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6/08/29 도덕의 원근법
  2. 2016/08/24 같지 않은
  3. 2016/08/24 기레기와 기자님
  4. 2016/08/23 용기
  5. 2016/08/20 감히
  6. 2016/08/19 각별한 즐거움
  7. 2016/08/18 이정호 작가
  8. 2016/08/18 민족사
  9. 2016/08/12 위로
  10. 2016/08/12 아니다
  11. 2016/08/09 양아치 대처법
  12. 2016/08/08 거울
  13. 2016/08/02 나쁜 사람
2016/08/29 21:03
칸트 이래 철학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 즉 인간이 특별한 압력이나 통제 없이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하고 되도록 인간답게 행동하려는 것에 대한 토론을 거듭해왔다. 근래 과학은 그런 본성이 뇌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이를테면 뇌의 ‘피각’ 부위는 효율성에 반응하며 ‘뇌섬’은 공정성에 반응한다. ‘미상/중격슬하’는 그 둘을 중재하고 균형을 맞추는 부위다. 인간의 뇌는 그 자체로 정교한 도덕 계산기라는 것이다. 연쇄살인범의 뇌는 안와피질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정상 범주의 뇌를 가진 사람도 외상에 의해 관련 부위가 손상되면 도덕적 기능이 변화한다.

인간의 도덕적 기능이 전적으로 뇌에 의해 결정된다면, 모든 인간의 뇌를 검사하여 도덕적 등급을 매기고 관리하는 완결적 형태의 파시즘이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뇌는 도덕적 기능과 작동에 전적이지 않다. 우리 가운데는 연쇄살인범이나 사이코패스의 뇌를 가졌지만 충분히 사랑받고 자라고 안정된 환경에서 살아가는 덕에 큰 문제없이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 가운데 정상 범주의 뇌를 가졌지만 성장 환경과 사회적 관계에 따라 뇌 본연의 도덕적 기능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뇌를 수정할 순 없고 사회가 개인의 환경에 낱낱이 개입할 방법도 없다. 도덕적 기능과 관련하여 우리가 함께 말할 수 있는 건 사회적 영향의 측면이다. 우리는 도덕적 본성을 고양하는 경향을 가진 사회에서 살 수도 있고 위축시키는 경향을 가진 사회에서 일생을 보낼 수도 있다. 우리가 사회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사회가 우리의 도덕적 본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 김수영은 그 문제에 대해 제 나름의 방식으로 반응한 사람이다.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그는 사회의 큰 구조에 분노하지 못하고 기름덩어리만 나온 갈비를 제공한 식당 주인이나 돈을 받으러 거듭 찾아오는 야경꾼(방범대원) 같은 작은 대상에만 분노하는 ‘나’를 조소한다. 김수영은 실은 그 구조에 분노할 때 심각한 불이익에 처하게 함으로써 도덕적 본성을 위축시키는 억압적 사회를 조소하는 것이다.

동시에 김수영은 도덕의 원근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멀리 있는 도덕은 작고 가까이 있는 도덕은 크다. 아무리 큰 일도 내 삶과 멀고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으면 작은 일일 뿐이다. 아무리 작은 일도 내 삶과 가깝고, 직접적 이해관계를 가지면 큰일이 된다. 원근법이 신이 아닌 인간이 주인인 세계를 그리려 한 르네상스 화가들의 고안품이었듯, 도덕의 원근법은 인간 도덕의 이상과 관념이 아닌 세속적 속성을 담고 있다.

김수영의 시대보다 나은 수준의 민주주의 절차가 작동하는 오늘 도덕의 원근법은 얼마간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큰 도덕은 멀고 작은 도덕은 가깝다. 김수영의 시대는 사회 구조에 분노할 때 심각한 불이익을 치러야 했지만, 이젠 상당 수준 허용된다. 대신 작은 것에 분노하는 게 구체적 불이익이 된다. 제 학교의 부당해고 강사나 비정규 노동 문제를 외면하는 좌파 교수. 전태일 이후 민주적 노동운동의 성과를 경제투쟁에만 쏟아붓는 조직노동. 수구 기득권 세력을 욕하며 제 기득권을 알뜰하게 챙기는 하고많은 진보시민들. 그들은 작은 것에 분노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큰 것에 분노한다. 그들의 도덕적 기능은 사회에 개입하는 게 아니라 제 기득권의 알리바이로 사회에 진열된다. ‘제 이해관계와 무관한 사회 문제에만 열을 내는 진상들’은 많은 인민들에게 진보의 일반적 이미지가 된 지 오래다.

