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쾌도난담은 희한하다. 양심수들이 애독한다는 양식 있는 시사주간지에 지성도 교양도 함량 미달인 두 건달이 별다른 준비도 없이 두세 시간 횡설수설하는 게 매주 멀쩡하게 실려나간다. 한두 번의 해프닝으로나 어울릴 이 믿기 힘든 일은 해를 넘겨 계속되고 있다. 풍문으로는 쾌도난담 덕에 <한겨레21> 웹사이트 조회수가 몇 배 늘었다고도 하고, 이 시궁창 같은 기사를 저주하며 구독 중단을 선언하는 비장한 독자가 나타났다고도 한다. 그런 극단적인 반응은 내 머리통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대로 진지한 얘기들을 무겁지 않게 전한다는 장점(제대로 전하는가는 논외로 두고)도 있지만, 사적 톤으로 발언하고 공적 톤으로 읽히는 쾌도난담의 작동 원리는 나를 늘 불편하게 한다. 쾌도난담은 마치 내가 어느 카페에서 친구와 편하게 나눈 대화를 수많은 사람에게 생중계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쾌도난담을 읽는 사람들은 나를 실제보다 조금 더 경박한 인간으로, 실제보다 조금 더 방자한 인간으로 짐작하는 듯 하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나를 실제보다 조금 더 기품 있는 인간으로 실제보다 조금 더 진지한 인간으로 인상 지우고 싶은 내 욕망과 충돌한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내게 말하곤 한다. "생각보다 점잖은 분이군요." 빌어먹을.
별의별 얘기를 다루다보니 별의별 잡음이 끊이지 않지만 나나 김어준이나 지성의 부족 분을 고집으로 채우고 사는 스타일이라 일일이 개의하진 않는다. 다만 이따금씩 제 말에 제가 후회하고 그러는데, 내가 '율려'라는 걸 들고 나온 김지하 선생을 '애처로운 왕자병 환자에 앵벌이하는 상이군인'이라고 비아냥거린 일은 바로 그런 예다. 내가 오늘의 김지하를 존중할 수 없는 게 사실이라 해도 그 비아냥은 무슨 얘기든 짧게 훑고 지나가는 쾌도난담의 형편과 결합하여 비열한 인신공격이 되었다. 다른 곳에 김지하 선생에 대한 좀더 차분한 비판문을 쓴 적이 있긴 하지만 나는 내 20대의 치명적인 선생에게 씻을 수 없는 결례를 하고 말았다.
얼마 전 매매춘을 필요악이라고 표현한 일은 쾌도난담의 형식이나 사정으로 변명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내게 남겼다. 후배들은 그 발언으로 별 문제는 없는지 조심스레 물어왔고, 평소 내 글에 호의적이었던 한 학자는 무척 실망했다며 내 말이 고도의 반어법이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김강자라는 여성 경찰관의 해프닝과 구성애라는 보수주의자의 맞장구에 내가 가진 이른바 '과학적 매매춘론'을 사용하는 일이 왠지 허망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내 발언은 고도의 반어법은커녕 그저 반동적 매매춘론을 한번 더 강조하는 일이 되었다.
두어 달 전 나는 담당기자에게 쾌도난담을 그만두겠다 말했다. 내가 뒤늦게 글쓰기라는 걸 시작하여 체험수기류의 잡문이나마 열정을 가지고 끼적일 수 있었던 건 내 팍팍한 삶에서 빚어지는 나와 세상의 긴장감 덕이었다. 매주 한번씩 세상의 일들을 연예가 방담 하듯 주절대는 쾌도난담은 그런 내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고 있었다. 쾌도난담 덕에 나는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내가 그런 허명이 한 인간을 얼마나 가련하게 만드는가 쯤을 모르진 않았다.
