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26 17:28
베스트셀러는 '많이 팔린 책'이다. 지적 주체성이 있는 사람은 단지 많이 팔렸다는 이유로 책을 고르진 않는다.
2014/01/26 17:28 2014/01/26 17:28
2014/01/25 01:34
140124_고래밤티켓

2014/01/25 01:34 2014/01/25 01:34
2014/01/24 22:23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면 자연스럽게 깨우치는 일상의 깨달음마저도 책과 이론을 통해서만 깨우치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생경하고 현학적인 개념과 이론을 들먹이지 않고는 아무 것도 깨우칠 수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가련한가.
2014/01/24 22:23 2014/01/24 22:23
2014/01/24 22:22
불편하지 않은 진실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진실이 아니거나 진실의 전모를 덮기 위해 그 일부만 드러내려는 술수일 것이다. 모든 진실은 언제나 불편하다.
2014/01/24 22:22 2014/01/24 22:22
2014/01/24 22:22
어떤 이가 평화로운 얼굴로 말했다. '20년 전 나는 계급적 변혁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변화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이젠 영적 변혁에 집중합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당신은 계급적 존재이자 영적존재입니다.' 아집은 때론 성찰을 경유한다.
2014/01/24 22:22 2014/01/24 22:22
2014/01/23 00:01
근래 ‘딸과의 심야 대화’ 소재는 셋이다. 음악, 미술(여기까진 늘상 하던), 남친. 그 중 딸이 가장 열중하는 건 남친, 사귄 지 두달 만에 군대 간 남친이다. 딸은 왜 그가 마음에 들었는지부터 시작해서, 제 남친의 프라이버시를 해치지 않는 범주 안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시시콜콜 늘어놓는다. 자기에게 특별하고 의미있는 이야기가 아비에겐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연애 중인 인간답게. 나는 딸의 이야기 중간 중간 시키지도 않은 남성심리 분석을 시도한다. 딸의 남친은 나보단 훨씬 쿨한 스타일의 남자인 듯하지만 ‘그래봤자 남자’ 아닌가. 남자는 쿨한 체 하는 종이지 쿨한 종은 아니다. 딸의 표정이 유난히 밝다면 남친 편지(물론 종이 편지)가 도착한 날이다. “그렇게 좋으냐.” “좋지.” “군대 간 지 일 년 쯤 지나도?” “그야 모르지!” 사람의 인생에 연애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딸의 인생엔 얼마나 많은 연애가 있을까. 그러나 만 번의 연애를 한 사람도 가장 중요한 연애는 현재의 연애다.
2014/01/23 00:01 2014/01/23 00:01
2014/01/17 14:10
140116_고래밤웹자보


2014/01/17 14:10 2014/01/17 14:10
2014/01/17 11:46
마음이 지척(咫尺)이면 천리(千里)라도 지척(咫尺)이오.
마음이 천리(千里)오면 지척(咫尺)도 천리(千里)로다.
우리는 각재천리(各在千里)오나 지척(咫尺)인가 하노라.

내가 좋아하는 옛 시조.
골수 하드록 매니아이던 스무살 무렵 김월하 선생 소리로 처음 듣곤 뭉클했고
여전히 그렇다.
사랑의 이치를 이보다 더 간명하게 묘파할 수 있을까.
또한 사회적 연대란 사랑의 풍경이라는 사실도..

다시 적어 본다.