그런 파탄적 상황은 사회 성원 전체의 도덕적 본성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다들 밥을 굶어 헬조선이 아니다. 더 가난하고 더 전망 없는, 지옥의 조건을 더 많이 가진 사회들이 적잖이 있다. 한국은 그런 조건을 불식하고 사회 성원들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나 빠르게 지옥에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경이로운 사례다. 인간으로서 성찰과 인간적 행동의 욕구가 거세되어 가는 사회에서 혐오와 모욕은 사회적 소통의 골간이 된다.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마르고 거칠어진다. 사람의 가치를 외적 조건으로 평가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모습은 하위계급에서도 격렬하게 나타난다. 아이들은 경쟁 효율성을 위해 애초부터 도덕적 본성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키워진다. 지금 청년들은 그렇게 자란 첫 세대다.

빠져나갈 수 있을까. 김수영은 ‘지식인은 세계의 문제를 내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지성’에 대해 말한다. 인간은 지성의 힘으로 도덕의 원근법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강퍅한 사람도 제 식구나 제 아이가 당하는 부당한 고통을 외면하는 경우는 없다. 제아무리 신념에 찬 리버테리언도 제 사적 관계 속에서 벌어진 착취, 불공정에까지 ‘경쟁 본능’이나 ‘시장 원리’를 설파하진 않는다. 누구나 분노하고 누구나 변혁하려 한다. 지근거리의 세계에선 누구나 휴머니스트이며 사회주의자다. 지성은 그런 도덕적 본성을 기억하고, 더 먼 거리의 상황과 사회 구조가 만들어내는 현실에까지 일치시켜 보려는 인간 특유의 태도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6/08/29 21:03 2016/08/29 21:03
2016/08/24 22:36
제도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그나마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같이 ‘같지 않은' 사람들이다. 기자 같지 않은 기자, 교수 같지 않은 교수, 정치인 같지 않은 정치인, 관료 같지 않은 관료, 목사 같지 않은 목사 등등. 체제가 제공한 껍질로 인해 본디 냄새와 색깔이 짓무르지 않는, 그래서 드물게 기자인 교수인 정치인인 관료인 목사인 사람들.
2016/08/24 22:36 2016/08/24 22:36
2016/08/24 14:17
호칭과 존칭의 변화는 사회상을 반영하는데, 근래 인상적인 사례는 기자에 관한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선 기레기라는 호칭이 일반화한 반면, 사적 차원에선 기자님이라는 호칭이 일반화했다. 물론 기자를 직접 대면할 때 그 호칭은 큰 문제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기자를 일컬을 때, 즉 3인칭일 때는 압존법에도 어긋나고 과한 것이다. 기자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늘었지만, 기자의 권력에 기대려는 심리 역시 늘었다는 이야기. 이중적이지 않고는 살기 어려운 비루한 시절이다.
2016/08/24 14:17 2016/08/24 14:17
2016/08/23 16:23
글을 되도록 쉽게 써야 한다는 생각은 근대적 교의에 입각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전근대성을 고려할 때 여전히 유효한 교의다. 그러나 어려울 수밖에 없는 글도 있다. 이를테면 주디스 버틀러 같은 사람은 쉬운 글은 기성 질서의 언어라는 뜻이며 새로운 질서의 언어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치에 맞는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질서의 언어 역시 다시 쉽게 풀어 쓰는 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면 실제 현실 변화와 유리된 소수의 지적 유희에 머물게 되니, 새로운 질서의 언어는 아니다. 결국 우리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글을 되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하되, 어려울 수밖에 없는 글도 있음을 인정하면 된다. 정작 문제는 새로운 질서의 언어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괜스레 어렵게 쓰는 경우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경멸의 의미에서 ‘기지촌 지식인’이라 불러왔다. 그런데 며칠 전 친구가 말하길 ‘그들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 했다. 맞는 말이다. 그들은 제 글에 지적 고유성이 없다는 사실이 폭로될까 두렵고, 제 글이 실제 현실과 연루되어 안온한 일상에 지장이 생길까 두렵다. 그들은 두려움에 맞설 용기가 없어 어렵게 쓴다.
2016/08/23 16:23 2016/08/23 16:23
2016/08/20 17:13
'감히’는 가장 분명한 죽음의 표식이다. ‘감히 나한테’라고 말하는 건, 내 영혼은 이미 죽었고 사회적 지위나 권력, 명성, 나이 따위 껍질로 연명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존중하는 사람에게 그 말을 붙이는 건, 그를 박제로 만드는 일이다. 감히 안중근에게! 감히 전태일에게! 생각해보라. 안중근이나 전태일이 저간의 정황을 안다면 ‘감히 나한테!’ 역정을 냈을까, 이해한다는 얼굴로 허허 웃었을까.
2016/08/20 17:13 2016/08/20 17:13
2016/08/19 17:22
두어달 전, 한겨레21 쪽에서 '기사 제휴' 제의가 있었다. 고래를 더 널리 알리고 고래를 구독하지 않는 아이들이 고래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흔쾌히 응했다. 실무 준비를 거쳐 이번 호 한겨레21에 고래가그랬어 섹션이 생겼다. 주로 '고래토론'과 '아삭아삭 민주주의학교' 기사가 격주로 실릴 예정이다. 한겨레21 독자에겐 '아이와 함께 읽는 면'이 생긴 셈이다. 안수찬 편집장은 '별사탕'이라 표현했다. 아이와 함께 읽으면 자연스레 아이의 질문을 받게 된다. 그에 열심히 응하고 토론하는(부디 가르치려 들진 마시고) 각별한 즐거움(얼마간의 진땀을 수반하는)을 누리시길 빈다. 기사 제휴에 동의해주신 필자들과 어린이 토론자들께 감사드린다.




