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07/08/31 주접
  2. 2007/08/30 아줌마의 변절 이야기
  3. 2007/08/29 평론가
  4. 2007/08/28 현상 퀴즈
  5. 2007/08/27 경멸
  6. 2007/08/25 타인의 취향
  7. 2007/08/24 우리 안의 천황제
  8. 2007/08/23 고래 티셔츠
  9. 2007/08/22 영혼을 파괴하는 시절의 아동문학
  10. 2007/08/18 안상수의 예수상
  11. 2007/08/15 문장
  12. 2007/08/08 조화
  13. 2007/08/07 덧글
  14. 2007/08/06 망월동
  15. 2007/08/02 잠자리
  16. 2007/08/01 개만도 못한
2007/08/31 13:21
그리고 저 전두환아저씨 있잖아요.
그 분 보면서 반성 많이 해요.
저도 한때 개그만화를 그린 적이 있었는데
도저히 그분의 유머 코드는 못 따라가겠어요.
그런 발상과 개꼴통 주접은 어디서 나오시는지.
대단하세요. 정말.

(강풀이 보낸 안부 편지에서)
2007/08/31 13:21 2007/08/31 13:21
2007/08/30 12:18
한나라당을 막기 위해 열우당(이름이 바뀌었지만 잘 기억이 안 난다) 찍는다는 잘난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할 아줌마의 변절 이야기.
2007/08/30 12:18 2007/08/30 12:18
2007/08/29 16:44
(몇해 전 쓴 것. 이젠 이런 싸늘한 글은 쓰고싶지 않지만, 읽어보니 재미있긴 하다.)

평론가란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에 기생하는 사람’이다. 영화평론가란 대개 영화감독에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음악평론가란 작곡이나 연주자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문학평론가란 작가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출발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평론가란 대개 애초 생산을 꿈꾸었으되 재능의 부족이나 의지의 박약, 혹은 지나치게 운이 없어(본인의 주장이 그렇다는 얘기) 꿈을 접었으나, 아예 그 바닥을 떠나려니 너무나 서럽고 딱히 갈 데도 없어 ‘남의 생산에 평론이나 일삼으며 사는 사람‘이다. 평론가의 재능이란 생산과 관련한 현상들을 얼마나 그럴싸한 글(말)로 꾸며대는가에 있다. 평론가들은 평론이 생산물의 질과 가치에 대해 말한다 주장하지만, 이른바 좋은 평론이란 어디까지나 ’글로서의 그럴싸함‘을 기준으로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가장 유능한 영화평론가는 영화에 대해 가장 무딘 사람일 수 있으며 유능한 음악평론가는 음악에 가장 무딘 사람일 수 있으며 다른 생산에 기생하는 평론가 역시 그 생산물에 그렇다. 그러나 먹고사는 일과 관련한 인간의 본능이란 언제나 대단한 것이라서 한 생산의 언저리에 평론가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못 생산과 긴장을 이루는 (듯한) ‘평론계’가 구축되곤 한다.
2007/08/29 16:44 2007/08/29 16:44
2007/08/28 23:58
놀이와 오락의 차이가 뭘까
2007/08/28 23:58 2007/08/28 23:58
2007/08/27 16:12
세상은 '훌륭하게 사는 사람들'과 '훌륭하지 않게 사는 사람들' 둘로만 나뉘는 게 아니다. 아마도 숫자로는 가장 많은 또 하나의 사람들, '훌륭하게 살 수 없는(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는 바로 그들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했으며 전망했다. 예수가 헤롯 괴뢰정권이나 성전지배세력(훌륭하지 않게 사는 사람들)보다 바리새인들(훌륭하게 사는 사람들)과 오히려 더 많은 갈등을 벌인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경멸은 억압보다 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2007/08/27 16:12 2007/08/27 16:12
2007/08/25 13:43
<디워>를 둘러싼 소동을 보며 몇 해 전 한 선배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아이가 신화를 너무 좋아해서 고민이야." "신화 좋아하는 게 왜..." "아, 가수 신화 말이야." "아, 예." "중학교에 가더니 안 좋은 집 아이들과 어울려서인지 취향이 저속해졌어." "글쎄요, 전 음악은 가리지 않고 듣는 편이지만 대중음악이 고전음악보다 저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대중음악 중에도 바흐나 모차르트에 필적하는 음악이 있죠. 신화가 그런 음악은 아니지만..." "그렇게 잘났으면 당신이 우리 애 데려다 키우지 그래!"

