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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서 최재천 씨가 ‘근로자’라는 말을 쓰기에 지적했더니, 어떤 이가 근로자와 노동자의 차이를 질문했다. 간략한 답변.)
노동자는 봉건제가 무너진 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계급입니다. 노동자는 농노나 노예처럼 귀족에게 예속된 주종 관계가 아닌 자유롭고 동등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지요. 그런데 주인이 먹여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먹고살아야 하므로 공장이나 회사 따위를 가진 자본가에게 제 노동력을 팔아(자본과 동등한 신분으로 계약관계를 맺어) 살아가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로 살아가며 자본가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의 양축을 이룹니다. 근로자는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박정희 정권이 노동자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만들어낸 말입니다. 박정권은 근로자라는 말을 억지로 쓰게 하면서, 노동자라는 말을 빨갱이들이 쓰는 말이자 거칠고 험한 일을 하는 하층민의 뉘앙스로 조작했습니다. 여전히 한국엔 자신을 노동자라 부르기 싫어하는 노동자들이 많은 것도 그래서이지요. 근로자라는 말이 엉터리인건 이명박 정권처럼 자본의 완전한 개노릇하는 정권조차도 노동조합이나 노동부를 근로조합이나 근로부로 바꿔부르진 못하는 데서 충분히 드러납니다. 한국의 지배체제는 근로자니 근로자의날이니 하는 말을 고수함으로써 세상의 구조를 은폐하고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억눌러 왔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당연히 근로자의날을 노동절로 근로자를 노동자로 살려부르는 교육적 문화적 노력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지요. 두 정권 역시 노동자의 편은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규항넷을 보고 ‘아이들’에 보내주신 157개의 따듯한 마음을 ‘남북어린이어깨동무’에 보냈습니다. 이번이 3차 모금이었습니다. 남과 북, 사는 곳은 달라도 아이들이 더는 고통 받지 않고 놀 수 있는 세상이 와야 합니다. 시골집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달력을 죽 늘어놓고 봉투 붙이는 추억을 만들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달력이 이제 다 떨어져 없다는 것도 알립니다. 해문.
북녘 수해 지역 어린이 긴급 지원 기금 마련을 위한
편해문 사진 달력 2011
Phyen Hae Moon Photograph Calendar 2011
아이들
children
더는 아이들이 고통 받지 않고 놀 수 있기를
- I wish children can play without pain -

"여태 어설픈 사진쟁이랍니다.
아이들 놀이와 노래를 찾아 우리나를 여러 해 다녔고,
그 뒤로 지금껏 아시아 아이들의 얼굴과 삶과 놀이를 사진에 담고 있습니다.
스스로 먼저 아이가 되려고 애쓰고,
그 눈에 아이들이 비췄을 때 셔터를 누릅니다.
지난해 고래가그랬어에서 사진집 <소꿉>을 펴냈고
시골에서 아내와 딸 이렇게 세 식구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 달력의 판매 금액 전부를 북녘 아이들의 겨울나기에 보냅니다.
올해 북녘의 수해가 어느 해보다 컸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가장 힘들었을 테지요.
그 아이들을 생각하며 사진을 고르고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달력은 1개 만원입니다.
구매하시고자 하는 분들은 입금(국민은행 613201-04-102590 박보영) 후
이메일( timber800@naver.com)이나 문자로(010-3937-7170)
주소를 알려주시면 보내드립니다."
우리는 왜 교육을 하는가. 교육의 목표는 아이를 정의롭고 진보적인 사람으로 키우는 것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자본주의 전사로 키우는 것도 아니다. 교육의 목표는 아이가 행복하고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다. 그걸 위해 필요한 건 유전자를 조작한 농작물처럼 교육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생략하고 조정하는 게 아니라 교육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온전히 간직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교육만이 어떤 차원에서든(심지어 자본주의적 경쟁력의 차원에서라도) 가장 훌륭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저자는 독일이 선진국이고 독일교육이 우리보다 앞서 있으니 배우자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그러나 어떤 불안과 강박과'내 새끼를 위해'로 표현되는 이런저런 욕망 때문에 까마득히 잊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도란도란 들려준다.
