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7/06/29 보수부모, 진보부모, 보통부모
  2. 2017/06/28 미적 풍경
  3. 2017/06/25 환빠 혐오
  4. 2017/06/19 새책
  5. 2017/06/17 닳고닳은 추억담
  6. 2017/06/11 86의 도리
2017/06/29 13:57
언젠가 이렇게 썼다. “한국의 오른쪽엔 보수 부모가 있고 왼쪽엔 진보 부모가 있다. 그리고 그들 아래에 가난한 부모가 있다.” 지금 이라면 '가난한 부모'를 '보통 부모'라 쓸지도 모르겠다. 90퍼센트 부모들이니. 교육 문제는 한국 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뉜 사회가 아니라 10:90으로 나뉜 사회임을 매우 생생히 보여준다. 외고 과학고 자사고 국제학교 조기유학, 대안학교에 이르기까지 교육은 10(1+9)퍼센트 양반 계급의 일이 되었다. 90퍼센트의 교육, 이른바 공교육의 괴멸은 자연스럽다. 조선시대 전체 과거급제자의 35퍼센트 가량이 상민 계급 출신이라 하니 한국은 조선시대보다 더 강고한 신분사회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현실이 어지간한 개혁으로 바뀔 거라 기대하는 건 과연 온당한가.
2017/06/29 13:57 2017/06/29 13:57
2017/06/28 18:11
혁명적 구호를 외치는 노동자보다 나름의 미적 경험을 즐기려 드는 노동자가 더 전복적일 수 있음을 먼저 알아챈 건 철학자들이 아니라 체제다. 체제는 예술 공간과 아티스트를 노동자의 미적 경험으로부터 분리하고 무력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수행해왔다. 유럽 현대미술 전시 방법론이 현실적 콘텍스트가 제거된 채 복제됨으로써 전시가 미술업계 종사자와 지망생끼리의 나른한 사교장이 되고, 블랙리스트 사태가 본의 아니게 드러냈듯 아티스트들은 각종 지원금 시스템에 거의 완전히 포박되어 있으며, 대안과 사회를 말하던 중견 기획자의 유일한 소망이 계약직 고급공무원 자리가 된 건, 그로 인해 펼쳐진 한국적 풍경들이다.
2017/06/28 18:11 2017/06/28 18:11
2017/06/25 13:26
내가 황우석 빠라 불리는 사람들을 혐오한 이유는 단지 그들이 광적이거나 황우석이 사기꾼이어서가 아니었다. '과학=돈=국가'로 표현되는 그들의 저급하고 반동적인 사고 체계 때문이었다. 내가 환빠라 불리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그들이 상고시대에 광적으로 집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 체계가 상고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영토를 위대한 나라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을 혐오하지 않을 방법을 난 알지 못한다.
2017/06/25 13:26 2017/06/25 13:26
2017/06/19 19:30
제법 오래전부터 기획되었고, 교정 작업에 참여하면서는 굳이 내야 하나 싶다가 그런대로 나쁘지 않네 싶다가 했는데, 결국 나왔다. 시집 크기에 하드커버 북디자인이 미려하다. 친구에게 부탁한 프로필이 마음을 읽는다. 특히 '저마다의 쓸모없는 짓들에 골몰하는 세계'. 그거지.

"글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도구가 아니라, 불편함을 수반하더라도 좀더 사유함으로써 세계의 본질에 함께 다가가는 도구다. 모든 아름다움이 그러하듯 문장은 군더더기가 적을수록 아름답다. 사람들이 정치나 사회 문제를 벗어나 저마다의 쓸모없는 짓들에 골몰하는 세계를 소망한다."


2017/06/19 19:30 2017/06/19 19:30
2017/06/17 09:51
새 정부 고위공직자 후보를 옹호하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내로남불'의 졸렬함을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 민주화 30년은 민주화운동 세력이 기득권화한 지 30년이라는 뜻이기도 하니, 그들이 극우세력과 '생활 양식'면에서 그리 다르지 않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재확인한 것, 즉 나와 그들이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음을 재확인한 것이야말로 청문회의 중요한 사회적 소득일 것이다. 새 정권과 관련하여 여전히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이 풍경이 나를 도리없이 비위 상한 게 해준 건 내로남불이 아니라 후보와의 옛 인연을 들먹이는 추억담들이었다. 순수, 열정, 온화, 소탈 따위 상투어들이 난무하는, 그 후보나 옹호자나 그런 것들을 잃은 지 매우 오래임을 강조하는 걸 유일한 소임으로 하는, 닳고닳은 민주 아재들의 추억담.
2017/06/17 09:51 2017/06/17 09:51
2017/06/11 17:33
사람이 옛 이야기를 할 때 자칫 추해지기 쉬운 건 현재의 삶에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의 옛 저항 투쟁담이 특히 그렇다. 86은 과연 민주화의 주역인가.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더 중요하게 86은 군사독재를 자본독재로 만든 주역이고 그 덕에 축조된 10:90의 헬조선에서 10의 양반 계급으로 살고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지만, 한국 사회 돌아가는 꼴을 보면 86은 젊어 한때 헌신으로 3대가 흥할 조짐이다.

86의 투쟁담은 사실 교묘하게 편집되어 있다. 80년대 후반 즈음 86은 늙은 재야인사들처럼 단지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한 게 아니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공장에 들어가고 노동자와 연대한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86은 변혁운동을 했고 대개의 86은 6월 항쟁의 의미보다 같은해 7~9월 노동자 대투쟁의 의미가 오히려 더 컸다. 이제 86은 그런 사실들은 쏙 빼고는 줄창 6월 이야기만 한다. 비정규직으로 대변되는 오늘의 노동자들에게서 자신을 분리하며, 다시 만개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주인공 행세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무작정 죄악시한다고 볼맨 소리 할 건 없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기득권 자체가 아니라 기득권이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과 방향이며, 적어도 86의 주류는 그게 글러먹었다는 것이다. 6월항쟁 30주년. 소중한 추억은 가슴 한켠에 두고 현재 시점에서 민주주의, 인민이 지배하는 사회의 의미를 조용히 되새기는 게 86의 도리다.
2017/06/11 17:33 2017/06/11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