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3/05/30 털어놓은 말
  2. 2013/05/28 박제인가 희망인가
  3. 2013/05/28 월천서당
  4. 2013/05/27 강용주
  5. 2013/05/24
  6. 2013/05/23 다만 솔직해지자
  7. 2013/05/23 고 노무현
  8. 2013/05/21 익살의 사유
  9. 2013/05/21 읽기 겁내기
  10. 2013/05/20 또한
  11. 2013/05/19 사과
  12. 2013/05/18 문패
  13. 2013/05/17 추억의 싸움
  14. 2013/05/14 사람과 소
  15. 2013/05/14 올인
  16. 2013/05/13 표식
  17. 2013/05/07 지식인의 죽음과 부유하는 언론
  18. 2013/05/02 두 권
  19. 2013/05/02 옛말
2013/05/30 10:23
요즘 신문에서 읽은 원로의 말 두가지.
'털어놓은 말’엔 식견이 보이기도 하고 인격이 보이기도 한다.  

“현재 시점에서 사회경제적 내용으로 보면
사실상 새누리당이 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이다.” 최장집

“가만히 나둬도 몇 십만 부는 나갈 책인데
왜 조기에 실적을 내려고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간다.
10만부 판매에 그치고 말았다.” 황석영
2013/05/30 10:23 2013/05/30 10:23
2013/05/28 07:37
‘일베’라는 곳에서 5·18 광주민중항쟁을 심각하게 왜곡·폄훼하고 심지어 희생자들 사진을 음식에까지 비유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일베의 행태에 분노하는 건 시민의 상식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연한 분노에 머물러선 안된다. 일베에 분노하며 일베만큼만 생각해선 안된다. 역사는 악의에 의해서만 왜곡되는 게 아니라 게으른 선의에 의해서 더 많이 왜곡된다.

역사 속에서 저항적 사건은 대개 처음엔 체제에 의해 금지되거나 불온시되면서 일부 저항세력에게서만 존중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존중은 일반화하고 공식화한다. 물론 그 사회가 느리게라도 진보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일부의 존중이 일반적이고 공식적 존중으로 변화함으로써 그 사건은 명예를 회복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건에 담긴 정신은 위기를 맞기 시작한다. 저항적 사건의 정신은 체제 내로 수용되면서, 기념일과 기념관과 기념묘역이 생기면서 박제화하는 속성이 있다. 역사에 대해 냉철한 편인 프랑스인들이 파리 코뮨전사의 벽을 그리 소박한 상태로 두는 것도 그런 맥락에 닿아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행사에서 부르는가 못 부르는가, 5·18 민중항쟁을 인정하는가 모독하는가는 물론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정신이 살아있는가와 5·18 민중항쟁의 정신이 오늘 현실에 살아있는가다. 박제된 역사는 더 이상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기억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을 밝히고 미래를 보여줌으로써 역사일 수 있다.

5·18 민중항쟁의 저항정신은 대개 둘로 볼 수 있다. 독재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려 한 저항,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넘어 계급투쟁과 이상주의적 공동체 건설의 면모를 보인 저항. 그것은 흔히 ‘수습파’의 정신과 ‘항쟁파’의 정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진보적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회복 운동이던 한국의 사회운동이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변혁운동으로 발전한 것 역시 바로 광주에서의 미국 역할에 대한 각성과 항쟁파의 역사 덕이었다.

독재가 물러나고 옛 저항세력이 체제 내로 진입해 옛 독재세력과 경쟁하거나 심지어 집권하는 수준에 이르자 5·18의 정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체제 안의 새로운 기득권 세력이 된 옛 저항세력은 5·18의 정신에서도 자신들의 현실에 부합하는 부분만 취사선택했다. 항쟁파의 정신은 슬그머니 잊혀지고 수습파의 정신만 강조되기 시작했다. 오늘의 광주, 지금 여기의 항쟁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던 5·18은 어느새 잘 차려입은 정치인들의 헌화 행렬에 더 어울리는 역사가 되어갔다.

오늘날 일베 사태와 관련한 논란이 역사를 모독하는 사람들과 역사를 박제로 만든 사람들의 논란의 경향을 보이는 건 그 자연스러운 귀결인 셈이다. 더욱 애석한 것은 일베의 몰상식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진보세력의 집권놀음을 위한 정치 선동에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베 사태는 보수정권 6년 동안 청년들이 극우적 경향에 물들었음을 보여준다”는 식의 주장이 바로 그런 경우다. 보수정권 6년에 청년들이 영향을 받았다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청년들이 ‘이명박의 치명적인 매력’에 대거 홀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이명박과 그 패거리의 풍모는 보수로 갈 젊은이도 막아세울 만큼 낡고 악취 나는 것이었다. 박근혜 정권도 아직은 딱히 나은 게 없다.

