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3'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05/03/30 심리
  2. 2005/03/29 독도 정론
  3. 2005/03/28 예수 이야기 6
  4. 2005/03/26 노힘 기관지
  5. 2005/03/23 박유하
  6. 2005/03/21 애국자가 없는 세상
  7. 2005/03/20 dying art
  8. 2005/03/19 근사한 공연
  9. 2005/03/18 물건들
  10. 2005/03/17 죽을 줄도 모르는 2
  11. 2005/03/16 죽을 줄도 모르는
  12. 2005/03/14 아버지의 자서전
  13. 2005/03/11 인터뷰
  14. 2005/03/10 덧글
  15. 2005/03/10 들쥐, 혹은 레밍에 관한 단상
  16. 2005/03/09 스트립 댄서
  17. 2005/03/08 사장들
  18. 2005/03/08 차별
  19. 2005/03/04 녹색평론
  20. 2005/03/02 외유내강
2005/03/30 16:09
낭독의발견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정혜신 씨가 내 글을 낭독한단다. 그는 ‘남성 심리 전문가’라 들었는데 내 글을 낭독만 할 게 아니라 그 글을 갖고 내 심리를 분석해주면 좋겠구나 싶다. 나도 때론 내 ‘심리’가 정말 궁금하다. 심리를 정리(혹은 정돈)해야 할 시점이기도 하고.
2005/03/30 16:09 2005/03/30 16:09
2005/03/29 14:26
'독도 문제'에 대해 뭔가 명료한 생각을 갖고 싶다면 이 글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정론이다.
2005/03/29 14:26 2005/03/29 14:26
2005/03/28 13:52
장일담은 백정 아비와 성매매여성 어미에게서 태어난 도둑놈이다. 그는 자기 처지에 비관하다가 어느 날 깨달은 바 있어 임꺽정처럼 의적이 된다. 감옥에 들어가서도 도둑들에게 혁명을 가르친다. 탈옥한 장일담은 경찰에 쫓기게 되고 집창촌에 숨어드는데 그곳에서, 성병과 결핵과 정신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성매매여성이 건강한 아이를 낳는 것을 보고 “오, 나의 어머니여!” “발바닥이 하늘이다!” “하느님은 당신들의 썩은 자궁 속에 있다! 하느님은 밑바닥에 있다!”고 외친다. 일담은 ‘해동극락교’를 선포하고 ‘시천주’(侍天主) ‘양천주’(養天主) ‘생천주’(生天主) 세단계의 수행과 ‘공동소유’를 설교한다. 그는 인민들에게 전도를 하며 제사를 올려 모든 옛것을 불태우고, 폭력은 불가피하지만 ‘단’(斷)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는 군중들과 함께 서울을 향해 깡통을 들고 진군한다. 그는 극락이란 “밥을 나눠 먹는 것”이며 “밥이 하늘이다”라고 선포한다. 하지만 일담은 패배하고 현상수배되어 쫓기다 배신자 유다스의 밀고로 잡혀 한마디 변명도 없이 반공법, 국가보안법, 내란죄의 죄목을 쓰고 목이 잘려 죽는다. 일담은 사흘 만에 부활하는데 잘린 목은 배신자의 몸통 위에 붙는다. 참수하는 순간 잘려진 일담의 머리가 배신자의 몸통 위에 붙는다. 일담은 영원히 억압받는 사람들의 구세주가 된다.


‘2천 년 전 예수가 어땠는가’를 알려고 노력하는 건, ‘지금 여기에서 예수가 어떨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다. 그런 노력을 통해서 예수는 2천년이라는 시간을 뚫고 지금 여기 우리 삶의 현장에 부활한다. 2천 년 전 예수라는 팔레스타인 남성의 죽은 몸이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는가 아닌가는 본질이 아니다. 설사 그 ‘생물학적 기현상’을 증명해낸다 해도 그 삶이 지금 여기 우리 삶의 현장에 살아있지 않다면, 그건 단지 ‘생물학적 기현상’일 뿐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가 지금 여기 우리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수의 부활을 가장 훼방하는 건 역설적이게도(혹은 당연하게도) 가독교의 중심 교리다. “1) 우리에겐 원죄가 있다. 2) 하느님이 그 원죄를 사해주려고 당신 아들 예수를 속죄양으로 삼았다. 3) 우리는 예수만 믿으면 구원 받는다.” 이 편의적이고 앙상한 3단계 구원론은 실은제도 교회의 존재와 운영을 위한 이데올로기다. 그 교리는 교회의 영원한 안녕을 위해 예수의 부활을 훼방한다.
늘 무시되는 사실이지만, 예수는 단 한번도 ‘원죄’ 따위는 얘기한 적이 없다. 그는 오로지 ‘회개’를 촉구했다. 예수가 말한 회개란 종교적 결신(교회에 나가고 계명을 지키는)이 아니라 ‘삶의 완전한 전복’을 뜻한다. 나밖에 모르던 사람이 남을 섬기며 살게 되며, 신분이나 세속적 조건으로 사람을 구분하던 사람이 모든 인간을 똑같은 형제자매로 여기게 된다. 그런 극적 변화가 회개이며 그로 인한 삶이 바로 구원이다. 그리고 그 구원을 통해 “양과 사자가 함께 뛰노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예수는 그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교회에 '안치'되어 있는 게 아니다. 하느님은 골방에도 시냇가에도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에도 슬픔과 비탄이 있는 어디에도 있다. 회개와 구원은 골방에서도 시냇가에서도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에서도 슬픔과 비탄이 있는 어디에서도 가능하다. 하느님을 볼모로 잡고 회개와 구원의 독점권을 주장하는 제도 교회는 오히려 회개와 구원이 어려워 보이는 유일한 공간이다.
