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1'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05/01/31 와우산
  2. 2005/01/29 청탁
  3. 2005/01/28 골절
  4. 2005/01/27 하느님은 하나다
  5. 2005/01/25 예수 이야기 4
  6. 2005/01/24 풍경 구함
  7. 2005/01/21 코멘터리
  8. 2005/01/20 소리 밥상
  9. 2005/01/19 종간
  10. 2005/01/16 아빠 이봉렬
  11. 2005/01/15 그러나
  12. 2005/01/14 어려운 말
  13. 2005/01/11 예수이야기 3
  14. 2005/01/09 구름
  15. 2005/01/05
  16. 2005/01/04 지관순과 아버지
2005/01/3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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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 저놈 다 떼어주고 결국 거실 벽이 텅 빈 게 작년 이맘때다. 특히 최호철의 와우산을지로순환선은 두세 번씩은 준 것 같다. 워낙 좋아하는 그림이라 주는 것도 기쁘다. 물론 그 그림들이 '그림의 숙명'을 거스르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모든 그림은 ‘사적 소유’라는 숙명을 갖는다. 오로지 한 점뿐이기 때문이다. 그 그림이 제아무리 숭고한 공동체적인 이상을 담았다 해도 결국 경제적 능력을 가진 수집가에 의해 사적 소유되기 마련이다. 최호철은 애초부터 제 그림을 판화처럼 복제해서 보급했다. 몇 백 장을 공들여 인쇄해서 일련번호를 매긴 다음 제작에 들어간 정도의 돈만 받거나 나처럼 허울 좋은 선배에겐 여러 번 거저 나눠주거나 했다. 며칠 전 와우산과 을지로순환선을 다시 두 벌 표구했다. 한 벌은 고마운 이에게 보내고 한 벌은 거실 벽에 걸었다. 와우산은 ‘205/300’이고 을지로순환선은 ‘277/500’이다.
2005/01/31 00:47 2005/01/31 00:47
2005/01/29 00:45
대략 3년 가까이 원고나 강의 청탁을 거의 받지 않고 지냈는데 이젠 할 만한 건 할 생각이다. 왜 생각을 바꾸었는가는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사과부터 드린다. 돌이켜보면 ‘꼭 했어야 했는데’ 싶은 경우들이 있다. 내가 하지 않아서 잘못된 게 아무것도 없었으리라 믿지만, 그래도 사과드린다.
2005/01/29 00:45 2005/01/29 00:45
2005/01/28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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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이 태권도 도장에서 손을 다쳐서 왔다. 별로 붓지 않았길래 약이나 발라주고 말까 하다가 "가만 있어도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가보니 골절이란다. 깁스를 하고 돌아와 기념사진 한 컷. 장난삼아 찍었지만 결과는 그다지 장난이 아닌 듯..ㅎㅎ.
2005/01/28 00:37 2005/01/28 00:37
2005/01/27 11:10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난 지진해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가족과 이웃을 잃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너나없이 나섰다. 그런데 우리나라 서울에 있는 아주 큰 교회의 목사님은 아주 끔찍한 소리를 했단다. “그게 교회 안 다녀서 하느님에게 심판 받은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는 데 실망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하지만 목사님이 이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게 처음은 아니다. 동무들은 혹시 목사님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응원하는 걸 보았는지? 대체 그 목사님들이 모시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기에 그러는 걸까? 그 목사님들은 하느님이 자신들만 위해준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서 그 목사님들은 불교나 이슬람교 같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미워하고 벌을 주신다고 믿는다. 지진해일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목사님들은 하느님에 대해 진짜 모르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의 뿌리는 유대교다. 유대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던 종교인데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기독교가 생겼다. 유대교는 하느님이 자기 민족만을 위한다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하느님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600년 후에 마호멧이 나타나서 이슬람교가 생겼다. 그런데 이슬람교가 믿는 하느님과 기독교나 유대교가 믿는 하느님과 같다. 이를테면 예수님이 태어날 거라는 걸 알려준 천사와 마호메트를 인도한 천사는 모두 하느님의 천사 대장인 가브리엘이다. 세 종교의 차이는 구세주가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의 차이일 뿐이다. 유대교는 아직 구세주가 오지 않았다고 믿고 기독교는 예수님이 구세주라 믿고 이슬람교는 마호멧을 구세주라 믿는 차이일 뿐이다. 그러니 이슬람교 신도들을 하느님이 미워하고 벌을 줄 거라 믿는 그 목사님들은 순 엉터리다. 아니, 그 목사님들이야말로 하느님이 미워하시고 벌을 줄 거다. 만날 입으로만 하느님을 말하면서 하느님을 꽁꽁 묶어서 자기 필요한 대로 이용할 궁리만 하니 말이다. 하느님은 사랑이 많다는데 그 목사님들을 언제까지 용서하실까? (고래가그랬어 17호)
2005/01/27 11:10 2005/01/27 11:10
2005/01/25 11:08
‘주일성수’(主日聖守)라는 말이 있다. 한번이라도 교회에 나가본 사람들은 들어본 말일 게다.(하긴, 이 극성스런 기독교 국가에 살면서 교회에 한 번도 안 나간 사람이 있을까만.)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일요일에 다른 일 말고 꼭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주일성수는 특히 보수적인 교회에서 매우 강조한다. 그런 교회에선 일요일에 교회에 나오는가 안 나오는가를 신앙의 척도로 삼는다. 교회에 나오면 구원받은 사람이고 안 나오면 지옥불에 떨어질 죄인인 것이다.

