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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7/25 운동 2
  2. 2016/07/25 운동
  3. 2016/07/24 발버둥
  4. 2016/07/24 신파
  5. 2016/07/18 재난을 벗어나는 방법
  6. 2016/07/16
  7. 2016/07/14 두 영화 제목
  8. 2016/07/13 고깃덩어리
  9. 2016/07/12 인터넷 예의
  10. 2016/07/11 댓글 여론
  11. 2016/07/09 사고의 기원
  12. 2016/07/08
  13. 2016/07/07 번민
  14. 2016/07/06 호러
  15. 2016/07/05 노조
  16. 2016/07/03 매끄러운 한병철 2
  17. 2016/07/02 매끄러운 한병철
  18. 2016/07/01 루저
2016/07/25 15:34
운동하는 사람이 흔히 빠지는 정서적 오류는 세상을 운동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운동 역시 아직 바뀌지 않은 세상의 일부이며, 문제를 수반하지 않는 운동은 없다. 운동이 비판과 토론에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자신을 바꾸어가는 일은 단지 운동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명백하게 보여주고 증명해내는 일이다.
2016/07/25 15:34 2016/07/25 15:34
2016/07/25 14:46
운동은 이미 그 운동의 대의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 동의한다는 사실을 끝없이 확인하는 집단적 카타르시스가 아니다. 운동은 그 대의에 아직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세를 늘여감으로써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운동에 수반하는 문제와 비판에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거야말로 운동의 첫번째 요건이다.
2016/07/25 14:46 2016/07/25 14:46
2016/07/24 17:29
헬조선 담론 직전에 힐링 담론이 그 직전에 웰빙 담론이 횡행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집단무의식을 잘 보여준다. 곧 벼랑 끝에 도달한다는 걸 직감한 사람들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던 것이다.
2016/07/24 17:29 2016/07/24 17:29
2016/07/24 14:16
'관객보다 먼저 우는' 걸 신파라 한다. 좀처럼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을 때 운동은 신파에 빠지기 쉽고, 그래서 좀더 나쁜 상황으로 접어드는 경향이 있다.
2016/07/24 14:16 2016/07/24 14:16
2016/07/18 21:27
<다음 침공은 어디인가>(2015)에서 마이클 무어는 스스로 미국의 전사가 되어 다른 나라들을 침공하기로 한다. 단, 세 가지 규칙이 있다. 누구에게도 총을 쏘지 말 것, 기름을 약탈하지 말 것, 친애하는 미국인들에게 유익한 것을 가지고 돌아올 것. 총을 쏘지 않고 기름을 약탈하지 않는다면, 진지한 의미에서 미국식 침공은 아니다. 결국 침공은 세 번째 규칙을 위해서다. 무어는 미국인에게 유익한 것을 가지고 돌아가기 위해 이탈리아의 휴가, 프랑스의 학교 급식, 독일의 과거사 성찰, 아이슬란드의 양성평등 그리고 핀란드의 교육을 침공한다.

핀란드 침공에서 무어는 묻는다. 예전엔 핀란드 교육이 미국처럼 엉망이었고 학력 수준도 다를 바 없이 바닥이었는데 어떻게 세계 최고가 되었을까. 무어는 적국 교육부 장관을 찾아간다.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핀란드 교육부 장관은 ‘일급비밀’을 털어놓는다. “핀란드 학교엔 숙제가 없습니다.” 경악한 무어는 아이들을 만난다. 상대적으로 숙제가 많을 법한 고학년 아이들은 말한다. “숙제는 없어요. 있다고 해도 10분밖에 걸리지 않아요.” 핀란드 교육부 장관은 이어 말한다. “아이들에겐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로 지낼 시간, 청소년으로 지낼 시간, 삶을 즐길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국에서도 핀란드 교육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공부를 많이 하지 않는데 교과 학력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방점은 학력 수준이 높다에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놀리니 공부를 못할 수밖에 없지. 복지병의 또 한 사례군.’ 비웃고 넘어가지 않았을까. 독일 교육이 여러 장점과 미덕을 가지면서도 한국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도 학력 수준이 신통치 않기 때문이다. 독일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있지만, 남의 평가 방식(PISA, OECD 국제학생평가 프로그램을 말한다)에 휘둘리지 않고 독일 교육 나름의 철학과 기준을 믿는 사람이 여전히 더 많다. 그리고 인문계 아이들이 대학에 이르고 실업계 아이들이 산업 현장에 이르면 독일 교육의 진가는 확인된다.

한국 아이들의 교과 학력 수준은 핀란드 못지않다. 대신 아이로 지낼 시간, 청소년으로 지낼 시간, 삶을 즐길 시간은 모조리 반납된다. 대학이 민망할 정도의 지적 수준을 보이는 건 그 자연스러운 결과다. 얼마 전 작고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10여년 전 말했다.