<디워> 문제가 간단치 않은 건 비슷하게 언급되는 다른 사건들(이를테면 황우석 사건)과는 달리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술엔 맞다 틀리다, 혹은 옳다 그르다라는 게 없다. 취향이 있을 뿐이다. 예술이란 나에겐 천상의 아름다움인 게 다른 사람에겐 하품만 나오는 것일 수도, 나에겐 쓰레기인 게 어떤 사람에겐 삶의 위로일 수 있는 것이다. 만명에겐 만개의 취향이 있다. 천박한 취향은 고전음악을 듣는 사람도 대중음악을 듣는 사람도 아닌, 고전음악을 들으며 대중음악을 듣는 사람을 경멸하는 사람에게 있다.

어떤 사람들 말마따나 <디워>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디워>가 특별하게 경멸당할 이유는 아니다. 알다시피 오늘 생산되는 상업 영화의 9할은 언급할 가치가 없는 영화다. 사실 <디워> 사태의 시작은 <디워>를 넘어 <용가리>도 나오기 전이다. 언젠가부터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이 평론가와 평론가 지망생, 그리고 인텔리들끼리 읽는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평론도 있어야겠지만 대부분의 평론이 그렇게 된 건 적이 식민지적 풍경이었다.(본토의 록음악 평론가는 좋아하는 뮤지션이 레드 제플린이라고 말해도 식민지의 평론가들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뮤지션을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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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은 잘난 그들에게 반감을 갖게 되었고 그 반감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는데(전문가들이 호평하는 영화는 부러 피하는) 결국 <디워>에서 폭발한 것이다. 심형래 씨는 영리하게도 대중들의 그런 반감을 장사에 이용한다. 훌륭한 행동은 아니지만 오늘 한국사회가 그런 행동을 집어내어 준엄하게 질책할 만큼 품위 있는 사회는 아니다. '애국주의 마케팅'이라는 것도 한심스럽긴 하지만 한국에선 이미 특별한 게 아니다. 월드컵 때 텔레비전 화면을 채우던 태극기를 잊었는가? 싸잡아 말할 순 없지만 네티즌의 집단주의적 행태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특별할 게 없으니 문제가 없다는 게 아니라, 특별할 게 없는데 매우 특별하게 여겨지는 배경에 인텔리들의 취향에 대한 경멸(이 ‘꼴 같지 않은’ 영화에 대한 경멸, 그리고 그런 걸 영화라고 열광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이 있다는 것이다. <디워>를 옹호하는 사람들 역시 타인의 취향에 폭력적이지 않은가, 라는 반문은 맥락을 잃은 이야기다. 그들은 타인의 취향에 폭력적인 게 아니라 제 취향을 경멸하는 재수 없는 인간들에 반발하는 것이다. 동네 양아치들이 싸우다 파출소에 잡혀가도 ‘선빵'을 가리는법이다.

내 주변만 해도 <디워>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예의 보지도 않고 비웃는 사람부터 이런저런 이론을 들먹이며 조소하는 사람까지. 그 가운데 <디워>라는 영화에 대해 말할 분명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둘, 내 딸과 아들이다. 둘은 <디워>가 “재미있었다”고 한다. 중학 1학년인 딸의 평은 이렇다. "스토리나 구성은 괜찮은데 CG는 좀 엉성해." 전문가들의 평, 심지어 심형래 씨의 의견과도 많이 달라서 좀 당혹스럽긴 하지만 내가 그의 평에 할 수 있는 말은 오로지 하나였다. "아, 그래."