주일성수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규범이라 할 십계명 가운데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을 근거로 한다. 십계명은 기독교에서 만든 게 아니라 예수 이전, 즉 구약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탈출한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받는다. 그 후 유대인들은 십계명을 자신들의 사회와 일상생활에 적용해가면서 세세하게 발전시켰다. 예수 당시에 이르러 율법(십계명)은 어떤 법이나 윤리와도 견줄 수 없는 유대 사회의 유일한 생활규범이 되었다.

율법을 지키며 사회에 적용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 ‘바리새’는 ‘분리하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서 자신들을 거룩하게 분리시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세분화하여 6백여 개의 세부 조항을 만들었는데 그 조항들은 대부분 ‘금지하는 것’이었다. 안식일에 대한 조항만도 39개나 되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엔 노동을 하거나 농사도 짓는 건 물론 여행을 하거나 짐을 운반할 수도 없었다. 안식일엔 심지어 의료 행위도 할 수 없었다.

39개의 조항엔 다시 수백 가지의 ‘사례집’이 달렸다. 이를테면 안식일에 사람이 무너진 담벼락에 깔렸을 경우에 대한 답은 이렇다. “1.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아 볼 만큼만 무너진 담을 헤쳐 본다. 2. 그 사람이 살아있다면 구할 수 있으나 죽었다면 안식일이 지난 다음 시체를 꺼낼 수 있다.” 우리로선 웃음이 나올 만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조항을 목숨처럼 진지하게 지키며 살았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걸핏하면 안식일을 어기곤 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면서 예사롭게 밀 이삭을 따먹었다. 그것은 율법적으로 추수, 타작, 키질, 음식 장만의 네 가지 조항을 한꺼번에 어기는 행동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다 노동하던 청년들인데 고작 밀 이삭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겠는가. 그건 거룩한 사람들을 엿 먹이는 시위였다. 그들의 스승 예수는 한 술 더 떴다. 예수는 안식일에 버젓이 환자를 치료했다. 그 환자들은 당장 목숨이 위급한 환자들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앓아온 만성병환자들이었다.

