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미국은 좌파가 없는 사회, 대표적인 보수 양당제 사회라 불린다. 그러나 미국도 한때는 노동운동을 비롯, 좌파 세력이 꽤 활발했다. 유럽 같은 사민주의 사회로 진전할 여지가 있었던 셈이다. 미국 좌파는 선거에서 ‘현실적 선택’을 거듭하면서 민주당에 흡수되고 괴멸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미국, 극우적 보수와 리버럴이 바통 터치하듯 정권을 주고받으며 미국식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다수의 삶에선 어느 정권이든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는 사회가 되었다. 버니 샌더스의 선전은 그 공고한 체제에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다.
샌더스 선전은 단지 민주당 내의 이변이 아니라 보수 양당체제의 이변이다. 민주당 경선에 나섰지만, 샌더스는 이념과 정책 면에서 민주당을 뛰어넘는 좌파 정당 후보와 다름없다. 미국 보수 양당체제를 실제적으로 수호하는 건, 공화당이 아니라 좌파 정치를 흡수하는 역할을 맡은 민주당이다. 민주당 엘리트는 그 대가로 공화당 엘리트와 함께 미국 사회의 상층 계급을 형성한다.
뉴욕타임스를 애독하고 폴 크루그먼의 ‘인간적 경제학’을 신뢰하는 그들에게 필요한 건 좀 더 상식적인 사회, 즉 그들의 집권이지 결코 계급적 변화는 아니다. 그들은 연일 샌더스의 정책들이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실은 샌더스가 가져올 수 있는 현실의 변화를 두려워한다.
700여명의 ‘슈퍼 대의원’ 대다수가 힐러리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힐러리를 압도하지 않는 한 샌더스가 이길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런데, 만일 샌더스가 지면 모든 것은 바람처럼 사라질까? 미국 민주당은 당내 정치 분파 활동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1988년 민주당 예비 경선에서 파란을 일으킨 제시 잭슨 목사도 패배 후엔 바람처럼 사라진 사례가 있다. 그러나 샌더스 현상은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사회에 남아 리버럴을 견제하고 체제를 위협하며 다음 희망을 만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샌더스 현상은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라 일련의 큰 흐름을 타고 있다. 시작은 2011년 월가 점령 시위다. 자본주의 비판이 쏟아져 나오자 ‘고목나무에 꽃이 피었다’고들 했다가 별 소득 없이 사그라들자 ‘미국이 그렇지 뭐’했던 점령 시위의 에너지는, 사그라든 게 아니라 수면 아래에서 숨을 고르다 대선을 통해 다시 분출되고 있다.
미국 대선의 예비 경선제는 대중의 참여도 높고 매우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대기업과 주류 미디어가 후보를 낙점하고 지배하는 구조다. 양당 모두 그렇다. 오바마는 그 구조에 영리하게 적응하며 승리했다. 그러나 샌더스는 대중의 모금과 소셜미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젊은 세대의 활동으로 그걸 넘어서고 있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거대하고 강력한 힘은 잠시 잠잠해질 순 있겠지만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은 작다.
또 하나는 샌더스 현상이 오바마 정권의 성공과 상호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두 번 집권하는 중간에 월가 점령 시위를 겪었으며, 그로부터 재선에 도움을 받기도 한 오바마 정권은 최선의 리버럴 정권이 갖는 미덕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샌더스 현상의 중요한 기반을 만들었다. 좀 더 상식적인 사회를 구현해 보임으로써 시민들에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에너지를 심어주었고, 역시 미국식 자본주의의 골간은 건드리지 못한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결심을 만들어냈다.
샌더스 현상은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버니 샌더스의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다. 샌더스는 질문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극소수가 사회적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다수의 사회 성원들이 열심히 일해도 살기 어렵고 불안한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정치를 바꿔야 한다. 기존 정치체제 안에서 상대적으로 선한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체제 자체를 넘어서는 정치여야 한다.
한국의 진보 경향 시민들은 그와 반대다. 그런 변화는 당장은 불가능하니 정권교체에 집중하는 게 현실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대중은 지금 미국인들처럼 성공적 리버럴 정권을 경험한 게 아니라 노무현 정권의 실패가 남긴 상처와 거대한 반동에 젖어 있다. 청년들은 보수 엘리트 못지않은 기득권을 구가하면서도 박근혜 욕만 일삼으며 여전히 저항 세력의 표정을 짓는 진보 엘리트들에게 호감을 갖지 못한다. 아예 정치에 관심을 끊어버리거나 보수화하는 대중이 늘어난다. 결국 정권교체에 집중할수록 정권교체가 요원해지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이 수렁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길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다시 질문하는 것이다. 필리버스터를 보며 민주주의를 연호하는 사람들이, 무덤덤한 대중을 계몽의 표적으로 삼는 게 아니라, 왜 내가 열광하는 민주주의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지, 그들의 삶에 다가가는 민주주의는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할 때 희망이 싹튼다.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버니 샌더스라는 인물의 영웅적 투쟁기가 아니다. 비현실적인 것을 선택함으로써 현실을 바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행동이며, 샌더스는 그 반영 혹은 매개일 뿐이다. (혁명은 안단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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