그러나 제3세계 현대 역사 속에는 감옥 창살에 이름 없는 풀꽃이 피어나듯 ‘교회를 넘어선 교회들’이 피어났다. 그 교회들은 '유약한 백인남성' 예수를 2천년 전 팔레스타인의 예수 그대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제 나라 인민들의 가장 수더분한 동무로 부활시킨다. 그 교회에서 예수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며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다. 제3세계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렇게 ‘우리 예수’를 형상화했다. 김지하의 장시구상 ‘장일담’은 그 가장 훌륭한 예 가운데 하나다. 비록 구상 단계에서 끝나긴 했지만(선생은 이제 그런 쪽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장일담’은 여전히 ‘예수의 한국적 형상화’에서 ‘남한 인민의 구세주상’에서 가장 높은 성취다. (다음에 계속)
2005/03/28 13:52 2005/03/28 13:52
2005/03/26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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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힘보다 노힘 기관지가 낫다”는 농담이 나올 만큼, 노동자의힘 기관지는 '생각보다' 근사하다. 요즘 같은 시절에 민노당보다 왼쪽인 노동운동 조직에서 70쪽이 넘는 정기발간물을 격주로 낸다는 것만도 희한한 일인데, 내용이나 모양새가 갈수록 나아진다. 나도 칼럼을 연재하고 있지만, ‘운동권적 문장’만 좀 더 벗어난다면 대중적인 교양물로도 훌륭할 것이다. 내 정신의 균형 있는 영양 공급을 위해 노힘기관지와 녹색평론을 부러 같이 읽곤 한다. 72호엔 인상적인 기사가 두 개 있다. 아버지 사진놈현 정권 2년, 여성(정책) 어떻게 전락했는가. ‘놈현 정권..’에 나오는 ‘주류 여성계’라는 말은 내가 전에 썼던 ‘주류 페미니즘’과 거의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다.
2005/03/26 08:27 2005/03/26 08:27
2005/03/23 10:42
국산은 후지다는 편견은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확실히 국산은 후지다. '학자'(혹은 '교수')는 그 중 대표적인 품목이다. 학자 행세를 하려면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에다 박사 공부까지 짧게 잡아도 10년은 공부해야 한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 10년을 했다면 ‘귀신처럼’은 아니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은 가지는 법인데 이상하게 한국의 학자들은 그런 사람이 참 드물다. 괜찮은가 싶다가도 월드컵이나 독도 같은 광풍이 한번 몰아치면 그저 ‘축구 응원단의 일원’으로 ‘우익 시위대의 일원’으로 그 초라한 몰골을 드러내고 만다. 해서, 이따금씩 괜찮은 학자를 만나면 그것처럼 반가울 수가 없다. 관점이나 의견에 차이가 나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만 있다면 충분히 기쁘다. 박유하 씨는 그런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책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보석과 같다. 어제 신문에 난 그의 대담 기사를 읽다보니 ‘남성 학자는 단지 냉철할 뿐이지만 여성 학자는 냉철한 데다 부드럽기까지 할 수 있구나’ 싶다.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수잔 손탁이 나오겠지?
2005/03/23 10:42 2005/03/23 10:42
2005/03/21 10:55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테고
대포도 안 만들테고
탱크도 안 만들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월드컵에서 독도로 다시 이어지는 이 지긋지긋한 ‘국민통합쇼’에, 정말이지 아나키스트라도 되어야하나 싶은데, 오랜 만에 펼친 신문엔 국회의원 나부랭이 몇이 독도에서 환한 얼굴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우리?’ 확 짜증이 밀려오다 이내 쓴웃음이 나온다. ‘하긴 너희 땅이지, 너희가 나라의 주인이니.’ 뭔가 정리된 글을 써볼까 싶지만 그럴 형편은 못되거니와 극적으로 회생 중인 고래에 행여 부담을 줄 새라, 권정생 선생의 시나 다시 읽기로 한다. 속으로 이런 후렴구를 달아보며..

영토가 절반인들 어떠랴,
힘들고 상처 입었을 때 위로받고 기댈 수 있는 나라라면,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이 주인인 나라라면,
영토가 절반인들 어떠랴.
2005/03/21 10:55 2005/03/21 10:55
2005/03/20 21:59
요즘 저는 대중음악의 죽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조금 과장인지 모르지만 제가 젊어서 좋아했던, 큰 의미를 부여했던 대중음악은 앞으로의 세상에는 없는 아닌가 매우 심각하게 고민 중입니다. 저희 학교의 대부분의 학생과 선생들이 연주를 통한 대중음악, 최근의 컴퓨터 댄스 뮤직이 아닌 ‘인간의 음악'은 일종의 dying art 라는 데에 심정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놓고 말은 잘 안 하지만 이제 이곳 영국에서 조차 연주자들의 생존 방식은 방송이나 게임 등 다른 미디어를 위한 배경 음악이나 결혼식 등에서의 반주, 혹은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을 다음 세대를 양산하는 선생 정도로 좁혀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느낌이 저로 하여금 음악 관련된 글을 쓰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제 자신의 개인적인 연주 세계와는 무관하게 말씀이지요. (후배가 보낸 편지에서)
2005/03/20 21:59 2005/03/20 21:59
2005/03/19 11:52
이 나라에서 열리는 가장 근사한(=재미있고 감동적인) 공연 가운데 하나인 기차길옆 작은학교 정기공연이 또 열린다. 4월 10일(일) 2시와 6시.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많이들 오시라.