불한당 같은(예수의 별명 가운데 하나는 ‘먹고 마시길 즐겨하는 자’였다.), 그러나 매우 빠른 속도로 인민들의 호감을 얻어가는 예수에게서 뭔가 꼬투리 잡을 기회만을 노리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 따졌다. 예수는 그들에게 대꾸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습니다.”(마가 2:27) 예수는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사회적 스캔들에 대해 설명하거나 타협하기는커녕 ‘할 테면 해봐라’ 식의 태도를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 비판이란 체제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안전한 것이다. 물론 예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동자의힘 기관지, 계속)
2005/01/25 11:08 2005/01/25 11:08
2005/01/24 00:31
고래의 새로운 풍경이 되실 분,

주저없이

간단한 자기소개와 원고 시안(혹은 기획안)을
저에게로 보내주십시오.
2005/01/24 00:31 2005/01/24 00:31
2005/01/21 01:47
몇 달 전 DVD 코멘터리를 하나 했었다. 영화가 괜찮고 또 작업하는 곳과 개인적 인연이 있어서 한 건데 해놓고선 너무 썰렁하게 된 것 같아 늘 찜찜해 했다. 그게 그새 출시가 된 모양이다. 코멘터리가 어쨌든 소장 가치가 있는 영화가 DVD로 만들어지는 건 좋은 일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2005/01/21 01:47 2005/01/21 01:47
2005/01/20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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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국악을 많이 듣고 있다. 20년 전처럼 잠자는 시간 빼고 종일 듣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지난 20년 어느 때보다 많이 듣고 있다. 취향은 예나 지금이나 같아서 정악과 민속 실내악 위주다. 처음엔 시디나 파일로 갖고 있는 것들을 듣다가 이것저것 구색을 갖춰보려는 중이다. 가장 좋아하는 김성진 선생의 연주는 상령산 파일 한 개밖에 없었는데 이곳을 통해 이곳에서 세장짜리 연주를 찾았다. ‘희귀국악음반 제작’이라는 제목대로 김성진 선생뿐 아니라 여러 희귀한 연주들이 많다. PDF 해설지에 파일은 다운로드할 수 있으니 조금만 품을 들이면 누구나 귀한 음반을 여러 개 소장할 수 있다. 스튜디오 녹음이 아니라 음질이 좀 들쑥날쑥이긴 하지만 어떤가, 진짜 음악이란 본디 완벽하지 않은 것이다.(‘완벽한 사운드’란 실은 스튜디오에서 수없이 땜질을 한 것이니, 성형수술로 만들어낸 ‘완벽한 마스크’와 다를 게 뭔가.) 김성진, 봉해룡, 김천흥, 김명환, 임석윤, 지영희... 오랜 만에 차려진 푸짐한 소리 밥상에 절로 흐뭇하다.
2005/01/20 14:18 2005/01/20 14:18
2005/01/19 18:46
강준만의 기지 인물과사상이 종간했다. 한 역사가 마감했다. 그 잡지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물론이려니와 나와의 인연도 적지는 않았다. 인물과사상의 초기에 한국 지식사회(여전히, 이런 게 있긴 한가?)에서 강준만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시간이 흘러 이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강준만을 칭송한다. 강준만을 칭송하는 것은 한 인간을 칭송하는 일을 넘어 자신이 건전한 사회의식을 가졌음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 듯하다. 그런데 왜, 세상이 다 강준만을 칭송하는 듯 한데 강준만의 기지 인물과사상은 종간하는가? ㅎㅎ, 역사란 그런 것이다. 역사란 늘 ‘죽 쒀서 개주는’ 방식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2005/01/19 18:46 2005/01/19 18:46
2005/01/16 17:02
고래가그랬어는 만화 위주로 된 잡지지만 글 꼭지도 몇 개 있었다. 개편 작업을 거듭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빠지고 혼자 남은 게 이봉렬 님의 아빠가 읽어주는 책이다. 내용도 훌륭하거니와 아이에게 좋은 책을 읽어주는 아빠의 마음은 개편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아빠 이봉렬’은 이제 고래의 한 풍경이 되었다. 글의 마지막엔 늘 이렇게 적혀 있다.

