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5/04/30 동병상련 부모공부 13
  2. 2015/04/29 보수교회?
  3. 2015/04/28 마을 만들기
  4. 2015/04/23 잉여
  5. 2015/04/23 안단테로 2년
  6. 2015/04/21 쓸모없는 예술
  7. 2015/04/15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
  8. 2015/04/10 경멸
  9. 2015/04/07 고래 주주 추가모집
2015/04/30 09:13
한국 대안학교의 역사가 20년을 넘기고 있다. 몇 해 전부터 대안교육 쪽의 뜻있는 사람들이 ‘정명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꾸려왔다. 정명(正名)은 알다시피 ‘이름이 바로 서야 세상이 바로 선다’는 공자의 이야기다. 대안교육이라는 이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그 이름에 값하는 본디 뜻을 살피고 바로 세워 제대로 된 대안교육을 해보자는 취지다. 그런 모임이 꾸려진다는 것은 대안교육이 많이 흐트러졌다는 뜻일 게다.

수많은 대안학교가 다 같진 않고 최초의 대안학교라는 간디학교만 해도 여러 개로 분화되어서 여전히 미인가 상태이면서 대학입시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학교도 있고 인가학교인 경우도 있다. 한 대안학교에서는 진보진영 인사의 아이와 재벌가의 아이가 함께 다니는 풍경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큰 흐름으로 본다면 대안학교는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는 학교보다는 ‘대안적 입시’를 모색하는 학교로 가는 경향을 보여왔다. 의식 있는 중산층 인텔리 부모들이 제 아이를 야만적인 공교육 현장을 우회시키되 결국 대학입시로 가는 경향이다.

‘귀족학교’라는 비판도 실은 그와 관련되어 있다. 흔히 귀족학교라는 말은 대안학교의 비싼 학비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교육부의 조사에 의하면 2014년 기준으로 전국 170여곳의 미인가 대안학교의 연간 학비(입학금·수업료·숙식비)는 평균 620만7000원으로 조사되었다. 평균이 그렇다는 것이니 실제 체감 학비는 그보다 많다는 것이고, 입학 때 내야 하는 목돈까지 생각하면 한 아이에게 한 달 100만원이라는 이야기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도시 중산층 부모들이 보기에는 일반학교에 다녀도 사교육비나 식비까지 생각하면 감당할 만한 돈일 수 있다.

만일 대안학교들이 ‘대학입시를 통한 인력 상품화’라는 현재의 교육시스템을 벗어나 대학에 가지 않고도(대학을 가는 게 잘못이거나 못 가게 하는 게 옳다는 게 아니라) 제 삶을 꾸려가는 교육을 해왔다면, 그래서 20년쯤 되고 보니 그런 삶을 꾸려가는 대안학교 졸업생들이 사회 전반에 제법 나타났다면 귀족학교라는 비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귀족학교라는 비판에는 서민 부모들의 울분이 담겨 있다. 아이가 동네 학교에 다니는 것도 빡빡한 부모가 대안학교를 생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학비도 학비지만 입학전형에서 대안학교 부모의 그룹에 끼는 것도 쉽진 않다. 미인가 대안학교는 재정이나 운영 면에서 부모의 참여 몫이 매우 크다. 그래서 학교의 운영방식이나 취지에 교감하는 부모들이 다수를 점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배가 산으로 가게 된다. 자연스레 아이를 뽑을 때 부모의 교육관이나 성향을 살피게 된다.

결국 대안학교 부모들은 유유상종의 그룹을 짓게 되고, 학력이 낮거나 먹고사는 일에 쫓겨 교육문제나 인문사회적인 식견을 가질 기회가 적은 서민 부모들이 그 그룹에 끼기는 어렵다. 그것도 마음 상하는 일인데, 가만 보니 대안학교라는 데가 결국은 입시로 흘러간다면 서민 부모들로서는 위화감이 들고 마음이 언짢을 수밖에 없다. 만일 대안학교들이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는 데 힘써왔다면, 그런 모델을 많이 만들어내진 못했더라도 힘닿는 데까지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귀족학교라는 비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배운 사람들이 다르긴 다르다. 입시로 승부할 형편이 충분히 되는데도 저렇게 뜻있는 교육을 해보려 하니 참 훌륭하다’라는 칭송이 나오지 않았을까.