2016/08/19 17:22 2016/08/19 17:22
2016/08/18 17:25
'AOI 일러스트레이션 어워즈'는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이라 한다. 올해 대상(Overall Professional Winner)은 한국의 이정호 작가가 받았다. 이 작가는 고래 표지도 여러번 했다. 그 중 하나인 139호(2015년 6월) 표지와 아이들이 흉내내 보낸 독자엽서들.

2016/08/18 17:25 2016/08/18 17:25
2016/08/18 10:43
남은 건 컴플렉스뿐인 사람들은 오늘 나에 대해 말할 용기가 없기에, 언제나 과거의 나에 대해서만 말한다. 얼마나 잘 나갔는지, 혹은 얼마나 잘나가는 사람들과 어울렸는지 등. 그들은 그 연장선에서 민족의 과거에 집착한다. 영토가 얼마나 컸는지 얼마나 강하고 뛰어났는지 등. 그렇게 민족사는 제 컴플렉스를 위로하려는 그들의 개인사와 함께 끝없이 부풀려진다.
2016/08/18 10:43 2016/08/18 10:43
2016/08/12 10:35
위로를 너무 쉽게들 한다. 상대의 고통에 정말 교감하면 어떤 말을 해야할지 망설이게 되고, 작게라도 실제로 도울 방법은 없을지 고민하게 된다. 쉽게 위로한다는 건 남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힘든 사람에겐 그런 위로도 고마울 수 있지만, 결국 더 깊은 외로움에 빠지게 한다.
2016/08/12 10:35 2016/08/12 10:35
2016/08/12 10:34
무서운 건 타락한 목사가 아니라 그를 목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목사가 그런 짓을 하다니, 가 아니라 그는 목사가 아니다, 이다.
2016/08/12 10:34 2016/08/12 10:34
2016/08/09 16:45
어디에나, 제아무리 고상하고 품위있는 곳에도 이상한 사람이 있고 양아치가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들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건 인간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고,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파시즘의 씨앗이다. 살아간다는 건 그런 사람들이 포함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최선의 대처는 두가지 편향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전체와 대의를 앞세워 그런 사람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 혹은 그런 사람들을 빌미로 전체와 대의를 부정하는 것.
2016/08/09 16:45 2016/08/09 16:45
2016/08/08 21:23
메갈리아에 대한 호오(好惡)를 떠나, 메갈리아가 페미니즘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건 이상한 일이다. 메갈리아는 미러링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미러링에서 내용들은 그 자체로 실제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다. 미러링은 그 가짜 상을 통해 은폐된 현실을 환기함으로써 사회적 토론을 만들어내는 소통방식이다. 메갈리아는 한국 남성의 성차별적 태도와 행동들을 거울에 비추어 낱낱이 보여줌으로써, 그런 태도와 행동이 얼마나 일상적이며 뿌리 깊은지 환기하려 했다.

오히려 메갈리아는 이른바 제대로 된, 건강한 페미니즘으로 보여선 안 된다. 페미니즘이라고 보기엔 지나쳐 보이는 것, 불편함과 거부감을 주는 것일 때 비로소 미러링의 효과가 생겨난다. 메갈리아의 일부 행태가 페미니즘의 범주를 넘는다는 비판은 싱거운 것이다. 메갈리아 미러링의 범주는 ‘한국 남성이 여성에게 한 적이 있는 모든 것’이다. 일베의 행태도 당연히 포함될 수 있다. 그럼에도 문제 삼는다면 ‘감히 여자가 남자 하는 걸 다 하려 하는가’라는 말일 뿐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미러링이 아니라 진짜라는 비판도 마찬가지다. 미러링이 미러링으로만 여겨질 거라면 뭣 하러 미러링을 하겠는가.