아빠 이봉렬

9살 예경과 6살 예림의 아버지. 회사원.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뭐든 하고 싶다.”
2005/01/16 17:02 2005/01/16 17:02
2005/01/15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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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들은 참호마저 놀이터로 만든다.
2005/01/15 12:37 2005/01/15 12:37
2005/01/14 16:50
김단이 읽을거리를 찾기에 해저이만리를 꺼내 주었다. 작년에 김석희 씨가 옮긴 쥘 베른 선집이 나왔다기에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나도 초등학교 때 쥘 베른을 처음 읽었는데 그 움울한 분위기가 무서우면서도 참 좋았다.) 몇 권 샀었다. 김단은 요즘 부쩍 과학이나 공상과학 쪽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한 참 지나 김단이 그랬다. “어려운 말이 많아서 못 읽겠어.” “예를 들면 어떤 말이지?” “뭐, 인광이라는 말도 모르겠고 모르는 말이 너무 많아.” “인광?” 우선 ‘인광’이 들어간 문장을 봤다.

때로는 인광을 발했고 고래보다 훨씬 더 크고 빨랐다.

‘인광’(燐光 phosphorescence) 같은 말은 달리 우리말도 없고 알아두면 나쁠 게 없다 싶었다. “국어사전을 찾아가며 더 읽어보지 그래?” “그럴까?” 김단에게 국어사전을 갖고 오게 해서 몇 쪽을 함께 읽어보기로 했다. 김단이 소리내어 한 문장을 읽고 잘 모르겠는 걸 나에게 묻고 하는 식으로. 첫 쪽은 그런대로 넘어간다 싶었는데 두 번째 쪽에서 다시 걸렸다.

하지만 그 괴물은 실제로 존재했고,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환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간심리의 경향을 고려하면...

김단은 ‘부인’ ‘엄연한’ ‘경향’ 등을 잘 모르거나 불편해 했다. ‘인광’과는 경우가 다른 것이라 나도 어째야 하나 싶었다. “우리나라 말에 사실은 한자말, 중국말이 참 많아. 그래서 어려운 거야.” “우리나라 말로는 없는 말들이야?” “없는 것도 있고 있는 것도 있지. 아빠가 풀어서 읽어볼까?” 나는 적당히 단어들을 풀어서 다시 읽어보았다.

하지만 그 괴물이 진짜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사람에겐 환상적인 것을 쫓는 마음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응,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말을 꼭 써야 하는 거야?” “꼭 써야 하는 건 아니지.” “그런데 왜 써?” “글쎄.” “내 생각엔 자기가 남보다 많이 안다는 걸 자랑하려고 그러는 거 같아.” 김단은 마치 이런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한 것처럼(실제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자못 화가 난 얼굴이다. “그런 것도 있지. 그런데 단이는 어려운 말 쓰는 건 다 나쁘다고 생각해?” “응.” “왜 그렇지?” “다른 사람이 못 알아들으니까.” “모든 책을 모든 사람이 읽으라고 쓰는 건 아니잖아?” “하지만 글자를 아는 사람이면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써야 한다고 생각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으며 나는 이 고지식한 여성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도 아빠 글은 좀 쉬운 편이지?” “잘 모르겠지만 아빠 글도 어려운 말 많지 않아?” “그래 단이 말이 맞다. 아빠도 더 쉽게 쓰도록 노력할게.”
2005/01/14 16:50 2005/01/14 16:50
2005/01/11 00:13
연대를 표기하는 방법은 한 사회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북한은 김일성이 태어난 해를 기원으로 하며 남한에서도 민족애가 강한 사람들은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새운 해를 기원으로 하는 ‘단기’를 쓴다. 올해는 주체 94년이자 단기 4338년이다. 그러나 오늘 일반적으로 쓰는 연대표기 방법은 서력기원, 즉 ‘서기’다. 서기는 예수가 태어난 해를 기원으로 한다. 재미있는 건 예수가 태어난 해는 서기 1년이 아니라 기원전 4년 경이라는 것이다. 525년 교황의 명을 받아 서기를 계산해낸 수도사(디오니시우스엑시구스라는 긴 이름을 가진)의 실수로 그렇게 되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인 성과를 얻기 시작한 건 현대에 들어와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별 진척이 없었던 첫번째 이유는 기독교를 국제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바울이 역사적 예수보다는 그리스도 예수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죽음을 당할 만큼 험악했던 당시의 사회적 정황에서 정치범으로 죽은 예수를 ‘탈현실화’하는 그의 방식은 이해할 만한 것이지만 그 덕에 기독교(카톨릭이든 개신교든)는 역사적 예수를 소홀히 하는 전통을 갖게 되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로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가 신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좋든 싫든 이 글을 읽는 상당수의 동지들이 외울 수 있을 ‘사도신경’의 전문(개신교판)이다. 여기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해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정작 예수의 삶에 대해선 아무 언급이 없다. 예수는 시종일관 머리 뒤편에 둥그런 불이 켜진 신인 것이다.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찍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대식구를 건사해야 했던 평범한 팔레스타인 청년의 30여 년은 흔적조차 없다.

