 18:04
2014/03/05 18:03

'일은 잘하지만 좋은 아빠는 아니지' '좋은 시민운동가였지만 정치인으로선 꽝이었지' 식의 말을 모순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유독 '좋은 변호인이었지만 좋은 대통령은 아니었지'라는 말만은 모순이라 여기는 건 적이 모순된 일로 보인다.


2014/03/05 18:03 2014/03/05 18:03
2014/03/03 18:21
흔히 좋은 민족주의와 나쁜 민족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민족주의란 인간의 모든 선의를 인류가 아니라 민족 단위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본디 위험한 개념이다. 모든 파시즘이 민족주의를 기초로 한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만 한국처럼 식민지 경험을 가진 나라에서 민족주의, 즉 방어적인 의미의 민족주의는 한정된 진보성을 가질 수 있으다. 그러나 그 한정성을 엄격히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일제 식민지 경험은 한국 민족 전체와 일본 민족 전체 사이에서 일이 아니었다. 대다수 일본 민중들 역시 전쟁에 동원되고 착취당하는 피해자였으며,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본제국주의 세력과 이해를 같이 했다. 일제 식민지 경험은 일본 지배계급(제국주의자들)과 한국 민중 사이에서 일이었다.

계급이라는 ‘체’로 걸러지지 않은 민족주의, ‘태극기 휘날리는’ 뭉뚱그려진 민족주의는 백이면 백 지배계급의 도구가 된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어 경무대(청와대의 전신)의 일제 전기 콘센트를 손수 망치를 들고 다 부쉈다. 그러나 그는 더 큰 망치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부쉈다. 박정희 역시 내내 반일을 내세우고 일본문화를 일절 허용하지 않는 정책을 펼쳤지만, 일본 극우세력의 정치적 지도를 받았고 식민 지배의 역사를 들추지 않는 조건으로 막대한 정치자금을 받았다. 독도, 올림픽, 월드컵 따위는 지배의 도구로서 민족주의의 매우 좋은 재료가 되어 왔다. 민족과 국가의 깃발을 휘날리며 민족 안의 모순, 국가 안의 억압과 착취는 잊게 만드는 술책이 근래까지도 통했다는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인들의 의식 진전을 생각한다면 이채로운 일이다. 그만큼 민족주의의 폐해가 큰 사회라는 뜻이다.

‘친일파’라는 말은 지배의 도구로서 민족주의에 최적화한 말이다. 친일, 즉 일본 사람들과 친하고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다. 문제가 되는 건 ‘일본과 친했느냐’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한국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역사에 부역했는가’이다. 식민지나 피점령의 역사를 비교적 제대로 청산한 나라 가운데 ‘친일파’ 같은 부주의하고 모호한 말을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프랑스인들이 나치부역자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은 ‘콜라보’다. 콜라보는 ‘콜라보라퇴르’(collaborateur, 협력자)에서 나온 말이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협력자를 표현할 땐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친일파’에 해당하는 ‘게르마노필리’(germanophile, 친독파)는 단지 독일이나 독일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 가치중립적인 말이다. ‘친일파’가 아니라 ‘일제 부역자’다.
2014/03/03 18:21 2014/03/03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