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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07/28 최악
  3. 2014/07/28 21세기
  4. 2014/07/24 용맹 고독
  5. 2014/07/20
  6. 2014/07/17 공현의 경우
  7. 2014/07/16 정치로부터의 유폐
  8. 2014/07/02 서글픈 월드컵
2014/07/28 10:00
지배 체제 입장에서 어느 쪽이 더 이문일까. 국회의원 하나 더 느는 것과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생각과 토론을 멈추는 것.
2014/07/28 10:00 2014/07/28 10:00
2014/07/28 09:23
정치, 특히 근래 선거에서 '여하튼 최악은 막자'는 견해를 존중한다. 그러나 '여하튼 최악은 막자'는 견해 외엔 아무런 생각도 토론도 않겠다는 태도는 존중하기 어렵다. 그보다 더 최악은 없다
2014/07/28 09:23 2014/07/28 09:23
2014/07/28 02:41
'21세기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대립이 아닌 중도와 통섭의 시대'라는 식의 말은 그럴싸하지만 허망한 말이다. 전쟁 이후 한국사회는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이념대립을 벌인 역사가 없거니와, 근래 보수 진보의 격렬한 이념대립이라는 것도 실은 수구기득권 세력과 신흥기득권 세력의 땅따먹기 싸움일 뿐이다. 21세기는 허깨비 보수 진보 이념대립의 시대도 아니지만 중도와 통섭의 시대는 더욱 아니다. 21세기는 보수 중도 진보를 아우른 자본의 지배와 벌이는 필사적인 사회적, 영적 저항의 시대다.
2014/07/28 02:41 2014/07/28 02:41
2014/07/24 19:50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을 구분해야 한다. 고독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고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 차단된 고통이다. 자신과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까. 고독을 피한다면 늘 사람에 둘러싸여도 외로움을 피할 수 없다. 용맹하게 고독해야 한다.
2014/07/24 19:50 2014/07/24 19:50
2014/07/20 11:19
'사랑이 적절치 않은 때'가 없듯이 '비판이 적절치 않은 때' 같은 건 없다.
2014/07/20 11:19 2014/07/20 11:19
2014/07/17 00:00


몇몇 좌파들이 격하게 비판하기에 읽어봤는데 나로선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근래 전교조 법외노조화와 관련한 '아저씨들' 글과 달리 기름기가 쏙 빠진 느낌의 글이다. 좌파/사회주의 운동은 자본과 노동자라는 적대적 계급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노동이 변하고 계급 양상도 변했다고 주장하지만 하지만 그런 기본 구조가 변한 건 아니다. 그러나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등 소수자 운동은 자본주의 계급구조에 남성/여성, 이성애자/성소수자, 성인/청소년이라는 또 다른 계급구조가 결합된 운동이다. 그래서 노동운동처럼 자본주의 계급구조에 집중하는 운동의 맥락으로 소수자 운동의 모든 걸 치환해선 안 된다. 공현 씨가 청소년운동가로서 두 계급 구조를 어떻게 배분하는가는 전적으로 공현 씨의 몫이다. 만일 누군가가 ‘공현에게 기대하는’ 임의의 배분치를 전제로 공현을 비판한다면 매우 생뚱맞은 상황이 된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계급구조에 집중하는 누군가가 공현 씨에게 ‘좌파가 그렇게 말해서야 되겠느냐’ ‘사회주의자가 그렇게 말해서야 되겠느냐’고 비판한다면, 공현 씨가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난 좌파로서 사회주의자로서 말한 게 아니다’ 외엔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런 비판이 안그래도 궁지에 몰린 전교조에 대한 여론을 더 악화시킨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관념적인 것이다. 전교조는 합법화 이후, 혹은 신자유주의 이후 노동운동으로서도 교육운동으로서도 꾸준히 자유주의화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전교조가 서민 대중의 신망을 잃고 궁지에 몰렸다면 그 주요한 원인은 극우세력의 공격과 매도 이전에, 서민 대중(혹은 서민 대중 부모와 학생)의 삶에 닿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전교조뿐 아니라 민주노총의 주력인 정규직 노동운동의 일반적인 문제(중산층화/자유주의화)이기도 하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공격이 살아있던 전교조의 급진성을 죽였는지, 오히려 이미 스스로 죽은 전교조의 급진성을 살아있는 것처럼 포장해주진 않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지금 전교조에게 중요한 건 전교조를 둘러싼 상황 이전에, 전교조 스스로 급진성을 회복하는 것, 다시 말해서 서민 대중(혹은 서민 대중 부모와 학생)의 삶과 교육현실에 닿는 것이다.

