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21/06/29 대기 신청
  2. 2021/06/29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3. 2021/06/25 초고
  4. 2021/06/23 강연
  5. 2021/06/21 우는 아재들
  6. 2021/06/20 김정은의 곤란
  7. 2021/06/11 이준석 당선의 의미
  8. 2021/06/08 왜 공부하는가
  9. 2021/06/03 투사
  10. 2021/06/02 ‘지식인이 수치심을...’ 참고 메모
  11. 2021/06/01 지식인이 수치심을 처리하는 방식
2021/06/29 16:19
대기 신청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하 대안공간 루프의 공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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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한 생각들> 강연 예약은 오픈 하루 만에 전회 마감되었습니다. 많은 관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예약 취소 등을 감안하여 대기 신청을 받습니다. 신청해주시면 예약 대기자로 등록되며, 자리가 날 경우 바로 연락드립니다.

강연 퍼포먼스 '상품 생산 사회의 비참' 예약 대기 신청
이름, 전화번호, 참가 희망 회차를 적어서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이메일: gallery.loop.seoul@gmail.com

강연자: 김규항

우리가 ‘상품 생산’이라는 독특한 재생산 방식을 가진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아담 스미스의 말처럼 교환이 인간의 본능이라서도, <멘큐의 경제학>이 적듯 모두를 이롭게 해서도 아니다. 근대에 이르러 사회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례 없는 풍요를 만들어낸 이 재생산 방식이 결국 인간과 자연을 동반 파괴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 구조와 그에 수반한 물신숭배 현상을 4회에 걸쳐 심도있게 고찰한다. 생태와 젠더와 공산의 사유가 자유인의 사상으로 연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모색이기도 하다.

1회: 7월 2일(금) 저녁 7시
2회: 7월 3일(토) 오후 3시
3회: 7월 10일(토) 오후 3시
4회: 이행 7월 11일(일) 오후 3시

간결한 생각들
Simple Thoughts
강연: 2021. 7. 2 - 7. 11
전시: 2021. 12. 9 - 12. 26
http://altspaceloop.com/exhibitions/simple-thoughts-2021
2021/06/29 16:19 2021/06/29 16:19
2021/06/29 08:08
김구는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나는 그렇지 않은 축에 속하는데, 오래전 『백범일지』를 처음 읽으며 받은 충격 때문인 것 같다. 감옥살이의 고통스러움을 한껏 토로하며 그는 적는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들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난다.”
 
오늘 어느 정치인이 김구처럼 말했다면 어떻게 될까. 사회도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도 변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김구의 말을 어떻게 여기든, 그의 말이 당시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건 사실이다. 그걸 인정하는 건 역사를 대하는 기본적 태도를 이룬다. 오늘 사회와 의식을 역사적 상황에 들씌우는 건 역사 해석이 아니라 각색 혹은 창작이다.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를 민족의 성녀라 추켜올리거나 자발적 매춘여성이라 깎아내리는 일도 그렇다. 위안부의 가장 주요한 정체성은 빈곤과 여성이다. 부유한 위안부도, 남성 위안부도 없다. 위안부는 ‘가난한 집 딸들’이었다. 딸을 파는 가난한 아버지들이 많았다. 김구의 말에서도 비치듯,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매매를 중계하는 조선인 업자들도 많았다.
 
팔려가는 딸들의 역사는 일본군 위안부로 끝나지 않았다. 해방 후 미군 위안부와 전쟁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역사로 이어진다. 연구자들은 한국 정부가 미군 위안부와 한국군 위안부를 매우 적극 관리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팔려가는 딸들, 여성 인신매매는 그 후로도 매춘 산업의 주요한 공급 방식이 된다.
 
근래 많은 시민이 나눔의집과 정의연(정의기억연대)에 분노했다. 일본군 위안부 여성을 지원하고 그들과 함께 싸운다는 명분 하에, 사익을 추구했다 볼 만한 정황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앵벌이 집단’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으니 시민의 실망과 분노가 어떤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만일 그 정황들이 사실이라 해도, 그 단체들이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들은 왜 변질했을까.
 
