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22/01/28 마법과 사인
  2. 2022/01/27 태일이 응원 상영회
  3. 2022/01/18 생각의 두께
  4. 2022/01/12 인터뷰
  5. 2022/01/11 멸공 소란
  6. 2022/01/10 애플
  7. 2022/01/03 자본주의는 정말 위기인가?
  8. 2022/01/01 새해
2022/01/28 14:36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도 하는데, 본디 선거권은 일정한 재산을 가진 부르주아 남성에게만 있었다. 보통선거권은 노동자의, 그리고 여성의 오랜 투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보통선거권이 인민을 정치의 주인으로 만들어줄 거라는 믿음이 순진한 것이었음은 바로 드러났다. 자유민주주의 하의 선거는 그 형식이 무엇이든 인격화한 자본, 즉 부르주아 남성의 이해를 대변한다. 자유민주주의 하의 선거는 시민으로 하여금 두 가지 생각을 일제히 멈추게 한다. 현재의 정치 체제를 넘어서는 정치에 대한 생각, 그리고 자신이 정치의 주인이라는 생각. 자유민주주의 하의 선거는 부르주아의 마법이다.

그 구체적 사례를 우리는 또 한 번 생생히 보고 있다. 시민은 유력 후보들의 매일 반복되는 동정과 일거수일투족 따위에 집중한다. 그 덕에 평소 할 줄 아는 게 그런 것뿐이라 비난받는 미디어와 그에 기생하여 조악한 정치공학을 나불대는 논객,  평론가들만 대목을 누린다. 마법 안에서 마법을 벗어날 순 없다. 마법을 벗어나려면 마법의 체제를 벗어나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너머를 생각하는 시민이 길을 연다. 민주적 사회주의, 새로운 사회주의, 혹은 생태 사회주의 뭐든 좋다.

이번 선거는 매우 특이한 면이 있다. 선거는 어찌 됐든 희망과 꿈이 유포되는 장이다. 다들 한껏 기대에 부푼다. 머지않아 실망하고, 다음 선거가 다시 희망과 꿈을 유포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체제 너머의 상상력과 에너지가 씻겨 사라진다. 그래서 부르주아에게 선거는 ‘민주주의 꽃’이다. 이번 선거는 기이할 만큼 희망과 꿈 같은 걸 찾아볼 수 없다. 널리 유포되는 건 '사상 최악의 후보들’이라는 탄식이다. 아마도 이건 역사의 사인일 것이다. 이 선거는 이 체제를 벗어날 때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2022/01/28 14:36 2022/01/28 14:36
2022/01/27 14:26
태일이 같이 보시죠.
2월 16일 저녁 7시, 응원 상영회 초대합니다.

상영을 마치고 관객과의 대화가 있습니다.



2022/01/27 14:26 2022/01/27 14:26
2022/01/18 15:32
급진주의자의 말이던 '세상을 바꾼다'가 테크 자본가의 애용어가 된 지 꽤 되었다. 전엔 이윤축적 운동의 혁신을 되도 않게 미화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속속들이 바꾸고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가령 SNS는 언어 생활을 바꾸었다. 인간은 생각하고 그 일부를 말한다. SNS의 인간은 먼저 말한다. 말할 거리만 생각한다.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는 일에 집착한다. 이런 변화들은 확실히 생각의 두께를 바꾸고 있다.
2022/01/18 15:32 2022/01/18 15:32
2022/01/12 09:04
북저널리즘 인터뷰. 고래가그랬어 관련한 인터뷰는 오랜 만이다. 인터뷰는 결국 질문. 묻는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더 나은 사회라는 게 어떤 것인가?”