전교조의 법외노조화를 위한 비판과 법외노조화 반대를 전제로 한 비판은 전혀 다르다. 법외노조화 반대를 전제로 한 비판이 지금 당장은 전교조에 해로운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걸 자제하거나 금하는 건 전교조를 보위하는 게 아니라 결국 전교조를 제대로 망하게 하는 길이다. 당파성만 분명하다면 넓고 긴 안목이 필요하다.

2014/07/17 00:00 2014/07/17 00:00
2014/07/16 23:58
안철수를 새로운 정치의 희망이라 기대하고 환호하던 많은 사람들이 안철수 얼굴만 보여도 욕을 한다. 이제 그들에게 안철수는 새로운 정치의 희망이 아니라 낡은 정치의 화신이 되어버린 듯하다. 물론 기대는 실망으로 바뀔 수 있고 그 낙차에 따라 욕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이력이 전무한 안철수가 정치판에서 힘을 갖게 되고 저리 활개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기대와 환호 덕 아니었던가. ‘나의 관련성’을 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이다. 심각한 정치적 성찰까진 아니어도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내가 어리석었다’ 정도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단지 ‘성찰하지 않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의 태도는 매우 열정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듯한 그들이 실은 ‘정치로부터 유폐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들의 태도는 전통적인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수십년 전 복덕방에 모여 앉아 “대중이가 말이야” “영삼이가 말이야” “박통이 말이야” 하며 ‘한국 정치를 운영하던’ 영감들을 빼닮았다. 권위주의 사회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권력들에 섬세하게 조아리며 식구들에나 군림하던 그들은 복덕방 장기판에 둘러앉아 세상의 모든 걸 꿰는 양 한국 정치의 막후 실력자라도 되는 양 허세를 부리곤 했다. 우스꽝스럽고 슬픈 풍경은 여전하다. 복덕방이 인터넷 공간으로, 장기판이 모니터와 키보드 혹은 스마트폰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여론은 유폐의 또 다른 사례일 것이다. 노무현은 기대와 환호로 출발했다. 그가 좋은 변호사였고 좋은 사람이긴 하나, 그와 그가 속한 정치세력의 이념으로 볼 때 서민 대중의 편에 서는 급진적인 대통령일 거라는 기대는 무리한 것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그런 대통령일 거라 확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대가 근거 없는 것임이 드러났을 때 제 확신을 되새기는 사람은 없었다. ‘노무현이 변했다’ ‘개혁의지가 후퇴했다’고 비난할 뿐이었다.

퇴임 후 그가 형과 부인의 비리를 시인하자 비난은 극에 달했다. 그날 한 ‘진보신문’의 사설 제목은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였다. 그러나 그의 비극적 죽음 후 모든 게 바뀐다. 노무현은 민주주의 순교자로 추앙되고 동시에 부활한다.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어!’라는 탄식은 ‘얼마나 좋은 대통령이었어!’로, 다시 ‘얼마나 좋은 정권이었어!’로 바뀐다. 문재인이니 유시민이니 노무현과 함께 몰락했던 친노세력이 일제히 되살아난 건 물론이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의 비극적 죽음 앞에서 그의 인간미를 새삼 되새기고 애도하는 건 품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개인에 대한 애도가 대통령으로서 그에 대한 평가와 그 정권, 그리고 현존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평가를 전적으로 뒤집는 건 의식의 파탄일 뿐이다. 공화국의 시민 노릇을 하기엔 지나치게 감상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역시 정치로부터 유폐의 자연스러운 귀결일 뿐이다.

