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신저 창에 ‘조폭소녀’가 접속을 해왔다. 김단(열살 먹은 내 딸)이다. ‘이 녀석은 제 별명을 만족해하는군.’ 나는 혼자 조용히 웃었다. 몇 달 전 나는 김단이 제 동무들, 특히 남자 동무들 사이에서 ‘조폭소녀’라 불린다는 걸 알았다. 겉모습에서부터 하고 노는 짓까지 여느 여자아이들과 다를 게 없는 김단은 유독 ‘남자의 폭력’ 앞에선 자못 전사로 변한다고 했다. ‘잘 가고 있군.’ 나는 그때도 혼자 조용히 웃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물리적으로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저런 전문가들이 이런저런 장황한 분석을 내놓곤 하지만, 이유는 실은 단순하다. 물리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여자는 남자보다 물리적으로 약하며, 여자와 남자 사이에서 물리적 폭력은 대개 남자의 선택 사항이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당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침묵하고 살 건지 제 자존을 되찾기 위해 싸울 것인지 선택하게 된다. 물론 싸워야 하고 싸우는 건 침묵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은 건 처음부터 물리적으로 당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는 ‘약한 인간인 여자’가 적어도 10년 이상의 철저하고 조직적인 교육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한 여자 아이는 그의 유년기와 소년기 동안 ‘여자다움’이라 설명되는 철저하고 조직적인 교육을 통해 ‘약한 인간인 여자’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약함은 모든 사회적 억압과 차별의 공식적인 근거가 된다. 강한 인간(남자)은 약한 인간(여자)을 당연히 다스리며 고작해야 ‘보호’하는 것이다.
변화는 ‘여자답게 키우는 일’과 ‘약한 인간인 여자, 남자에게 물리적으로 당하는 여자로 키우는 일’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 시작한다. 나는 그런 생각을 지난 10년 동안 나름대로 실천해왔다. 그 실천이란 그저 소박한 것이다. 김단이 말귀를 알아먹을 무렵부터 ‘남자들의 세상’에 대해 토론식의 대화를 한 것(이젠 그런 토론을 한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김단에게 몇 가지 무술을 맛보게 했고 제가 고른 태권도를 꾸준히 하게 한 것(끼니는 건너도 태권도는 빠지지 않으려 들만치 김단은 열심이다. 몸에서 밀리면 모든 것에서 밀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쩌다 김단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눈물이라도 보이면 “여자라서 우는 거냐?” 야비하게 빈정거리는 것(모든 눈물을 빈정거리는 건 아니다. <레미제라블>에서 판틴이 죽을 때, 나는 내 눈물을 감추며 김단의 눈물을 슬쩍 확인하는 것이다.) 따위다.
그런 소박한 실천들은 내 일상에 어떤 부담도 주지 않는다. 앞으로 10년 더 하는 것 역시 별 부담이 없다. 그러나 오늘 김단이 ‘조폭소녀’라 불리고 자신이 ‘조폭소녀’라 불린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 그리고 내가 김단이 ‘약한 인간’ 아니 아니라 ‘대등한 인간’으로 살아갈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분명한 성과인 셈이다. 이런 얘기를 듣던 어떤 이가 참으로 근심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김단이 남성적인가요.”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김단은 인간적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내 진정한 바람이다. 김단이 남자에게 당하고 사는 것도 심란하지만, 김단이 남자놈들이 하던 못된 짓을 해보는 게 유일한 목표인 ‘치마 두른 마초’가 되거나 세상을 성기로만 구분하는 ‘파시스트 여성주의자’가 된다는 건 또 얼마나 심란한가.)
오랜 만에 한가로이 소파에 늘어져 있는 내게 김단이 다가왔다. “아빠.” “응.”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응, 나 나중에 결혼 해 안 해.” “그걸 지금 결정해야 해.” “그냥, 생각나서.” “김단의 결혼이야 김단이 알아서 할 일이지.” “맞아.” 조폭소녀. 나를 아빠라 부르는 긴 머리의 여자가 씩 웃으며 돌아섰다. (씨네21)
2003/04/27 17:57
2003/04/09 16:41
운동한답시고 다리를 다쳐 꼼짝 못하고 방에 있는데, 바깥에서 내 딸과 그의 동무가 말한다. "너는 미국 편이야, 이라크 편이야?" "히히, 아무 편도 아닌데." 나는 미소 지으며 대화에 귀 기울인다. "그래도 미국하고 이라크하고 저렇게 계속 싸우면 누구 편인데." "히히, 그럼 이라크 편. 미국은 맨날 약한 나라만 괴롭혀." "맞아, 정말 짜증나지." 기분이 환해진다. 제국주의자들은 제 더러운 침략전쟁을 이런저런 요사스런 논리로 분칠하려 애쓰지만 변방의 열 살 먹은 아이들의 눈도 속이지 못한다.
