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페촐트는 몇해 전 <트랜짓>을 감독 이름을 모른 채 봤고, 최근 <운디네>를 보고는 <바바라> <옐라> <열망> <피닉스> 등을 연이어 찾아봤다. 미학적 철학적 안정감이 각 영화의 구성과 서사는 물론, 여성 주인공 캐릭터들에 묘한 일관성을 부여한다. 니나 호스와 파울라 베어는 심연을 지닌 여신으로 나타난다. 페촐트는 이른바 예술영화 감독으로 분류되는 듯하다. 그런데 내 주변의 예술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들은 대체로 몰랐다. 난해하거나 실험적이지 않은 예술 영화 감독, 혹은 예술적인 상업 영화 감독이랄까. 다소 애매한 포지션이 오히려 좀 더 많은 사람에게 편안함과 즐거움을 줄 수도 있겠다. 이력을 살펴보니 페촐트는 하룬 파로키(!)의 조감독 출신이고, <피닉스>는 파로키의 마지막 각색 작품이다.
2024/01/30 15:44
2024/01/25 14:03
자본주의에서 합리적 삶의 추구가 영적 결핍을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게 사실일까.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자본주의에서 합리성은 효율성, 좀 더 정확하게는 경제적 효율성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합리적 삶이란 자본의 증식 운동 메커니즘에 나를 효율적으로 욱여넣는 삶, 영성과 경제적 효율성을 교환하는 삶이 된다.
2024/01/22 16:53
2024/01/04 09:16
민주화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는, 권위주의 체제가 물러나고 민주화가 되면 자연스럽게 좋은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엔 또 다른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인민이 스스로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있는데 권위주의 체제에 억눌려 있다는 믿음이다. 사실일 수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나쁜 경우 인민이 아직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은 없다는 사실을 권위주의 체제가 감추어주고 있는 걸 수도 있다.(흔히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는 1인 1표가 아니라 1달러 1표라는 모순을 갖는다고 하지만, 인민이 제 1표마저 부자 계급에게 주는 일은 매우 흔하다.) 어느 쪽이든 민주화는 진실을 드러낸다. 민주화는 좋은 사회의 보장이 아니라, 비로소 좋은 사회를 만들어갈 출발점인 셈이다. 권위주의 체제는 그 자체로 나쁘다. 그러나 나쁜 사회는 민주주의로도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미덕은 대체 뭘까. 인민이 어떤 사회를 만들까를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진 사회에 책임진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를 ‘인민의 자기지배’라고 하는 것도 결국 그래서일 것이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