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의 토론회 2차 제안문을 보고 ‘미쳤군’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황으로 보건대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오만하기가 창비는 저리가라구나 싶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들은 왜 미쳤다는 말을 들을 만큼 오만해졌을까. 사람이든 사람들이든 그렇게 되는 원인은 언제나 하나다. 지나친 숭상.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나치게 숭상해왔다. 그들을 숭상해온 사람들엔 지금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포함된다. 그 사람들은 왜 그들을 숭상했을까. 그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이라도 표절 작가를 감싸지 않고 적절한 예의만 갖춘다면 그들을 숭상할까.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한 '텅 빈 공간’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문학 정신’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인간에게 왜 필요하며 세계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라는 일련의 질문들로 지어지는 인간의 정신 말이다. 그 텅 빈 공간에서 표절과 염치없음과 오만과 숭상과 비난들이 뒤엉켜 피어나고 있다.
'2015/06'에 해당되는 글 10건
2015/06/30 15:02
2015/06/27 23:50
창비나 문학동네 같은 문화권력을 비판하는 동시에, 내가 연루된 미시적 문화권력에 대해서도 예민해진다면 좋을 것이다. 폭력적이지 않고 권위주의적인 외양도 없이 친구로 지내지만 뭔가 부적절한 일이 있을 때 비판이나 충고가 어렵다면, 그래봐야 소용도 없고 불편만 치르게 될 거라 느껴진다면, 그건 그가 단지 비판이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문화권력이 작동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단지 비판이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얼마간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관계를 끝내면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문화권력의 내용이다. 두 사람 사이의 상황일 수도,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한 여러 사람 사이의 상황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기 어려운 인간 관계를 운영하면서 상대를 혹은 상대들을 '좋은 친구’ 혹은 ‘좋은 친구들’이라 부르곤 한다. 그는 우리 주변에 매우 많다. 내가 그에 지배되고 있거나 심지어 그가 나일 가능성도 많다는 뜻이다.
2015/06/24 17:07
칼럼 '포스트모던에의 질문'에서 백낙청에 관한 묘사를 불편해하는 이들이 있어 적는다. 나는 백낙청이 단지 문화권력이라서가 아니라 '진보적 수구'의 배후이자 좌장이기에 그에게 비판적이다. ‘수구’라는 말은 반드시 ‘보수’라는 말과 짝을 이룬다. 그러나 보수적 수구는 실은 수구의 절반일 뿐이다. 수구는 보수적 수구와 진보적 수구로 구성된다. 민주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진, 40대 이하의 어지간한 시민들에게 보수적 수구의 영향력이 극히 미미한 오늘 좀더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는 건 진보적 수구다. 진보적 수구는 ‘체제 변화’에 쓰일 모든 진보적 자원과 에너지를 ‘정권 변화’에 쓸어넣음으로써 체제를 수호한다. 보수적 수구가 경제적/사회적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이라면, 진보적 수구는 그에 더해 대중의 존경까지 누린다. 그들은 ‘수구보수 세력과 싸우는 의인’인 것이다. 예수 당시의 수구세력과 싸우며 의인으로 불리던 바리새인들처럼. 존경받는 수구. 얼마나 웃기는가, 아니 얼마나 악질적인가.
2015/06/22 21:59
인터넷과 SNS에서 집단적 분노와 비판이 늘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대상에 대한 빠르고 뜨거운 분노와 비판은 번번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해소되어버리곤 한다.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속도와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온도를 스스로 차단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땅콩회항 사건에서 분노와 비판은 조현아 개인에게는 충분히 표현되었지만 조현아의 그런 행동을 만들어낸 노동 구조에는 닿지 못했다. ‘다 좋은데, 함부로 욕하진 말아주세요’가 애초의 목표이기라도 했던 걸까.
그런 면에서 신경숙 표절 논란은 이례적인 경우다. 창비와 문학동네, 특히 노회한 문화 권력 백낙청의 사기업임에도 마치 진보문학의 공공재인 양 위세등등하던 창비의 아우라를 박살내버렸으니 말이다. 대중은 그들이 특별할 게 없는 장사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즉시 빠르고 뜨겁게 존경을 철회했다. 정치와 노동 등의 영역에서 SNS의 폐해나 한계는 더 냉정하게 분석되고 토론되어야 하지만, 그 폐해나 한계가 모든 영역에서 전적이진 않다는 걸 확인하는 일이었다.
