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20/03/30 바이러스의 작업, 예술가의 작업
  2. 2020/03/29 농락당한 사람들
  3. 2020/03/29 기생충 파시스트
  4. 2020/03/26 역겨움
  5. 2020/03/24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들
  6. 2020/03/24 교육, 남자아이, 포르노
  7. 2020/03/15 문명
  8. 2020/03/13 예스24 인터뷰
  9. 2020/03/12 오디오 주석
  10. 2020/03/04 듬직함
2020/03/30 12:13
월간미술 4월호 권두 칼럼. 며칠 전 올린 중앙일보 시론과 함께 코로나19를 소재로 요청받은 글이라 도입부가 비슷하다. 이 글에선 근래 자본주의가 파괴한 생태와 노동 가운데 노동, 특히 ‘예술 노동’에 대해 썼다. 월간미술은 글과 함께 마누엘 발레스터의 <5월 3일 3de Mayo>을 실었다. 고야의 <5월 3일>에서 인물들만 제거한 작품이다. 핏자국만 남은 텅 빈 화면은 1808년 학살을 방금 일어난 사건처럼 느끼게 한다. 그렇다. 예술가에게 평온한 세계란 ‘학살 직후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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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의 작업, 예술가의 작업


14세기 유럽 인구의 1/3을 사라지게 한 페스트는 중앙아시아의 들쥐에 기인했다. 들쥐 몸에 사는 벼룩이 인간에게 페스트균을 옮겼고 전쟁이나 교역 등 국제적 이동을 통해 유럽까지 전파되었다. 공중위생과 항생제, 백신 등이 일반화한 현재 페스트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콜레라, 장티푸스, 홍역 등 오랫동안 인간을 위협하던 전염병들도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게 된 지 오래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난데없이, 동물과만 관계하던 바이러스가 변종과 변이를 거듭하며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2002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 그리고 이번 코로나19 등이다. 이것은 현재 인류 문명이 생태환경과 관계에서 최종 한계선을 넘었음을 의미한다. 현재 문명을 구성하는 보편적인 방식은 자본주의(혹은 중국처럼 사회주의라 주장되는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 문명의 특징은 인간이 주인이 아니라는 데 있다. 자본의 이윤 추구와 축적 운동이 문명의 동력이자 주체이다. 현실에서 그런 속성이 언제나 완전히 발현되는 건 아니다. 반자본주의 운동이나 여러 사회적 요인들이 견제하고 조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된 기간, 특히 현실 사회주의라는 왼쪽의 힘(현실 사회주의가 제대로 된 사회주의였는가와 무관하게 작동한)이 무너진 이후 30여년은 예외였다. 자본주의는 제 속성을 온전하게 드러냈고, 문명은 거의 전적으로 자본의 의지로 구성되어왔다.

이 문명은 최후의 원시림과 소농 경작지마저 파괴했으며, 첨단 대도시들은 대규모 축산산업의 현장의 일부로 만들었다. 연속되는 바이러스 공격은 최근 호주 산불과 아마존 산불, 그리고 ‘기후 위기‘라 일컬어지는 거대한 상황의 일부인 것이다.

이 문명이 파괴한 건 생태만은 아니다. 문명의 기초인 노동을, 당연히 파괴했다. 불안정 비정규노동이 일반화한 걸 넘어, 기존의 노동권마저 삭제하는 플랫폼 노동이 확대되고 있다. ‘청년 문제’는 결코 세대 문제가 아니라 그 결과이다. 이 문명은 또한, 노동의 ‘물신성’을 완성 단계에 이르게 했다. 노동력의 가격(임금이나 수입)이 노동의 내용이나 사회관계와 상관없이 노동의 존귀함을 결정하는 노동 물신성은 이제 모두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예술 노동은 좀 더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었다. 극소수 작가에게 대부분의 교환가치를 할당하도록 짜인 미술시장에서, 대다수 작가는 시장 안에 존재하되 팔리진 않는 상품이다. 여전히 작가들은 제 노동을 여느 임금 노동(labour)과 구분하여 ‘작업’(work)이라 부른다. 그러나 제 노동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작가의 신념과, 완성 단계에 이른 노동 물신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작가의 현실은 서로 거스른다.    