그 주요한 조건으로 콤플렉스 민족주의를 꼽을 수 있다. 한국인들이 반일 감정을 갖는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식민지 역사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 민족 전체와 일본 민족 전체 사이에서 일이 아니었다. 일본 지배계급(제국주의 세력)과 조선 민중 사이에서 일이었다. 대다수 일본 민중 역시 전쟁에 동원되고 착취당하는 피해자였으며, 조선의 지배계급은 일본 지배계급과 공조하며 안락을 유지했다.
 
해방 후 한국 지배계급은 그 역사를 민족 전체의 일로 만들어낸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부수면서도 반일 정책을 고수했고, 일본 군가를 즐겨 부르던 사무라이 박정희는 일본 문화를 엄격히 금지했다. 그들은 그런 정책 덕에 한국 내의 여러 모순적 상황들을 상당 부분 덮을 수 있었다. 반일 감정은 반세기에 걸쳐 극우 독재 세력의 손쉽고 효과적인 지배 수법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했음을 내세우는 현 정권이 이어받아 죽창가를 부르고 항일을 외친다.
 
‘친일파’는 그런 지배 수법에 최적화한 말이다. 우리가 문제 삼을 건 일본과 친했느냐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했는가이다. 이를테면 프랑스인들이 나치 부역자를 표현하는 말은 ‘콜라보’다. ‘친독파’에 해당하는 ‘제르마노필’은 단지 독일이나 독일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일파가 아니라 ‘일제 부역자’라 고쳐 말해야 한다.
 
위안부 관련한 학문적 견해 때문에 정의연과 나눔의집과 갈등을 빚고 마녀사냥을 당했던 박유하 씨에 대해, 그 단체들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무너지고도 지식사회의 재평가가 없다는 건 인상적인 일이다. 박 씨의 재평가엔 자신들의 오류 인정이 수반되기 때문일 것이다. 논의는 사태의 구조가 아닌 개인 윤리 차원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제 윤미향이 새로운 마녀이며, 옛 마녀 박유하는 침묵으로 배제된다. 그들은 여전히 한나 아렌트에게 민족 배신자 낙인을 선사한 ‘악의 평범성’을 말한다.
 
콤플렉스 민족주의는 한국 남성 특유의 가부장적 피해의식과 관련이 있다. 일본에서 역사 관련 발언이라도 나오면 다짜고짜 발끈하기부터 하는, 일본과 스포츠 경기를 ‘전쟁’(대일전)으로 규정하며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피해의식 말이다. ‘가장 민족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괴테의 말도 의미가 바뀐다. 괴테의 말에서 ‘세계적’이란 인류 보편성을 뜻한다. 한국에서 그 말은 다른 민족과 비교와 우열을 표현한다.
 
민족은 실재하며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보편성을 잃은 민족주의는 언제나 예외 없이 악용된다. 콤플렉스 민족주의가 만연할 때, 지워지는 건 민족 내의 계급 현실이다. 그리고 계급 현실의 보편성에 기반을 둔 인류애다. 평범한 한국 노동자의 친구는 동족 이재용인가, 평범한 일본 노동자인가. 콤플렉스 민족주의를 벗고 보편적 인류애를 가진 개인들로 설 때도 되었다. 오늘 한국 시민은 당연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그게 진정한 역사 청산이며 회복이다.
 
