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05/08/31 물건들
  2. 2005/08/29 나의 예수전
  3. 2005/08/28 슬플 때 듣는 음악
  4. 2005/08/25 초토화
  5. 2005/08/23 밝음
  6. 2005/08/20 맥도날드의 이라크
  7. 2005/08/16 박준흠의 근황
  8. 2005/08/15 외할아버지
  9. 2005/08/14 로자룩스 제작소
  10. 2005/08/12 나의 문장론
  11. 2005/08/06 노들의 12년
2005/08/31 12:38
물론 갈수록 비싼 물건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물건은 비싸지는 경향이 있다. 가격과 심미성의 상관관계, 즉 평민들과 다른 것을 갖고 싶어 하는 부자들과 그 욕구에 봉사하는 장사꾼들의 오랜 상관관계 덕이다. 그러나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물건은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는 물건이다. 미술작품이 미술관에 소장되어 영원히 그 아름다움을 나누듯, 어떤 물건은 누구나 구입할 수 있어 그 아름다움을 나눈다. 내가 가진 아름다운 물건 몇 개.

일수공책
늘 갖고 다니면서 메모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수첩. 프랭클린 다이어리만 빼곤(쓰면 ‘성공’한다기에) 수첩 종류는 거의 다 써봤는데 이 단순함의 마력을 따라갈 물건은 없다. 중철(게다가 실묶음) 제본이라 좍좍 벌어져서 쓰기 편하고, 고전적인 디자인은 언제 봐도 푸근하다. 교보나 알파 같은 큰 문구점에서 구하기 어려운데 나는 디자이너 안상수 선생이 자기 동네 문방구에서 판다며 세권씩 부쳐준다.(없는 게 없는 대형 문구점에는 없고 오래된 동네 문방구에만 있는 이상한 물건.) 떨어질 만하면 세권씩 배달된다. 메이커는 불확실하고 한권에 삼백원 쯤 한다. 문구 구경이 취미라 이따금 잠시 물리치기도 하지만 얼마 못가 “역시 일수공책이제일이야” 한다. 이를테면 얼마 전에 나는 몰스킨 수첩(고흐와 헤밍웨이가 썼다고 선전하는)을 하나 샀는데 모양새 하나는 정말 내 취향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이만원 가까이 하는 쬐끄만 수첩’은 삼백원짜리 일수공책을 도무지 이길 수 없다. 일수공책엔 아무 거나 생각나는 대로 끼적거릴 수 있지만 몰스킨엔 뭔가 정리해서 적어야 할 것 만 같은 불편함이 있다. 알다시피 메모란 정선한 끼적거림이 아니라 정선하기 위한 끼적거림인 법.

액토 독서대
지난 몇해 동안 몇몇 독서대들을 전전한 끝에 만난 독서대. 액토라는 회사는 컴퓨터 악세서리를 만드는 곳으로 아직은 팰로우나 엘레콤 따위 외국 회사에 비해 (특히 디자인 면에서) 많이 떨어지는데 이건 참 물건이다. ‘카피가 아니라면’ 이라면 전제가 붙어야겠지만. 모든 독서대(관광 토산품 가게에서 파는 나무에 인두로 그림을 새긴 것부터 시스맥스 류의 뺀질뺀질한 것까지)의 문제는 ‘독서대가 책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독서대란 제 존재를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으면서 책과 사람의 만남을 거드는 게 사명인데 독서대가 책을 압도한다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오로지 ‘철사’와 최소한의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이 물건은 철저하게 책을 모시려는 태도가 되어 있다. 앞에서 보면 구부러진 철사만 살짝 보이는 게 두꺼운 책을 올려놓으면 벌렁 자빠질 것 같지만 실은 뒤에선 자못 역학적인 구조로 열심히 책을 받치고 있어서 천 페이지가 넘는 큰 책도 너끈히 모신다. 오천원 쯤 한다.