국가와 관의 기금/지원금 시스템은 예술 노동의 그런 이중적 상태와 결합하여 일종의 ‘예술가 구빈법’으로 기능한다. 17~19세기 엘리자베스 구빈법(Poor Law)은 명목상으로는 빈민을 구제하는 법이지만 실은 땅을 잃고 도시로 몰려든 농민 중  공장노동자가 되지 않고 걸인이나 부랑자 생활을 하는, 즉 자본주의 성장 발전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처리했다. 그들을 단계에 따라 태형에 처하고 감옥에 가두고 귀를 자르고 죽였다. 오늘 기금/지원금 시스템은 작가의 창작 활동과 생활을 지원하는 명목 하에, 작가의 상상력을 시스템이 허용하는 범주 내로 완벽히 제한된다. 신청서가 선정되길 바라는 한, 작가는 시스템의 골간을 비켜나거나, 소재나 주제로 삼되 무력한 클리셰에 머물러야 한다.

예술가도 생존하고 생활해야 하는, 다를 바 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작업이 여느 노동과 다름없는 생존과 생활의 수단일 뿐이라면, 예술가가 굳이 예술가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예술가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공정성이나 분배 정의를 요구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질문하는 존재일 것이다. 생태와 노동이라는 인간 삶의 두 축을 파괴하며 폭주하는 문명에 브레이크를 거는 건 바이러스의 작업이 아니라 예술가의 작업일 것이다.

credit_José Manuel Bellester, 3 de Mayo, 2008
2020/03/30 12:13 2020/03/30 12:13
2020/03/29 11:12
손석희 씨가 고작 25살짜리에게 농락당했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먼저 25살은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다. 얼마든 끔찍하고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나이다. 조주빈이 카메라 앞에서 첫 마디로 손석희를 내세운 건 얕은 잔꾀였다. 그에 이끌려 관심을 성착취 사건에서 개인 손석희로 돌린 사람들이야말로 ‘조주빈에게 농락당한’ 사람들이다.

한국 사회는 개인에 대한 공사 구분, 특히 개인의 사적 영역에 대한 존중이 지나치게 약한 편이다. 그런 정서는 이번 사례처럼 종종 악용되곤 한다. 폭력이 개입된 게 아니라면, 개인 사생활에 대해선 서로 간섭하지 않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라 해서 예외일 이유는 없다.

손석희 씨는 오랫동안 ‘반공주의 보수’의 적이었고 ‘삼성’의 적으로 떠올랐으며 최근 들어선 ‘조국수호 진보’의 적이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세 세력의 공적이 된 이유가 단지 ‘중도와 팩트’라는 원칙을 좇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한국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조주빈의 잔꾀와 그런 적의들이 반갑게 손잡고 있다.

분별 있는 시민이라면 관심을 개인 손석희가 아닌 조주빈의 범죄에, 만연한 성폭력 성착취에 맞선 투쟁과 사회적 연대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
2020/03/29 11:12 2020/03/29 11:12
2020/03/29 08:13
한국이 코로나19 사태를 비교적 잘 이겨내고 있다면, 가장 주요한 비결은 의료노동자들의 헌신과 성숙한 시민의식이다. 특히 공황에 가까운 신천지 충격 속에서 대구 시민이 보인 품격은 놀라웠다.

자칭 역사학자 전우용은 역사 속의 파시스트 전통을 열심히 따른다. 사람을 인종이나 민족, 지역 등으로 구분지어 반감을 만들어냄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만들어내는 수법이다. 물론 현재 한국 시민 중 그런 낡은 수법에 걸려들 사람은 별로 없다. 전우용은 그런 자극적 언행을 반복하며 얻는 값싼 유명세에 기대어 연명하는 것이다. 전우용은 위험한 파시스트가 아니라 기생충 파시스트이다.