'우리아이들의 나라는 15' 홍보 동영상
2005/03/19 11:52 2005/03/19 11:52
2005/03/1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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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내 일상에서 빠트릴 수 없는 두 가지 물건. ‘일수공책’과 ‘액토 독서대’. 일수공책은 늘 갖고 다니면서 메모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수첩이다. 프랭클린 다이어리만 빼곤(쓰면 ‘성공’한다기에) 수첩 종류는 거의 다 써봤는데 이 단순함의 마력을 따라갈 물건은 없다. 중철(게다가 실묶음) 제본이라 좍좍 벌어져서 쓰기 편하고, 고전적인 디자인은 언제 봐도 푸근하다. 교보나 알파 같은 큰 문구점에서 구하려다 실패한 걸 안상수 선생이 세권을 부쳐주었다.(없는 게 없는 대형 문구점에는 없고 동네 문방구에만 있는 이상한 물건.) 그 후로도 떨어질 만하면 세권씩 배달된다. 메이커는 불확실한데 한권에 3백원인가 한다. 액토 독서대는 지난 몇해 동안 몇몇 독서대들을 전전한 끝에 만난 것이다. 액토라는 회사는 컴퓨터 악세서리를 만드는 곳으로 아직은 팰로우나 엘레콤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데 이건 참 물건이다. 카피가 아니라면, 이라면 전제가 붙어야겠지만. 모든 독서대(관광 토산품점에서 파는 것부터 시스맥스의 것까지)의 문제는 ‘책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철사’로만 이루어진 이 물건은 철저하게 책을 모시는 태도가 되어 있다. 앞에서 보면 구부러진 철사만 살짝 보이지만 뒤에선 자못 역학적인 구조로 열심히 책을 받치고 있다. 교보에서 5천5백원인가 주고 샀다. 아, 일수공책 옆에 놓인 펜은 5년 째 쓰고 있는 파버카스텔 수성볼. 볼펜을 싫어해서 만년필 아니면 수성볼인데 만년필은 마음에 든다 싶으면 고가품이라 데리고 살기가 불편하다.(비싼 물건은 ‘누구나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악하다.) 윗부분이 단풍나무로 되어 있는데 내가 알기로 ‘비싸지 않은’ 모든 펜 가운데 가장 품위 있는 물건이다. 검정 리필을 구하지 못해 파랑을 쓰고 있는데 파랑 글자.. 나쁘지 않더라.
2005/03/18 11:19 2005/03/18 11:19
2005/03/17 12:12
(...)

덧붙여, 살아있는(아직 자살하지 않은) 우리는 ‘과연 살아 있는 건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일하러 나간다. 그런데 그러면 살아있는 것일까? 우리의 몸에 피가 흐르고 움직이고 생각한다 해서 살아있는 거라 규정하는 건, 인류가 적게 잡아 수천 수만 년 동안 고민하고 축적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비추어 참으로 치졸한 수작이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건 인간으로서 위엄을 유지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를테면, 잠자는 시간만 빼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만 궁리하는 인간은 전혀 살아있는 게 아니다.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걸 행복해 하는 인간은 전혀 살아있는 게 아니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인간이란 모든 생명을 내 생명과 다름없이 여기며,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걸 죄스러워 할 줄 아는, 더 갖는 일엔 아무런 관심이 없이 남에게 더 줄게 없나에 골몰하는 그런 인간이다. 과연 우리는 그런가? 우리는 대개 이미 죽었거나 반쯤 죽은 인간들일 뿐이다.

(원문)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 즉 자살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은 이런 것이다. “죽을 용기로 더 열심히 살아야지.” “생명은 소중하기에 스스로도 포기할 권리는 없어.” 이런 의견들은 윤리나 종교 형태로 명문화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근본주의적인(스스로는 ‘복음주의’라 주장하는) 기독교에서 자살은 ‘지옥불에 떨어지는 일’이다. 최근 개봉한 ‘콘스탄틴’이라는 영화에도 자살한 이자벨이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자살에 대한 그런 의견들은 대개 한 가지 목적을 갖는다. ‘자살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이란 오로지 살아있는(아직 자살하지 않은) 사람들의 자살을 막으려는 것이다. 거기엔 죽음에 대한 본능적 공포(인간에게 확실한 건 두가지뿐이다. 죽는다는 것, 그리고 그게 언제일지 모른다는 것.)와 함께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할 경우에 치러야 할 고통(사랑하는 사람의 잃은 고통에, ‘자살에 이르게 한 책임’까지 추궁 당하게 된다.)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결국 살아있는(아직 자살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자살 금지’라는 팻말 아래 모여서야 비로소 안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살’에 대해 말하는 것과 ‘자살한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을 혼돈한다. 그러나 ‘자살’에 대해 말하는 것과 ‘자살한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자살에 대해서라면, 자살한 사람들 대부분도 본디 자살을 지지하진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오히려 앞서 말한 자살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일반적인 차원에서 자살을 반대하면서, 자살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두고 자살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의견을 암송할 게 아니라 그들의 ‘선택’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그들의 ‘선택’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이지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완전히 알 도리가 없다. 자살하는 사람의 일부는 유서를 남긴다. 그러나 그 유서란 이미 죽음을 결정한 상태에서 쓴 것이라 그 선택에 대한 설명으론 부족하기 마련이다.(대개의 유서란 ‘미안하다’는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의 선택은 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우리는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자살을 반대하는 사람이 그들의 ‘선택’을 애써 이해하려 하거나 지지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우리가 그렇게 하길 바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오로지 살아있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비난해선 안 된다. 우리는 제 아무리 가슴 아픈 수사로 포장하더라도 그들의 선택을 비난해선 안 된다. 그들은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한(자살하지 않기로) 우리에게 그들의 선택을 권하거나 지지해 주길 바라기는커녕 그저 미안해할 뿐인데, 우리는 왜 우리와 다른 선택을 한(자살하기로 한) 그들을 비난하는가? 우리가 ‘이미’ 자살한 사람에게 할 일은 비난도 지지도 아닌, 존중이다. 만일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자살을 시도했다면,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그가 힘을 내서 살아가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떠났다면 그의 선택을 조용히 존중해야 한다.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파헤치려하지도 말고 그 선택엔 진지하고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해야 한다.