만일 바울이 좀 더 역사적 예수에 집중했다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가 충분했을까? 꼭 그랬을 것 같진 않다. 예수는 2천년 전, 우리로 말하면 바야흐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생겨나던 무렵의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이나 행적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사고방식은 그런 고대사회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것이다. 예수의 사상과 행적엔 사회주의, 페미니즘, 아동인권, 생태주의 같은 인류가 이룬 가장 최근의 정신적 진척들이 이미 가장 조화로운 형태로 들어 있다. 그를 직접 보았다 해도 그런 개념의 씨앗조차 없던 사람들이 그를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예수와 같은 경우는 역사 속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을 통틀어 봐도 찾기 어렵다. 사람이란 자기가 속한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을 근본적으로 거스를 수 없다. 어느 한 부분에 매우 급진적인 사람이라 해도 다른 부분에서는 여전히 지배적인 정신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사상과 행적의 면에서 예수와 비교해서 말할 만한 수운 최제우가 1824년생이라는 걸 생각한다면(수운은 예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예수는 참 놀라운 사람이다. 이제 하나씩 짚어보기로 하자. (노동자의힘 기관지, 계속)
2005/01/11 00:13 2005/01/11 00:13
2005/01/09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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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를 잘 아는 사람을 보면 많이 부럽다. 그런 사람들의 눈엔 낱낱의 별들이 선으로 연결되고 살이 붙어 곰으로 여인으로 전갈로 보이고 보통 사람 눈엔 보이지 않은 별도 보인단다. 눈이라고 다 같은 눈은 아닌 셈이다. 그렇게까지 되려면 공부도 해야 하고 시간도 꽤 걸린다는데 나는 다음 겨울이 오기 전까지 밤하늘의 얼개라도 익혀보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대신 구름은 늘 본다. 구름은 애써 공부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곰으로 여인으로 전갈로 보인다. 어제 아침 부여 근처를 지나는데 흰수염고래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차를 세우고 한참 봤다. 구름을 보는 건 미룰 수 없다. 어느새 구름처럼 사라져 버린다.
2005/01/09 23:49 2005/01/09 23:49
2005/01/0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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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김건은 커서 뭐 할래?” 실없이 물어보곤 한다. 며칠 전 처음으로 ‘책 만드는 사람’ 이라고 대답했다. “로봇 과학자나 화가는 어쩌고?” “그런 건 재미없어졌어.” “왜?” “아빠가 고래가그랬어 만드는 게 멋져서 나도 그거 하려고.” 속으론 흐뭇하기 짝이 없었으나 불현듯 제 자식에게 출판사를 물려준 한 유명 출판인이 떠올랐다. “혹시 고래가그랬어 하려고?” “응.” “그건 안 되지.” “왜? 아빠하고 나는 식구잖아.” “고래가그랬어는 아빠 게 아니라 수많은 어린이들 거야. 건이가 아빠 아들이라고 해서 물려줄 순 없어.” “...” “아빠 말 알 것 같아?” “응.” 김건은 실망의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애써 수긍하는 얼굴이다. 장래 희망이야 앞으로도 수없이 바뀔 것이고 또 그래야 하겠지만 어찌됐건 고맙다. 앞으로 이삼십년 후까지 고래가그랬어가 존재할 거라 철석같이 믿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ㅎㅎ.

