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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3/09/01 역사의식
2023/09/19 11:36
교양이 “아이들이 제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힘”(지난 글 ‘교양의 힘’에서)인 이유는 무엇인가. 싱겁게 들릴 수 있겠지만, 교양이 애초부터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의미에서 교양은 사회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시민(부르주아)이 이전 주인인 귀족을 극복하는 문화 투쟁으로 출발했다. 단지 물려받은 신분으로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는 귀족에게, 세련된 지적 예술적 소양이란 그저 지배 계급으로서 품위 유지와 피지배계급과 분리에 사용되는 장식물이다.

그에 반해 시민은 인격적으로 문화적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가꾸어감으로써 세상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자격과 정당성을 증명해내려 노력했고, 그게 바로 교양이다. 교양은 본디 ‘더 나은 나 만들기’와 ‘더 나은 세상 만들기’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교양은 더 나은 나를 만드는 일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하나일  때, 분리되거나 생략되지 않을 때 성립한다.

근대 사회(자본주의적 근대 사회)가 안정화하고 부르주아가 지배계급의 지위를 확고히 함에 따라 교양도 애초의 역동성을 잃고 보수화한다. 교양에 수반하는 일정한 인문학적 지식과 예술적 경험 같은 것들이 껍질만 남아 그 자체로 교양 행세를 하게 된다. 교양은 자본주의 사회 상위 계급의 어설픈 귀족 흉내에 사용되는, 혹은 그들을 보좌하며 기생하는 교육받은 중간 계급이 인민과 자신을 구별하는 장식물로 전락한다.

더 나은 나 만들기는 더 나은 세상 만들기로부터 분리된다. 이른바 ‘자기 계발’은 그 극단적 형태다. 자기 계발의 사전적 의미는 ‘잠재하는 자기의 슬기나 재능, 사상 따위를 일깨우는 일’이니, 교양에서 나 만들기와 별다를 게 없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자기 계발은 전혀 다르다. 자기 계발은 인간이 전인적 발전이 아니라 ‘몸값’을 높이려는 행위, 총체적 인격으로서 나를 기각하고 상품으로 취급하는 변태적 행위이다. 자기 계발은 자본주의에서 교양의 최종적 파탄을 상징한다.

20세기에 생겨났다 사라진 현실 사회주의 사회들에서 교양은  자본주의에서와 반대로, 세상 만들기가 나 만들기로부터 분리한 경우다. 이 사회들은 부르주아의 장식물로서 교양을 노동자 농민의 살아있는 교양으로 교체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 소련의 지식인과 예술가에 대한 관료의 억압과 탄압, 모택동 치하 중국에서의 기괴하기 짝이 없는 하향식 인간 개조 실험(문화혁명) 등이 보여주듯, 교양에 대한 이해는 물론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한 것이었다. 이전 역사에서 축적된 지적 예술적 자원은 반동 딱지를 붙여 삭제해버리고 새로운 교양을 만드는 데는 실패한 결과는, 현재 러시아(인)와 중국(인)에도 짙은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

혼란과 위기 상황에서 아이가 제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힘은 교양이며, 교양은 더 나은 나를 만드는 일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하나라는 이야기는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주된 이유는 우리가 ‘교양 실종의 세계’에 이미 길들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개인의 문제는 지나치게 섬세하게만 보며, 세계의 문제는 지나치게 거대하게만 본다. 그러나 한 아이의 성장은 세계의 변화만큼 거대한 일이며, 세계의 변화는 내 아이의 성장처럼 섬세한 일이다.(주간경향)
2023/09/19 11:36 2023/09/19 11:36
2023/09/06 09:17
교양의 힘

'교양’은 본디 수입된 말로 일본 학자들이 독일어 ‘빌둥’을 번역했다. 빌둥은 인간 만들기(혹은 형성하기)를 뜻하는 ‘멘셴빌둥’(menschenbildung)의 줄임말이다. 영어로 교양은 ‘컬처’인데 역시 ‘경작하다’는 어원을 가진다. 교양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인격적이며 문화적으로 자신을 가꾸어가는 노력’이라 말할 수 있다.

한국 교육에서 교양은 또 다른 연원을 가진다. 해방 후 한국은 미국 학제를 도입해서 교육 체계를 꾸리면서 ‘리버럴 에듀케이션’을 ‘교양 교육’이라고 옮겼다. 서구에서 리버럴 에듀케이션의 역사는 장구하지만, 그 현재적 의미는 2007년 하버드대학이 발표한 ‘교육과정 개편 보고서’가 잘 대변한다. 보고서는 대학교육의 목적이 리버럴 에듀케이션임을 명시하며, 기존의 지식 습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깨트리고 나아가도록 하는 것임을 매우 열정적인 어조로 말한다.

