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4/09/30 고통
  2. 2014/09/30 승무원
  3. 2014/09/24 노동운동의 목표
  4. 2014/09/23 릴레이 해명
  5. 2014/09/22 생활양식의 전투
  6. 2014/09/21 거대한 상점
  7. 2014/09/20 죽은 이론, 죽은 학자
  8. 2014/09/18 예수와 예수業界
  9. 2014/09/17 미숙
  10. 2014/09/05 정의와 상식
  11. 2014/09/04 예수의 정치성에 관한 개소리들
2014/09/30 09:40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위로의 의미로든 충고의 의미로든 고통의 객관성(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생각해봐, 따위)을 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고통엔 현재성이 있을 뿐이다.
2014/09/30 09:40 2014/09/30 09:40
2014/09/30 09:13
지당한 얼굴로든 억지스런 얼굴로든 '사람보다 돈'을 좇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이들에게 '살려면 가만있으라' 윽박지른다는 점에서 세월호는 대한민국 자체이기도 하다. 적어도 아이들의 삶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국의 성인은 모두 '대한민국이라는 세월호'의 승무원이 아닐까. 모든게 내탓이오 식의 비굴도 나만은 정의롭소 식의 기만도 이제 그만 떠나보낼 때.
2014/09/30 09:13 2014/09/30 09:13
2014/09/24 10:22
노동운동의 목표는
사장처럼 사는 게 아니라
사람처럼 사는 것.
2014/09/24 10:22 2014/09/24 10:22
2014/09/23 17:52
‘감사’ 릴레이나 ‘열권의 책’ 릴레이에 내 책을 언급하거나 다음 주자로 나를 지목한 분들께 감사드린다. 나는 릴레이를 잇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를 이야기하는 게 예의지 싶다. 주장할 만한, 특별히 의미있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감사나 책 릴레이를 아이스 빠께슨가 뭔가 하는 꼴사나운 놀이와 같다고 생각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단지 나는 릴레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협의되지 않은’ 릴레이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이를테면 나는 어떤 자리에서 돌아가며 자기소개하는(하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 중엔 하고싶지 않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여하튼 릴레이를 잇지 않음을 널리 양해해주시길. 물론, 이후로도 내 책을 언급하거나 나를 다음 주자로 지목하는 분이 있다면 변함없이 감사드릴 뿐이다.
2014/09/23 17:52 2014/09/23 17:52
2014/09/22 23:56

몇 해 전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노페 열풍’(노스페이스 패딩 열풍)이 있었다. 그즈음 노스페이스 창업주가 한국에서 실적이 좋은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국엔 산이 많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 산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는 제 상품이 한국 고등학생의 ‘비공식 교복’이라는 사실은 몰랐던 것 같다. 고등학생들은 왜 그리 노페에 집착하고 또 안달했을까? 이런저런 사회문화적 분석을 할 수 있겠지만, 결국 옷에 관한 ‘취향’이 없기 때문이다.

교사들에 따르면 MP3 플레이어(최근엔 스마트폰으로 통합된)에 기획사에서 만들어내는 유행 음악이 아닌 음악, 대중음악의 고전이나 인디음악 파일이 한 개라도 있는 아이는 반에서 하나가 채 안된다고 한다. 왜 그런 걸까? 역시 아이들에게 음악에 관한 ‘취향’이 없기 때문이다. 취향이 없는 아이는 유행하는 것, 즉 남들이 하는 걸 따르게 되고, 따를 수 없을 때 심한 통증을 느낀다.