김건이 꿈꾸는 교실(교하에 있는 근사한 어린이도서관)에서 만들어 온 책. 제법 재미있는 데다 희소성의 측면에서(딱 한권만 만들어진 수제품) 소장가치가 있다 싶어 ‘즉시’ 구입했다.

말꼬리 따기 놀이
글/그림 김건
야간비행

파주 하면 고래가그랬어

고래가그랬어 하면 책

책은 재미있어
재미있으면 옛날놀이

옛날놀이는 즐거워
즐거우면 얼음땡

어름땡(얼음땡)은 손시러워

손시러우면 겨울
겨울은 눈 와
추워


이 책은 말꼬리 따기 놀이를 글/그림으로 만들었습니다.

각격(가격) 500원
2005/01/05 14:33 2005/01/05 14:33
2005/01/04 11:41
지관순이라는 이름을 처음 본 건 몇 달 전 문산(내가 사는 교하와 함께 파주시의 일부인) 부근 어느 담벼락에 붙은 현수막에서다. “문산여고 3학년 지관순양 43대 골든벨!” 방송 날짜는 한 달 쯤 후라고 적혀 있었는데 챙겨보진 못했다. 지난 연말에 여기저기서 올해의 인물로 등장하는 걸 보고 그 후로 아주 많이 유명해진 걸 알았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까지 잘하게 되어버린 세상에서 초등학교를 못 다닐 만큼 가난한 소녀가 이룬 작은 승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그로 인해 기쁨을 느끼는 이웃들의 자랑스러운 벗이 될 것인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그의 작은 승리는 이웃들을 추억으로 남기기 위한 출발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개천에서 난 용'의 행로는 대개 그렇다.

아버지 지씨는 지양이 골든벨을 울린 데 기뻐하면서도 “사람 되는 일보다는 공부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 같다.”며 걱정부터 했다. 공부를 잘 한다고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평소 소신 때문이다. 최근 부쩍 늘어난 주변의 관심도 부담스러운 듯했다. 지씨는 “관순이에게 한번도 공부하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학교 자율학습도 고3이 되어서야 담임 교사의 끈질긴 설득 끝에 저녁 7시까지만 시키고 있다. 지양은 대신 집에 돌아가 집안일은 물론 마을 이웃 일을 돕는다. 지병에 시달리는 이웃 어르신들을 위한 빨래도 관순이의 몫이다. 오리를 기르는 지씨는 자신도 생활보호대상자인데도 사육장에서 나오는 오리알은 몇년 전부터 인근 의료원과 요양소 등지에 수용된 오갈 곳 없는 환자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지씨는 “관순이가 학자보다는 의인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동안 살면서 공부 좀 했다 하는 사람 치고 곡학아세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세상에 대학생은 많지만 의인은 없습니다. 본인이 공부를 계속하겠다면 막지 않겠지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묵묵히 봉사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어제 우연찮게 읽은 지난 신문 기사에서 나는 지관순 양이 매우 반듯한 의식을 가진 청년이며 그 배경엔 그의 아버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상에 가난한 아버지는 많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가난하면서도 자식에게서 존경받는 아버지는 없다. 영혼이나 사랑까지 사고파는 세상에서 가난한 아버지는 자식의 인생을 해치는 죄인에 가깝다. 그러니 지관순 양과 그 아버지의 경우는 참 특별하다. 딸을 초등학교에 못 보낼 만큼 가난한데다 “의인”이니 “곡학아세”니 하는 지사적 언어(요즘 젊은이들이 구리디 구려하는)를 사용하는 아버지와 2004년의 딸 사이에 흐르는 믿기 어려운 존중은 말이다. 한 가지만 짐작한다면 그 아버지는 제 딸을 단지 말로 가르친 게 아닐 것이다. 말로는 그렇게 되기 어렵다. 그는 제 딸에게 ‘살아 보인’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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