두 주류 성 안에서 메갈리아에 대한 반응은 대략 여섯가지로 나타난다. 1-① 페미니즘 반대 메갈리아 반대 남성. 1-② 페미니즘 지지 메갈리아 반대 남성. 1-③ 페미니즘 지지 메갈리아 지지 남성. 2-① 페미니즘 반대 메갈리아 반대 여성. 2-② 페미니즘 지지 메갈리아 반대 여성. 2-③ 페미니즘 지지 메갈리아 지지 여성.

메갈리아는 주로 2-③ 여성이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1-① 남성은 당연히 적대와 배제의 대상이다. 1-② 남성은 메갈리아를 빌미로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1-①과 다를 바 없는 남성으로 여겨진다. 1-③만 유일하게 개념을 가진 남성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그들 역시 마냥 당당하긴 어렵다. 2-② 여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공통점은 미러링을 실제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미러링을 미러링으로 생각한다면 서로 그토록 화낼 일도 없었을 텐데 왜 다들 굳이 착각하는 걸까. 메갈리아조차 더는 그런 착각에 항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의 착각은 더 이상 착각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로 봐야 한다. 왜 다들 착각할까가 아니라, 다들 착각해야 할 필요가 뭘까라고 질문해야 한다. 누구도 선뜻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실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다. 우리가 이미 우리 삶에 잔뜩 화가 나 있다는 것, 화를 낼 정당한 이유를 찾고 있다는 것, 그래서 미러링이 실제일 필요가 있다는 것.

우리는 왜 토론하는가. 한가지 옳음만 존재하는 사회가 가장 끔찍한 사회라는 걸 체험과 역사를 통해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이 전적으로 옳은 사람들과 전적으로 그른 사람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옳음과 옳음의 조각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조각들을 모으고 합쳐서 좀 더 나은 사회와 삶을 얻기 위해 우리는 성가심과 고단함을 무릅쓰고 토론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걸 민주주의라 부른다.

토론의 예의는 화를 내지 않고 평온함을 잃지 않는 것 따위에 있지 않다. 토론 예의는 토론의 기본을 지키는 데 있다. 토론의 기본은 나와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내 의견에 모자람과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토론의 기본만 지킨다면 토론 과정에서 나타나는 감정이나 충돌은 서로 인간임을 확인하는 일일 수 있다.

지금 우리의 토론엔 예의가 있는가. 우리의 토론은 오히려 무례를 기본으로 한다. 나와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일은 의견이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일로, 내 의견에 모자람과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은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패거리를 짓는 일로 대체된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토론 예의가 얼마나 더 망가질 수 있는지 경연하는 공간이다.

이런 상황이 모든 걸 더 나쁘게 만들 거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모두에게 나쁜 건 아니다. 이런 상황이 매우 유익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헬조선’에서 살게 된 덕에 지상 천국을 확보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래전 우리를 서로 빨갱이가 아닐까 의심하고 신고하게 만들어 유익했다. 우리가 그런 무지를 벗어난 다음엔 우리로 하여금 피 터지게 경쟁하게 만들어 유익했다. 그리고 우리가 경쟁의 결과가 헬조선일 뿐임을 깨닫고, 토론의 칼날이 드디어 저희를 향할 가능성이 보이자 짐짓 긴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새 희색이 만면하다. 우리가 서로 벌레라 부르며 혐오의 수렁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혐오가 지배전략의 최정점임을 잘 안다.

이소룡 영화 <용쟁호투>엔 수천개의 거울로 만들어진 방 장면이 있다. 그 방에서 전투가 힘겨운 이유는 적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의 상들 속에 숨어 있다. 적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나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소룡은 나의 상을 한개씩 깨트려간다. 나를 발견해감으로써 적을 발견해간다. 우리는 지금 그런 방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왜 이미 내 삶에 화가 나 있는지, 내 삶을 그렇게 만든 건 과연 누구인지 비추어볼 때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6/08/08 21:23 2016/08/08 21:23
2016/08/02 22:27
'일대일로 만나서 나쁜 놈이 있냐.' 십대 후반을 한참 가깝게 지냈던 건달 형의 말이 자주 떠오르는 시절이다. 고작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적 반감과 살벌한 적의를 표출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견해가 다른 사람이 나쁜 사람이어야 한다는 건, 내 삶이 슬프다는 뜻이다.
2016/08/02 22:27 2016/08/02 2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