문화 권력에 대한 타격과 더불어 나타난 건 ‘언어의 역전’이다. 문학동네 편집위원 신형철이 신경숙의 표절에 대해 “같은 것을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운율까지 맞추어 말했을 때 그 말은 평소처럼 세련되게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 걸맞지 않은 화려한 옷차림 같다고 할까. 반면, 이번 표절 논란을 촉발한 소설가 이응준의 글은 세련된 문체는 아니었다. 문단에서 고립을 각오한 비장하고 지사적인, 어쩌면 그 스스로도 평소라면 어딘가 구식의 언어로 느껴졌을 만한 것이었다. 그 언어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언어의 역전은 신경숙보다 20여년 아래인 비평가 한윤형의 데이트폭력 논란에서 좀 더 넓게 드러난다. 한윤형과 같은 노동당원이기도 한 음악가 단편선은 한윤형과 사적 친분이나 활동에 대한 존경과는 별개로 이 문제에 대한 당의 냉정하고 분명한 입장 표명을 촉구했다. 역시 노동당원이자 한윤형의 절친인 비평가 김민하는 “나는 그를 도울 것이다. 그 나름의 명성과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아니라 그가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조력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들의 언어는 평소보다 훨씬 더 소박했다. 이번 일에 대한 그들 세대 다른 사람들의 언어도 평소보다 훨씬 소박했다. 무례한 개신교도가 성경 구절을 들이밀듯 포스트모던 철학 용어가 들먹여지는 모습도, 난해하고 배배 꼬인 문화비평 언어가 괜스레 배치되는 모습도 없다. 다들 잠시 포스트모던을 접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한 언어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것을 되새기게 한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소박하고 진솔한 언어를 사용하길 꺼림으로써 그에 대응하는 현실들을 놓쳐버린 게 아닐까.
포스트모던의 바람 이후 우리는 분노, 용기, 양심, 성찰, 수행 같은 것들과 그 언어들을 낡고 지적으로 둔한 것처럼 치부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들이 단순화하고 교조화할 때 인간의 삶의 복잡성을 생략하고 이런저런 비인간적 폭력을 만들어낸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해결은 폐기가 아니다. 인간의 지혜와 사회 디자인 가운데 폐기될 건 없다. 끝없이 수정하고 보완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포스트모던 바람은 그렇지 않았다. 현실 사회주의 패망과 그 실체의 폭로 앞에서 공황 상태에 빠진 80년대 좌파들의 유력한 탈출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그들이 저주하던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같았다. 초가지붕을 알록달록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새마을이라 부르듯, 그들은 근대도 경험하지 못한 사회에서 탈근대 언어의 유행을 만들어냈다. 그 해악은 다음 세대 좌파들의 머리통과 언어에 새겨졌고, 지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의 부조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똑똑해 보이긴 하는데 존경심이 들진 않는다든가, 사회 변화에 대해 말하는데 정작 개인은 불안정해 보인다든가 같은 젊은 좌파 비평가들에 대한 모종의 공통된 인상은 그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 경향들이 데이트폭력의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순 없다. 역시 노동당원으로 데이트폭력 사건의 가해자인 비평가 박가분이 쓴 자기파탄적 해명 글(“천하의 ‘진보논객’ 박가분의 몹쓸 짓에 대한 의혹에 관한 저 자신의 입장”이라는 제목의)은 그런 관련성을 짙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언어의 역전은 그런 경향성과 함께 희망도 내포된 혼돈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꼰대질을 하려는 건 아니다. 한국적, 아니 새마을운동적 포스트모던의 원흉에다 이제 급진성은커녕 정권놀음에만 몰두하는 세대의 일원이 그럴 자격이나 있겠는가. 나는 그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다. 김민하가 그 말에 자신을 포함시켰듯 우리도 자신을 포함시키자는 것이다. 지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의 조화를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내 마음이 조화롭지 않은데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순 없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좌파는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5/06/11 16:41
주목할 일은 '하버드와 스탠포드를 2년씩 다니기로 한 한국인 천재소녀' 이야기가 사실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가 주요한 신문의 기사가 된다는 사실, 그런 기지촌풍 기사에 많은 사람들이 진지한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2015/06/10 17:27
메르스 사태에 대한 박근혜의 끔찍한 무능이야 사실의 재연에 불과하지만, 메르스 공포가 상당 수준 부풀려져 있는 상황에서, 박원순의 영웅적 행보 또한 미심쩍은 것이다. 박원순은 부풀려진 공포를 억지하고 가라앉히기보다는 짐짓 이용하면서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영웅 이미지를 차용한다. 박원순은 시민운동가 시절부터 활동 자체보다 그 활동을 어떻게 포장하는가에, 이를테면 시위보다는 기자회견에 집중하는 사람이었고 그게 성공을 거두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섣불러서 지지율만 깎아먹긴 했지만, 근래 대권후보로서 보수 성향 유권자를 유인하려는 일련의 행보도 같은 맥락에 있다. 박원순에게 메르스 사태는 보수진보 진영구도를 넘어서는, 경쟁자들과 다른 차원의 대권후보로 부상하는 절호의 기회다. 그런 행보를 윤리적으로 비난할 이유는 없다. 정치, 현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제도정치란 치밀한 계산과 연출로 만들어지는 쇼이며, 정치인의 최선은 쇼의 무대를 통해 현실의 최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정치는 불순한 것이다. 본디 불순한 걸 불순하다고 욕할 필요는 없다. 정치가 싫다면 운동을 하면 된다. 위험한 건 정치인의 행동을 지사의 행동으로, 쇼 무대를 운동 현장으로 여기는 태도다. 그런 태도는 쇼를 견제하지 못함으로써 쇼의 개선을 막고, 결국 쇼의 밥이 된다.
