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09 16:41
운동한답시고 다리를 다쳐 꼼짝 못하고 방에 있는데, 바깥에서 내 딸과 그의 동무가 말한다. "너는 미국 편이야, 이라크 편이야?" "히히, 아무 편도 아닌데." 나는 미소 지으며 대화에 귀 기울인다. "그래도 미국하고 이라크하고 저렇게 계속 싸우면 누구 편인데." "히히, 그럼 이라크 편. 미국은 맨날 약한 나라만 괴롭혀." "맞아, 정말 짜증나지." 기분이 환해진다. 제국주의자들은 제 더러운 침략전쟁을 이런저런 요사스런 논리로 분칠하려 애쓰지만 변방의 열 살 먹은 아이들의 눈도 속이지 못한다.

분칠은 여기저기서 계속된다. ‘개혁정치인’ 유시민은 노무현의 이라크전 지지와 파병결정을 ‘대통령으로선 바른 선택’이라고 분칠한다.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긴장 상태로 볼 때 노무현이 부시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한 일이라는 얘기다. 유시민은 ‘정치란 현실적인 것이기에 대의를 거스를 수 있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유시민에게 명분과 이상을 말하는 건 싱거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유시민의 이야기는 전혀 현실적이지도 않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은 대통령들 사이의 ‘의리’가 아니라(조폭도 ‘의리’로 전쟁을 벌이진 않는다.) 순수한 손익계산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그렇게 하고 있듯) 미 제국주의는 한반도전에서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분명히 많다고 판단하면 언제든 전쟁을 벌이려 들 것이다. ‘의리’는 간단하게 무시될 것이고,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전쟁 명분이 다시 반복되면, 남의 땅의 더러운 전쟁을 지지한 노무현에게 제 땅의 더러운 전쟁을 반대할 명분은 없을 것이다. 미 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순수한 손익계산만으로 전쟁을 벌일 수 없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지금 미 제국주의가 순수한 손익계산만으로 벌이는 전쟁에 대해 가장 정당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오늘 전쟁을 반대하는 것만이 내일 전쟁을 거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개혁정치인’ 유시민은 그에 대해, ‘대통령은 전쟁을 지지하고 국민은 그것을 반대하여 결국 대통령이 반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한다. 궤변도 이쯤 되면 사람을 서글프게 만든다. 대체 정치를 개혁한다는 것의 출발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정치란 현실적인 것이라 대의를 거스를 수 있다'는 생각을 부수는 것이다. 정치란 대의를 좇는 것이라는 것, 정치가 대의를 좇는 게 절대 비현실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야말로 정치 개혁의 핵심이다. 물론 그건 유시민이 엄살하듯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개혁정치인’ 명찰을 달고 행세하는 사람에겐 당연한 임무다. 명찰은 그러라고 달아준 것이다.

유시민의 궤변은 처음이 아니다. 여중생 살해사건에 대한 온 나라의 분노에 노무현이 경우 없는 소리를 했을 때도 그는 '원래, 대통령은 그렇게 하고 국민은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유시민의 궤변대로라면 우리의 모든 사회적 신념과 가치들은 뒤집힌다. 그렇다면,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보다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는 게 훨씬 나았을 게 아닌가. 이회창이 전쟁을 지지했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을 거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전쟁을 거부하긴 더 좋았을 테니 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군사 파시즘에 감사해야 하고, 여성들은 제 인권을 일깨워 준 가부장제에 감사해야 할 것 아닌가.

‘참여 대통령’ 노무현이 주창하고 ‘개혁정치인’ 유시민이 분칠하는 국익/생존론은 이광수 따위 일제 부역자들이 떠들어대던 민족이익/생존론에서 한 치도 발전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세월 동안 정치란 당연히 대의를 거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놈들에게 원 없이 농락당해왔는데, 급기야 대의를 거스르는 정치를 개혁하겠다며 등장해 다시 대의를 거스르는 놈들에게 당하게 된 셈이다. 정말이지 궁금하다. 그 구린내 풀풀 나는 개혁은, 개혁이냐 개뼈냐.
2003/04/09 16:41 2003/04/0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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