타인의 취향은 전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쓰레기라 해도? 그렇다, 쓰레기라 해도. 덧붙이면, 쓰레기라 해도? 라는 말은 쓰레기로 보여도? 로 바꾸는 게 좋다.(한겨레21, 일러스트 김대중)
2007/08/25 13:43 2007/08/25 13:43
2007/08/24 20:54
일본과 천황제(가제)라는 만화의 추천사. 이런저런 일이 밀린데다 대충 훑어보고 쓸 수 있는 책도 아니어서 어제야 원고를 보냈다. 담당자 박지수 씨는 정중하면서도 일처리가 어찌나 깔끔한지 채근을 당하면서도 내내 흐뭇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신문에서 읽은 사람이다.



이 책은 일본의 천황제가 단지 몇몇 나라에서 유지하고 있는 입헌군주제와 같은 일본 고유의 전통이나 습속이 아니라는 것, 애초부터 지배세력이 인민들을 지배하고 착취하기 위한 장치로 만들어졌으며 배타적 집단주의나 맹목적 상하관계 같은 일본인들 특유의 (것이라 여겨지는) 모습 역시 천황제의 크고 작은 변형들로 돌아간다는 것을 정교하게 파헤친다. 그러나 이 책이 단지 그것뿐이라면, 한국에 사는 우리가 꼭 읽어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유익한 건 이 책이 우리 스스로를, 우리 안의 천황제를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이다.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감은 대단한 데가 있다. 거의 모든 한국인은 여전히 편한 자리에서 일본 사람을 ‘일본놈’이라 일컫는다. 젊은 연예인이 제 스쿠터에 일장기 스티커를 달고 다니는 사진이 인터넷에 뜨면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다. 알다시피, 한국인들의 그런 반감은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경험 때문이다. 그러나 그 참혹한 경험은 한국 민족 전체와 일본 민족 전체 사이에서가 아닌,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한국 민중 사이에서 일이었다. 대다수 일본 민중들 역시 일본제국주의의 피해자였으며 한국의 지배세력은 일본제국주의 세력과 이해를 같이 했다.
그런 진실을 뭉뚱그려 일본 민족 전체에 대한 반감으로 만든 건 해방 후 여전히 한국을 지배한 일제 부역세력이다. 그 후 반세기 동안 그들은 실제로는 일본 극우세력과 철저히 야합하면서도, 대중들에겐 일본인 전체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감을 심어줌으로써 제 정통성 문제를 은폐해왔다. 결국 대개의 한국인들은 젊은이들의 음악이나 옷차림 따위에 나타나는 왜색에 대해선 나라가 망할 것처럼 개탄하면서도 종군 위안부 문제처럼 정작 자존과 위엄을 보여야 할 문제엔 별 무관심한, 희한한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런 희한한 태도는 한국을 일본에 대해 거부감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실제론 일본식으로 돌아가는 사회를 만들었다. 알다시피, 엘리트 영역에서 배타적 집단주의와 맹목적인 상하관계는 조직의 운영 원리에 해당한다. 심지어 기자와 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선후배끼리 군기를 잡고 폭탄주로 배타적 동료애를 키우며, 학문적 양심보다는 자신이 속한 패거리의 위계를 따른다. 그런 모습들을 흔히 군사문화의 유산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듯 그런 모습들은 군사문화의 유산이 아니라 천황제 군사문화의 유산이다.
젊은 세대는 많이 다르지 않은가, 반문할 수 있다. 확실히 한국의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에 비해 개인주의적이며 자유분방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회 활동이라 할 인터넷 공간에서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단순하고 맹목적인 믿음으로 움직이며 배타적이고 집단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미 한국 네티즌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게 왜 꼭 천황제와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천황제의 특징은 천황을 신처럼 떠받들면서도 정작 천황이 누구인가는 상관이 없다는 데 있다. 일본 천황이 누군지도 모르는 한국인이 영락없이 천황제의 신봉자처럼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 안의 천황제는 아주 많다. 이를테면 신도들에게서 헌금을 뜯어내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상징을 사용하는 한국의 보수교회를 보라. 이런 말을 그들은 ‘몹시 불경하다’고 할 것이다. 바로 그거다. ‘불경죄’야말로 천황제를 유지하는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다.