정치로부터 유폐의 연원은 무엇일까. 연구자들의 좀 더 정교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한국 시민들이 ‘정치는 내 삶을 반영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조차 실제로 체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 중요한 뼈대일 것이다. 절차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진보정당이 약진하면서 잠시 기회가 오는 듯했지만 결국 이루어내지 못했다. 결국 정치로부터 유폐란 내 삶을 반영하지 않는 정치를 묵인하는 혹은 견뎌내는 한국 시민들의 의식적/무의식적 자구책인 셈이다. 한국 시민들에게 정치란 참여가 아니라 관람하는 것이라든가, 그들에게 정치란 과도하게 존재하면서 동시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분석은 오히려 피상적이다.

정치로부터 유폐되어 있기에 ‘역설적이게도’ 사소한 정치적 차이는 매우 의미 있는 차이가 된다. 이를테면 보수정치와 자유주의정치의 동맹체제로서 신자유주의 공세에 내몰려온 시민들에게 두 세력은 ‘차이가 없다’고 주장되어도 모자랄 것이지만, ‘매우 의미 있고 큰 차이’가 된다. 안철수에 대한 근거 없는 기대와 희망이 거대한 기대와 희망이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을 무작정 냉소하고 개탄하긴 어렵다.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학자라는, 언제나 이상주의적 정치가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정당정치를 주창한다는 노학자마저도 싱겁고 망신스럽게 휩쓸리는 지경 아닌가. 정치로부터 유폐는 차라리 한국의 ‘보편적인 정치문화’라 할 것이다.

한국 정치가 바뀌려면 이 ‘보편적인 정치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정치로부터 유폐를 스스로 해제하는 시민들로부터,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처음부터 차근차근 되새기는 시민들로부터 시작된다. ‘정치는 내 삶을 반영해야 한다’ ‘내 삶을 반영하지 않는 의미 있는 정치란 내 삶을 기만하고 동원하려는 함정이다’ ‘정치는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지금보다 낫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정치의 주인이며 정치와 정치인의 수준은 내 정치 수준의 반영이다’ 같은 생각들을 되새기는 시민들로부터 말이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4/07/16 23:58 2014/07/16 23:58
2014/07/02 14:37
월드컵이라는 초대형 쇼 이면의 사회적 참상이나 국가주의적 폐해를 접고라도, 한국에서 4년마다 반복되는 ‘16강 염원 열기’는 영 생뚱맞은 것이다. 현재 한국 대표팀의 FIFA 랭킹은 57위다. 월드컵 본선 32팀에 오른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순위다.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과 같은 H조에 속한 팀들을 보면 벨기에가 11위, 러시아가 19위, 알제리가 22위다. 그 팀들이 본선에 오르고 또 16강을 기대하는 건 자연스럽다. 그에 반해 한국팀은 조에서 꼴찌를 하고 16강에 오르지 못하는 게 자연스럽다. 물론 스포츠 경기의 즐거움은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없다는 데 기인한다. 한국팀이 16강에 오를 수도 있고 그걸 기뻐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57위의 실력을 가진 팀이 16위 안에 들지 못한 게 큰 실패는 아니다. 한국팀이 4강에 오른 적도 있지 않으냐고? 매우 이례적인 경우를 일반적인 경우처럼 기대하는 건 정상적이지 않다.
(편의상 ‘한국 대표팀’이라 적긴 했지만, FIFA 월드컵은 올림픽과는 달리 국가 대항이 아니라 축구협회 대항 대회다. 한국 대표팀이 아니라 대한축구협회 팀인 것이다. 영국의 경우 월드컵에 나올 수 있는 협회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등 네 개나 된다. 월드컵을 보며 ‘대~한민국’을 외치고 태극기를 휘날리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먹고사는 일이 근심이 많은 개털 시민들이 자신과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부자 선수들을 ‘태극전사’라 부르며 감동하고 낙심하는 건 몹시 서글픈 일이다.)
2014/07/02 14:37 2014/07/02 1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