“한국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교육이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하루 10시간 이상을 학교와 학원에서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에 필요하지 않은 지식을 배우기 위해,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직업을 위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토플러는 한국 교육이 ‘산업화 시대의 인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라 평가했다.

토플러는 한국 교육을 오해했거나,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한 셈이다. 한국 교육의 목적은 산업화 시대의 인력을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대학 입시에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대학 입시의 목적은 오로지 아이들의 이마에 등급을 새겨 인생을 줄 세우는 데 있다. 토플러가 한국 교육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잘못된 교육이어서가 아니라 교육이 아닌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모 강연을 하면 굳이 꺼내지 않아도 핀란드나 독일 교육, 혹은 프랑스 학교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부모들은 볼멘소리를 한다. ‘나도 핀란드나 독일, 프랑스 같은 데 살면 그렇게 하죠. 하지만 한국에 살잖아요.’ 당연히 수긍이 가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엔 빠진 게 있다. 핀란드나 독일 교육, 프랑스 학교가 처음부터 지금 같았던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사회들 역시 교육 문제로 홍역을 앓고, 부모들은 불안감과 이기적 태도로 만연한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가면 모두 망한다’는 문제의식이 부모의 연대를 만들면서 변화했다.

문제의식이 부모의 연대를 만들었다는 말은 단순하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현실에선 무척 어려운 일이다. 문제의식은 대개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말에 차단되며, 연대보다 각자도생의 태도를 양산한다. 문제의식이 연대를 만들어냈다는 건, 구체적으로 말해서 ‘내 아이만 손해 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뚫고 나아가는 소수의 부모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유럽 노동자들의 연대임금이, 대기업 등 기존의 임금보다 오히려 덜 받게 되는 노동자의 연대로 시작되었음을 안다. 그들은 당장 나만 손해 보는 기분을 누르고 장기적으로 더 이로운 선택을 했다. 아이 문제는 내 문제보다 훨씬 더 많은 두려움과 번민을 안겨준다. 핀란드와 독일, 프랑스 부모들은 그걸 이겨냈던 것이다.

재난상황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국 교육 현실에서 내 아이부터 살리고 보겠다는 부모들의 태도는 본능적인 것이다. 그러나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교훈처럼) 재난상황의 가장 큰 특징은, 나부터 살겠다는 본능적 태도가 나를 더 나쁜 상황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내가 재난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과 힘을 모으는 것이다. 내 아이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 역시 내 아이만 뒤처질 것 같은 두려움을 누르고 다른 부모와 연대하는 것이다. 함께 우리 아이들이 행복할 가능성을 좀 더 높이는 교육 체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손잡을 수 있다면 변화는 시작된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6/07/18 21:27 2016/07/18 21:27
2016/07/16 10:04
다들 이미 잔뜩 화가 나 있다. 비판과 토론은 그저 화낼 빌미와 대상을 찾는 일에 불과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은 나쁜 인간이 된다. 비난과 조롱, 적대와 배제만 교환된다. 내가 속한 패거리는 비판과 토론에서 철저히 제외된다. (한국 지식인 사회, 2016년 7월 현재)
2016/07/16 10:04 2016/07/16 10:04
2016/07/14 00:01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The Double Life Of Veronika>을 다시 개봉해서, 추억에 잠기는 사람들이 꽤 있는 듯하다. 도리없이, 요상한 한국어 제목(아마도 수입업자가 흥미를 끌기 위해 붙인)이 주는 찜찜함도 다시 재생된다. <베로니카의 두 삶> 정도면 좋았을 걸.