일본헌법 제1장은 천황에 관한 조항이다. 이 책은 그것을 없애지 않으면 일본의 미래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천황제는? 헌법에도 없고, 천황제를 싫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는 우리 안의 천황제는? 이 책은 우리에게 그 열쇠를 쥐어준다.
2007/08/24 20:54 2007/08/24 20:54
2007/08/23 10:33
고래 티셔츠가 나왔다. ㅎㅎ
2007/08/23 10:33 2007/08/23 10:33
2007/08/22 23:35
(17일 안동에서 열린 '어린이와 문학' 여름연수 토론문)

아동문학에 대한 식견이라곤 아이에게 동화책을 골라주는 정도인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아동문학 자체보다는 아동문학을 둘러싼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삶이 현명함을 잃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주요한 것 하나는 우리가 사는 현실이 중립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현실은 대개 어떤 쪽으로든 편향적이며 그걸 제대로 인식하지 않을 때 거꾸로 우리 삶이 편향에 빠지게 된다. 나름대로 열심히 진지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거대한 지배체제의 시스템에 놀아나는 ‘불쌍한 바보들’이 되는 것이다. 군사 파시즘이 폭력과 권위주의로 지배하는 시대엔 웅크리고 있어도 정신은 함락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자본의 시대엔 어느새 우리 영혼까지 파고든 자본의 가치관들이 우리를 스스로 굴종하게 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아이들에 관한 모든 활동이나 생산물들은 그 양식이나 외형과는 상관없이 독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이른바 ‘민주화’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절차로 보는가 분배나 계층 같은 좀더 구조적인 차원으로 보는가에 따라 의견이 좀 다르긴 하지만, 적어도 개인의 자유가 몰라보게 진전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어디를 가든 무슨 말을 하든 함부로 제한받거나 구속받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옛 군사독재 시절보다 오히려 더 퇴보한 사람들이 있다. 누구일까? 바로 아이들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아이들에게만은 자유가 있었다. 마음껏 뛰어놀고 어른들의 강제가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느리고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아 보이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정서와 인간적 면모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감옥에서 지내는 수인들과 다를 바 없다. 평균적으로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이른바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선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아이들은 경쟁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된다.
과거식 어린이 탄압, 즉 폭력이나 권위주의적 방법을 통해 아이들의 자유와 인권을 구속하는 일은 이제 적어졌고 누구나 비판적이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심한 매로 다스리는 교사는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이른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훨씬 더 강도 높은 구속이 이루어지는 오늘의 어린이 탄압은 전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 탄압은 이른바 ‘아이의 미래’라는 강력한 명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 이후, 특히 IMF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무한경쟁 체제로 변화하면서 아이들이 경쟁의 감옥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경쟁의 감옥에서 중요한 건 인간적 면모가 아니라 경쟁력이다. 아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옛날엔 아무리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부모라 하더라도 아이들에겐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너 하나만 잘났다고 되는 게 아니다.” “너보다 약하고 불쌍한 동무를 보살펴야 한다.” 그러나 이젠 진보적인 부모들도 아이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못한다. 가르친다고 해도 초등학교 고학년쯤이면 끝이다. 동무는 곧 경쟁자이며 경쟁자를 존중하라는 말은 패배하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치 온 세상이 다 그런 줄 알지만 세계 어디에도 아이들을 이렇게 키우는 사회는 없다. 군사 파시즘에서 빠져나와 민주화의 기쁨에 취한 우리는 급격한 자본화의 바람에 별다른 경계가 없었다. 불과 일이십년 사이에 한국인들을 돈과 외형적인 가치에 미친 사람들이 되었고 아이들은 아예 처음부터 경쟁 기계로 키워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교육을 말하고 아이들과 대중문화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아동문학의 현실과 전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 한국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좋은 아동문학도 재미있는 아동문학도 아닌 자유다. 아동문학을 포함, 그들을 위한 어떤 가치있는 활동이나 생산물도 그들을 경쟁의 감옥에서 구출해내는 것보다 훌륭하진 않다.

