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22/02/28 이어령
  2. 2022/02/26 피시조차 못하는
  3. 2022/02/21 과학
  4. 2022/02/17 전태일 정신
  5. 2022/02/13 분수
  6. 2022/02/12 속도
  7. 2022/02/10 이진경
  8. 2022/02/09
2022/02/28 17:46
이어령 씨의 글이나 말을 좋아하는 걸 존중한다. 그의 글이나 말에서 특별한 유익이나 영감을 얻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가 '시대의 지성'이었다는 식의 표현은 사회적 차원의 검토가 필요하다. 그는 재기 있는 사람이고 그걸 부지런히 활용하여 세속적인 영예를 누렸지만, 지성인의 면모를 보인 적은 없다.

이어령 씨가 정치적 격변에서 양지만 좇은 건 흉한 일이되, 부차적이다. 그는 사회를 말할 때 언제나 민족이나 문명 단위로 퉁쳐서 말하는 방법으로, 민족과 문명 안에서 계급/계층 간 모순이나 적대를 회피했다. 그런 방법은 그의 세속적 영예 추구에 유효했고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 그를 소비하는 일에서 불편을 씻어주었지만, 지성과는 동떨어졌다.

20여 년 전, 그의 이대 석좌 교수 퇴임 때 중앙일보에서 '문지방 대담'이라는 걸 했었다. 내가 5분도 안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몹시 당황하며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는 어디서나 제 말만 늘어놓는 걸 대화라 알고 살아왔고, 그걸 사양하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대담은 그가 묻고 내가 답하는 형국으로 바뀌어버렸는데, 지면에선 비슷하게 말을 주고받은 걸로 정리되었다.

말년의 그가 종교에 귀의하고 지난 시간을 성찰하며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를 위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을 이미 지나치게 많이 해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모습은 그답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진지하고 심각하기만 한 사회는 끔찍하다. 그러나 이 사회가 적어도 이어령이 '시대의 지성'이라 여겨지고 김용옥이 '시대의 석학'이라 여겨지는 상태는 넘어서길 바란다.

2022/02/28 17:46 2022/02/28 17:46
2022/02/26 20:41
민주당에 대한 시민의 반감이 어느 정도인가는, 촛불로 몰아냈던 정치세력을 통해서라도 정권 교체를 해야겠다는 데서 확인하고도 남는다. 민주당 리버럴에 대한 시민의 반감은 미국에서 트럼프 당선을 낳았던 미국 시민의 리버럴에 대한 반감과 비슷한 맥락이 있다. 그걸 '위선적 진보 주둥이'에 대한 반감이라고 해보자.

미국 리버럴 진보 주둥이의 핵심은 역시 피시다. 피시, 즉 정치적 공정함은 정체성을 기반으로 혐오와 차별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회운동으로, 미국에서 1980년대 이후 본격화했고 이젠 리버럴 세력 전반에 자리 잡은 상태다. 한국 리버럴의 진보 주둥이는 미국 리버럴의 그것에 비교하기 어렵다. 우스운 말이지만, 위선에도 수준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대선 후보 이재명의 진보 주둥이를 경유한 무수한 혐오 발언들은 굳이 재론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법무부장관 명찰을 단 진보 주둥이의 우크라이나 사태 촌평은 또 어떤가. 혐오와 천박함에선 트럼프와 다를 바 없지만, 제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는 정치적 멍청함에서는 트럼프에 한참 못 미친다. 트럼프의 혐오 발언은 치밀한 계산의 산물이었다.

이 집단의 다른 진보 주둥이들, 심지어 여성 진보 주둥이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피시조차 못하는 리버럴의 쓸모란 대체 무엇일까. 이 집단에서 그나마 혐오 발언을 찾기 어려운 사례로 문재인 씨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 말에 진심을 담지 않는 사람이다. 혐오 발언도 나름엔 진심의 발로다.
2022/02/26 20:41 2022/02/26 20:41
2022/02/21 16:46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아마도 마르크스의 가장 유명한 말이고, 청년 마르크스가 처음 말할 때는 공포를 자아낼 만큼 급진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이젠 주류 리버럴에서 혁신 자본가에 이르기까지 개나 소나 갖다 쓸 수 있는 말이 되었다. 내 생각에 현재 시점에서 곱씹어볼 마르크스의 말은 이것이다.

‘사물의 외양과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할 것이다.’