“이를테면 근래 많은 사람이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공감하지만 경제적 불평등보다 더 나쁜 건 경제가 삶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교육에서도 근래 경쟁의 공정성 이야기가 많은데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교육에 경쟁만 남았다는 것이다. 누구도 교육이란 무엇인가 질문하지 않는다. 그 질문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이어져 있다. 모두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사회다. 인생이 단지 나를 판매하는 일이 아니라면, 더 나은 사회는 가능하다. 사회를 좀 더 긴 안목으로 역사적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2022/01/12 09:04 2022/01/12 09:04
2022/01/11 11:28
자본주의 극복을 말할 수 있는 사회라면, 멸공이라는 말도 가능은 한 셈이다. 멸공이 파시스트의 폭력과 사상 탄압의 용도로 사용되는 시대도 아니다. 멸공에 정색하고 분노하는 대부분 사람은 자본주의 아닌 사회를 꿈꾸긴커녕 반감을 가진다. 즉 그들은 순수한 의미에서 반공주의자다. 애초에 정용진이 스스로 바보임을 인증하고 망신당하는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었던 셈이다. 다만 이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소란을 통해 우리는 두어가지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변칙 상속으로 대자본가가 된 한 아재가 단지 부자라서 받는 존경을 정말 존경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한국이 부자 존경이 대단한 사회라는 사실), 국힘은 민주당의 대안도 586 응징의 방법도 아니라는 사실.
2022/01/11 11:28 2022/01/11 11:28
2022/01/10 09:33
<애플>을 봤다. 영화에서 기억상실 상태가 된 남자는 흔하고, 대개 그는 기억의 회복을 갈망한다. 그런데 이 남자는 기억의 회복을 회피한다. 관객은 그가 기억이 아니라 자신을 잃으려 했(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기억, 정체성, 관계, 상처를 함께 다루는 영화는 어른스러운 느낌, 감독이 여성일 거라는 느낌을 준다. 절반쯤 봤을 때 <경계선>이 떠올랐다. 감독은 이렇게 말하는 남자였다.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규칙을 바꾼 영화를 좋아해요. 우화적인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너무 공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더 선호하는 편이죠."
2022/01/10 09:33 2022/01/10 09:33
2022/01/03 10:17
'자본주의는 위기’라는 소리는 좌파의 유서깊은 말버릇이기도 하지만, 근래 상황은 확실히 달라 보인다. 자본주의에 동의하는가 반대하는가와도 무관하다. 현대적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주요한 비결은 ‘타협’이다. 자본의 착취와 노동의 살림이 맞부딪힌다면 혁명이든 뭐든 사달이 날 수밖에 없다. 둘의 타협 상태가 체제를 유지하게 해준다. 쉽게 말해서 노동 계급의 아이가 교육받고 자라 성인이 되면 취업을 하고 집도 구하고 가정도 꾸리면서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일이 가능한 상태다. 오늘 청년들에겐 불가능한 꿈이다. 흔히 말하는 ‘청년 문제’란 실은  ‘최근 노동 계급의 문제’이다.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모든 게 신자유주의 때문이니 케인스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방향을 바꾼 건, 케인스주의라는 카드를 다 썼기 때문이다. 기존 산업에서 더는 이윤 창출과 축적이 어려워진 자본은 타협 상태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기존 타협 상태에서 노동 몫을 탈취하게 된다. 불안정 비정규직이 표준이 되고 복지는 해체된다. 동시에 자본은 실물 경제와 분리된 허구적 금융 시장으로 뻗어 나간다. 다른 한편으로, 이윤 창출에 눈이 뒤집힌 자본은 '자연에 대한 착취'에서 완전히 선을 넘는다. 그 결과는 코로나로 기상이변으로 그리고 기후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2008년 미국발 공황이 터지자 좌파 일각에선 ‘신자유주의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꼭 20년 전 후쿠야마의 ‘역사는 끝났다’(자본주의가 최종 승리했다)는 선언에 대한 회심의 설욕이었지만, 결과는 어땠는가. 자본주의는 케인스주의로 돌아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끝낼 수도 없다. 남은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은 인격도 합리성도 없다. 인류와 자연이 위기에 처하든 말든, 온갖 변칙적이고 변태적인 방식으로 축적 운동을 지속할 뿐이다.

오늘 ‘자본주의는 위기’라는 말이 남의 일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더는 거대담론을 믿지 않는다, 작고 일상적인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선을 그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경제 성장이 희망이라는 믿음은 미신이다. 단지 생태주의적 탈성장을 말하는 건 아니다. 자본주의는 지나치게 노쇠했다. 성장이 가능했다면 신자유주의도, 신자유주의 금융화도 없었을 것이다. 노동 위기와 생태 위기가 동시에 펼쳐지는데 자본주의로는 해결 불가능하다는 건, 주장도 견해도 아닌 객관적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발상지이자 현 맹주인 영국과 미국의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부는 사회주의 바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은 마치 이 모든 상황에서 예외라도 되는 듯, 좋게 봐야 70년대쯤에서 튀어나온 듯한 두 아재의 악취 나는 정치 소극이 사회를 점하고 있다. 사방이 꽉 막혀있을수록 필요한 건 더 멀리 보는 힘, 역사적 관점이다. 이런 이야기는 여전히 비현실적이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비판적 지지니 최악보다 차악이니, 당장의 상황에만 집중한 20년 이상의 결과가 현재 상황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 20년을 돌아볼 수 있다면 앞으로 20년도 생각할 수 있다. 위기의 근본 원인을 살피고, 탈자본주의 기획의 주체가 되는 일을 상식으로 여기는 시민들이 출현할 때가 되었다.
2022/01/03 10:17 2022/01/03 10:17
2022/01/01 12:55
날씨가 맑습니다. 아침에 산책하다 문득 전에 쓴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좋은 글은 불편하며 좋은 음악은 가슴 아프다.’ 더 생각하게,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여전히 믿습니다. 그러나 음악 이야기는 바꾸고 싶군요. 좋은 음악은 좋아하는 음악이다. 가끔은 멈춰 설 수 있고, 늘 음악이 함께 하는 한해이시길 빕니다.
2022/01/01 12:55 2022/01/01 1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