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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9 20:49
맑스의 말마따나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게 아니라, 개인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들의 합으로 구성된다. 모든 관계에서 나쁜 개인도 모든 관계에서 좋은 개인도 없다. 나에게 나쁜 인간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고 나에게 좋은 사람이 누군가에게 나쁜 인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의 인격이 아니라 그의 행동을 판단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는 나쁜 인간이다’보다 ‘그는 나쁜 행동을 했다’가 우리를 좀 더 현명하게 한다.
2018/11/24 23:07
2001년 엔론의 회계 부정 사건으로 회장은 24년형을 받고 심장마비로 사망, 부회장은 자살, CEO는 도주했다 1년 만에 체포되어 역시 24년형, 회계법인은 해체되었다. 미국이 보인 엄격한 경제 정의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지키기 위한 우파적 정의이다.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가신 이후에도 좌파 정치가 살아나지 못한 주요한 비결도 우파적 경제정의가 굳건했기 때문이다. 이걸 ‘정의 1’이라고 하자. 그리고 이런 경제 정의마저 부인하는 사이비 자유시장주의자 쓰레기들을 ‘정의 0’이라 하자.
패션지 <보그> 미국판의 10대지인 <틴보그>는 올해 ‘맑스에 관한 모든 것’과 ‘자본주의에 관한 모든 것’이라는 기사를 연이어 실었다. 물론 <틴보그>는 10대에게 사회주의를 주입하려는 게 아니라 10대 독자에게서 부는 사회주의 바람에 상업적 부응을 하는 것이다. 근래 미국의 청년과 청소년을 중심으로 부는 사회주의 바람은 ‘정의 1’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흐름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정의롭지 않다는 전제 하에 시스템을 넘어선 새로운 정의를 요구한다. 이것은 ‘정의 2’라고 하자.
삼성바이오닉스의 설립과 엔론보다 훨씬 큰 규모의 회계 부정이 지난 20여년에 걸친 이재용의 삼성 승계 작업임을 모르는 사람은 이젠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재용의 처벌은커녕 삼바의 상장 폐지조차도 논란 중이라는 사실은 한국의 경제 정의가 ‘정의 0’을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미국 젊은 세대에서 ‘정의 2’의 흐름은 미국 사회 전반에서 ‘정의 0’의 쇠락과 ‘정의 1’의 일반화를 의미한다. 한국 청년과 청소년은 ‘헬조선’을 외치지만 자본주의 극복이나 사회주의 모색보다 아직은 서로를 혐오하고 조롱하는 일에 매몰되는 듯하다.
그들이 시스템을 저주하면서도 시스템의 바닥을 맴도는 데는 386리버럴(자본주의 지배계급이 된 옛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반감과 학습 효과 등 몇가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사정이나 상황도 결국 ‘현실 자체’를 완전히 은폐할 순 없다는 건 역사의 법칙이다. 미국에서 바람도 2008년 월가발 공황과 점령 시위, 대선에서 샌더스의 약진 등 10여 년의 경과였다. 누구도 그 10년을 예상하지 못했다. 반전은 멀지 않은 셈이다. 기여할 구석이 있는 사람은 준비해야 한다.
2018/11/17 17:27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나답게 살아야 한다' 같은 충고는 지당하면서도 허황되다. 사람들이 나 자신을 찾지 못하고 나답게 살지 않는 주요한 이유는 흐트러진 심리(스스로 정신만 차리면 회복되는)가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곧 상품으로써 가치다. 그의 인격적 면모, 개성이나 특징 같은 것들은 그 자체로 발현되는 게 아니라 상품으로써 가치로 추상화하거나 환원된다. 그게 자본주의에서 보편적 삶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인간은 나 자신을 찾고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앞서 충고와 같은 심리 조정이나 무책임한 위로 따위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조와 대면을 수반한다. 자본주의와 그 가치 체계에 승복하면서 나 자신을 찾고 나답게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지적 각성으로부터 말이다. 세상엔 자본주의의 수혜를 누리면서도 멋스럽게 자신을 찾고 자신답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그런 삶의 스타일을 구매했으며, 그럴 수 있을 만큼 성공한 상품이다.
2018/11/09 12:15
혁명은 인민의 자기 해방이다. 혁명가는 인민을 해방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인민의 자기 해방에 기여하는 존재다. 혁명가가 인민을 해방시키는 존재일 때 혁명은 새로운 지배로 귀결한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8/11/09 10:36
극히 사적인 억압에서든 거대한 구조적 억압에서든 해방은 오로지 ‘자기 해방’이다. 누군가 위기에 빠진 나를 구출해 줄 수 있다. 내 해방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도 나를 해방시켜 줄 순 없다.
2018/11/01 10:23
넬슨스와 보스턴 심포니의 쇼스타코비치 시리즈는 연주도 연주지만 감탄스러운 녹음 때문에 더 자주 듣게 된다. 타이달에 MQA 음원이 있다. 시리즈 중 두개는 '스탈린의 그림자 아래'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2015년과 2016년에 나왔는데 2015년의 1번 트랙이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중 한 곡이다.
1936년 1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던 스탈린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다음날 프라우다엔 ‘부르주아적 혼돈’이라는 비판이 실리고 공연 금지 처분이 내려진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수많은 예술가들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완성한 교향곡 4번의 초연을 포기한다. 그리고 4개월 만에 교향곡 5번을 써낸다. ‘당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답변’에 대해 당은 ‘낙관적 비극’이라는 호평을 내린다. 쇼스타코비치는 가까스로 위기를 빠져나온다.
교향곡 5번은 당시에도 혁명을 그린 음악으로 여겨졌고 여전히 그렇다. 누가 듣기에도 혁명의 전형적 과정과 이미지들(군중의 함성, 거대한 저항, 투쟁의 드라마, 위대한 승리 같은)이 그려진다. 그러나 5번엔 혁명을 망가트린 당에 대한 예술가의 조소도 숨겨져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제자인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이야. 어떠한 바람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
여기에서 ‘어떠한 바람’을 반공주의적으로 빠져나가면 안 된다. 오늘 우리에겐 명백하게 ‘자본의 바람’이다. 쇼스타코비치에 따르면 '예술가는 자본의 바람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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