자살한 사람에 대해 말하기 전에, 살아있는(아직 자살하지 않은) 우리는 ‘과연 살아 있는 건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일하러 나간다. 그런데 그러면 살아있는 건가? 우리의 몸에 피가 흐르고 움직이고 생각한다 해서 살아있는 거라 규정하는 건, 인류가 적게 잡아 수천 년 동안 고민하고 축적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인문적 질문에 비추어 참으로 치졸한 수작이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건 인간으로서 위엄을 유지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를테면, 잠자는 시간만 빼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만 궁리하는 인간은 전혀 살아있는 게 아니다.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걸 행복해 하는 인간은 전혀 살아있는 게 아니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인간이란 모든 생명을 내 생명과 다름없이 여기며,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걸 죄스러워 할 줄 아는, 더 갖는 일엔 아무런 관심이 없이 남에게 줄게 없나만 골몰하는 그런 인간이다. 과연 우리는 그런가? 우리는 대개 이미 죽었거나 반쯤 죽은 인간들일 뿐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오늘 당장 잃어버린 위엄을 회복하고 사람답게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는 시간을 빼곤 죽은 시체와 같다. 그런 우리가 어찌 이 욕된 삶을 스스로 마친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매일 자살하는 우리가 어찌 단 한번 자살한 그들을 두고 훈계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자살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우리의 자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자살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의견을 우리 자신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죽을 용기로 더 열심히 살아야지.” “생명은 소중하기에 스스로도 포기할 권리는 없어.”
2005/03/17 12:12 2005/03/17 12:12
2005/03/16 10:25
존경하는 선배의 아이가 죽음을 선택했다. 스물셋. 참 예쁘고 똑똑한 아이였다. 나는 그 아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선배는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어 했다. 선배는 죽음에 대해 아무런 성찰이 없는, 죽음 앞에서 할 줄 아는 거라곤 무작정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것뿐인 사람들(물론 우리들 대부분)이 아이의 선택을 모욕할까 걱정했다. 아내도 “울 거면 오지 말라”는 다짐을 받고서야 빈소에 가서 뒤치다꺼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가지 않았다. 대신 그 아이의 선택에 대해, 그 선택을 존중하려는 어미에 대해, 그리고 내 아이에 대해 내내 생각했다. 어제, 아이가 안치될 곳에 일찌감치 갔다. 아이는 벽제에서 화장을 하고 두어 시간 후에 도착할 거였다. 납골당 언덕배기에 서서 연신 들어오는 영구차들과 겨울 동안 쉬고 있는 논과 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죽을 줄도 모르는 우리는 얼마나 흉한 인간들인가.. 이 따위 세상에서.
2005/03/16 10:25 2005/03/16 10:25
2005/03/14 16:44
밤늦게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다. 내가 전에 한 얘기가 생각나서 그런다고 하기에 무슨 얘기냐 물으니 ‘자서전’ 이란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혹시 무안해 하실까봐 가만 들어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당신이 겪은 일들을 죽 한번 적어보고 싶단다. “그렇게 적어놓으면 니가 거기에 살을 붙이고 해서 쓸모 있게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오래 전에 내가 그런 권유를 했던 것도 같다. 그때 아버지는 “싱거운 소리 마라” 쯤의 반응을 보였을 것인데 마음에 새겨두셨던 모양이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버지 살아오신 게 우리나라 역사와 결부된 게 많으니까 자료적인 가치가 있고.” 아버지는 1935년에 태어나 일제, 좌우대립, 6.25전쟁을 비롯한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다 겪으며 살아왔다. 물론 그 연배의 분들이 다 그걸 겪었지만 ‘일본에서 태어난 전라도 사람’인 아버지는 그 결이 좀 다르다. 그는 오래 전 풋내기 대학생이던 내가 읽으라고 갖다 드린 태백산맥 열권을 “다 실제로 본 얘기라 시시하다”며 그대로 돌려준 일도 있다.(실은 나도 그 책이 ‘이상하게’ 별로라서 두 권도 채 못 읽고 아버지에게 넘긴 거였다. 다들 조정래가 위대하다는데 왜 나는 별로일까.) 내가 좌익에 대해 단 한 번도 부정적이지 않았던 것도 아버지(와 어머니) 덕이다. 오래 전에 뿌리깊은나무에서 민중자서전이라는 걸 냈었다. 물론 거기 나오는 ‘민중’들은 드문 재주를 가졌다든가 하는 이들이었지만 적어도 그 책은 자서전은 가오다시가 특별한 사람들이나 내는 거라는 편견을 거슬렀다. 아버지는 특별한 분도 아니고 드문 재주를 가진 분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 온 칠십년에 해당하는 한국 역사, 그 특별한 역사를 투영하기엔 적절한 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서전이 그저 개인적인 의미만 가지면 또 어떤가? 그는 바로 내 아버지인 걸. 그의 인생의 절반은 내 인생이기도 하다.