발제자 박숙경 선생님은 90년대 초반부터 뚜렷한 아동문학의 양적 질적 성장이 이루어졌으며 그 주요한 원인이 그 시기에 아이들의 부모로 등장한 386세대 때문이라고 했다. 대체적으로 동의하지만 “386세대의 헌신”이라는 표현은 절반의 사실만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386세대는 오늘 아이들을 인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일 또한 가장 헌신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가장 열심히 좋은 아동문학을 읽히고 생산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아이들을 가장 열심히 상품으로 키운다.
단적으로 말하면, 오늘 좋은 아동문학은 아이를 상품으로 키우는 데 아이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사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말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지나친 것처럼 느껴진다. 그 시기만 해도 좋은 책은 좋은 뜻으로 읽혀진다. 다시 말해서 그 시기만 해도 좋은 책이 좋은 책으로만 읽히지 않을 결정적인 긴장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무렵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좋은 아동문학은 달라진 교육문제(라는 말은 실은 ‘학벌 문제’를 듣기 좋게 바꾼 말이다)에 대처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지는 것이다. 사지선다형 시험에서 수능과 논술 등으로 입시가 변화하면서 텍스트를 읽고 제 생각을 쓰는 능력이 중요해졌는데 386세대 부모들은 그런 능력이 대학입시에 닥쳐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아이에게 좋은 책을 사주기 시작했고 수요의 급증이 다시 아동문학의 활황으로 이어졌다. 마치 옛날 부잣집에서 운동권 과외선생을 구하는 풍경(데모하는 걸 가르치지만 않는다면 똑똑한 운동권 대학생이 좀 더 제 아이를 잘 가르칠 수 있다는 노회한 판단에 의한)과 비슷한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에게 좋은 아동문학을 읽히되 그 안에 담긴 가치가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갖은 노력을 다 한다. 권정생이나 박기범의 책은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책에 담긴 가치대로 사는 건 반대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아동문학에 담긴 가치나 감동이 실제 삶과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거나 상업적으로 사용되기만 하는 거라면 우리가 아동문학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건 매우 무망한 일일 수밖에 없다. 막막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정신적 가치들을 빨아들이는 이 자본의 시스템에 긴장해야 한다.

근래 교사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게 되면 꼭 빠트리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지배체제가 달라졌고 이제 진보적인 교사상도 달라져야 합니다. 단지 권위주의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아이들과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교사상은 군사 파시즘 시절엔 진보적인 교사상이었지만 이젠 교사의 당연한 요건일 뿐입니다. 오늘 진보적인 교사는 자본의 가치관과 긴장하는 교사입니다. 오늘 아이들에게 자본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교사, 경쟁력을 이야기하고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은 사람을 위인이라 가르치는 교사는 옛날에 아이들을 억누르고 때리며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가르치던 교사와 같습니다.”
외람된 말이나 오늘 아동문학계 전반이 갖고 있는 소박한 현실 인식이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 물론 훌륭한 사회적 태도가 훌륭한 아동문학을 만드는 건 아니다. 문학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같은 현실에서 훌륭한 사회적 태도가 결여된 아동문학이 훌륭하게 소구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가장 인간적인 내용이 가장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말이다.
아동문학이 다른 장르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는 현실은 아동문학업계의 성원들에겐 매우 중요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들이 문학에 더 관심을 갖게 하는 일, 혹은 아이들이 향유하는 정신적 생산물들의 분배와 균형을 갖추는 일보다 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아동문학은 대체 왜 존재하는가? 아동문학은 아동문학가나 아동문학계를 위해 존재하는가, 어린이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런 고민을 통해서만 우리는 모든 속물주의적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몇 권이나 팔리는가, 얼마나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가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그런 외형적인 가치들에 집착하게 된 우리의 모습이다.