2021/06/29 08:08 2021/06/29 08:08
2021/06/25 09:04
<혁명노트>를 읽은 분들 중에 물신성(물신숭배)이 뭔지 잘 모르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물신숭배론은 마르크스 사상 전반에서 손꼽게 어렵고 오해와 오독도 광범위하지만, 그만큼 중요하다. 21세기 자본주의에서 더욱 그렇다. 비유하자면 물신숭배론은 자본주의에 관한 지동설 같은 것이다. 고대인들이나 우리나 해가 뜬다 해가 진다, 말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게 사실은 아님을 안다. <혁명노트>는 물신숭배의 영향과 폐해들을 강조하는데, 정작 물신숭배가 뭔가는 충분히 기술하지 않는다. 혁명에 관한 단상들이지 <자본>해설서는 아니라 변명할 순 있겠으되,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고민 끝에 아예 ‘매우 간결한’ <자본> 해설서를 쓰기로 하고, 10여년 전 다른 주제의 책을 계약해놓고 기다려 온 김영사와 내기로 한 게 작년 여름이다. 방금 초고가 나왔다. 가제는 ‘예술 시민을 위한 자본주의 세미나’.
2021/06/25 09:04 2021/06/25 09:04
2021/06/23 12:55
노동 위기도 기후 위기도 팬데믹도 ‘다 자본주의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중요한 건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의 어떤 점이 위기를 만드는 건지 알아보는 일, 그래서 무엇을 할지 함께 고민하는 일이겠죠.

‘간결한 생각들’이라는 4인 프로젝트에서 강연합니다.



2021/06/23 12:55 2021/06/23 12:55
2021/06/21 14:24
정상 범주에 속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중장년 아재에게 국회의원이라는 지위가 갖는 특별한 마력이 있다. 남보다 힘을 갖는 것 외엔 제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을 한번도 배운 적 없는 아재들은, 신체도 지력도 예전 같지 않다 느낄 무렵 힘의 새 껍질을 찾게 된다. 그래서 이런저런 짓들을 하는데 그 정점이 국회의원이다.

한국 국회의원이 뭘 하는 직업인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일상에서 특권이나 편리는 최고 수준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디서든 호통치고 어디서든 으스댈 수 있다. 우스꽝스럽긴 해도 당사자에겐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처절한 순간들이다. 어지간히 사회활동을 한 중장년 아재라면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들 혈안인 이유다.

그러니 흔해빠진 의사, 변호사 명함을 내세워 SNS 골목대장 노릇이나 하는 중장년 아재에게 ‘청년-여성-비례대표’ 국회의원은 그 자체로 얼마나 부당한 존재겠는가. 보는 것만으로도 부아가 치미는데, 거침없이 제 생각을 밝히기까지 한다면 부들부들 떨릴 수밖에. 그 심정 남은 모른다. 그 아재들은 단지 낡은 사고를 자가 폭로하고 있지 않다. 그 아재들은 울고 있다.
2021/06/21 14:24 2021/06/21 14:24
2021/06/20 14:56
김정은이 케이팝과 한류 문화상품을 북한 청년을 부패시키는 ‘악성암'이라고 규정하고, 막지 않으면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고 했단다. 일단 정확한 상황 파악이다. 다만 정말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북한만큼 인민 통제에 성공한 전체주의 체제가 없긴 하다. 그러나 청년에게서 그들이 매력을 느끼는 문화를 분리하는 일은 핵위협과 싸우는 일보다 어렵다. 금지하고 탄압하면 없던 매력도 생겨난다. 게다가 북한청년들은 이전 세대처럼 수령을 은인이라 여기지 않는다.
2021/06/20 14:56 2021/06/20 14:56
2021/06/11 18:48
이준석 당선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는 세대 교체가 아니라 이념 교체이다. 그의 당선은 한국 보수세력이 70년 이상 유지해 온 반공주의가 시효를 다했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문재인은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는 멍청이들이 보수에서 사라지는 변화이자, 동시에 보수(국힘)와 리버럴(민주) 정치 구도의 변화이다. 반공주의는 두 세력의 마지막 변별성이었기 때문이다.

두 세력이 레토릭으로서 아닌 실제 정책 차원에서 시장주의 우파로 동일화한 건 2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보수:진보’ 정치쇼를 고수하며 그들만의 기득권 경쟁에 전력한 결과, 사회가 이 지경이 되었다.