2005/03/14 16:44 2005/03/14 16:44
2005/03/11 08:17
어떤 이가 인터뷰 잡지 구상을 밝히며 참여를 권했다. 인터뷰(라는 노동)는 나 역시 관심이 많고 인터뷰 잡지도 생각해본 적이 있다. 진행을 포기한 건 ‘인터뷰이의 부족’ 때문이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워낙 몰려다니는 나라라선지 5년 단위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존중할 만한 인물로 알았는데 더 이상 존중하기 어려운 인물인 경우가 참 많다. 아차 하는 순간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도 그렇지만 하고난 인터뷰가 그렇게 되기도 한다.
구상을 들어보니 좀 더 아기자기하고 다채로워서 그런 문제를 넘어설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는 아예 ‘매우 공격적인 인터뷰’를 하나 맡으면 어떠냐고 한다. 웃으며 사양했다. “제가, 싫어하는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합니다.”

지금까지 다섯 사람을 인터뷰했다. 한 사람 당 적어도 세 번에서 많게는 다섯 번 이상 인터뷰해서 원고를 만들었다. 물론 그건 인터뷰라는 노동에 대한 한국적 현실(지승호의 책에 대한 추천 글에서 적었듯)에 아랑곳하지 않는 방식이지만 덕분에 시간이 지나고서도 읽을 만한 인터뷰는 되는 것 같다.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아직 미완성이다. 이미 돌아가셨으니 서두를 만도 하지만, 길이 남을 분이라 서두르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다. 그는 '물론' 이오덕이다.

가난한 카메라의 전투 - 다큐멘터리 감독 김동원
예수를 좇아 맑스에 기대어 - 인권운동가 서준식
목마른 사나이의 귀환 - 음악가 한대수
세상을 벗겨내는 붓 - 미술가 홍성담
2005/03/11 08:17 2005/03/11 08:17
2005/03/10 11:38
(트랙백을 사용한 질문에 답을 달려다, 안 그래도 부연하려던 이야기도 있고 해서 여기에 올린다. 앞으로 이런 형식의 질문에 반드시 답을 하겠다는 다짐은 아니다..ㅎㅎ. 형식은 ‘게시물에 대한 덧글’ 그대로.)

우선 글의 전제부터 되새기자면..
제가 ‘지배계급과 자본’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현재 지배계급은 파시스트도 정권도 아닌, 자본이지요. 민주화한(혹은 신자유주의화한) 정권은 현재 자본의 이해나 논리에 가장 부응하는 정치적 장치라 할 수 있겠지요. 이 부분에 대해선 따로 한번 쓸 생각입니다.
제가 이 글(혹은 이런 글)을 쓰면서, 쓰고 나서 몹시 불편했던 건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냉소가 담겨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기계가 아니고 사람인 이상 맞는 이야기라고 다 좋은 건 아니지요. 그런데 조금 꺼려지고 오해의 여지가 있더라도 제가 사회적 의견을 제출하는 일을 하고 있는 한 이야기를 해야 할 짐이 있고 해서, 생기는 고민이 있습니다. 김지하나 박노해 같은 분들을 비판하는 건 그 분들이 스스로 뿌리고 거둔 공적 책임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글에도 적었듯이 저는 ‘평범한 사람들’에겐 그런 책임이 없다고 보는 편입니다. 그래서 ‘합의 독재’ 따위 말은 참으로 책상물림의 냉소라고 보고 반대하지요. 그런데도 쓴 건 물론 그런 걸 써달라고 적시해서 청탁을 해왔고, 그 적시된 부분이 현실의 전체는 아니더라도(단적으로, 광주항쟁이나 6월항쟁은 그럼 뭐냐라고 묻는다면) 중요한, 누구도 말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레밍...’ 이라는 글은 굳이 ‘이게 현실의 전부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라는 코멘트를 달지 않았을 뿐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제가 GQ에 그런 글을 쓰는 일의 어색함에 대해선 오래 전에 코멘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간단하게 피력한 바 있습니다만 저로선 '한겨레'나‘오마이뉴스’에 쓰는 것보다 오히려 마음 편한 데가 있습니다. GQ는 적어도 자신을 진보잡지라고 주장하거나 행세하진 않거든요.(정직보다 더 품위있는 건 없습니다.) 저는 노동자의힘 기관지 같은 데 쓰는 게 가장 편하고 제도 지면이나 방송 같은 건 영 불편하고 그런 것들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것도 영 치사스러운데(최근에 달라진 건 그런 데 못나가 안달하는 이들을 더 이상 혐오하진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에겐 그들의 삶이 있으니..) GQ는 그 제도 지면들 가운데 오히려 가장 불편한 축은 아닙니다. GQ와는 개인적인 ‘사연’도 좀 있고 역시 따로 한번 쓰겠습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이라는 말은 좌도 우도 아닌 그저 중립적인 말이라는 걸 환기하고 싶군요. 그런 말을 금기시하던 시대엔 그런 말이 좌파의 말이었지요. 이젠 아닙니다. 어디서든 편안하게 쓰십시오.^^
2005/03/10 11:38 2005/03/10 11:38
2005/03/10 09:40
1980년 어느 날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지껄였다.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 들쥐의 습성은 한 마리가 맨 앞에서 뛰면 덮어놓고 뒤따라가는 것이다." 물론 그의 발언은 ‘망언’이라 비난받았다. 그는 “레밍(우두머리를 따라 떼 지어 몰려다니는 쥐처럼 생긴 동물. 절벽을 만나 떼죽음을 당해도 절대 멈추지 않는다.)을 들쥐로 오역한 것”이라 해명했지만 들쥐든 레밍이든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누구든 맨 앞에서 뛰면 덮어놓고 뒤따라가는 습성을 보여 온 건 사실이었고 그런 습성은 그 후로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98년에 어느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위컴은 '망언'을 사과했지만, '들쥐들'은 18년 동안 덮어놓고 맨 앞에서 뛰는 놈만 따라다녀 왔다.” 이제 7년이 더 지났다. 다시 ‘18’을 ‘25’로 고쳐 적어도 좋을까?