아이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아무 죄도 없이 자본의 가치관에 빠진 부모와 어른들을 만나 수인처럼 살아가는 그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위로를 주는 작품은 얼마나 훌륭한가. 사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어린이책의 주인은 어린이가 아니다. 좋은 어린이 책은 '어른이 보기에 아이게 좋다고 여겨지는 책‘인 것이다. 그래서 ’좋은 어린이책‘은 아이들이 따분해하고 아이들이 흥미로워 하는 책은 어른들이 마땅치 않아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린이 책의 주인은 어린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며 그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작품을 존경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작품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혹은 종종 의도적으로 담겨있는 상품으로서 욕망에 대해 우리는 성찰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시절에 걸맞은 죄책감과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발제자가 말한 “마법 지팡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07/08/22 23:35 2007/08/22 23:35
2007/08/1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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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남녘교회에 걸린 안상수의 타이포그라피 예수상. 내 예수전이 먼저 나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결국 안선생 게 먼저 나왔다. 역시 그림은 글보다 고고하다. 글은 한방에 구상해도 쓰는 데 3년이 걸리지만, 그림은 3년 동안 구상하다 한방에 그려진다. 김민해 목사가 남녘교회 할머니 신도들에게 “저게 뭐 같아요?” 물으니 다들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예수님이지 뭐야.” 하더란다. 그 할머니들은 어디가 코고 어디가 눈인지가 아니라 영성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다 접고라도 “예수님 우리 예수님..” 글귀만으로도 뻐근하게 충만하다.(사진 안상수).
2007/08/18 17:37 2007/08/18 17:37
2007/08/15 15:12
스스로를 “약한자의 힘”이라 부르는 경남도민일보의 거창 토론회 기사. “질문과 대답은 만날 듯 만날 듯 하면서도 평행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 평행선 사이에는 의미있는 담론들이 무수히 쌓여갔다. 그렇게 쌓인 담론들이 두 개의 선을 잇는 역할을 하는 듯도 보였다.” 서정적이면서도 팩트에 정확한 문장이다.
2007/08/15 15:12 2007/08/15 15:12
2007/08/08 13:03
생명평화결사에서 마련한 나로선 적이 부담스러운 방식의 토론회(내가 도법스님을 비롯한 9인의 생명평화운동가들에게 질문을 던지는)에, 가기로 했다. 행사 실무를 맡은 최명진 목사는 ‘애정 어린 비판’을 주문했다. 애정 어린 비판이라... 상투적으로 쓰이는 말이지만(대개 ‘애정 어린 비판’은 ‘애정 어린 비판을 가장한 비판’에 불과하지 않은가) 생명평화운동에 대한 내 심경을 그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말은 없다. 나는 그들의 생각을 존경하며(분배와 사회정의를 넘어 지구의 파국을 향해 가는 상황에서, 나는 운동이 결국 그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폭력이라는 그들의 무기가 자본의 체제를 위협하고 무너트리길 기대한다. 아쉬운 건 그들이 오늘 진보운동에 갖는 얼마간의 오해다.
생명평화운동가들은 대개 진보운동이 ‘증오의 폭력이라는 죽음의 가치체계’에 머물고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나는 우선 분노와 증오는 다르다는 걸 되새기고 싶다. 불의와 억압과 폭력의 현장에서 분노는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다. 물론 분노는 자칫 증오로 변질되기 쉽다. 증오는 적을 미워하다 적을 닮아버린 상태다. 증오는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을 낳는다. 분노가 증오로 변질되지 않게 하는 게 바로 생명평화운동가들이 강조하는 영성이다. 그러나 영성에 대한 강조가 지나쳐 정당한 분노마저 증오로 취급하는 건 매우 애석한 일이다. 예수는 영성이 부족해서 성전 장사치들을 불같이 분노하며 내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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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된 말이나, 생명평화운동가들의 그런 오해는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과거 진보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진보운동이 갖는 한계를 누구보다 깊게 체험했으며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생명평화운동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만큼 성숙하지만 대신 자칫 자신이 체험한 과거 진보운동의 한계를 진보운동의 본질적인 한계로 파악할 위험이 있다.