전우용에게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진영의 이해를 고려하여 묵인하는 민주당 지지자에게 생각을 바꿀 것을 조언한다. 전우용은 당신을 심각하게 욕보이고, 당신의 정치적 신념에 대한 대중의 지지와 호감을 갉아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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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페이스북 글)
집단감염이 발생했던 대구의 요양원과 같은 건물에 있는 병원에서 또 집단감염이 발생했습니다.
대구에 확진자가 유독 많은 게 신천지 때문이라고만은 볼 수 없게 됐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되는 곳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2020/03/29 08:13 2020/03/29 08:13
2020/03/26 07:55
중산층 인텔리 남성들이 N번방 연루자의 신상 공개를 인권의 이름으로 반대하는 풍경은 우스꽝스럽고 역겹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결정적 힘은 인권의식도 지적 신념도 아니다. 일생 동안 성폭력이나 성착취에 노출된 적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보장된 안전이 선사한 파렴치함이다.
2020/03/26 07:55 2020/03/26 07:55
2020/03/24 14:22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썼습니다. 지난번 언급했듯, 직접적인 대처 방법이나 단기적 해결책 등에 대해선 되도록 말을 줄이고 식견을 가진 전문가들의 견해를 따르는 게 최선이라 봅니다.

이 글에선 사태의 좀더 근본적인 원인과 거시적 전망, 개인이 해야 할 일들을 적어봤습니다. 요즘 신약성서의 구절이 자꾸 떠오릅니다.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일어나 외친다.”(누가복음 19:40) 이 미친 문명에 제동을  건 건 인간이 아니라 바이러스였습니다.



2020/03/24 14:22 2020/03/24 14:22
2020/03/24 10:05
N번방 사건에 대한 분노가 뜨겁다. 관련자 공개와 가장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근본적인 문제는 남성들의 일반적 성의식이다. 한국 중장년 남성의 성의식이 어떤 수준인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정상 범주라고 생각하는 성행위의 상당 부분은 성폭력이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그렇게 배웠고 길들어 있다. 그들이 그런 성의식을 예전보다 행동으로 덜 드러낸다면, 사회적 견제 때문이지 성의식이 개선되어서는 아니다.

한 사회가 남성들의 일반적 성의식을 바꾸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남자아이들에 대한 교육이다. 십수년 간 어린이잡지 발행인 노릇을 하면서 느낀 바로는, 여자 아이들에 대한 성의식 교육은 꽤 진전된 반면 남자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 교육은 아이의 경쟁에 집중되어 왔고, 갈수록 사회적 차원보다 ‘내 새끼 챙기기’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성폭력에 대해서도 딸을 둔 부모에 비해 아들을 둔 부모의 관심이나 문제의식이 지나치게 적다.

성의식 교육에서 사회적 환경이 진전되었다는 생각도 일부만 사실이다. 심각한 건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일반화로 포르노에 접근하는 연령이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야동, 즉 포르노는 거의 대부분 여성을 극단적으로 대상화하는, 섹스에 대한 매우 왜곡된 관점과 의식을 담고 있다. 남자아이들은 부모나 어른이 그런 걸 봤을 거라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그걸 보기 시작한다. N번방 참여자는 이 순간도 광범위하게 길러지고 있는 셈이다.

남자아이를 둔 부모라면 이 문제를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보길 권한다. 잠재적 가해자로 낙인찍는 게 아니라, 야동 따위에 눌리지 않는 성의식을 길러주는 노력이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한 전사회적 환기가 필요하다. 고래가그랬어는 몇해 전부터 페미니즘 꼭지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왔지만, 좀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할 생각이다.