삼나무 수성펜
5년 째 쓰고 있는 수성펜. 정식 이름은 ‘파버카스텔 베이직 삼나무 롤러볼’. 딱히 이유는 댈 수 없으면서도 유성볼펜을 끔찍이도 싫어해서 만년필 아니면 수성펜인데 만년필은 마음에 든다 싶으면 고가품이라 데리고 살기가 영 불편하다. 이 펜은 만원 쯤 한다. 파버카스텔은 가장 오래된 독일 필기구 회사다. 검정 플라스틱 재질의 뚜껑엔 파버카스텔의 중후한 로고가 ‘since 1761'과 함께 음각되어 있다. 이 펜의 가장 큰 매력은 몸체의 절반이 삼나무(삼나무 무늬의 플라스틱이 아니라 삼나무)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비싸지 않은’ 모든 펜 가운데 가장 품위 있게 생긴 펜이다. 물론 삼나무 덕에. 파버카스텔엔 단풍나무, 배나무, 삼나무를 댄 시리즈들이 죽 있는데 이건 그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형 모델이다. 만원 남짓 하는 수성펜에 원목이라니 얼마나 흐뭇한 상상력인가. 요즘엔 구하기가 쉬워졌지만 전엔 파는 데가 드물었고, 이 펜에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에게 선뜻 준 적도 여러 번 있다. “파는 델 알아. 하나 또 사지 뭐.” 하면서. 아름다움을 나누기 위해서. 그런데 이게 몽블랑이었다면, 아니 이삼만원 쯤만 했어도 그게 어디 쉬었겠는가. 삼나무라서, 그러나 비싸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운 펜.

비알레티 다마
시각과 청각은 남 못지 않게 예민한 편인데 어찌된 일인지 미각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사람들은 내 미각에 대해 매우 의외라거나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들이 무슨 근거로 내가 뭔가 범상치 않은 미각을 가진 사람일거라고 단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혀가 그렇게 생겨먹은 건지 어떤 사회적인 불편함(굶는 사람이 8억인 지구에서 먹을 걸 갖고 우아를 떠는 일에 대한)이 작동하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하여튼 나는 그렇다. 하여튼 나는 “머슴의 미각을 가진 사람”(인권운동가 서준식 선생의 표현)이고 자연히 기호품에도 별 취향이라는 게 없다. 오래 전 문학평론 하던 이성욱 형은 나에게 다도를 가르치려다 사흘 만에 다기를 집어던지며 포기한 일도 있다. “실망했다 자식아!” 하면서. 그래도 어쩌다 커피 전문점에 가면 반드시 에스프레소를 시킨다. 언젠가 노르망디 해변에서 에스프레소를 처음 먹고선 ‘이거군’ 한 후로 줄곧 그렇다. 다마를 처음 만났을 때 난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고전미가 물씬한 알루미늄 몸통에 현대적이기 짝이 없는 선홍색 플라스틱 손잡이라니. 손님이 오면 물어보지도 않고 다마를 불에 올린다. 다마는 아름답다. 손님이 반가운건지 다마를 사용하게 되어 반가운 건지 헷갈릴 만큼.
2005/08/31 12:38 2005/08/31 12:38
2005/08/29 15:37
김규항은 요즘 잠행 중이다. 아니 그 번다한 입들의 논전에서 잠시 물러서서 더 깊고 따뜻한 일을 하는데 온전히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귀한 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안정적으로 발간하는 일이며, 그리고 또, 생각하고 성찰하는 일들이다. 이 두가지 일은 오늘의 번잡한 속도로 보건대 소중하면서도 벅찬 일이다. 그 일에 충실하기 위하여 이른바 ‘논객’ 김규항은 잠시 휴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B급 좌파’가 요즘 몰입하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예수’이다. 그가 한신대에 학적을 둔 사실이 있다는 점은 단순한 참고사항일 뿐이다. 그는 예수를 통하여, 그 수난의 생애가 어떻게 역사화되고 다시 수많은 말들이 더해져서 우리의 마음을 숨가쁘게 하는지 깊이 생각하는 중이다. 그는 말한다. ‘예수는 여전히 인류의 빛인가?’ 이 강좌는 기독교와 교회의 출발점인 예수에게 돌아가는 행로이며 목수의 아들이자 신의 아들이었던 한 팔레스타인 사내의 모습을 끊임없이 성찰하여 오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그윽한 시간이 될 것이다.