2015/06/07 13:22
2015/06/02 16:32
문: 고래에도 비정규직 노동이 있나요?
답: 전원 정규직입니다. 운영 원칙입니다.
문: 고래도 알바를 씁니까? 쓴다면 시급은 얼마인가요?
답: 독자 명단을 재정리한다거나 일손이 부족할 때 한시적으로 알바 노동이 있습니다. 시급은 1만원입니다.
문: 고래에 노조가 있나요?
답: 언론노조 소속 노조가 조직되어 있고 대표 외에 모두 조합원입니다.
2015/06/02 07:35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사람이란 근본적으로 편견과 주관성을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스스로 사유하려 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기대는 속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으로 산다는 건 끊임없이 누군가를 판단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런 한계와 모순을 최소화하는 일이다. 판단해야 하는 대상의 개인적 인격과 사회적 활동을 나누어 보는 건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일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 “그는 예술가로선 훌륭하지만 애인으로선 빵점이라 생각해.” 식으로 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말에 대해 ‘이중적’이라 항의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대상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게 안 되는 사람을 흔히 ‘빠’라고 한다. 빠는 ‘열렬한 지지자’와 전혀 다르다. 근대 대의민주주의에서 지지자는 제 철학과 세계관을 특정한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통해 표현하는 정치적 주체다. ‘차이와 존중’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주체들은 나와 다른 지지와 지지자를 존중하는 의무를 갖는다. 어떤 정치인에 대한 내 지지가 존중되길 바란다면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에 대한 다른 사람의 지지도 존중해야 한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을 비판할 권리는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병존한다. 근대 대의민주주의,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그런 지지와 지지자들로 가까스로 작동되는 정치 체제다.
빠는 대상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다. 빠는 단지 자기애를 대상에 투사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비판에 보이는 태도로 쉽게 드러난다.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대상에 대한 비판을 가급적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많이 불편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대상을 위한 길이며 대상을 욕되게 하지 않는 태도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는 대상에 대한 비판에 무작정 반발하며 증오감을 드러낸다. ‘나에 대한 모욕이자 공격’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빠는 대상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듯하지만, 대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 자기애의 실체는 자기 존중의 부족, 열등감이다. 빠는 대상을 무작정 옹호하는 행동을 통해 제 열등감을 해소한다. 그래서 ‘빠’는 또한 ‘까’이기도 하다.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은 무조건 옹호(빠)하고 그 이상화를 방해하는 대상은 무조건 폄훼(까)하는 ‘분리 행동기제’는 경계성 인격장애 등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병증이기도 하다.
근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불거지는 빠는 역시 ‘노빠’일 것이다.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을 나누어 보길 거부하는, 대통령 노무현의 공과에 대한 어떤 비판과 토론도 거부한 채 무작정 ‘노짱’을 추앙하고 ‘그런 대통령은 또 없다’ 말하는 사람들이다. 노무현의 인간적 매력이 각별했던 만큼 인간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과 기억 앞에서 그들의 감정도 극단에 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빠들은 수구세력이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주장한다. 수구세력이 노무현을 없애고 싶었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김대중이나 노무현 지지자들이 수구세력을 없애고 싶은 게 사실이듯 말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대한민국이라는 시궁창 속에서 고졸 학력으로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 과정과 세월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모멸과 고난에 맞닥뜨렸을지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노무현은 그런 모멸과 고난을 이겨내는 힘을 가진, 그럴수록 오히려 기개 있게 싸워 이겨내고야 마는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전직 대통령을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 시절이 아니기에 노무현을 없애고 싶어 한 세력도 여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론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이다. 악화한 여론을 더 악화시켜 노무현을 궁지로 몰아넣은 건 바로 노빠들이다. 노무현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여러분의 마음은 잘 알지만, 이러는 건 오히려 나를 더 어렵게 만드는 일’이라는 요지의 글을 홈페이지에 남긴 적이 있다. 노빠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무현이 결국 부인과 형의 비리를 시인하고 한겨레에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는 사설이 실릴 만큼 궁지에 몰릴 즈음에도, 그들은 ‘생계형 비리’ 따위 강변이나 늘어놓을 따름이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노무현 지지자는 박근혜 지지자보다 나은 사회의식을 가진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노빠와 박빠는 같은 병을 앓는 환우일 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비판이나 토론이 아닌 치료다. 지난 몇 해 동안 노빠가 한국 정치를 얼마나 퇴행시켜 왔으며, 그래서 애꿎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해악을 끼쳤는가에 대해 굳이 더 반복할 건 없을 것이다. 물론 노빠라고 다 같진 않다. 어떤 사회적 존중도 필요 없어 보이는 중증 노빠도 있지만, 지지자이되 여린 성정 탓에 노빠의 영역을 맴도는 사람들도 있다. 노빠를 이용해 제 이해를 도모하는 노빠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사랑의 결핍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5/06/01 16:56
지난번 경향신문에 쓴 쓸모 없는 예술이라는 칼럼을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번역해 실었다. 사용한 사진이 흥미롭다. 존 버거의 어투로 길게 말해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한달까. 많은 것을 말해주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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