<비밀은 없다>가 홍보 마케팅 때문에 망한 수작이라는 의견을 간간히 본다. 동의한다. 시시한 정치 스릴러인 줄 알았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가족이라는 인간 단위에 대한 고전비극적 은유였다. 제목도 원래 '행복이 가득한 집’(참으로 맞춤한)이었단다.
2016/07/14 00:01 2016/07/14 00:01
2016/07/13 17:33
누가 우리를 개돼지라고 부르는가와 무관하게, 우리가 본질적으로, 또한 최종적으로, 여느 동물과 다를 바 없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자의식을 갖는 건 지성의 중요한 기초다.
2016/07/13 17:33 2016/07/13 17:33
2016/07/12 12:58
나는 인터넷 예의가 오프라인에서와 다를 수 있다는 견해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예의는 인터넷이든 오프라인이든 다르지 않고, 다르지 않아야 한다. 만일 다르다면, 인터넷에서 다른 인간이 된다는 뜻일 뿐이다.
2016/07/12 12:58 2016/07/12 12:58
2016/07/11 13:39
인터넷 기사의 댓글은 여론을 엿볼 수 있는 용이한 참고이긴 하지만, 여론 자체 혹은 여론의 표본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모든 사람이 댓글을 다는 게 아니며, '댓글을 즐겨 다는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 역시 댓글을 달 땐 (멀쩡한 사람이 예비군복만 입으면 달라지듯) 평소보다 덜 신중해지는 경향이 있다.
2016/07/11 13:39 2016/07/11 13:39
2016/07/09 11:18
특별히 솔직할 놈일 뿐, 이놈들이 대체로 이런 식의 사고 구조를 갖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런데 이놈들이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놈들이라고만 분노하는 건, 상황을 회피하는 일일 수 있다. 대체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보였기에 이놈들이 이런 사고구조를 굳힌 걸까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놈들이 개돼지라는 표현을 못하게 만드는 걸 넘어, 개돼지라는 생각을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2016/07/09 11:18 2016/07/09 11:18
2016/07/08 13:13
합법적인가를 묻는 것보다 중요한 건, 누구를 위한 법인가를 근본적으로 묻는 것이다. 법은 만인에게 공정하다는 말처럼 오래된 농담은 없다. 법은 속성상 지배계급의 도구이고, 법 속에 그렇지 않아보이는 구석이 있는 주요한 이유는 지배엔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6/07/08 13:13 2016/07/08 13:13
2016/07/07 12:44
다니는 교회 문제로 번민하는 사람이 의견을 구해 올 때 내 말은 늘 같다. '먼저 그게 교회인지 아닌지부터 다시 살펴해보세요.' 교회인데 문제가 있다면 번민하는 게 당연하고, 비판과 토론을 통해 조금씩 고쳐나가면 된다. 그러나 교회가 아니라면, 교회를 가장한 상점일 뿐이라면 번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무시와 폭로만이 답이다. 현실적으로는 후자가 대부분이다. 교회에 관한 번민의 대부분은 교회가 아닌 걸 교회라고 믿는 가치의 오류에 기인하는 것이다. 물론 이건 교회 문제에만 국한한 이야기는 아니다.
2016/07/07 12:44 2016/07/07 12:44
2016/07/06 11:40
본디 인텔리의 삶이라는 게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 실제 자신의 숙명적 거리를 수반하는 코미디이긴 하다. 그러나 최근 평화박물관이나 자음과모음,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등을 둘러싼 풍경에서 새삼 확인되듯, 평소 입만 열면 자본주의가 어쩌니 신자유주의가 어쩌니 하다가도 자신의 이해관계와 눈곱만큼이라도 관련한 사안에선 참으로 철저히 침묵하는 진보 인텔리 아재들의 풍경은 코미디를 넘어서 기괴한 느낌이 있다. 현실이 호러, 라는 말은 박근혜 인근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2016/07/06 11:40 2016/07/06 11:40
2016/07/05 14:58
책을 만드는 출판사에, 특히 인문사회 분야 책을 만드는 출판사에 노조가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책을 만들기 전에 노조부터 만들자. 사장이 반기지 않는다면 더욱 빨리 만들자.
2016/07/05 14:58 2016/07/05 14:58
2016/07/03 18:03
한병철이 매끄러움의 대가로 얻은 포박된 사유는, 현실과의 '거친 연루'는 질색하면서도 현실 앞에서 '급진적 스타일'은 구비하고 싶어하는 인텔리들에게 애완된다.
2016/07/03 18:03 2016/07/03 18:03
2016/07/02 09:03
한병철의 책들은 중심 논리를 사용하여 끝까지 매끄럽게 가는 구조인데, 그 매끄러움에 스스로 미끄러져 사유가 포박된다. 이를테면 한병철은 제 가장 중요한 중심논리라 할 '자기착취론'에 심취한 나머지 현실 세계의 총체성을 초월한다. 그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자기착취 체제이기 때문에 외부의 착취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란 '시기 구분' 혹은 '성격 규정'대로 떡을 썰듯 똑똑 떨어지지 않는, '혼합물'이다. 후기 자본주의가 자기착취 체제라는 말은 당연히 수긍하지만(한병철만 하는 이야기도 아니거니와) 자기 착취 체제 역시 고전적, 야만적 착취가 병행한다. 자기 착취 체제는 자기 착취가 '주요한 경향'으로 나타나는 체제이지, 자기 착취만 존재하는 체제는 아니다.
2016/07/02 09:03 2016/07/02 09:03
2016/07/01 22:19
청년 노동이 심각하고 대개의 청년이 처한 경제 상황이 처참하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처참은 청년들이 제 경제 상황대로 제 가치를 정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얼마 짜리’ 외엔 다른 가치를 배운 적이 없고, 목격하거나 느껴본 적도 없다. 가난한데 자존감도 제 나름의 에너지도 없다면 완벽한 루저 아닌가. 신자유주의 이후 진보운동의 가장 큰 실패는 바로 그것, 청년들을 루저로 만든 것이다.
2016/07/01 22:19 2016/07/01 2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