마음이 가까이 있으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가까이 있는 것이고
마음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해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비록 몸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함께 있다고 믿습니다.
2014/01/17 11:46 2014/01/17 11:46
2014/01/16 11:34
고래밤 출연자와 프로그램이 최종 확정되었다. 실은 요 며칠 고민이 많았다. ‘2차 밀양희망버스’와 날짜가 겹치면서(고래밤이 더 일찍 정해지긴 했지만) 불편한 마음이 있었고 ‘설 이후로 일정을 변경’하는 것에 대해 주변에 의견을 구했다. ‘지나친 오지랖’이라는 의견도 있었고 ‘그럼 더욱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제 내부 회의에서 ‘일정 변경이 가능한지 알아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공간은 이미 예약이 찼고 출연자 중에 바로 연락이 된 세 사람은 다른 일정이 있었다. 즐겁게 할 생각이다. “반갑고 즐겁고 맛있는”이라는 캐치프레이즈 그대로. 고래밤도 밀양도 다 잘되길 빈다. 특히, 이번 고래밤은 고래동무나 고래가그랬어 독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다. 테이블 배치를 비롯하여 여러 면에서 혼자 온 분도 편안하도록 준비하고 있다. 아이를 떼어놓고 오기 어려운 분들을 고려하여 실내 금연을 유지하고, 바깥에 흡연 공간도 마련된다. 그 밖에도 무엇이든, 참여에 불편한 문제나 있거나 궁금한 게 있는 분은 편히 연락주시길 빈다. gyuhang@gmail.com
2014/01/16 11:34 2014/01/16 11:34
2014/01/14 00:41
친일과 반공의 역사를 미화한 교학사 역사 교과서를 채택했던 학교들이 격렬한 반대 여론에 결국 채택을 철회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역사 교과서를 반대하는 걸까. 왜 우리는 ‘친일’과 ‘반공’의 역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일본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 안 된다’ ‘공산주의를 반대해선 안 된다’고 가르치려는 걸까. 우리가 친일과 반공의 역사를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그게 실은 민족의 문제도 이념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그리고 남한에서 소수의 지배세력이 대다수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역사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상황, 어떤 방식으로도 소수의 지배세력이 대다수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은 잘못이며, 그런 역사에 굴종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역사란 단지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역사는 무엇인가. 현재의 지배세력, 현재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박근혜 정권인가. 물론 박근혜 정권이 반공독재의 충분한 자질을 가진 건 분명해 보이지만 ‘오너’는 그 배후에 있다. 더는 함부로 죽이거나 고문하거나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지만 우리 삶을 일제나 반공독재보다 더 속속들이, 가치관과 영혼까지도 지배하는 몸통은 말이다. 그것은 이건희나 정몽구 따위 재벌과 초국적 금융자본으로 대변되는, 자본이다.

현재 교과서의 경제 관련 부분은 철저하게 친자본적이다. 한국 교과서는 내용과 체계에 있어 미국의 경제교육의 표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독일이나 유럽 교과서들이 노사관계를 자본과 노동의 계급 관계로 접근하는 반면 미국 교과서는 개인과 회사 간의 ‘자유로운 계약관계’로 본다. 한국 초등 교과서의 경제 관련 내용은 신자유주의를 국가의 토대로 하며 ‘국익’과 ‘시장 자유’를 절대화하고 경제발전/경제성장 지상주의를 강조한다. 그로 인한 빈부격차, 차별, 생태 환경 등의 문제는 외면하며 노동의 개념과 노동자 권리에 대한 내용은 없다시피 하다.

이를테면 초등 6학년 교과서엔 이런 내용들이 실려 있다. ‘개인과 기업들이 경제적 자유를 누리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게 우리 경제의 주요한 특징이다.’ ‘경쟁은 개인과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이익이 된다.’ ‘근로자의 불법 파업은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우리나라는 무역의 규모가 크지만 무역 상대국이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무역 상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자유 무역 협정(FTA)을 맺는다.’ 친자본적인 게 아니라 자본의 관점을 대놓고 주입하는 수준이다. 교과서뿐 아니다. 미국경제교육협의회(NCEE)의 한국판인 한국경제교육협회(KAEE,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한국소비자원 전경련 은행연합회 상공회의소 등이 지원하는)를 비롯한 수많은 단체와 소년조선일보, 소년동아 등 온오프라인 미디어에서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친자본적인 어린이 경제교육을 하고 있다.

교학사 역사 교과서 사건은 역사 교육에 관한 소중한 승리가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 지배세력은 친일과 반공이라는 과거의 역사에선 밀렸지만, 현재의 역사와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의 역사에선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이 제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대다수 인민이,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대다수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하며 모든 걸 ‘자유로운 경쟁’의 결과이자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모자람으로 돌리며, 부자를 우러러보는 실패자로 살아가지 않을까.

오늘과 같은 현실에서 아이에게 현재의 역사에 대해 올바로 가르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명박 박근혜는 물론 김대중 노무현 같은 개혁적 정권마저 별다를 수 없었을 만큼 전능한 자본 독재 치하에서 말이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되새기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친일을 옹호하는 사람을 비난한다. 그러나 일제 당시에, 특히 2차 대전 말기의 아비규환의 현실에서 친일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여겨졌고 일반적이었다. 오늘 우리는 반공을 주장하는 사람은 ‘극우꼴통’이라 비난하지만 반공독재가 한창이던 시절에 대부분의 사람은 ‘북한과 대치하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곤 했다.