분칠은 여기저기서 계속된다. ‘개혁정치인’ 유시민은 노무현의 이라크전 지지와 파병결정을 ‘대통령으로선 바른 선택’이라고 분칠한다.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긴장 상태로 볼 때 노무현이 부시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한 일이라는 얘기다. 유시민은 ‘정치란 현실적인 것이기에 대의를 거스를 수 있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유시민에게 명분과 이상을 말하는 건 싱거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유시민의 이야기는 전혀 현실적이지도 않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은 대통령들 사이의 ‘의리’가 아니라(조폭도 ‘의리’로 전쟁을 벌이진 않는다.) 순수한 손익계산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그렇게 하고 있듯) 미 제국주의는 한반도전에서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분명히 많다고 판단하면 언제든 전쟁을 벌이려 들 것이다. ‘의리’는 간단하게 무시될 것이고,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전쟁 명분이 다시 반복되면, 남의 땅의 더러운 전쟁을 지지한 노무현에게 제 땅의 더러운 전쟁을 반대할 명분은 없을 것이다. 미 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순수한 손익계산만으로 전쟁을 벌일 수 없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지금 미 제국주의가 순수한 손익계산만으로 벌이는 전쟁에 대해 가장 정당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오늘 전쟁을 반대하는 것만이 내일 전쟁을 거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개혁정치인’ 유시민은 그에 대해, ‘대통령은 전쟁을 지지하고 국민은 그것을 반대하여 결국 대통령이 반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한다. 궤변도 이쯤 되면 사람을 서글프게 만든다. 대체 정치를 개혁한다는 것의 출발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정치란 현실적인 것이라 대의를 거스를 수 있다'는 생각을 부수는 것이다. 정치란 대의를 좇는 것이라는 것, 정치가 대의를 좇는 게 절대 비현실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야말로 정치 개혁의 핵심이다. 물론 그건 유시민이 엄살하듯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개혁정치인’ 명찰을 달고 행세하는 사람에겐 당연한 임무다. 명찰은 그러라고 달아준 것이다.
유시민의 궤변은 처음이 아니다. 여중생 살해사건에 대한 온 나라의 분노에 노무현이 경우 없는 소리를 했을 때도 그는 '원래, 대통령은 그렇게 하고 국민은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유시민의 궤변대로라면 우리의 모든 사회적 신념과 가치들은 뒤집힌다. 그렇다면,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보다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는 게 훨씬 나았을 게 아닌가. 이회창이 전쟁을 지지했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을 거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전쟁을 거부하긴 더 좋았을 테니 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군사 파시즘에 감사해야 하고, 여성들은 제 인권을 일깨워 준 가부장제에 감사해야 할 것 아닌가.
‘참여 대통령’ 노무현이 주창하고 ‘개혁정치인’ 유시민이 분칠하는 국익/생존론은 이광수 따위 일제 부역자들이 떠들어대던 민족이익/생존론에서 한 치도 발전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세월 동안 정치란 당연히 대의를 거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놈들에게 원 없이 농락당해왔는데, 급기야 대의를 거스르는 정치를 개혁하겠다며 등장해 다시 대의를 거스르는 놈들에게 당하게 된 셈이다. 정말이지 궁금하다. 그 구린내 풀풀 나는 개혁은, 개혁이냐 개뼈냐.
분칠은 여기저기서 계속된다. ‘개혁정치인’ 유시민은 노무현의 이라크전 지지와 파병결정을 ‘대통령으로선 바른 선택’이라고 분칠한다.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긴장 상태로 볼 때 노무현이 부시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한 일이라는 얘기다. 유시민은 ‘정치란 현실적인 것이기에 대의를 거스를 수 있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유시민에게 명분과 이상을 말하는 건 싱거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유시민의 이야기는 전혀 현실적이지도 않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은 대통령들 사이의 ‘의리’가 아니라(조폭도 ‘의리’로 전쟁을 벌이진 않는다.) 순수한 손익계산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그렇게 하고 있듯) 미 제국주의는 한반도전에서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분명히 많다고 판단하면 언제든 전쟁을 벌이려 들 것이다. ‘의리’는 간단하게 무시될 것이고,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전쟁 명분이 다시 반복되면, 남의 땅의 더러운 전쟁을 지지한 노무현에게 제 땅의 더러운 전쟁을 반대할 명분은 없을 것이다. 미 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순수한 손익계산만으로 전쟁을 벌일 수 없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지금 미 제국주의가 순수한 손익계산만으로 벌이는 전쟁에 대해 가장 정당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오늘 전쟁을 반대하는 것만이 내일 전쟁을 거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개혁정치인’ 유시민은 그에 대해, ‘대통령은 전쟁을 지지하고 국민은 그것을 반대하여 결국 대통령이 반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한다. 궤변도 이쯤 되면 사람을 서글프게 만든다. 대체 정치를 개혁한다는 것의 출발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정치란 현실적인 것이라 대의를 거스를 수 있다'는 생각을 부수는 것이다. 정치란 대의를 좇는 것이라는 것, 정치가 대의를 좇는 게 절대 비현실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야말로 정치 개혁의 핵심이다. 물론 그건 유시민이 엄살하듯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개혁정치인’ 명찰을 달고 행세하는 사람에겐 당연한 임무다. 명찰은 그러라고 달아준 것이다.
유시민의 궤변은 처음이 아니다. 여중생 살해사건에 대한 온 나라의 분노에 노무현이 경우 없는 소리를 했을 때도 그는 '원래, 대통령은 그렇게 하고 국민은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유시민의 궤변대로라면 우리의 모든 사회적 신념과 가치들은 뒤집힌다. 그렇다면,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보다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는 게 훨씬 나았을 게 아닌가. 이회창이 전쟁을 지지했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을 거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전쟁을 거부하긴 더 좋았을 테니 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군사 파시즘에 감사해야 하고, 여성들은 제 인권을 일깨워 준 가부장제에 감사해야 할 것 아닌가.
‘참여 대통령’ 노무현이 주창하고 ‘개혁정치인’ 유시민이 분칠하는 국익/생존론은 이광수 따위 일제 부역자들이 떠들어대던 민족이익/생존론에서 한 치도 발전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세월 동안 정치란 당연히 대의를 거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놈들에게 원 없이 농락당해왔는데, 급기야 대의를 거스르는 정치를 개혁하겠다며 등장해 다시 대의를 거스르는 놈들에게 당하게 된 셈이다. 정말이지 궁금하다. 그 구린내 풀풀 나는 개혁은, 개혁이냐 개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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