극우가 자본주의의 자식이라는 것, 한 사회가 심화하는 착취 구조와 반복되는 불황·공황이라는 자본주의적 모순에 갇혀 아무런 출구를 찾지 못할 때 극우의 우물을 찾는 청년들이 생겨난다는 건 상식적인 이야기다. 물론 한국의 기존, 장년층 극우는 전쟁과 분단이라는 특별한 역사에 기인한 바 크지만 일베 사태에서 보이는 자생적, 청년 극우는 그 전형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청년들의 처지를 보라.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모조리 입시에 바치고 한 해에 1000만원을 넘는 등록금에 시달리며 간신히 대학을 졸업하면 비정규 노동과 아르바이트가 기다린다. 이런 상황에서 서유럽, 북유럽에도 있는 극우 청년들이 여태 없었다는 건 오히려 희한하고 감사한 일일 수도 있다.

청년들이 극우의 우물을 찾는 건 보수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진보가 희망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희망은커녕 이 상황을 만든 주역이기 때문이다. 그걸 ‘신자유주의’라 부르든, ‘재벌 왕국’ 혹은 ‘부자의 천국’이라 부르든 이 상황이 진보정권 10년과 보수정권 6년의 변함없는 행진 덕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 진보가 지난 6년 동안 한 거라곤 모든 문제를 보수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진보라 여기는 기성세대가 청년들 앞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보수 정권 6년의 영향” 따위 속이 빤한 정치 선동이 아니라 ‘깊은 성찰’이다. 그게 청년들이 제가 살아온 사회를 사랑하게 할 수 있게 만드는 첫걸음이자 박제된 5·18의 역사에 숨길을 불어넣는 일이다. 일베는 단지 시작일 뿐이다. [경향신문-혁명은 안단테로]
2013/05/28 07:37 2013/05/28 07:37
2013/05/28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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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8 06:24 2013/05/28 06:24
2013/05/27 10:13
며칠 전 한 자리에서 어떤 이가 인사를 건네왔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의 강용주 씨였다. 유학생도 간첩도 아니었지만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14년을 옥살이한 사람. 98년에 쓴 조개구이라는 글에서 그를 언급했었다. 그로부터 15년 만에 만난 것이다. 그걸 읽었을가 궁금했는데 환하게 웃으며 감옥에서 그걸 읽었다고 했다. 그는 출소 후 뒤늦게 공부를 마치고 의사가 되었고 광주 트라우마 센터를 비롯하여 여러 사회활동도 하고 있다. 반가운 만남이었다. 앞으론 종종 보기로 했다.

2013/05/27 10:13 2013/05/27 10:13
2013/05/24 15:43
흔히 사회를 시소에 비유하곤 한다. '한국 사회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시소와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시소가 기울었는가와 함께 살펴볼 일은 시소의 축은 중앙인가, 하는 것이다. 축이 어느 한편으로 옮겨져 있다면 기울었는가 여부가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자면 한국 사회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시소일 뿐 아니라 축이 오른쪽으로 옮겨진 시소와 같은, 사회다. 재미있는 건 그 주체의 변화다.  옛날엔 극우세력이 자유주의 세력을 빨갱이로 몰기 위해 축을 옮겼다면 이젠 자유주의 세력이 스스로를 빨갱이라 강변하기 위해 축을 옮긴다. 맑스의 말마따니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2013/05/24 15:43 2013/05/24 15:43
2013/05/23 11:30
다른 길을 선택할 이들을 붙들거나 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솔직해지자.
그래서 제대로 갈라지자.
그래야 제대로 모일 수도 있다.

당파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보다는 통합과 연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좀더 유연하고 포용적인 건 당연한 일인데 근래 한국은 정반대다. 그 통합과 연대의 기치가 사회의 미래나 대의보다는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나 전망을 위해 봉사하는 경향 때문이다. 옛 민노당 당권파의 패악질에 질려서 진보신당을 만들었다던 노회찬, 심상정 씨가 통합과 연대의 기치로 당원들을 떠나 다시 그들과 몸을 합쳤다가 예의 패악질이 일반 대중에게까지 불거지자 난생 처음 겪는 일이라는 얼굴로 그들을 개탄, 비난하는 풍경은 한국 진보정치 역사에 길이남을 코미디였다. 진보신당 당원이 아닌 내가 봐도 민망한 일이었으니 오랜 시간 당에 몸바친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그 중 한 사람일 장석준의 사려깊고 현명한 이야기.

2013/05/23 11:30 2013/05/23 11:30
2013/05/23 08:23

좋은 대통령이었는가엔
의견이 다르더라도
좋은 사람이었다는 건
누구든 인정하는 사람.