과거의 역사에 올바르긴 쉽다. 그 역사엔 내가 살아가지 않고 삶의 이해관계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올바른 게 ‘상식’이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 중인 역사에 올바르긴 어렵다. 내가 그 안에 끼어 살아가니 눈 밝혀 보기도 어렵고 갖은 이해관계와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지 잊어선 안 된다. 아이들이 이미 자본의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로 공부하고 있다면 우리는 대다수 인민,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담은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 검정 교과서가 당장 어렵다면 대안교과서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 검정교과서가 되도록 싸워야 한다.(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4/01/14 00:41 2014/01/14 00:41
2014/01/11 00:06
'선진국들도 거부 못한 신자유주의를 김대중 노무현이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항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이 신자유주의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다고 타박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좌파가 아니더라도 경제문제에 대한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가 안 갈만큼’ 두분이 신자유주의에 열심이었다는 데서 문제가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선진국들도 거부 못한 신자유주의를 김대중 노무현이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는 말을 들을 때면 초등학생 시절, 사흘이 멀다 하고 부인을 때리던 친구 아버지가 떠오른다.(아래 글 '공존'도 실은 이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산발을 한 채 비명지르며 맨발로 동네를 가로질러 도망치던 친구 어머니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며 구경하거나 기껏해야 그녀의 취한 남편이 골아떨어질 때까지 피신처를 제공할 뿐이었다. 드디어 어느 날 한 어른이 그를 붙들고 따져 물었다. "무식하게 왜 그래." 억울하다는 얼굴로 그가 대꾸했다. "형님, 서울 사는 배운 놈들 잘난 놈들도 마누라 패요." 못난 시절, 못난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 아이들도 이 시절을, 우리를 그렇게 말해야 할까.
2014/01/11 00:06 2014/01/11 00:06
2014/01/09 23:01
‘김대중 노무현이 신자유주의 한 건 잘못이지만 민주주의 하지 않았느냐’는 식의 글을 종종 본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이건 마치 ‘그 남자가 그 여자를 매일같이 때린 건 잘못이지만 사랑하지 않았느냐’는 말과 같다. 사랑에 폭력이 공존할 수 없듯 민주주의엔 신자유주의가 공존할 수 없다.
2014/01/09 23:01 2014/01/09 23:01
2014/01/08 11:20
다른 사람의 아픔을 똑같이 느낀다는 말은 수사일 뿐이다. 인간은 그럴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만일 다른 사람의 아픔을 똑같이 느낄 수 있다면 인간은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파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아차릴 수 있다. 가끔 아파야 한다. 사랑도 우정도 아픔의 연대다
2014/01/08 11:20 2014/01/08 11:20
2014/01/06 21:34
gorae_poster_1440_2
2014/01/06 21:34 2014/01/06 21:34
2014/01/02 12:47
modernhierarchybig

권민호 작_Modern Hierarchy
1330x845mm, 트레이싱페이퍼에 연필과 목탄. 2011

금융 자본주의의 계층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을 그린 작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구조를 한눈에 본다는 건 잔인한 일이다. 우리는 살아가는가 사육되는가, 라는 질문을 피할 여지가 없어지는 순간은 말이다. 그림은 무엇보다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1. 이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구조의 전모를 좀처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 어지간히 영민하고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해봐야 구조는 그대로 둔 채 구조 속의 나쁜 정부와 좋은 정부에 절망과 희망을 반복하며 ‘상식적인 시민’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 2. 그러나 만일 구조를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본다면 더 이상 온순한 삶을 지속하긴 어렵다는 것, 분이 터져 불편한 얼굴을 하든 조직하고 행동하든 모종의 불온한 상태에 접어들 거라는 것. 구조의 지배자는 그런 위협적인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최선의 기만'을 다할 거라는 것.

자, 김규항이가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이 찬찬히 감상해보시길.
2014/01/02 12:47 2014/01/02 12:47
2014/01/01 13:02
"의원님 좋은 새해 좋은 하루 되세요!!!"
농성 중인 활동가가 보내 온 문자 메시지.
"악, 죄송합니다 ㅠㅠ"
잠시 후 두번째 메시지.

빙그레 웃으며 답문자를 보낸다.
"^^ 힘내세요 다들 ㅎ"

이따금 이런 일을 겪다 보면
비지니스 대상이 된 것 같아 적이 불쾌하기도 하고
이번처럼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어지간한 실수에도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사람들
오히려 미안해지게 만드는 사람들
그들이 좀더 행복해지는 한해이길 기도한다.
2014/01/01 13:02 2014/01/01 1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