사회적 맥락에서 대안학교와 대안교육은 ‘교육의 전위’의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의 교육 현실에 많은 문제가 있고,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있지 못하고, 그래서 아이의 미래도 사회의 미래도 어둡기에 대안학교라는 게 출현한 것이다. 전체 교육을 당장 바꿀 수 없다면 일부라도 제대로 된 교육을 해나감으로써 전체 교육에 영향을 주고 변화를 만들어내자는 게 대안교육의 사회적 위상이다. 그런데 대안학교의 주된 흐름이 일부 부모들이 전체 교육의 현실로부터 제 아이를 빼돌리는 상황이 된다면 그건 귀족학교라는 이야기가 아예 그른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판이 대안학교 자체를 겨냥하는 것은 본질을 벗어난다. 어느 대안학교도 설립할 때부터 그런 교육을 지향하지는 않는다.(아예 처음부터 골프와 승마까지 교과에 넣고 대놓고 귀족교육을 표방하는 일부 대안학교는 제외한다) 다 저마다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려고 학교를 만든다. 귀족학교라 불리지만 교사의 임금수준은 매우 열악한 편이다. 일반 학교 교사생활을 하다 제대로 된 교육을 해보고 싶어 대안학교로 옮긴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왜 대안학교들이 그렇게 흘러갔는가. 전적으로 부모들 때문이다.

부모들의 욕망과 불안이 대안학교를 그렇게 몰아간다. 대안학교 부모 대상 강연에서 이따금 부모들에게 묻곤 한다. ‘아이가 대학에 꼭 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 들어주시겠어요?’ 초등 대안학교는 거의 모든 부모들이 손을 든다. 중등에서는 절반 정도가 들고 고등학교에선 일부만 든다. 고등학교도 학년에 따라 다르고 학교마다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인 흐름은 그렇다.

그렇다 보니 신입생을 채우기 쉽지 않은 신생 대안학교는 아예 두 가지 경향을 함께 포용하려는 모습도 있다. 몇 해 전에 생긴 인문학 공부 위주의 중·고등 과정 대안학교는 “제대로 된 인문학 공부를 하면 대학입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 학교는 두 경향의 부모들이 늘상 갈등했고 결국 두 목표 다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 사실 제대로 된 인문학 공부가 대학입시를 해결한다는 건 기만이거나 지나치게 순진한 이야기다. 대학입시가 정말로 그런 상태라면 현재 교육에 별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닌 공부를 하고 그걸로 입시 결과가 나오니 현재 교육이 문제인 것 아닌가.

흔들리는 대안학교 부모들은 “현실이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항변한다. 수긍이 가는 이야기지만 그럴 거면 굳이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낼 이유가 있는가. 굳이 대안학교를 고집한다면 결국 대안학교와 대안교육의 정체성을 일반 학교와 다름없이 만들어놓는 데 기여하겠다는 것밖엔 안 된다. 내 아이부터 생각하는 건 부모의 인지상정이고, 한 부모가 교육문제에서 사회적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내 아이만 생각하고 대안교육의 사회적 의미에 눈감는다면 성숙한 태도라고 하긴 어렵다. 사실 그런 모습은 교육에서 주체적 태도보다는 교육상품을 골라 아이를 내맡기려는 한국 부모 전반의 태도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다음 회에 계속) (주간경향)
2015/04/30 09:13 2015/04/30 09:13
2015/04/29 09:17
어제 강연에서 '예수전 내고 보수 교회로부터 욕을 많이 먹지 않았는가' 질문을 받았다. 종종 받는 질문이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보수교회의 관심은 교리나 신학이 아니라 오로지 경제적 이해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에 직접 저촉되지 않는 것에 그들은 일절 관심이 없다. 예전의 한국 보수교회는 교리나 신학에서 유난히 보수적인 면모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그 교회들은 경제적 이해관계에 결정적이라면 교리나 신학마저 수정할 채비가 되어있다. 보수교회? 어떤 교회도 그 교회들보다 더 급진적일 순 없다.
2015/04/29 09:17 2015/04/29 09:17
2015/04/28 09:16
'마을 만들기'는 좀 해괴한 말이다. 유럽인들에게 '신대륙'이 실은 '내 대륙'이라는 뜻이었듯 마을 만들기는 '내 마을'의 욕망이 느껴진다. 현재 마을들이 '마을성'을 많이 잃었다는 건 대체로 공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수백년 이상 사람이 살아온 마을에 들어가선 '이것은 마을이 아니다' 선언하는 게 마을성 회복의 출발점일까. 마을의 요체는 이웃이다. 이웃은 지원금신청서나 보도자료, 요란스러운 토론회가 아니라 겸손과 속깊은 배려의 교직에서 생겨난다.
2015/04/28 09:16 2015/04/28 09:16
2015/04/23 10:58
‘공부 못하는 아이’가 단지 입시공부에 재능이 없는, 다른 공부에 재능이 있는 아이이듯, ‘잉여’는 이 사악한 경제시스템이 쓸모를 인정하지 않는, 다른 가능성을 가진 청년이다. 이 시스템에서 잉여로 살아가는 건 물론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부끄러울 이유는 없다.
2015/04/23 10:58 2015/04/23 10:58
2015/04/23 10:37
경향신문에 '혁명은 안단테로'라는 기명 칼럼을 쓴 지 꼬박 2년이 되었다. 처음 쓸 땐 전에 것들보다 3매 이상 많아 호흡 조절이 쉽지 않았는데 이젠 적당하게 느껴진다. 안단테로는 '자유주의 비판'을 벗어나 좀더 다양한 이야기를 해온 것 같다. 근래 글들은 명료한 결론보다는 얼마간의 모호함을 남기는 경향도 보인다. 함께 생각할 공간을 확보하고 싶어서일 게다. 읽어주신 분들께 정중히 인사드린다.