그들과 맞서는 좌파정치 세력이 없다시피하다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진보 이준석들의 분발을!), 한국 제도정치의 가장 오랜, 가장 고질적인 병폐 하나가 해결된다는 건 그 자체로 희망적인 일이다.
2021/06/11 18:48 2021/06/11 18:48
2021/06/08 10:39
반이명박 운동이 한창일 무렵, 후배에게 반 농담으로 말했다. ‘고작 이명박을 쥐라고 욕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책이 필요해?’ 이명박 비판이 카타르시스 이상의 의미가 있으려면 이명박 개인 인격이 아니라 이명박으로 표현되는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이어야 하고, 당연히  ‘왜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까?’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당시 그런 비판을 수행하기에 충분해 보일 만큼 공부하고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꽤 실망했던 것 같다. 반 농담이라곤 했지만, 그 중 하나일 뿐인 후배가 조금은 애꿎게 타박을 들은 셈이다. 시사평론을 하기 위해 인문 사회과학 공부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해 평범한 통찰력을 유지할 거라면 굳이 어렵게 공부하고 책을 읽을 이유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런 자문을 하지 않게 된 것도 결국 포스트주의 바람의 후과다.)
2021/06/08 10:39 2021/06/08 10:39
2021/06/03 09:38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를 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실은 사랑이 아니라 실패한 자기애의 투사(投射)이다. 콤플렉스, 좌절감, 불안증에 지나치게 억눌린 자기애는 자아 밖으로 삐져나와 대상에 투사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실패한 자기애의 투사를 사랑이라 믿는 일은 연인이나 자식처럼 사적인 관계에서뿐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 현상으로도 나타난다. 오늘 이 사회와 성원을 더욱 고단하게 만드는 (지지자가 아닌) 빠, (신앙인이 아닌) 광신도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도무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그들은 슬픔과 분노에 눈이 뒤집힌 채 ‘정의’와 ‘신의 뜻’을 외친다.

다만 그들을 경멸하며 나는 전혀 다르다고 자신할 건 없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콤플렉스, 좌절감, 불안증을 온전히 통제하는 인간은 없다.
2021/06/03 09:38 2021/06/03 09:38
2021/06/02 09:51
댓글에 지면 부족으로 빠진 부분을 올렸고, ‘주제가 커서 속편을 쓸지도 모르겠다’고 적었지만, 지면 성격상 그럴 가능성은 사실 매우 적다. 읽는 데 참고가 될 이야기를 조금 메모해 본다.

1. 수치심

그 지식인들이 정말 수치심을 느꼈는지 느꼈다면 얼마나 느꼈는지 정확하게 알 방법은 없고, 물론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 이 글에서 수치심은 그들 개인의 심리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이 공통으로 처한 심리적 상황(그들의 심리가 공통으로 처한 사회적 상황)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열정적인 신념은 그것과 관련한 현실이나 사회 구조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20세기 초 서유럽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에게 공산당, 그 중앙 지도부로서 소련 공산당, 그리고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가 그렇다. 그런데 그 현실이나 구조를 신뢰하고 존경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이번엔 열정적인 신념이 손상을 입게 된다.

사실 이런 일은 얼마든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났을 때 대응 방법도 그리 복잡할 게 없다. 우리는 그걸 ‘비판적 성찰’이라고 말한다. 20세기 중반 서유럽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그걸 못하고, 회피와 도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특히 프랑스 지식인들의 행태가 불거졌는데, 그로부터 희한한 상황이 펼쳐진다. 그들은 단지 폼나게 추락하면서 ‘난다’고 말하는 <토이스토리>의 버즈 라이트이어였다. 그런데 그들이 ‘’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새로운 나는 방법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나고 CIA의 응원까지 받으며 미국에서 상품으로 재가공되어 전세계에 퍼져나간다. ‘포스트모더니즘 소동’이다. 그 소동이 신자유주의에 길을 열어준 건, 본문에 언급했듯 한국에서 특히 심각했지만 세계적인 상황이기도 했다.

