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21/01/25 교훈
  2. 2021/01/25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3. 2021/01/23 유시민의 반복
  4. 2021/01/20 새 프로필
  5. 2021/01/19 새해엔
  6. 2021/01/14 기이한 정치쇼와 좌우 분별
  7. 2021/01/14 시사와 역사
  8. 2021/01/01 유토피아
2021/01/25 13:58
김종철 사건으로 우리는 소중한 교훈 하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성폭력과 관련하여 ‘그럴 사람이 아니다’ 따위 말은 해선 안 된다는 것. 누구나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것.
2021/01/25 13:58 2021/01/25 13:58
2021/01/25 09:27
<혁명노트>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선정되었다. 심사평이 언급하듯 이 책의 디자인에서 먼저 눈에 띄는 점은 본문과 주가 대등하게 배치된다는 점일 것이다. 집필 작업에서 주를 ‘또 하나의 본문’으로 상정했고, 디자인에서도 반영할 것을 요청했었다. 레이아웃 시안은 만족스러웠고 결과도 좋았다.

"<혁명노트>가 선정된 이유는 명확하다. 책이란 매체가 오랜 세월 일군 일반적 문법에서 벗어나려면, 편집과 디자인이 긴밀히 함께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능하다는 뜻은, 그 일탈이 단지 관습에서 벗어나는 데 그치지 않고 책의 내용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임을 함축한다. 119개의 짧은, 그러나 날 선 글과 그에 딸린 주들로 이뤄진 이 책은 주를 본문과 동등한 위치에 둠으로써 암묵적/명시적으로 텍스트에 부여되는 위계를 전복하고 나아가 독서의 흐름 자체를 바꾼다. 혹자는 그 독서 방식에 다소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을 테지만 디자인이 이렇듯 명시적으로 독서에 개입할, 적절한 기회가 흔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또한 형식이 앞으로 나서면 대개 텍스트는 그에 저항하기 마련인데, <혁명노트>는 최소한의 장치로 의도한 형식 내에서 주어진 내용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다. 이는 판형이나 타이포그래피 등에 대한 디자인적 판단 못지않게 편집적 선택과 수행이 동시에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텍스트의 위계에 대한 전복이 가독성을 헤치는 수준에 이르기 전에 멈춘 점은, 디자이너나 독자로서는 당연해 보이는 선택이지만 심사 위원들로서는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앞머리에 실린 마르크스의 제사(題詞)에 이어 군더더기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는 편집 구성, 제사를 좌우상하로 뒤집은 후 목차에 겹쳐 찍은 표지,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책 전체에 걸쳐 적용된 일 일관된 그래픽 요소 등은 일견 간결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주목되는 요소들인바, 책의 제목이 ‘혁명노트’가 아니었다면 일부는 자칫 과해 보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혁명의 전복적 힘을 책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디자이너의 의도는, 한글과 로마자의 글자 사이가 너무 좁아 종종 서로 붙기까지 하는 타이포그래피 조판마저도 일종의 전복으로 느껴지게 한다. 판형, 종이, 제책은 물론 내용에 대한 해석, 편집과 디자인적 선택과 수행에서 심사 위원들이 고루 주목한 수작이다." (박활성)

2021/01/25 09:27 2021/01/25 09:27
2021/01/23 08:15
누군가를 비판하게 되더라도, 그의 사회적 인격과 개인 인격은 분리하는 걸 원칙으로 해왔다. ‘나쁜 짓을 한 놈’이라고는 해도 ‘나쁜 놈’이라고는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뜻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인격을 온전히 판단할 수 있는가, 에 나는 회의적이다. 유시민 씨는 거의 유일한 예외였던 셈이다. 10여 년 전, 그가 현역 정치인일 때 이렇게 썼다.

“나는 그런 사람이 좋다. 오만할 법한 위치인데 겸손과 성찰을 잃지 않는 사람, 누가 봐도 초라한 처지인데 아랑곳없이 기개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들이다. 내가 유시민 씨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정반대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힘을 가질 때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애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일삼다가, 처지가 달라지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반성과 성찰을 말한다. 게다가 그런 상반된 모습은 늘 반복된다.”