사회 현실이 내가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히 파악된다는 믿음이 만연한, 사회적 토론은 가장 피상적인 차원의 윤리 논쟁(누가 가장 나쁜 놈인가, 만 따지는)에 멈추는, 정의는 너무 쉽고 분노는 너무 단순한 시절.
2022/02/21 16:46 2022/02/21 16:46
2022/02/17 10:15
'전태일 정신’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사람 이름에 정신을 붙이는 건 그의 삶이 역사적 의미가 있다 것, 그의 삶이 현재 사람의 삶에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의 정신은 그의 정신을 말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현실 속에 살아나기도 하고 엉뚱하게 왜곡되기도 한다. 근래 한국에서 '예수 정신'이라는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전태일 정신도 비슷한 처지에 있다. 586이라 불리는, 전태일 정신을 가장 많이 말한 사람들이 시민에게서 존중을 잃음으로써 전태일 정신도 좋지 않은 처지에 놓였다. 개인적으로 <태일이>가 5년 전쯤 만들어졌다면 훨씬 더 큰 관심, 정당한 수준의 관심을 받았을 거로 생각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흔히 586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진보이면서 기득권을 추구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런 윤리적 차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철학과 세계관이다. 오늘 586은 전적으로 자본의 철학과 세계관에 기반을 둔다. 그들은 전태일 정신을 말함으로써 전태일 정신을 죽인다. 오늘도 대선 이야기가 나왔다. 유력한 두 후보 중 누가 더 추한가, 누가 더 천박한가를 두고 말한다. 그러나 자본의 철학과 세계관으로 무장한다는 점에선 같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민은 그 사실을 문제 삼지 않는다. 이 상황이 <태일이>를 보는 우리의 불편함일 것이다. 기억할 것은  586이 진보의 다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소수가 여전히 존재한다. 노동하는 사람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인간의 사회라면 마땅히 어때야 하는가를 사유한다. 이윤이 아니라 필요를 위해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 경쟁 공정성이 아니라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를 고민하고 실천한다. 이들은 대선 정국의 중심에 있지도 않고, 대중적으로 주목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존재하기에 우리의 노동이, 우리의 사회가 이만큼 버티고 있다. 전태일 정신은 그렇게 살아있다. (<태일이> 응원 시사회에서 한 말.)
2022/02/17 10:15 2022/02/17 10:15
2022/02/13 09:03
산문가보다 성긴 문장을 구사하는 시인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단지 구매력이나 소비 한도에 관한 게 아니다. 내 삶을 사회에 비추어 그 위치와 역할을 분별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회주의자보다 덜 급진적인 생태주의자, 정치인이나 활동가보다 상상력이 빈곤한 예술가는 얼마나 슬픈 사람인가.
2022/02/13 09:03 2022/02/13 09:03
2022/02/12 13:35
올해부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느린 라이딩을 즐기기로 했으나, 여전히 빈번하게 속도계를 훔쳐보게 된다. 사이클리스트의 고질병, ‘평속 강박증’. 마침 고그 이번호 표지에 실린 숲속 달리기 시합을 보며 웃는다. 하나가 다르긴 하다. 나는 오로지 내 속도에만 관심이 있다.
2022/02/12 13:35 2022/02/12 13:35
2022/02/10 14:23
이진경이 과거엔 훌륭한 이론가였는데 최근 들어 고작 주류 리버럴의 호위 무사 노릇이나 하고 있다는 비판은 자연스럽긴 하지만, 피상적이다. 그는 과연 ‘과거엔' 훌륭한 이론가였는가. 이진경은 80년대에 이른바 PD 운동권이 스탈린주의로 치달을 무렵 이론가로 이름을 알렸고, 스탈린주의 국가들이 패망한 후 90년대엔 포스트 이론 수입상이었다. 스탈린주의야 극소수끼리 혁명놀이였다 치자. 그러나 지식 사회의 전반의 포스트모더니즘 유행은 마침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광풍에 빗장을 풀어버리는 거대한 지적 파산이었다.

요컨대 이진경은 그때그때 지적 유행에 앞장섬으로써 부각되었을 뿐, 소박한 수준에서라도 현실에 대한 이론적 통찰을 보인 적은 없다. 각 단계의 변신에서 이전 활동에 대한 이론적 해명이나 반성을 내놓은 적도 없다. 그의 행적을 윤리적 차원으로 비판하는 건 적절할까. 가령 지식인의 타락, 변절 따위로 보는 건 적절할까. 과한 이야기다. 그는 그저 언제나 분별없고 지각없었을 뿐이고, 여전히 그렇다. 지금 주류 리버럴의 호위 무사 노릇을 하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마르크스를 들먹이고 들뢰즈를 들먹이는 걸 보라.

(유사한 사례로, 역시 PD 이론가 출신이며 ‘윤석열 지지가 혁명적 선택'이라 주장하는 윤소영이 있다.)
2022/02/10 14:23 2022/02/10 14:23
2022/02/09 16:12
80년대를 그린 영화들이 586 선전물로 전락하는 건,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그 영화들의 단순함이 자초한 상황에 가깝다. <오래된 정원>(2006)은 예외적인 편이다. 역사 해석에서 그리고 시점에서 여러 겹을 보여준다. 한 장면에서 중요한 투쟁을 결의한 남자 후배는 바지에 손을 찌른 채 유유히 걸어 내려가고 청소부 부부는 리어카를 끌고 힘겹게 언덕을 올라온다. 한윤희는 그들을 바라본다. 한윤희가 카메라로 고개를 돌리면서 시점이 바뀐다. 죽은 한윤희는 현재 오현우에게 말한다. "쟤 요새 잘나가는 인권변호사래요. 다음에 무슨 선거에도 나간다던데."  

민중(청소부 부부)은 그들의 해방을 외치는 인텔리의 일상과 분리되어 대상화되어 있다. 그런 상황은 운동권의 교조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과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여성에게만 줄곧 관조 된다. 죽은 한윤희가 현재 오현우에게 건네는 말은, 영화가 혹은 동시대 감독 임상수가 시민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는 2006년 개봉했다. 지금 민주당과 586에 실망해 등을 돌린 사람들이 수구 기득권 세력만 물리치면 사회가 나아질 거라는 단순함에 한창 열을 올릴 때다. 바꿔 말하면, 그들의 단순함이 민주당과 586을 한창 자의식 없는 기득권 괴물로 키울 때다.

사회를 망가트린 단순함과 망가트러진 사회에 대한 분노의 단순함은 다르지 않다. 사회는 언제나 여러 겹을 이루고, 현재의 문제들은 실은 뒤늦게 드러난 오래전에 만들어진 문제들이다.
2022/02/09 16:12 2022/02/09 1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