부디 평안하시길..

2013/05/23 08:23 2013/05/23 08:23
2013/05/21 11:55
어쨌거나 오랜 만에 김수영을 읽었고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산문이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권정생의 산문과 닮았다는 것. 김수영과 권정생의 산문은  종착점을 향해 직진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는데 그 행로 어딘가에 단검 같은 통찰을 슬그머니 흘려놓는다. 익살의 검술, 익살의 사유랄까. 직진 전문에 가까운 나도 수영에 대한 책에서만은 그럴수 있을까.
2013/05/21 11:55 2013/05/21 11:55
2013/05/21 10:08

이틀 전 참 오랜 만에 김수영 산문을 읽었다. 책을 쓰기로 해놓고도 바로 꺼내읽지 않은 건 내 ‘읽기 겁내기’ 탓이다. 책이든 문건이든 늘 텍스트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또 그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읽어대지만 어떤 텍스트에 대해 진지한 숙제가 생기는 순간 그 텍스트를 읽는 게 겁이 난다. 그래서 읽기를 차일피일 미룬다. 그런 심리의 심리학적 정체는 모르지만 하나는 분명한 것 같다. 내 나름엔 그 텍스트에, 그 텍스트에 담긴 정신에 예를 갖추려는 행동이라는 것.

2013/05/21 10:08 2013/05/21 10:08
2013/05/20 13:40
친구에게서
핵심을 찔린다는 것은
이해받고 지지받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우정이다.

2013/05/20 13:40 2013/05/20 13:40
2013/05/19 09:09
요 며칠 이 블로그가 트래픽 초과로 다운되었다.
근래 방문자가 좀 늘긴 했지만
주초엔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여 해결할 생각이다.
애써 방문했다 헛걸음한 분들께 사과드린다.

2013/05/19 09:09 2013/05/19 09:09
2013/05/18 22:19
2013-05-18 15
오랜 만에 조탑리에 갔다.
2013/05/18 22:19 2013/05/18 22:19
2013/05/17 09:09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수 있는가 없는가의 싸움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 노래가 여전히 현실 변혁의 정신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 노래가 더 이상 현실 변혁의 정신을 담지 않고 있다면,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없는가의 싸움이란 단지 추억의 싸움, 혹은 추억에 근거한 현실적 기득권의 싸움일 뿐일 테니 말이다.

2013/05/17 09:09 2013/05/17 09:09
2013/05/1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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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씨 성을 가진 사람과 김씨 성을 가진 소.
2013/05/14 09:45 2013/05/14 09:45
2013/05/14 09:32
“아빠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애.”
김건이 킥킥거리며 말한다. 올 한해 기타 공부에 올인하기로 한 김건은 말 그대로 기타에 올인하고 있다. 제가 정한 과제곡을 떼기 위해 하루 열 시간 이상 기타에 매달리는 경우도 잦다. 당연히 연주력이 빠르게 늘고 있고 그럴수록 더 재미가 붙는 선순환이 보인다. 얼마간 관망하던 김단도 근래 들어선 ‘인정하는’ 태도다. 그런저런 것들, 제 할 일을 하며 알아서 생활하는 모습이 대견해서 좋은 말을 몇 번 했더니 되게 쑥스러워 한다. 하긴 김건은 제 누나에 비해 좋은 말을 덜 듣고 자란 편이다. 앞으론 많이 듣길.
“여튼 올 한해 기타에 올인하기로 한 건 잘 한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기타로 먹고살 수 있는지 없는지는 올 해 지나서 생각하면 되고.”
“네, 아빠.”
2013/05/14 09:32 2013/05/14 09:32
2013/05/13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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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의 2백킬로 라이딩이 만들어낸 사이클리스트의 표식'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요즘처럼 선크림과 팔토시가 일상화한 시절엔 무식한 인간이라 욕먹기 딱 좋을 테니
그저 '볕이 그리 좋을지 모르고 2백킬로나 타서 생긴 표식' 쯤으로 해두기로.ㅎ
2013/05/13 21:24 2013/05/13 21:24
2013/05/07 11:06
노무현 정권은 집권 초기를 빼고는 줄곧 지지율이 낮은 편이었다. 서민대중의 편에 서는 정치를 할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중들은 신자유주의니 따위 개념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갈수록 고단하고 불안해져만 가는 삶을 통해 기대는 환멸로 바뀌어갔다.  신자유주의라 불렀건 안 불렀건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환멸이었다. 17대 대선에서 이명박의 5백만 표차 압승은 그 환멸의 폭발이었던 셈이다.