엠앤엠(M&M) 대표인 최철원이 제 회사 직원들 앞에서 저보다 열두 살 많은 노동자 유홍준씨를 한 대에 100만원씩 야구방망이로 때렸다. 유씨는 자기 트럭을 가진 사업자지만 실제론 고용되어 일하는 이른바 ‘특수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다. 최는 유씨의 탱크로리 값과 맷값으로 7000만원을 지급했는데 교활하게도 이미 열흘 전 유씨를 상대로 7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해놓았다. 최의 패악질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다. 그 집안인 에스케이(SK) 불매운동도 벌인다. 그러나 과연 최철원이 한국에서 가장 포악하고 잔인한 자본가일까? 대법원 판결조차 무시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공장에 가두어놓고 교섭조차 거부하는 정몽구보다?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노동자의 산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이건희보다?
오늘 한국의 대자본가들은 마치 왕이라도 된 듯 인륜도 법도 무시한 채 포악하고 잔인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노동자에 대한 야만적인 폭력이 허락되고 그에 항의하는 건 죽음을 무릅쓰는 일이던 군사독재 시절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걸까? 촛불시위에서 충분히 드러났듯 이제 한국인들은 군사독재 수준의 억압은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 시민의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왜 박정희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이런 야만적인 일들이 벌어질까? 그것은 오늘 우리의 시민의식에 어떤 구멍이 있음을 알려준다.
정치적 악행엔 저항하면서도 자본의 악행엔 그리 저항하지 않는, 이명박의 악행에 대해선 들고일어나지만 정몽구나 이건희의 악행은 결국 방치하는 구멍 말이다. 그 구멍은 왜 생겼을까? 시민들은 왜 정치적 시민의식에 걸맞은 자본에 대한 시민의식을 갖지 못했을까? 물론 그 주요한 사회적 배경은 1997년 구제금융 사태 이후, 즉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래 진행된, 자본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변화일 게다.(우리가 ‘얼마나 좋은 대통령이었는가’ 추억하는 노무현 대통령 집권 동안에만 983명의 노동자가 구속되었는데 2006년 한해 구속자 중 91%가 비정규직이었다.) 그 기간에도 정치적 시민의식은 계속 발전했지만 자본에 대한 시민의식, 즉 시민의식의 구멍 또한 더욱 커졌다.
우리는 정몽구와 이건희를 욕해도 잡혀가지 않는 시민의 권리를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정몽구와 이건희를 부러워하는 내면을 갖게 되었다. 현대와 삼성을 욕하는 우리는, 동시에 그곳의 머슴인 조카와 자식을 짐짓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한국의 진보적인 사람들이 흠모하는 급진적 생태주의자 스콧 니어링처럼 대자본가의 머슴이 된 아들과 절연까지는 않더라도, 좀더 잘 먹고 잘살고 싶은 욕심에 저 짓을 한다는 불편함은 가질 만도 한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정몽구와 이건희는 바로 그 구멍을 통해 왕으로 등극했고, 왕족의 일원인 최철원은 천한 것들을 손수 매로 다스린다.
우리는 이 빌어먹을 왕들의 세상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막막하지만 분명한 한가지는 그 구멍부터 막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욕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부러워하는 우리 내면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가장 치열한 전장은 역시 교육이다. 한국 부모들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짜리’가 될 것인가에 몰두한 역사는 그 구멍의 역사와 일치한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고민이 남아 있지만 양보할 수 없는 첫째 고민은 역시 ‘얼마짜리’인가다. 우리는 그 구멍을 막을 수 있을까? 막는다면 정몽구와 이건희와 최철원은 여전히 왕처럼 호의호식할지언정 적어도 우리 앞에서 왕 노릇은 하지 못할 것이다. 막지 못한다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권위와 영화가 한층 더해진 왕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살 것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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