2015/04/23 10:37 2015/04/23 10:37
2015/04/21 10:46
예나 지금이나 하드록을 주된 취향으로 클래식, 재즈, 국악 따위를 가리지 않고 듣는 편이지만 현대음악은 가까이한 적이 거의 없었다. 최근 테리 라일리, 스티브 라이히, 필립 글래스 같은 미니멀 음악이나 올리비에 메시앙, 리게티, 크세나키스 등이 음악 듣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건 그런 나로선 이례적인 일이다.나는 ‘좋은 글은 불편하다’라는 명제를 글의 가치에 대한 지표로 삼아왔다. 이 사악하고 기만적인 세계에서 불편함조차 없는 글이란, 체제를 미화하고 타성에 젖은 삶을 위무하는 아편일 뿐이다. 그런 생각이 어느 순간 음악 쪽에 이어졌고 조화로운 조성에 대한 회의와 함께 현대음악의 불편함에 대한 자발적 대면을 만들어냈다.

30여년 전 한 시기에 나는 국악에, 농악이나 민속악이 아닌 정악에 빠졌더랬다. 옛 지배계급의 수행음악이던 영산회상이나 왕을 위해 연주되던 음악들을 탐닉하고 배우러 다니는 건, 혁명과 계급의식에 한창 몰입한 좌익 청년에겐 어울리지 않았고, 참으로 쓸모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쓸모없는 음악이 나에게 없었더라면 그 시간이 북이나 쇠를 배우는 좀 더 쓸모있는 시간으로 모두 대체되었더라면 나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좌익 청년에게 쓸모없는, 전혀 좌익적이지 않은 그 음악은 좌익 청년이 오래도록 좌익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예술이란 묘한 것이라서, 쓸모없음의 상태에서 그 본디 힘과 가치가 드러난다.

마크 로스코 전시에 나붙은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이라는 홍보 문구는 오늘이 예술의 쓸모가 얼마나 중시되는 세상인가를 보여준다. 문구에서 스티브 잡스는 더 이상 자본가가 아니라 예술가다. 예술가 스티브 잡스에게 예술적 창의성과 혁신적 태도는 기존의 세계가 아니라 기존의 산업과 충돌한다. 예술은 기존의 산업과 차원이 다른 부가가치와 이윤을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다. 스티브 잡스는 또한 창의성과 혁신의 기반이 인문학이라고 설파하곤 했다. 왕의 말씀은 ‘CEO 인문학’ 등의 바람으로 이어지고, 잘나가는 광고 카피라이터들이 인문학 멘토를 자처하거나 심지어 ‘광고가 세상을 바꾼다’고 주장하는 희한한 장면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런 바람과 풍경은 예술과 인문학이라는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가장 의미있는 두 가지에 대한 철저한 무지를 기반으로 한다. 예술이 제 본디 힘과 가치를 가지는 조건은 쓸모가 아니라 ‘쓸모와의 거리’다. 인문학의 힘은 인문학적 사유와 통찰로 최대한의 쓸모를 뽑아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제 정신적 고양을 쓸모에만 바치거나 그런 태도에 함락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요약하자면 예술과 인문학은 인간이 돈 되는 일보다는 돈 안 되는 일을 위해 살도록, 돈이 아닌 다른 소중한 가치에 좀 더 정신을 팔고 용감하게 좇도록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 시민은 현실적 쓸모에 관련한 일은 노예에게 맡기고 철학이나 예술 같은 쓸모없는 일에 몰두하는 걸 인간적인 삶의 태도라 믿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시작되고 쓸모있는 일에만 제 시간과 능력을 바치는, 노예적 삶의 태도가 바람직한 삶의 태도로 대두되고, 자본주의의 후기에 이르러선 그런 삶의 태도로 무장한 노예들이 영웅으로 추앙되고 지배계급으로 군림한다. 급기야 예술과 인문학은 그런 노예적 삶의 효율과 경쟁력을 높이는 도구가 되었다.