2. 알튀세르

본문에 적었듯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복권하기 위해 갖은 노력(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를 도입하며)을 다 한다. 알다시피, 그에게 현실적으로 긴급한 숙제는 마르크스(성숙기의, 과학적인)를 회피하기 위해 청년 마르크스(헤겔에 물든, 낭만적 휴머니스트인)를 다시 불러내는 신좌파와의 대결이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 사상이 초기와 성숙기로 ‘인식론적 단절’을 보인다고 전제하고(물론 이건 <공산당선언>과 <자본>의 차이만 보더라도 분명한 사실이다.) 성숙기만 읽자, 즉 <자본>을 읽자고 제안한다. 단, 역시 헤겔에 물든 <자본>의 첫머리 부분은 빼고.

흔히 <자본>의 핵심으로 잉여가치론, 즉 자본주의가 계급 착취 사회임을 규명한 것을 든다. 물론 중요한 이야기이지만 <자본>의 근본적 성취는 첫째로 상품의 ‘가치’(현대 경제학은 가치는 제쳐두고 ‘가격’만 말한다)와 노동의 관계를 분석하여, 생산에 관한 공동체 질서라는 게 없는 자본주의 사회가 재생산을 유지하는 원리(현대 경제학은 그것을 단지 ‘시장원리’라고만 말한다. 사회과학인가 종교인가?)를 해명한 것. 둘째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사물과 사물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는 이유가 ‘상품생산’ 사회라는 구조 자체에 기인한다(대개 ‘자본주의의 비인간성’ ‘자본주의의 소외 현상’ 등 정서적으로만 표현된다. 그리고 보다시피 자본주의적 삶을 실제로는 열심히 수용하되, 조금은 고뇌하는 얼굴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중산층 리버럴에게 주로 애용된다.)는 걸 해명한 물신숭배론이다.

그 둘이 <자본>의 전체 논의를 이끌고 간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둘을 헤겔의 악한 흔적이라며, 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르라는 명민한 인물에게서 이런 어이없는 오류는 왜 일어났을까? 우리는 그 오류가 앞서 말한 수치심의 상황에서 분투한 알튀세르의 ‘오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알튀세르 ‘이후’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의 끝없는 지적 혼란도 물론 그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포스트 구조주의가 결국 ‘포스트모더니즘 소동’으로 변해가는 과정 역시 그렇다.
2021/06/02 09:51 2021/06/02 09:51
2021/06/01 08:28
"그들이 어이없는 역편향에 빠진 건 그들이 생산과 노동이 이루어지는 실제 현실이 아니라 책과 연구실로 축조된 관념 세계에서 살아가는 먹물이어서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사유가 수치심으로 잉태했기 때문이다."



*

지면이 부족해 빠진 부분들. 칼럼 한 편에 담기엔 큰 이야기라, 속편을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진지한 사람들은 말한다. ‘마르크스를 제대로 읽은 푸코주의자가 없고 푸코를 제대로 읽은 마르크스주의자도 없다.’ 의미있는 말이지만, 푸코가 마르크스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사실부터 되새기는 게 좋다. 옛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푸코의 수치는 실은 제대로 된 마르크스주의자인 적이 없었다는 데서 나온다. 386의 수치 또한 그렇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폐해는 인정하더라도, 그 텍스트들이 갖는 의미가 있지 않냐고 말한다. 물론이다. 아예 없다면 그렇게 거대한 폐해를 일으킬 건덕지나 있었겠는가. 그러나 텍스트로든 컨텍스트(사회적 역사적 맥락)로든 그것이 수치로 잉태했고 업데이트된 반공주의의 소임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알튀세르가 말한 마르크스의 ‘인식론적 단절’은 사실이다. 마르크스의 가장 유명한 두 저작 <공산당선언>(1848)과 <자본>(1967)를 보더라도 다른 차원의 사유를 보인다. 문제는 알튀세르가 말한 인식론적 단절의 지점이 엉뚱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소외’ ‘이데올로기’ 같은 개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상품 물신숭배’(1권 1편) 논의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전체계를 해명한다.”

2021/06/01 08:28 2021/06/01 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