노페 열풍도 강남에선 통하지 않았단다. 어릴 적부터 노페보다 더 좋은 옷들을 구매해본 아이들에게 노페 열풍이란 촌스러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취향이라기보다는 소비 취향이다. 브랜드와 가격으로 표현되는 소비 취향은, 취향처럼 보이는 자본에 의한 ‘취향의 계열화’다. 그러나 주류 대중음악이 아닌 음악을 듣는 아이들이 가장 많은 곳 역시 강남이라는 사실은, 소비 취향의 기회와 취향 사이의 일정한 인과관계를 보여준다. 물론 대개의 아이들은 강남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취향이 없는 이유는 역시 어른들(부모들)에게 취향이 없기 때문이다. 옷이나 음악뿐 아니라 삶의 여러 부문에서 나름의 취향을 가진 사람, 남의 기준이나 이목에 아랑곳않는 제 나름의 미감과 생활철학을 가진 사람을 찾기란 정말 어렵다. 이를테면 돈에 대한 나름의 주관이나 철학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다들 ‘돈이 모자란다’고 생각할 뿐이다. 집이라는 게 삶에서 무엇이고 나에게 적당한 집은 어떤 것이며 집을 위해 인생을 얼마나 할애할 것인가 등에 대해 나름의 정리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내 집이 작은가 큰가, 싼 집인가 비싼 집인가를 생각할 뿐이다.

이런 상태는 결코 자연스러운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니다. 훨씬 더 가난했고 생존이 숙제이던 시절의 사람들도 나름의 취향과 철학을 가졌다는 사실을 떠올려볼 때 말이다. “돈이 중요하지. 하지만 사람이 너무 탐욕 부리면 죄 받지.” 이 흔하디흔한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적 위엄을 지키는 삶의 비결을 묘파한다. “공부 열심히 해. 하지만 공부가 인생의 다는 아니야. 동무한테 양보할 줄 알고 잘 놀아야지.” 어지간한 어른이라면 예사롭게 하던 이 말엔 교육 철학의 정수가 담겨 있다.

돈, 집, 직업, 아이 교육, 종교, 사랑 등 삶의 부문들에서 마련된 취향과 삶의 철학들이 모여 하나의 ‘생활양식’을 만들어낸다. 생활양식은 한 인간의 영적 성곽이다. 노페 점퍼를 두 벌 가진 아이가 못 가진 아이를 무시할 순 있지만 옷에 대한 나름의 취향을 가진 아이에겐 별 도리가 없다. 마당이 온통 잡초로 덮인 작고 초라한 시골집에서 혼자 살아가는 병든 노인을 누군들 측은히 여기지 않을까. 그러나 제 생활양식에 의거하여 바로 그렇게 살던 권정생을 측은히 여긴 사람은 없었다.

신자유주의에서 삶이란 곧 생활양식이 파괴된 삶이다. 신자유주의는 단지 ‘보이지 않는 손’에 모든 걸 내맡기는 19세기 경제체제의 부활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극단적 개인주의와 물신주의로 개조하려는 강력한 영성운동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이 낱낱이 흩어져 무한 경쟁을 벌임으로써 구원을 얻는, 또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으로 가득한 세상을 유토피아라고 설파하는 종교다. 한국인들은 1997년 이래 그 종교에 포획되었다. 이명박이라는 극단적 추(醜)와 박근혜라는 극단적 악(惡)에 분노하는 ‘정의로운 사람들’의 일상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생활양식은 24시간 내 영혼을 파고드는, 불안감과 경쟁 강박에 전전긍긍하게 하는 종교에 대한 면역체계다. 물론 신자유주의하에서 나름의 생활양식을 온전하게 마련하긴 어렵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내가 지금 당장 마련할 수 있는 생활양식의 범주는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쓰고 있기에 그 자체로는 내 삶을 말단까지 장악하기 어렵다. 내가 나름의 생활양식을 가지려 하지 않음으로써 말단까지 장악되는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역이용하여 나만의 생활양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

아이에게 제 삶과 관련한 취향들을 일찌감치 하나씩 길러주고 돈, 집, 직업, 교육 등 삶의 모든 부문에서 차근차근 나만의 생활양식을 만들어가는 일, 누구도 감히 내 삶의 가치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재단할 수 없는 영혼의 성곽을 쌓아가는 일은 일상에서 수행하는 신자유주의와의 전투다. 물론 일상의 전투만으로 신자유주의가 극복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전투가 없다면 사회적 차원, 좀 더 거대한 차원에서 전투도 없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체제이자 종교이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4/09/22 23:56 2014/09/22 23:56
2014/09/21 13:45

아시안게임 개회식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아무런 가치관도 철학도 없는 하나의 거대한 상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그리고 매우 우울하게 알려준다.