인간이란 처지와 위치에 따라 생각과 말이 달라지는 동물이다. 그러나 그 차이가 지나치게 클 때 우리는 그의 인격을 의심하게 된다. 유시민 씨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 그가 또 반성과 성찰을 말했다. 유시민의 반복 속에서 이것은 일단 ‘처지가 좋지 않은 국면’임을 뜻할 뿐이다. 얼마간 침묵하다가 잔뜩 사색하는 얼굴로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책을 내고, 그게 먹히면 다시 스위치가 켜지듯 예의 정치적 활동을 재개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유시민의 반복이 이젠 끝나길 바란다. 사회적 해악이 너무 많았다. 유시민의 반복을 가능하게 해준 사람들도 이젠 그만하길 바란다. 그에 관한 오랜 속담이 있다. “유시민을 좋아하지 않는 데 필요한 건 기억력뿐이다.”
2021/01/23 08:15 2021/01/23 08:15
2021/01/20 08:33
B-3084-R
프로필로 쓰는 사진들이 너무 오래 되고 해서, 얼마 전 새로 찍었다.
김용호 선생께 감사드린다.
2021/01/20 08:33 2021/01/20 08:33
2021/01/19 16:42
고래동무가 되어보셔요.

2021/01/19 16:42 2021/01/19 16:42
2021/01/14 13:18
2016년 10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촉발한 대규모 촛불집회가 시작된다. 이듬해 3월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파면 구속되고,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발한다. 사람들은 일련의 과정을 ‘상식의 회복’이라 말했다. 2019년 8월 조국 사태가 일어나고 정략적 검찰개혁을 비롯한 연이은 실정으로 문재인 정권에 대한 여론이 악화한다. 2020년 12월 정경심씨가 유죄 판결을 받고 윤석열씨가 업무 복귀한다. 사람들은 또 한 번 ‘상식의 회복’을 말했다.
 
상식은 ‘일반적인 사람이 다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이나 판단력’을 이른다. 상식은 하나가 아니다. 한 사람에게 상식인 게 다른 사람에겐 상식에 못 미치는 것일 수 있다. 한 사회에서 상식인 게 다른 사회에선 아직 상식이 아닌, 특별한 것일 수도 있다. 사회가 더 나아진다는 건, 상식이 아니던 것들이 상식이 되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가 그 외형이나 교육 수준 등에 비해 특별히 빠진 상식이 하나 있다. ‘좌우 분별’이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사회, 즉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정치는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경향의 우파와 극복하려는 경향의 좌파로 나뉜다. 우파와 좌파엔 여러 갈래가 있고 또 변화하지만, 크게는 그렇다. 흔히 새의 양 날개로 비유되기도 한다. 우파 정치와 좌파 정치가 잘 펼쳐져 작동할 때, 사회는 건강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파 일변도 혹은 좌파 일변도의 사회는 물질대사가 막히고 결국 썩게 된다.
 
한국 정치는 우파 일변도의 상태에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격렬한 ‘좌우대립’ 상태에 있다. 우파인 우파와 좌파 행세하는 우파의 대립이다. 후자가 청년 시절 잠시 어설프게나마 좌파였던 건 사실이나, 민주화 이후 주류 사회에 진입하고는 늘 우파였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수용할 뿐 아니라 신봉한다. 그들은 기존의 우파를 넘어서는 기득권 세력이 되고도, 여전히 좌파 행세를 한다. 재미있는 건 기존 우파가 그런 좌파 행세를 폭로하거나 비판하긴커녕 매우 열심히 돕는다는 사실이다.
 
두 우파의 격렬한 좌우 대립. 이 기이한 정치쇼가 한국 정치의 본질이다. 두 세력은 이 정치쇼에 대부분의 사회 성원을 포박하고, 기득권과 자산을 빨아들인다. 정치쇼는 ‘적대적 공생 체제’로 유지된다. 두 세력은 기득권과 자산을 두고 적대적 경쟁을 벌인다. 그러나 기득권과 자산의 생산자인 다수 인민에 대해선 철저히 연대한다. 두 세력은 원수처럼 갈등하다가도 노동 관련 입법이나 정책에선 예외 없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
 
이 정치쇼 하에서 ‘상식의 회복’ ‘좌우가 아니라 상식과 몰상식’ 같은 외침은 허망한 일이 된다. 상식의 회복을 외친 사람들이 상식의 파괴자로 재등장하는 악순환을 피할 수 없다. ‘중도’의 노력도 싱거운 일이 된다. 좌우 대립의 폐해를 지양하는 현실적 노선은 가짜 좌우 대립 상태에선 성립할 수 없다. 상식의 회복을 넘어 새로운 상식, 좌우 분별의 상식이 필요하다. 좌우 분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진 않는다. 그러나 좌우 분별조차 없다면 다수에겐 아무 희망이 없다. 좌우 분별은 정치의 출발점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정치는 두 우파 정치 세력 중 한쪽에 대한 실망이 다른 쪽에 대한 기대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반복해 왔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실망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기대로, 박근혜 정권에 대한 실망은 노무현 정권 재평가와 문재인 정권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는 식이다. 그 인과관계가 합리적이었던 건 아니다. 기대는 대개 현재의 실망이 과거의 실망을 삭제하고 낭만화한 것에 불과했다. 3년여 시차를 두고, 두 세력 모두 상식 이하의 집단임을 스스로 증명했으니 이젠 그런 반복도 어렵게 된 셈이다.
 