풀로엮은집 가을 강좌에서 예수읽기를 하기로 했다. 풀집에서 붙인 제목은 나의 예수전. 목수의 아들이자 신의 아들이었던 한 팔레스타인 사내의 모습을 함께 그려나갈 분은 주저 말고 오시길. 그런데 왜 다들 나를 '잠행중'이라 ‘휴전중’이라 할까? 이토록 열심히 사는데, 이토록 평화를 목말라 하는데..ㅎㅎ
2005/08/29 15:37 2005/08/29 15:37
2005/08/28 15:55
음악 하는 후배가 ‘슬플 때 듣는 음악’이라는 제목으로 컴필레이션 시디를 만들어 보내주었다. 혼자 앉아 그걸 들으며 서너 번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러다 궁금해져서 음악 하는 다른 후배에게 ‘슬플 때 듣는 음악 리스트를 뽑아 달라’고 했다. 리스트는 미리 준비되었던 것처럼 금세 도착했다. 슬픔은 역시 삶의 동무인 모양이다. 하긴 음악전문가라 해서 슬픔의 전문가는 아니니. 그런데 두 사람의 ‘슬플 때 듣는 음악’이 좀 다르다. 한 사람은 ‘슬플 때 듣는 음악’인데 한 사람은 ‘슬픈 음악’이다. 당신은?
2005/08/28 15:55 2005/08/28 15:55
2005/08/2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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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갈수록 선생의 바람과는 거꾸로, 그러나 선생이 예견한 그대로 가고 있다. 민주화의 성과는 자본에게 돌아갔고 장사꾼의 심성에 물든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잃어간다. 아이들은 단지 상품으로 길러지고 있다. 세상은 초토화되고 있다. 이오덕 선생 2주기다. (2001년 12월 작업실에서)
2005/08/25 16:14 2005/08/25 16:14
2005/08/2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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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과 김건이 지들끼리 버스타고 일산에 나왔다. 김단이야 제 동무와 나와 봤지만 늘 아비나 어미에 얹혀 다니기만 하던 김건에겐 자못 역사적인 날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발견한 둘은 별 이유도 없이 허리를 제쳐가며 웃는다. 둘은 참 밝다. 이따금 이렇게 다른 곳에서 만나보면 둘이 얼마나 밝은 아이들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가느라 둘의 밝음도 조금씩 바래가겠지만, 그래도 남보다는 밝아서 늘 위로의 사람이길.
2005/08/23 14:45 2005/08/23 14:45
2005/08/2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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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만화가 카를로스 라투프.
2005/08/20 15:42 2005/08/20 15:42
2005/08/16 00:06
한국 음악창작자의 역사가 이번 축제의 키워드이고,
한 80팀 정도가 메인스테이지, 서브스테이지 4곳에 설 예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랜만에 재미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대중음악과 관련한 행사를 가장 잘 꾸릴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박준흠이다. 그는 웹진 가슴의 발행인이자 비주류의 길을 올곧게 걸어온 평론가이기도 하지만 기획이나 정책, 심지어 음향이나 무대 실무에도 엔지니어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다. 그는 적어도 공연보다는 공연의 변이 근사한 사람들과는 다른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가 음악축제 하나를 꾸리고 있단다. 프로그램이 아주 흥미롭다.
2005/08/16 00:06 2005/08/16 00:06
2005/08/1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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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가진 유일한 ‘아빠 사진’이 보존상태가 너무 안 좋아 디지털 작업을 해드리려고 가져왔다. 1942년경 전라북도 태인면 면사무소 마당이다. 아래 줄 가운데 콧수염이 태인면장이고 그 왼쪽이 일본인 주재소장이다. 콧수염은 생김새만큼이나 열심히 일제에 부역했던지 해방되고선 몰려드는 군중들을 피해 어디론가 달아났단다.(달아날 수 있고 달아날 곳이 있었다는 게 이른바 ‘역사청산’의 문제다.) 아래 오른쪽이 외할아버지다. 어릴 적 이 사진을 보고 어머니에게 “외할아버지는 친일파였어요?” 물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웃기만하고 별 대답이 없었는데 나중에 어른들에게 듣기로는 “일본인들을 불편하게 하는 공무원”이었다고 했다. 어쨌거나 한일합방 해에 때어나 해방하던 해 돌아갔으니 그의 삶은 참 기구했다.
2005/08/15 14:03 2005/08/15 14:03
2005/08/14 15:00
아웃룩에 플러그인으로 사용하는 RSS 리더인 InterVnews를 설치하고 시험 삼아 몇몇 블로그를 등록했다. 그 가운데 하나인 로자룩스 제작소. 주인은 '넥타이 차림에 북아트 강좌를 들으러 다니는 여의도 어느 회사원'이자 “각종 수제 공책, 수첩, 앨범 및 항공모함과 무인정찰기 등을 제작할 예정”인 로자룩스 제작소의 소장님이다. 편안한 미소를 주는 블로그. 일수공책 이야기도 나온다.
2005/08/14 15:00 2005/08/14 15:00
2005/08/12 11:42
이따금 “문장론이 뭐냐”는 식의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현실에 익숙하지(하고 싶지) 않아서 늘 대답을 흐리곤 한다. 사실 나는 어떤 문장론을 갖고 글을 쓰진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 나는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어쨌거나, 문장론이 있든 없든, 내가 초고를 써놓고 퇴고를 거듭하는 걸 보면 나에게도 문장에 대한 어떤 태도는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두 가지일 것이다. 간결함과 리듬.