한국인들이 ‘레밍의 습성’을 갖게 된 원인은 물론 그들이 치러야 했던 저 특별한 근현대사 덕이다. 일반적으로 그런 습성은 봉건사회에선 그저 백성의 도리다. 나라의 주인은 왕이며 백성은 그저 왕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봉건사회를 지나 근대사회에 이르러 백성은 비로소 ‘개인’이 된다. 그러나 조선의 백성들은 봉건사회에서 바로 일본제국주의의 신민이 되어야 했다. 36년의 식민지 생활이 어떤 것이었는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제에서 가까스로 해방된 조선의 백성들은 비로소 그들의 나라를 건설할 기회를 맞은 듯했지만 조선은 남북으로 분단이 되고 둘은 다시 잔혹한 전쟁까지 치렀다. 그 후 우리가 살고 있는 남쪽은 강력한 반공파시즘의 지배에 들어갔다. 한국인들은 이승만에서 박정희, 박정희에서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반세기를 반공파시즘 치하에서 살아야 했다.
‘민주화’가 된 오늘 그 시절은 종종 이렇게 표현된다. “박정희 군사파시즘의 폭압에 신음하던 국민들.” 아픈 상처를 보듬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 말은 과장된 것이다. 그 시절에 “신음하던 국민들”이 몇이나 되었던가? 대개의 한국인들은 그저 초등학교에 다니는 제 자식에게 ‘대통령 이야기하면 큰일 난다’고나 가르치며 조용히 살았다. 그 시절을 겪지 못한 사람이라면 ‘조용히’라는 말에서 어떤 ‘저항’을 추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개의 국민들은 신음하는 소수를 ‘세상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여겨가며 오순도순 살았을 뿐이다.
파시즘을 연구하는 어느 학자는 그런 사실을 두고 ‘합의독재’라는 말을 붙이기도 한다. 그 파시즘이 폭력적 강압이 아니라 파시스트와 민중의 합의에 기초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민중이라면 밑도 끝도 없이 미화해놓고 보는 게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풍토 속에서 그 의견은 나름의 신선함을 갖는다. 그러나 그 의견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비범한 의식을 가정하는’ 엉뚱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사회적 지위나 학력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 즉 지배계급의 가치관에 순응하는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관심은 역사나 유토피아가 아니라 제 식구 챙기며 사는 것이다. 그들이 파시즘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적극적인 반발도 적극적인 동의도 아닌 순응이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종이배를 두고 ‘종이배는 바다를 그린다’고 말하는 건 문학적 수사는 되겠지만 합리적이진 않다. 물론 이상적인 사회란 지배계급이나 미디어의 조작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수준의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이겠지만 그건 만들어갈 현실이지 이루어진 현실은 아니다. 그런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런 기준을 적용하는 건 좋은 뜻에서든 나쁜 뜻에서든 잘못이다.
보다 중요한 건 그 파시즘이 일방적인 것이었느냐 합의에 의한 것이었느냐가 아니라 그 파시즘이 어떤 것이었는가, 이다. 파시즘이 뭔지 알 기회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 파시즘 치하에서 반발도 동의도 하지 않는 걸 비평할 순 없지만 그런 태도가 결국 파시즘을 보전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파시즘이 물러나고 이른바 ‘민주화’가 된 지 20여년이 되어 간다.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제 파시즘이 뭔지 알게 되었고 심지어 그 시절이 남긴 이런저런 수구적 잔재들에 매우 비판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은 ‘레밍의 습성’을 벗어났는가?
애석하게도 아직 그렇진 않은 것 같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늘 대열을 이루고 그 대열에서 이탈하길 두려워한다. 최신형 휴대폰과 초고속 인터넷으로 무장한 그들을 이끄는 구호는 이제 “뜬다”이다. 전지현이 뜨면 모든 한국인들은 전지현을 이야기하고 이효리가 뜨면 모든 한국인들은 이효리를 이야기한다. 여성 연예인의 사생활 영상이나 연예인 X파일 따위가 뜨면 며칠 내로 모든 한국인들이 그것을 본다. 한국의 모든 젊은 여성들은 성형수술을 통해 한 개의 얼굴로 변신하는 중이다. 웰빙이 뜨면 모든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은 웰빙이 되며 아홉시 뉴스에서 무슨 음식이 몸에 좋다고 나오면 모든 한국인은 그 순간부터 그 음식을 먹어댄다. 반신욕이 뜨면 며칠 내로 온 나라의 ‘빨간 다라이’가 동이 난다. 한국인들은 한 시기에 한 가지 취향과 기호로 통합된다.