집권 후반기에 이르자 지지율은 더욱 가파르게 낮아졌다. 그리고 퇴임 후 노 대통령이 형과 부인이 한 일을 시인하면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노 대통령이 눈엣가시였던 보수 언론은 얼싸 좋아라였지만 진보 언론도 다르진 않았다. 이를테면 다음날 한겨레는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한겨레와 경향은 입을 모아 ‘친노세력이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열흘 후 노 대통령의 죽음으로 그 모든 상황은 급반전된다.

‘이명박이 얼마나 괴롭혔으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가’의 측은지심으로 출발한 여론은 ‘얼마나 좋은 대통령이었는가’로 그리고 이내 ‘민주주의와 진보의 순교자’로 변화했다. '친노세력의 재기불능'을 선언했던 진보 언론은 친노세력이 “폐족 되는 멸문지화를 당했고” “덩달아 정을 맞았다”며 제 선언을 번복했다. ‘민주주의의 기수’로 부활한 친노세력은  빠른 속도로 ‘진보정권 교체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노대통령과 친노세력에 대한 평가의 급반전에 사실적 인과관계는 없었다. 상반된 평가 사이에 있었던 일은 오직 하나 ‘노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뿐이었다. 매우 특별하게 여겨질 만한 이 현상은 오늘 한국의 대중들이 대통령이나 정권에 대한 평가에서 매우 감상적이고 인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런 감상적이고 인간적인 태도가 적절한 현실적 분별력을 만나지 못할 때 심각한 사회적 왜곡과 해악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회는 위험 속으로 치달리거나 정직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쳇바퀴 속에 갇히게 된다.

현실적 분별력을 제공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과 언론이다. 주권을 가진 시민으로서 대중이 사회문제에 대해 감상적인 태도에 머물러도 상관없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대중이 사회 문제에 대해 지식인이나 언론과 같은 수준의 현실적 분별력을 유지해야 하는 건 아니다. 간혹 노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과 같은 충격적인 상황에서 대중은 감상적이고 집단적인 흐름을 보이기도 한다. 그걸 견제하는 게 지식인과 언론, 특히 진보 지식인과 언론의 역할이다. 설사 욕을 들어먹고 오해를 사더라도 그 흐름이 사회적 해악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견제할 책임 말이다. 우리가 지식인이라는 말 앞에 ‘비판적’이라는 말을 붙이고 언론이라는 말 앞에 ‘냉철한’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간단치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008년 미국발 공황으로 30여년 동안 인류를 야만으로 몰아가던 신자유주의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러나 자본은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손실은 사회화 이윤은 사유화’하는 방식으로 더 심각한 파국을 만들어가고 있다. 막나가는 자본과 현실적 불안감에 내몰리는 대중 사이에서 좌파는 아직 또렷한 대안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는 언제나 자본이나 노동 어느 한편이 우세하거나 불안하게 타협하는 것이었지만 자본과 노동이 공멸하는 묵시록적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말마따나 “산사태”가 말이다.

그러나 그 몇해 동안 한국의 지식인과 언론은 마치 한국은 그런 전지구적 상황과는 무관하기라도 한 듯 ‘이명박 악마화’와 ‘노무현 미화’라는 공간 안에서만 부유해왔다. 노무현에 열광하다 비난하고 다시 이명박을 비난하며 노무현을 찬미하는 시계추 같은 진동 속에 비판적 지성이나 냉철한 현실인식의 자리는 없었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환멸이 반드시 노무현 정권의 찬미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명박 정권이 나쁘지만 노무현 정권도 서민대중의 편에 서는 좋은 정권은 아니었다’는 진실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비판적이어야 할 지식인이 대중보다 더 감상적인 행태를 보이고, 냉철해야 할 언론이 대중의 집단적 흐름만 뒤쫓아 다닌다면 왜 굳이 지식인과 언론이 존재해야 하는가. ‘지식인의 죽음’ ‘부유하는 언론’이라는 말이 오히려 마땅하지 않은가. 대중의 감상적 태도와 집단적 흐름을 견제하긴커녕 지식인과 언론이라는 서푼짜리 권위로 공인하는 형국이니 말이다. 고답적이고 지사적인 지식인상이나 언론의 사명을 되새길건 없겠지만 지식인과 언론이 존재하는 한 최소한의 역할은 있는 법이다. ‘대중’이라 불리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묵묵히 제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가 작동되고 있듯 말이다.(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3/05/07 11:06 2013/05/07 11:06
2013/05/02 14:34
- 예수로 본 한국 사회

두 권을 쓰기로.

2013/05/02 14:34 2013/05/02 14:34
2013/05/02 14:31
오르막 좋아하는 라이더는 있어도
맞바람 좋아하는 라이더는 없다, 는
자전계 계의 오랜 속담이 있단다.

역시 옛말이 그른 게 없다.

2013/05/02 14:31 2013/05/02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