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미술 4월호 권두 칼럼. 며칠 전 올린 중앙일보 시론과 함께 코로나19를 소재로 요청받은 글이라 도입부가 비슷하다. 이 글에선 근래 자본주의가 파괴한 생태와 노동 가운데 노동, 특히 ‘예술 노동’에 대해 썼다. 월간미술은 글과 함께 마누엘 발레스터의 <5월 3일 3de Mayo>을 실었다. 고야의 <5월 3일>에서 인물들만 제거한 작품이다. 핏자국만 남은 텅 빈 화면은 1808년 학살을 방금 일어난 사건처럼 느끼게 한다. 그렇다. 예술가에게 평온한 세계란 ‘학살 직후의 세계’다.
*
바이러스의 작업, 예술가의 작업
14세기 유럽 인구의 1/3을 사라지게 한 페스트는 중앙아시아의 들쥐에 기인했다. 들쥐 몸에 사는 벼룩이 인간에게 페스트균을 옮겼고 전쟁이나 교역 등 국제적 이동을 통해 유럽까지 전파되었다. 공중위생과 항생제, 백신 등이 일반화한 현재 페스트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콜레라, 장티푸스, 홍역 등 오랫동안 인간을 위협하던 전염병들도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게 된 지 오래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난데없이, 동물과만 관계하던 바이러스가 변종과 변이를 거듭하며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2002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 그리고 이번 코로나19 등이다. 이것은 현재 인류 문명이 생태환경과 관계에서 최종 한계선을 넘었음을 의미한다. 현재 문명을 구성하는 보편적인 방식은 자본주의(혹은 중국처럼 사회주의라 주장되는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 문명의 특징은 인간이 주인이 아니라는 데 있다. 자본의 이윤 추구와 축적 운동이 문명의 동력이자 주체이다. 현실에서 그런 속성이 언제나 완전히 발현되는 건 아니다. 반자본주의 운동이나 여러 사회적 요인들이 견제하고 조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된 기간, 특히 현실 사회주의라는 왼쪽의 힘(현실 사회주의가 제대로 된 사회주의였는가와 무관하게 작동한)이 무너진 이후 30여년은 예외였다. 자본주의는 제 속성을 온전하게 드러냈고, 문명은 거의 전적으로 자본의 의지로 구성되어왔다.
이 문명은 최후의 원시림과 소농 경작지마저 파괴했으며, 첨단 대도시들은 대규모 축산산업의 현장의 일부로 만들었다. 연속되는 바이러스 공격은 최근 호주 산불과 아마존 산불, 그리고 ‘기후 위기‘라 일컬어지는 거대한 상황의 일부인 것이다.
이 문명이 파괴한 건 생태만은 아니다. 문명의 기초인 노동을, 당연히 파괴했다. 불안정 비정규노동이 일반화한 걸 넘어, 기존의 노동권마저 삭제하는 플랫폼 노동이 확대되고 있다. ‘청년 문제’는 결코 세대 문제가 아니라 그 결과이다. 이 문명은 또한, 노동의 ‘물신성’을 완성 단계에 이르게 했다. 노동력의 가격(임금이나 수입)이 노동의 내용이나 사회관계와 상관없이 노동의 존귀함을 결정하는 노동 물신성은 이제 모두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예술 노동은 좀 더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었다. 극소수 작가에게 대부분의 교환가치를 할당하도록 짜인 미술시장에서, 대다수 작가는 시장 안에 존재하되 팔리진 않는 상품이다. 여전히 작가들은 제 노동을 여느 임금 노동(labour)과 구분하여 ‘작업’(work)이라 부른다. 그러나 제 노동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작가의 신념과, 완성 단계에 이른 노동 물신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작가의 현실은 서로 거스른다.
국가와 관의 기금/지원금 시스템은 예술 노동의 그런 이중적 상태와 결합하여 일종의 ‘예술가 구빈법’으로 기능한다. 17~19세기 엘리자베스 구빈법(Poor Law)은 명목상으로는 빈민을 구제하는 법이지만 실은 땅을 잃고 도시로 몰려든 농민 중 공장노동자가 되지 않고 걸인이나 부랑자 생활을 하는, 즉 자본주의 성장 발전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처리했다. 그들을 단계에 따라 태형에 처하고 감옥에 가두고 귀를 자르고 죽였다. 오늘 기금/지원금 시스템은 작가의 창작 활동과 생활을 지원하는 명목 하에, 작가의 상상력을 시스템이 허용하는 범주 내로 완벽히 제한된다. 신청서가 선정되길 바라는 한, 작가는 시스템의 골간을 비켜나거나, 소재나 주제로 삼되 무력한 클리셰에 머물러야 한다.
예술가도 생존하고 생활해야 하는, 다를 바 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작업이 여느 노동과 다름없는 생존과 생활의 수단일 뿐이라면, 예술가가 굳이 예술가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예술가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공정성이나 분배 정의를 요구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질문하는 존재일 것이다. 생태와 노동이라는 인간 삶의 두 축을 파괴하며 폭주하는 문명에 브레이크를 거는 건 바이러스의 작업이 아니라 예술가의 작업일 것이다.
credit_José Manuel Bellester, 3 de Mayo, 2008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