한국 사회는 그런 흐름을 충직하게 따르면서도 문화적 기지촌의 추레한 풍경들이 덧붙여진다. 로스코 전시에 맞춤책을 의뢰받은 스타 철학자는 ‘비정규노동자들이 이 전시를 보고 위로받길 바란다’는 한가로운 소리를 하고, 급기야 전시장엔 ‘이건 단지 그림이 아니라 위로야!’ 윽박지르는 문구가 내걸린다. 스타 철학자는 책 의뢰를 받기 전엔 로스코를 몰랐다고 했다. 한 예술가에 대해 책을 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신체적/물리적 시간이 있는 법이다. 과문한 소재도 ‘구라’의 기술로 쓰고 순진한 사람들에게 팔아먹을 수 있지만, 인문 정신이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런 쓸모를 거부하는, 쓸모없음의 영토에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는 태도다.

예술의 쓸모와 관련하여 근래 한국에서 가장 대대적인 위력을 발휘해온 건 한류다. 한류의 가치와 지향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건 문화적 수구꼴통으로 전락하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한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풍경은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화려한 무대와 환호에 휩싸인 한류스타만이 아니다. 한류가 총력 동원된 지난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식은 세계적 망신으로 끝났고, 바로 이 순간 좀 더 높은 임대수익을 위해 ‘테이크아웃 드로잉’이라는 근사한 예술 공간을 용역을 동원해 내쫓으려는 건물주는 다름 아닌 ‘문화대통령’ 싸이다.

예술의 쓸모를 강조하고 쓸모의 도구로 삼는 일이 예술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예술이 황폐해진 세상에서 삶이란 또한 얼마나 황폐한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목도한다. 오래전, 스티브 잡스는 애플이 ‘창의성과 혁신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걸 보여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와 애플이 바꾼 건 세상이 아니라 단지 이윤이었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5/04/21 10:46 2015/04/21 10:46
2015/04/15 22:09

Frau mit totem kind

케테 콜비츠,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 1903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 나는 질려 버렸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모든 것을 깊이 느끼고 교감하면서 작품으로 표현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나의 예술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 구제받을 길 없는 사람들, 변호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동시대인들을 위해 한가닥의 책임과 역할을 하는 것이다."


2015/04/15 22:09 2015/04/15 22:09
2015/04/10 13:03
성매매 여성에 대한 ‘갈보’나 ‘똥치’ 같은 옛 사람들의 경멸과 ‘쉽게 돈 벌고 싶어 하는 애들이야.’ 하는 근래의 경멸은 질적으로 다른가. 사람들은 여전히 성매매 문제가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 윤리의 문제라 말함으로써 그들을 ‘정상 세계’로부터 분리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하기 싫은 상대와 섹스하지 않고도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다면 누가 성노동을 하겠는가. 결혼이 경제력을 가진 상대에게 장기간의 성적 독점을 제공하는 계약이 된 세상에서 누가 누구를 더럽다고 말할까. 우리는 모두 더럽거나 우리 가운데 누구도 더 더럽지 않다.
2015/04/10 13:03 2015/04/10 13:03
2015/04/07 09:00
지난해 말 고래가그랬어 정기 주주공모 이후
신청을 원하는 분들이 있어 추가모집 합니다.


주주공모_20150407
2015/04/07 09:00 2015/04/07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