2014/09/21 13:45 2014/09/21 13:45
2014/09/20 21:44

사회문화 현상에 대해 꽤 읽을 만한 책을 쓰는 학자 몇이 세월호 상황과 관련해선 다들 하는 수준의 개탄(국가가 이럴 수가 있느냐, 대통령이 저럴 수가 있느냐, 정부 여당의 각성을 촉구한다 따위)만 내놓는 걸 보면 한숨이 나온다. 학자도 사람이니 압도적 상항 앞에서 무기력해질 수 있다. 그러나 안온한 상황에서만 작동하는 이론은 죽은 이론이며, 압도적 상황일수록 냉철해지지 않는 학자는 죽은 학자다. 힘들 내길.

2014/09/20 21:44 2014/09/20 21:44
2014/09/18 18:20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적도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범주 안에서 어떤 직위(목사, 신부, 신학자, 선교사, 장로, 집사 등)를 갖거나 기독교와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이 예수와 좀더 특별한 관련을 갖는다는 건 실은 근거없는 생각이다. 그것은 단지 예수업계(業界)에서 일하는 것이지 예수와, 혹은 예수의 일을 하는 건 아니다. 예수의 일은 기독교 안인가 밖인가, 교회 안인가 밖인가와는 전혀 무관하다.
2014/09/18 18:20 2014/09/18 18:20
2014/09/17 18:21
번역투의 문장은 지적인 것도 학술적인 것도 아닌, 한국어 미숙이다.
2014/09/17 18:21 2014/09/17 18:21
2014/09/05 11:56
입버릇처럼 정의와 상식을 말하는 사람은 한번 더 살펴보게 된다. 입버릇처럼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가 애처로울 만치 단순해서 그 자체로 위험한 경우가 적지 않고, 입버릇처럼 상식을 말하는 사람은 이미 확보된 사회경제적 안정에 심리적 평온까지 보태려는 깍쟁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14/09/05 11:56 2014/09/05 11:56
2014/09/04 11:56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예수의 정치성에 대한 근거로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들어왔다. 알다시피, 당시 로마에서 십자가 처형은 식민지나 노예의 반란/반역죄에 적용되었다.(로마 시민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견해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건 사람들이 예수를 오해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의 생각과 메시지(근원적이고 우주적인 사랑!)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식의 논리로 다시 반박되곤 한다. 그런 반박은 예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는 개소리일 뿐이다. 예수에게 정치적 변혁은 굳이 강조할 이유조차 없는, 혹은 생략하려 해도 생략할 도리가 없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예수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 죄인 취급 받는 사람들, 여성, 아이들이 사람대접 받는 세상을 구름 위에, 혹은 관념 속이나 저승에 지으려 한 게 아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안에서, 그 현실을 변화시킴으로써 만들려고 했다. 그 변화는 원하든 원치 않든 기존 지배질서와의 정치적 갈등과 불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여자가 남자와 대등하게 사람 노릇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가부장 권력이 가만있을 리가 없고 사람 취급 못 받는 사람들이 인권을 확보하고 버젓이 똑같이 행동하는데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해서 유지되는 기득권세력이 그걸 용납할 리 없다. 예수의 정치성은 예수가 의도했든 안했든 필연적이었다. 예수의 변혁, 즉 하느님 나라 건설은 당연히 정치적인 변혁을 수반한다. 그것을 궁극의 목표로 하지 않을 뿐.
2014/09/04 11:56 2014/09/04 1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