‘6월 항쟁의 재연’이자 ‘위대한 민주시민들의 승리’라 일컬어진 탄핵반대 광장에서조차 “탄핵반대”라는 한 개의 구호 외의 모든 구호는 ‘불순한 의도’라 몰아세워진다. “전쟁반대”라는 깃발조차 끌어내려진다.(얼마 후 그 깃발이 ‘뜨고’ 다시 광장을 가득 채운다.) 그 ‘위대한 민주시민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보완하거나 더 깊게 만드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아이를 목말 태우고 촛불행진을 하는 그들은 바로 그 광장에서 일 년 내내 방패에 목이 찍혀 넘어가고 군화에 배를 차여 피를 싸대고 몸이 얼어붙는 날 물대포에 맞아 주저앉은 사람들과의 연대를 거부한다. 그들은 뜨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 분노의 대열은 한 일이라곤 야당과의 입씨름뿐인 어느 대통령을 민주주의의 순교자가 만들고 다시 민주주의의 부활자로 만든다.
반공파시즘 시절에 한국인들의 대열을 이끄는 구호는 ‘국가’나 ‘민족’이었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구호 앞에서 한국인들은 줄에 묶인 인형처럼 움직였다. 그 구호 역시 아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구호가 ‘죽은 아비가 살아 돌아오듯’ 등장한 게 2002년 월드컵이다. 그 때 한국이 얼마나 ‘소란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소란이 무작정 나빴다는 건 아니다. 월드컵은 이미 세상의 어떤 축제보다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마력이 있다. 게다가 제 나라 팀이 4강까지 올랐으니 도무지 고단하기만 한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흥분하는 건 당연했다. 대체 제 조국에 자부심을 가질 일이 얼마나 없었으면 고작 그런 일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를 외치겠는가.
문제는 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가 결국 누구에게 사용되었는가, 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가슴 아픈 자부의 대열은 대개 “고객이 행복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따위 사악한 광고나 일삼는 삼성이나 에스케이 같은 자본들과 자신의 문제를 ‘애국심’으로 통합하려는 지배계급에게 사용되었다. 그 대열은 그 대열을 이룬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지식인들, 특히 진보적이라 분류되는 지식인들은 그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축구에 흥분했을 뿐’이지만 제 아무리 사소한 것도 그럴싸하게 꾸며 떠들어대는 그들의 재주를 한껏 살려 ‘국가’와 ‘민족‘으로 시작하는 온갖 장엄한 수사의 범벅을 만들었다. 그 가슴 아픈 자부의 대열은 고스란히 자본과 지배계급의 먹이가 되었다.
대열을 이루고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습성은 이제 한국인들의 삶이 되었다. 그들은 그들을 옥죄던 모든 억압의 대열에서 빠져나와 마음껏 자유를 구가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들 스스로 만든 대열에 자신을 옥죄인다. 모든 일과를 마친 밤 인터넷에 모여 앉아 온 세상을 ‘종합 평론’하는 그들은 마치 세상을 만들어가는 듯 하지만(자본과 지배계급은 늘 그들을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라 부추긴다) 실은 이미 만들어진 세상을 되새길 뿐이다. 그들의 모습은 수십 년 전 복덕방에 모여 앉아 “대중이가 말야” “영삼이가 말야” 하며 ‘세상을 만들어가던’ 영감들을 빼닮았다. 세상의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그들 가까이에 있지만 스스로 세상을 다 아는 그들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십 년 전 영감들이 신음하던 소수를 “세상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비웃었듯 말이다. 다시 ‘18’을 ‘25’로 고쳐 적어도 좋을까? (GQ 3월호)
2005/03/10 09:40 2005/03/10 09:40
2005/03/0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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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정리하다 오랜 만에 찾아낸 앨범엔 웃을 수밖에 없는 몇 장의 사진들이 있다. 그 중 하나. 스트립 댄서 누님이 펑크를 내어 곤란한 상황을 맞았는데 "사회에서 많이 해봤다"고 주장하는 한 병사가 나섰다. 낮게 모나코가 깔리고 댄서는 하나씩 옷을 벗어던지는데.. 미래의 B급좌파는 아무 생각 없이 드럼을 연주한다. 스트립 댄서는 다음 무대에서 예정에 없던 불쇼까지 감행, 무난히 휴가증을 확보.
2005/03/09 17:32 2005/03/09 17:32
2005/03/08 12:35
어제 또 한명의 근사한 사장을 만났다. 도합 세 명 째다. 4년 전, 첫 번째 사장을 만났을 때 나는 돈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도 괜찮은 사람이, 특히 ‘사적 소유’ 의식을 뛰어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 후 두 명을 더 만났다. 그 두 명 가운데 한명은 나보다 한 살 많고 다른 한명은 동갑이다. 그들은 예전에 운동을 했었고 이젠 체제 내에서 상품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조금은 혹은 확실히, 다르게 그리고 다른 걸 만들어낸다. ‘체제내적 활동’이라 간단하게 치부하기엔 그들은 그들의 활동에 너무나 진지하다. 두 번째 만난 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늘 고민이다”라고 처음 말했을 때 나는 그가 멋을 부린다고 생각했고 거북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나는 그 고민을 존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좌파로서, 그들의 상품과 그들의 활동이 갖는 변혁적 맥락은 좀 더 분석해볼 문제다. 그러나 그런 걸 떠나 그들은 적어도 인간적으로 충분히 훌륭해 보인다. 좌파랍시고 예술가랍시고 술에 젖어 끊임없이 뒷말이나 하며 사는 축들에 비하면 백배나.