그만두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목요일이 다가오면 의례껏 쾌도난담하러 갈 요량을 하는 나를 보면, 내가 쾌도난담을 정말 그만두려 하는 건지 쾌도난담으로 일어나는 내 민망함을 보상하기 위해 나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지 나도 헛갈린다. 대견하게도(가증스럽게도) 이젠 공적 톤으로 읽힐 것을 염두에 두고 사적 톤으로 발언하는 일에도 어지간히 익숙해졌다. 또한 나는 쾌도난담이 스테레오타입화된 공격 대상 이외의 대상을 공격하기엔 몹시 불리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한편으론, 진지한 거라면 질색을 하던 나이 어린 후배가 쾌도난담을 낄낄거리며 읽는 모습을 보며 자못 계몽주의자의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쾌도난담이 내게, 내가 쾌도난담에 차분해진 셈이다. | 씨네21 2000년_2월
2000/02/22 16:55
2000/02/07 16:53
“만날 똑같은 소리... 강준만은 이제 지겨워.” 주변에서 이 말이 나오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다. 온 나라가 만날 한 가지 이슈에 휩쓸리고 또 그 이슈는 만날 변하는 사회에서 몇 년째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강준만이 지겹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달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강준만이 몇 년째 거듭하고 있는 바로 그 소리, 이른바 <조선일보> 문제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조선일보>는 여전히 건재하며 모든 형태의 사회 개혁에 '할말은 함'으로써 수구세력의 돈궤를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지겨운 건 강준만이 아니다.
강준만이 지겹다는 말은 강준만의 방법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른바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운동'을 둘러싼 그의 방법은 어딘가 저잣거리의 시비 같은 데가 있어 그의 공식적인 적대자들은 물론 그의 주장을 대놓고 적대하기 어려운 좌파 혹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비공식적인 적대자들의 심기를 거스른다. 강준만이 이른바 <조선일보>에 협조적인 지식인들의 명단을 <월간 인물과 사상>에 게시하자 그의 비공식적인 적대자들은 강준만이라는 불한당을 향해 동병상련의 정으로 단결한다. 21세기의 목전에 대대적인 빨갱이사냥을 당하고도 <조선일보>가 극우신문이라는 최소한의 합의조차 이루지 못한 그 못난이들이 말이다.
그들이 공동으로 개발한 논리가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와 같은 방법으로 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강준만의 말은 옳지만 방법은 틀렸다는 얘기로, 강준만의 주장과 실천을 분리해 강준만을 무력화하려는 노회한 논리다. 내 기억에 그런 말을 처음 사용한 건 이른바 강단좌파들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자본주의 이후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조선일보>라는 봉건적 신문에 보이는 무색무취한 태도와 강준만에 보이는 단호한 태도가 말이다
.
동병상련의 논리를 애용하는 또 다른 경우가 메이저 시민운동단체의 인사들이다. 최장집 사건 당시 시민운동권에서는 <조선일보> 취재 거부운동이 벌어졌지만 공교롭게도 이른바 3대 메이저 단체인 참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은 빠졌다. 그 일을 두고 강준만이 그들을 강하게 비판하자 그들은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와 같은 방법으로...”를 사용했다. 강준만은 그들이 언론플레이에 미쳤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했다. 그들이 <조선일보>와 어떤 내통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강준만의 주장이 객관적인 정황인 건 분명하다.
알다시피 그들은 요즘 낙선운동에 열심이다. 나는 내가 강준만의 방법을 최선이라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지지하듯 낙선운동의 방법을 최선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지지한다. 민주주의란 본디 작고 많은 비합법성을 모아 큰 변화를 이루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지식인들을 부역자처럼 게시하는 덜 합리적인 방법으로라도 지식인들을 <조선일보>에서 분리해내려 한다. 시민운동단체들은 낙천, 낙선되어야 할 후보들의 명단을 게시하는 덜 민주적인 방법으로라도 정치권의 인적 청산을 이루려 한다.