과거 진보운동에 스탈린주의로 대변되는 ‘사람 잡는’ 문제가 있었다는 건 반공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아는 이야기다. 그러나 진보운동은 80년대라는 그 전성기를 마감하고 동료들이 모두 돌아간 지난 십수년 동안, 특히 ‘개혁’이라는 진보운동을 참칭한 자본화 공세가 진행되는 지난 십여년 동안 뼈를 깎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왔다. 그리고 전혀 다른 의식과 감성으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은 여성이나 소수자, 생태, 평화, 대중문화, 일상 등 과거 진보운동에서 부차적으로 취급되던 문제들을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오늘 진보운동 진영에 ‘분노와 증오의 가치관’에 매몰된 깡통 유물론자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세상이 변하려면 사회구조가 변해야 할까요, 개인이 변해야 할까요?” 강연장에서 청중 한 사람을 지목해서 질문하면 언제나 별 어려움 없이 가장 현명한 답을 듣곤 한다. “둘 다 변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 둘 다 변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늘 한쪽으로 치우치곤 한다. 80년대는 모든 진지한 사람들이 사회구조의 변화에 집중했던 시기였다. 바꿔 말하면 사회구조의 변화에 치우쳐 개인의 변화엔 소홀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영성의 시대라 불리는 오늘 진지한 사람들은 개인의 변화에 집중한다. 바꿔 말하면 오늘은 개인의 변화에 치우쳐 사회구조의 변화가 소홀히 취급되는 시절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라는 제국주의 이후 가장 사악하고 폭력적인 자본의 지배체제가 지구를 장악한 오늘은 오히려 80년대보다 더 사회구조의 변화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다. 그렇지 않을 때 운동은 너무나 지당해서 아무런 사회적 역동성이 없는 ‘착하게 살자’ 차원으로 떨어지게 된다. 생명평화운동과 진보운동은 그 사상과 가치체계에서 일정한 차이를 갖다. 그러나 그 차이는 두 운동이 서로를 배제하는 데 사용되어선 안 된다. 그 차이는 오로지 두 운동이 자신의 한계와 결점을 보완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두 운동이 조화를 이룰 때, 싸움과 기도가 정치적 급진성과 영성이 현실적인 것과 근본적인 것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죽음과 폭력의 자본의 지배 체제가 균열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한겨레21, 일러스트 김대중)
2007/08/08 13:03 2007/08/08 13:03
2007/08/07 23:22
내 의도와 무관하게 생기는 무게(혹은 부담)를 고려해서, 고꿈세에 늘 들어가면서도 글을 올리거나 덧글을 다는 건 자제해왔는데 이젠 회원도 천명 가까이 되어가고 해서(누구든, 무슨 짓을 하든 고작 천 명 중 한명이니..ㅎㅎ) 편하게 처신하기로 했다. 제법 긴 덧글도 달고.
2007/08/07 23:22 2007/08/07 23:22
2007/08/0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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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강의 다녀오는 길, 망월동 구묘역에 들렀다.
2007/08/06 12:54 2007/08/06 12:54
2007/08/0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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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멧 통풍구멍에 낀 잠자리.
‘싱거운 놈이네’ 중얼거리며 놓아 주었다.
2007/08/02 18:23 2007/08/02 18:23
2007/08/01 15:09
아프카니스탄 일을 두고 한국 교회의 선교방식에 대한 비판들이 많다. 네티즌에서부터 기자들까지. 한국교회와 그 선교방식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비판적인 나지만, 참 개만도 못하구나 싶다. 사람이 꼼짝없이 죽어가고 있는데, 제 새끼가 살아오기를 기도하며 죽음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할 소리들인가? 비판은 상황이 끝나고 상처가 아문 다음에 해도 충분하다. 우리가 사람이라면 지금 할 일은 두 가지다. 남은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것, 그리고 빌어먹을 정부를 비판하는 것. 탈레반이 요구하는 수감자 석방이야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즉각철군 선언’은 해야 당연한데 그걸 안 한다. 개만도 못한 인간들, 개만도 못한 정부다.
2007/08/01 15:09 2007/08/01 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