20여 년이면, 관점을 바꿔 생각할 때도 되었다. 많은 우파 시민은 현 정권을 좌파라, 사회주의자들이라 부른다. 반대하고 비판하는 의도에서지만, 그 세력의 좌파 행세와 정치쇼에 놀아나고 있다. 옛 극우 파시즘을 잇는 우파 세력을 유일한 악의 근원으로 두고 스스로 박제가 되어버린 현 정권의 열성 지지자들은 그 거울 쌍이다. 둘의 몰상식을 개탄하는 사람들이라고 낫진 않다. 좌파 행세하는 우파 정치 세력에 매번 턱없는 좌파적 기대를 걸고는 실망과 배신감을 토로하길 20여 년 반복하는 사람들 말이다. 가장 이성적임을 자부하는 그들 역시 정치쇼에 놀아나고 있다.
 
주인이 되려면 주인으로 행동해야 한다. 봉건제나 군사 파시즘 하의 신민이 아닌 민주주의 정치의 주권자라면, 이 기이한 정치쇼를 거부해야 한다. 피해자 노릇도 그만해야 한다. 정치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만 토로할 게 아니라, 애초 내 기대가 오류였음을 성찰해야 한다. 정치의 주인으로서 나는 어떤 사회를 전망하는지, 그 도정에서 내 삶은 어떠할지 사유해야 한다. 좌우 분별의 상식을 가진 시민에 의해 정치가 시작된다. 우파 시민과 좌파 시민은 비로소 혐오와 조롱을 거두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사회적 토론을 벌여갈 수 있다.
 
2021/01/14 13:18 2021/01/14 13:18
2021/01/14 13:18
개인이든 사회든 살림을 잘 꾸려가려면, 시사와 역사를 함께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시사는 진행 중인 역사이며 역사는 지난 시사이다. 20세기 초중반 세계가 역사 과몰입의 경향이 강했다면, 신자유주의 혹은 포스트모던 이후 세계는 시사 과몰입의 경향이 강해졌다. 근래 한국은 그중에서도 극단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역사적 관점을 잃으면 속류 포스트모던에서 주장하듯 일상과 미시적 관점은 얻을 것 같지만, 실제론 다들 눈앞의 이해득실만 생각하게 된다. 커진 자본의 힘에 일방적으로 떠밀리기 때문이다. 이상, 신념, 사랑, 우정, 헌신, 위엄 같은 것들이 발붙일 자리가 없는 사회에서 개인의 삶은 무력하고 암울하다.

최근 한국은 마치 두 유형의 사람들로 구성된 듯하다. 더 나쁘고 더 몰상식한 인간들, 그리고 더 나쁘고 더 몰상식한 인간들을 찾아내고 진열하는 사람들. 무력하고 암울한 삶을 위로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둘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2021/01/14 13:18 2021/01/14 13:18
2021/01/01 09:55
최혜령 작가는 고래 206호 표지 일러스트에 <유토피아>라는 제목을 붙이고 적었다.

"잠깐의 외출도 힘들어진 요즘, 마스크 없이 어딘가 떠나고 뛰놀던 일상은 꿈만 같은 일이 되었어요. 아무 걱정 없이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그곳이 모두의 유토피아일지도 모르겠어요."

알다시피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쓰며 만든 말이다. 이상 사회를 의미하지만, 단어의 본디 의미는 ‘없는 곳’이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일이다. 다른 세상 만들기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조각들을 현재 세상 안에 조금씩 옮겨놓는 일이다.

예전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을 막아선 건 반공파시즘 같은 외부의 금지와 탄압이었다. 언제부턴가 현실성, 현실적 가능성만 따지는 우리 자신이, 움츠러든 마음이 더 강고한 장벽이 되었다. 상식의 회복을 넘어 유토피아의 회복이 필요하다.

유토피아가 반드시 거창한 것일 이유는 없다. ‘걱정 없이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그곳’처럼, 생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밝아진다면 내 유토피아다. 새해엔 우리 모두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품길 소망한다.
2021/01/01 09:55 2021/01/01 0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