#박사방_박사_포토라인_공개소환
 #N번방_갓갓_포토라인_공개소환
 #N번방_디지털성범죄수익_국고환수
 #N번방가입자_전원처벌
 #N번방_수익을_피해여성들_재활비용으로
2020/03/24 10:05 2020/03/24 10:05
2020/03/15 18:51
코로나 19 문제에 별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그럴 만한 직접적인 식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책 집필에 집중한다고 글 청탁을 고사한 지 꽤 되었는데 며칠 전 일간지와 월간지 칼럼 두개를 수락했다. 두곳 모두 거시적 관점을 주문했다. 코로나 19는 이제 지구적 역사적 상황이 되었고 간략하게라도 정리해볼 필요를 느낀다. 내 기본적인 생각은 인류가 ‘문명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 질문-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생태의 차원에서 그리고 노동(문명의 기초인)의 차원에서.
2020/03/15 18:51 2020/03/15 18:51
2020/03/13 13:39
“저는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개인주의자였고 지금도 그래요. 80년대 선배들이 협동 농장과 집단 생활을 하는 공동체 같은 걸 이상적인 사회로 이야기할 때 어린 마음에 고민이 많았어요. 혼자 생각했죠. ‘그런 세상을 만드는 투쟁에는 열심히 참여하겠지만 실제로 그런 세상이 오면 난 숙청당하겠지. 할 수 없는 일이지.’(웃음)”

2020/03/13 13:39 2020/03/13 13:39
2020/03/12 16:07
“김규항님의 '혁명노트'를 다 읽었다. 구소련 동독 일본에서 나온 이런저런 책을 인용하거나 답습하지 않고   맑스 원전을 나름대로  잘 이해하고 쓴 걸작이다. 어렵지 않고 쉬워 대중성도 뛰어나고. 어려운 용어로 대중을 현혹하는 기존의 이론가와는 다르다. 거의 자본  보조 교재에 다름아니다. B급 좌파가 아니라 A+좌파라는 느낌이 든다.  많은 분들이 읽어 보길 바란다.^^”

<자본> 번역자 황선길 선생의 페이스북 소감. 감사드리며, ‘쉽다’는 표현에 대해 약간의 부연 설명을 적는다. 책이 어렵다는 독자도 꽤 있기 때문이다. 적은 분량에 많은 내용이 담겨 있고, 문장 자체는 쉽고 간결한 편이나 서술이 함축적이라는 점이 주요한 이유인 듯하다. 더 자세하고 친절하게 쓰지 않은 건 의도적인 면이 있다. 저자는 쓰고, 독자는 읽는 구도를 넘어서고 싶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자신과 사회 현실을 반추해가며 읽어주신다면 문장들은 독자의 사유와 동행할 수 있을 것이다.
간혹 마르크스나 좌파 이론에 관한 내용이 익숙지 않아서 어렵다는 분도 있는데, 내가 우려하는 건 오히려 익숙한 이야기라는 선입견을 가진 분들이다. 이 책이 시도하는 새로운 해석들을 흘려보내기 쉬울 것이다.

책이 그렇게 생겨먹은 대신, ‘오디오 주석’을 준비하고 있다. 먼저 읽고, 들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플랫폼은 유튜브나 팟캐스트의 번잡함을 피해 사운드클라우드로 정했다. 테스트를 마치면 다시 알려드리려 한다.
2020/03/12 16:07 2020/03/12 16:07
2020/03/04 15:55
비교적 안전하고 생활도 안정적인 사람들은 충분히 말하고 여기저기 화도 내는데, 안전하고 싶어도 안전하기 어렵고 기본 생활조차 무너진 사람들은 말할 여유도 화낼 통로도 없어 망연자실하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딱 그만큼에 있다.

아랑곳없이 도란도란 제 생각을 나누는 아이들의 듬직함. 고그토론 195의 주제는 ‘집안일’(가사노동)이다.
2020/03/04 15:55 2020/03/04 1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