“리버럴 에듀케이션의 목표는 추정된 사실들을 동요시키고,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며 현상들 아래에, 그리고 그 배후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폭로하고, 젊은이들의 방향감각을 어지럽혀 그들이 다시 방향을 잡는 길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오늘 한국에서 교양 교육은 무엇인가. 대학 입시까지는 입시 경쟁에 직접 효용성이 없는 상식과 잡식 습득이며, 대학에서 교양 과정 역시 신입생이 본격적인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훑고 넘어가는 지식 쯤이다. 교양 교육은 그 연원들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져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교육이 나름대로 마련한 교양 교육의 개념이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교양이 더 나은 인간이 되려 자신을 가꾸는 노력이며 틀을 깨고 나아가는 비판적 개인이 되는 일일 때, 교양 교육은 교실이나 대학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삶과 생생히 부딪혀야 한다. 괴테는 ‘교양있는 개인’을 온전히 말하기 위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썼다. 빌헬름은 부르주아 계급 출신임에도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세계가 아니라 예술을 추구하며 역경을 헤치고 인간적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같은 맥락에서, 교양 교육은 교양이나 교양 교육이라는 말이 수입되기 전부터 있었던 셈이다. ‘공부만 잘한다고 사람 되는 건 아니다.’ ‘동무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하고,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면 못쓴다.’ ‘인생엔 돈으로 사지 못하는 게 많더라.’ 등등. 오랫동안 그저 어른이라면 아이에게 당연히 반복해 들려주던 덕담엔 교양 교육의 정수가 들어 있다. 이젠 모든 어른이 일제히 멈춘 덕담들이기도 하다.

교양 교육이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사라진 건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노력’이 ‘더 비싼 인간이 되려는 노력’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교육에서 불의하고 불공정한 사건을 두고 벌어지는 열띤 논란들도, 주요한 기반은 내 새끼에게 매겨질 가격과 관련한 분노이다. 교양 교육이 사라진 사회에서, 아이들이 쉽게 각종 혐오에 빠져들고 토론보다 편 가르기로 흐르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세계는 경제, 노동, 기후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부문에서 위기가 깊어만 가고 있다. 보수든 진보든 기존의 가치들도 이미 붕괴했다. 한 문명이 저물어가는 듯한 시기에, 아이들이 꼭 배워야 할 건 살아남는 요령이 아니다. 혼란을 헤쳐나가며 제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힘은 교양이다.(주간경향)
2023/09/06 09:17 2023/09/06 09:17
2023/09/04 11:48
제국주의는 영토 침략과 식민 지배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에 ‘민족 문제’로만 보인다. 그러나 실체는 20세기 들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본격화한 독점 자본이다.

이윤 축적의 한계에 도달한 독점 자본은 국경을 넘어 확장해야 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빠르게 제국주의화하며 전세계에서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진다. 식민지는 원료와 노동력 공급지이자 과잉생산 상품의 판매처였다. 국가는 ‘국익’(이라 선전되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며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 제국주의 경쟁과 충돌을 갈수록 격화했고, 그 필연적 결과가 바로 두 번의 세계대전이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모순이 민족 간으로 확장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제국주의와 식민지는 민족 문제이자 본질에서는 계급 문제이다. 가령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조선 지배는, 일본 민족 전체의 조선 민족 전체에 대한 수탈이 아니라 일본 지배체제의 조선 인민에 대한 수탈을 뼈대로 한다. 일본 인민 역시 지배체제에 착취당하고 전쟁에 끌려나갔으며, 조선의 상층 계급은 조선 인민의 고난과 무관하게 안락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은 무엇인가.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배를 민족 간 문제로만 보는 독립운동은 반쪽짜리 독립운동인 셈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 독립운동에서 독립이란 일본인 지배 체제를 조선인 지배 체제로 교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수 인민의 관점에서 진정한 독립운동은 적어도 민족 문제와 계급 문제를 동시에 고민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독립운동가의 자주성을 유지하는 수준의, 일정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력은 결코 독립운동가로서 결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온전한 독립운동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2023/09/04 11:48 2023/09/04 11:48
2023/09/01 17:05
일제 강점기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독립운동 지지자가 된다. 친일파(일제 부역자)라도 거론되면 다들 비분강개한 얼굴을 한다. 훌륭하다. 그런데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살았다 해도 똑같이 훌륭했을까.

그 시절 사람들이 살아간 모습을 통해 추정해볼 수 있다. 대부분 제 식구와 현실적 안정을 좇았고 갈수록 독립운동의 ‘비현실성’을 말하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그 시절 사람들보다 사적 이해나 돈 문제에 훨씬 더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역사를 말할 때 쉽게 훌륭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 내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잡혀가지도 탄압받지도 않으며 딱히 손해 볼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좀 더 훌륭한 사람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역사를 생각하는 이유는 현재를 생각하기 위해서다. 역사는 단지 지나간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진행 중인 역사다. 그래서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역사의식은 역사를 현실의 눈으로 보게 하며, 현실을 역사의 눈으로 보게 해준다.

역사의식을 가지면, 지난 역사에 대해 쉽게 훌륭하기 어렵다. 그 현실을 살아낸 사람들의 고뇌와 번민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을 가지면, 지금 현실에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선택들을 고뇌하고 번민하게 된다. 지금 내게 매우 중요한 이해관계도 손해나 피해를 보지 않으려는 태도도, 역사의 눈으로는 너무나 사소하고 조악해서 부끄러워지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의 지배체제가 제국주의라면 현재 우리 삶을 장악한 지배 체제는 무엇인가. 윤석렬과 국힘인가. 그건 마치 제국주의의 한 분파를 제국주의 전체라 말하는 것과 같다. 옛 독립운동을 상찬하는 사람들은 현재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에 대해선 어떤가. 역시 ‘비현실성’을 말하는가.
2023/09/01 17:05 2023/09/01 1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