내가 쓰는 글의 8.5할쯤에 해당하는, 공을 들여 쓰는 글은 초고를 쓰면 적어도 서너 번 이상은 퇴고를 한다. 군더더기라 느껴지는 건 망설임 없이 없애거나 좀 더 간결한 표현으로 바꾼다. 나는 중언부언 하는 것만 군더더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화려한 표현도 군더더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러 반복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면 한 글에선 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 10매 이하 칼럼에선 반드시, 30매가 넘어가는 긴 글에선 되도록 그렇게 한다. 동시에 리듬을 만들어간다. 거창하게 말해서 운율을 맞추는 건데, 눈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리듬감이 흐트러지거나 호흡이 끊기는 부분은 글자 수를 고치거나 단어를 바꾼다.

간결함과 리듬이 덜 다듬어진 글을 내놓는 것처럼 불편한 일은 없다. 어쩌다, 내 글의 1.5할쯤에 해당하는 글에서, 이런저런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도리 없이 그러곤 하는데 그런 글들은 그저 실용적인 이유를 위해 일회용으로 존재한 것일 뿐, 내가 썼지만 더 이상 내 글은 아니라 여긴다. 간결함과 리듬 말고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쉽게 쓰는 것이다. 나는 왜 거의 모든 글쟁이들이 글은 쉬우면 쉬울수록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배운 사람들이나 알아먹는 어려운 말을 이유 없이 쓰지 않는 건 물론이려니와 되도록 한자말을 줄이려고 애쓴다.

그러나 간결함, 리듬, 그리고 쉬움 같은 문장에 대한 내 모든 태도들은 오로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서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 (보그)
2005/08/12 11:42 2005/08/12 11:42
2005/08/06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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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가장 근사한 학교인 노들장애인야간학교가 오늘로 개교 12주년을 맞는다. 그저께 기념강연을 하러 갔었다. 교사와 학생들의 얼굴이 그렇게 맑은 학교가 어디에 또 있을까. 모든 사람이 노들학교에 다녔다면 세상은 이미 달라졌을 것이다. 사람들아, 노들의 12년을 열렬히 박수치자.
2005/08/06 13:02 2005/08/06 1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