가상현실게임 동호인들(이른바 강단좌파들)이 그러는 거야 학술영역의 문제라 치더라도, 낙선운동을 하는 시민운동가들이 강준만의 방법을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와 같은 방법으로 대하는” 것이라 폄하하는 일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앞서 말했듯 강준만의 운동과 낙선운동은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같고, 20세기의 막판까지 빨갱이사냥을 일삼은 극우신문에서 지식인들을 분리해내는 일과 감옥에나 앉아 있어야 할 사람들을 국회의사당에서 쓸어내는 일은 차선의 선택을 감수할 만큼 유익하다. 강준만의 운동은 우리 사회의 전근대성을 청소하는 일이고 낙선운동은 우리 사회의 근대성을 고양하는 일이다. 전근대와 근대가 뒤섞여 돌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좃선운동과 낙선운동은 서로 존경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상식이다. | 씨네21 2000년_1월
강준만이 지겹다는 말은 강준만의 방법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른바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운동'을 둘러싼 그의 방법은 어딘가 저잣거리의 시비 같은 데가 있어 그의 공식적인 적대자들은 물론 그의 주장을 대놓고 적대하기 어려운 좌파 혹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비공식적인 적대자들의 심기를 거스른다. 강준만이 이른바 <조선일보>에 협조적인 지식인들의 명단을 <월간 인물과 사상>에 게시하자 그의 비공식적인 적대자들은 강준만이라는 불한당을 향해 동병상련의 정으로 단결한다. 21세기의 목전에 대대적인 빨갱이사냥을 당하고도 <조선일보>가 극우신문이라는 최소한의 합의조차 이루지 못한 그 못난이들이 말이다.
그들이 공동으로 개발한 논리가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와 같은 방법으로 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강준만의 말은 옳지만 방법은 틀렸다는 얘기로, 강준만의 주장과 실천을 분리해 강준만을 무력화하려는 노회한 논리다. 내 기억에 그런 말을 처음 사용한 건 이른바 강단좌파들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자본주의 이후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조선일보>라는 봉건적 신문에 보이는 무색무취한 태도와 강준만에 보이는 단호한 태도가 말이다
.
동병상련의 논리를 애용하는 또 다른 경우가 메이저 시민운동단체의 인사들이다. 최장집 사건 당시 시민운동권에서는 <조선일보> 취재 거부운동이 벌어졌지만 공교롭게도 이른바 3대 메이저 단체인 참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은 빠졌다. 그 일을 두고 강준만이 그들을 강하게 비판하자 그들은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와 같은 방법으로...”를 사용했다. 강준만은 그들이 언론플레이에 미쳤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했다. 그들이 <조선일보>와 어떤 내통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강준만의 주장이 객관적인 정황인 건 분명하다.
알다시피 그들은 요즘 낙선운동에 열심이다. 나는 내가 강준만의 방법을 최선이라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지지하듯 낙선운동의 방법을 최선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지지한다. 민주주의란 본디 작고 많은 비합법성을 모아 큰 변화를 이루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지식인들을 부역자처럼 게시하는 덜 합리적인 방법으로라도 지식인들을 <조선일보>에서 분리해내려 한다. 시민운동단체들은 낙천, 낙선되어야 할 후보들의 명단을 게시하는 덜 민주적인 방법으로라도 정치권의 인적 청산을 이루려 한다.
가상현실게임 동호인들(이른바 강단좌파들)이 그러는 거야 학술영역의 문제라 치더라도, 낙선운동을 하는 시민운동가들이 강준만의 방법을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와 같은 방법으로 대하는” 것이라 폄하하는 일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앞서 말했듯 강준만의 운동과 낙선운동은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같고, 20세기의 막판까지 빨갱이사냥을 일삼은 극우신문에서 지식인들을 분리해내는 일과 감옥에나 앉아 있어야 할 사람들을 국회의사당에서 쓸어내는 일은 차선의 선택을 감수할 만큼 유익하다. 강준만의 운동은 우리 사회의 전근대성을 청소하는 일이고 낙선운동은 우리 사회의 근대성을 고양하는 일이다. 전근대와 근대가 뒤섞여 돌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좃선운동과 낙선운동은 서로 존경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상식이다. | 씨네21 2000년_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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