2005/03/08 12:35 2005/03/08 12:35
2005/03/08 11:35
아내는 언젠가 “건이한테는 너무 해준 게 없어, 불쌍해”라고 웃으며 말한 적도 있다. 나도 웃으며 동의했었다. 그런데 이젠 좀 심각하지 않은가 생각을 한다. 며칠 전 급식당번을 하러 학교에 다녀온 아내가 “선생님 말이 건이가 호기심도 많고 질문도 참 많다고 하더라”고 했다. 아내는 또 “건이가 동물사육사가 되고 싶다고 그러더라” 했다. 동물사육사라.. 확실히 김건의 개성이나 자질을 유심히 살펴보려는 노력이 적었던 것 같다. 적어도 제 누나에 비해서. '여성에게 불리한 세상이니 여성인 김단에게 좀 더 각별해야 한다'는 이 집안에 늘 팽배한 생각이 또 다른 차별을 낳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차별은 차별일 뿐이다. 차별을 보완하기 위한 차별이라 해도..

이틀 후에 생각난 ‘빠트린 것’

김건이 뒷전으로 밀린 이유가 성차별(역차별)이 다는 아니고, 김단이 어릴 적부터 워낙 두드러진 아이였다는 점이 있다. 김단이 반짝이니 덜 반짝이는 김건은 덜 보이게 되는 게 있다. 돌이켜보면, 나도 아버지가 ‘좀 모자라는 것 같아 학교를 한해 늦게 보낼까 고민했던’ 아이였다. 그 역시 반성하게 된다.(3/10)
2005/03/08 11:35 2005/03/08 11:35
2005/03/04 10:44
현재 시점에서 내 숙제를 요약한다면 급진성은 유지하면서 미래의 비전을 확보하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맑스주의, 예수, 생태주의라는 세 가지 틀을 사용하여 그 얼개를 잡아보려는 중이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취약한 게 생태주의다. 농촌 출신이긴 하지만 공군정비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도시를 전전하며 자란 탓인지 자연보다는 ‘기계’에 친근함을 느끼는 정서가 있다. 이를테면 나는 자동차나 최신 기계류나 따위는 한번만 봐도 그 계보를 줄줄이 읊으면서(오래 전, 어느 잡지에 ‘4WD의 역사’를 연재한 적도 있다) 풀이나 나무는 도감을 끼고 다니며 익혀도 잘 안 되는 것이다. 같은 자연을 관찰하더라도 망원경(이라는 기계)을 사용하는 버드워칭이나 천문 관측 쪽에 훨씬 더 재미를 느낀다. 그건 내게 일종의 콤플렉스이고 특히 아이들에게 몹시 미안하다. 그러나 생태주의란 단지 ‘풀이나 나무를 잘 알’거나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는’ 게 아니라 지속 불가능한 발전과 개발에 매달려 파국으로 달려가는 오늘 인류 문명에 대한 거시적 조망과 대안을 제시하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체계다. 생태주의자들, 혹은 생태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행색이나 분위기가 그들이 뭔가 비합리적이며 감성적인 사고 체계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주고, 이른바 과학과 합리적 근거를 내세우는 발전주의 혹은 개발주의자들은 그런 편견을 더욱 강조하려 애쓰지만, 실은 진정한 생태주의자야말로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다. 녹색평론은 그런 생태주의의 본령을 보여주는 잡지다. 어젠 ‘쓸 수 없는 원고를 억지로 쓰느라’(‘어려울 때 돕는 게 친구’라는 잘난 소신을 지키느라 며칠 째 녹아나고 있다.) 피폐해진 상태에서 녹색평론의 지난 기사 하나에 위안을 얻었다. 78호에 실린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좌담인데 제목이 시시해보여 읽지 않고 넘어갔던 기사다. 명쾌한 결론을 내리는 좌담은 아니지만 결론을 모색하는 그들(천규석, 신보연, 권혁범, 강수돌, 김종철)의 행간에서 나는 적지 않은 깨우침을 얻는다. 앞으론 빠트리지 말고 챙겨 읽어야겠다.
2005/03/04 10:44 2005/03/04 10:44
2005/03/02 21:25
“아빠. 전학 간 김00 한테서 이메일이 왔는데...”
“그런데?”
“학기 초에 나를 좋아했었대. 그런데 나중엔 싫어졌대.”
“왜?”
“처음엔 얼굴보고 좋아했대. 귀엽더래. 그런데 알고 보니 성격이 조폭이더래.”
“그래. 어떻게 생각해?”
“좀 나빠. 여자는 얌전해야 한다는 거잖아.”
“요즘도 남자애들한테 거칠게 하니?”
“별로 안 그래.”
“외유내강이라는 말 알아?”
“그게 무슨 말인데?”
“바깥 외, 부드러울 유, 안 내, 굳셀 강.”
“바깥은 부드럽고 안은 굳세다?”
“그래. 겉보기엔 부드럽지만 속은 강하다는 거지. 그게 진짜 강한 사람이야.”
“그런 것 같아.”
“여자는 얌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거고 거기에 맞춰주어서도 안 되겠지. 하지만 남자든 여자든 큰 이유도 없이 거칠게 행동하는 건 잘못이야.”
“아빠가 보기엔 내가 그래?”
“글쎄. 아빠는 단이가 별명이 조폭이라는 건 알지만 남자애들한테 하는 걸 실제로 많이 못 봤으니 잘 몰라. 함부로 말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단이가 5학년이 되어서 새 친구들도 만나니까 조금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아빠 말 기분 나쁘지 않지?”
“괜찮아, 아빠.”

외유내강. 나 역시 늘 생각하면서 늘 잊곤 하는...
2005/03/02 21:25 2005/03/02 2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