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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10/23 역사의 상처 4
2024/10/23 17:26
나치는 우월한 게르만족의 혈통을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유대인을 학살했다. 같은 이유에서 동성애자도 수용소에 가두고 죽였다. 베를린 티어가르텐 공원에 세워진 ‘박해받은 동성애자를 위한 기념비’에는 “Totgeschlagen, Totgeschwiegen”(맞아죽은, 침묵에 죽은)이라고 적혀 있다. 뒤의 말에 오늘 독일인의 역사 반성이 잘 담겨 있다. 학살의 직접 가담자뿐 아니라, 침묵으로 방관한 사람 역시 학살의 동조자라는 성찰이다.

성찰이 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2차 대전 종전 후 과거를 덮거나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68혁명 즈음하여, 특히 지식인과 학살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의 적극적인 비판과 함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Nie wieder!”(다신 안 된다!)는 대다수 독일인의 마음가짐이 된다. 2008년 독일 총리 메르켈의 이스라엘 국회 연설엔 아마도 역사적 가해국 정치 수반에 의해 이루어진 가장 적극적인 표현이 들어 있다. “인종학살에 대한 책임은 독일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세계인이 독일의 역사 반성을 칭찬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일본의 태도와 자주 대비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지난해 하마스와 이스라엘 충돌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팔레스타인 인민에게, 하버마스의 발언은 나치를 옹호하던 독일 지식인들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다. 그는 국제적으로 저명한 학자이자, 앞서 말한 68혁명 즈음 본격화한 역사 반성에 주요한 역할을 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2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백 살이 가까운 하버마스를 노망들었다고 비웃기는 쉽다. 문제는 독일 지식인 사회에 이러한 경향이 만연하다는 사실이다. 옛 유대인 학살에 대해 깊은 반성을 표하는 그들은 오늘 이스라엘에 의해 자행되는 학살에 대해 비판하지 않거나 회피한다.

이것을 역사 반성의 애석한 부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종학살에 대한 반성은 모든 인종학살에 대한 반대로 나타나야 하며, 지난 인종학살의 피해자들에 의한 경우도 당연히 예외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미숙한 역사 반성, 좀더 냉정하게는 ‘역사 반성의 오만’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매우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된다. 역사 반성(한국에서 ‘역사 청산’이라고 표현되는)은 단지 두 당사자(독일과 유대인, 일본과 한국 등) 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 반성은 인류의 문제이며, 인류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접근할 때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
2024/10/23 17:26 2024/10/23 1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