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3/09/30 고래 118
  2. 2013/09/27 예수전의 추억
  3. 2013/09/26 활공
  4. 2013/09/24 위로
  5. 2013/09/22 이빨 자국
  6. 2013/09/15 부채 전쟁 추천사
  7. 2013/09/12 Paz, 평화
  8. 2013/09/12 슬픈 이적
  9. 2013/09/09 이석기와 30년
  10. 2013/09/09 라이딩
  11. 2013/09/09 구절
  12. 2013/09/07 강선아
  13. 2013/09/07
  14. 2013/09/06 쓰기 싫은 글
2013/09/30 12:46
118_표1_800
2013/09/30 12:46 2013/09/30 12:46
2013/09/27 09:58
"아, 규항쌤.. 즐거운 기억 앞에 가슴이 아릴 만큼의 형용이라니요!
돌아보니 예수전 시간들이 좋았던 것은 내게 '진찌 위로'의 시간이었기 때문."

예수전 3기 친구가 보내온 문자메시지. 예수전은 초기와 후기가 진행 방식이 달랐는데 '위로'의 면에서라면 초기가 좋았던 것 같다. 친구들이 미처 모르는 사실은, 위로는 상호적이었으며 내가 받은 위로가 더 컸다는 것.

2013/09/27 09:58 2013/09/27 09:58
2013/09/26 12:19
부족한 공부가 한둘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급하고 긴요한 공부는 심리학이라는 생각을 근래 했다. 앞으로 내 활동과 책 집필에서 가장 숙제가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배울만큼 배웠음에도 '반이명박'과 '반박근혜' 외엔 사유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사유할 것을 촉구해왔지만, 그들의 사유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대해선 무심한 편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제 마음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자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야 할까? 현명한 친구의 말대로 "세상 모든 일의 처음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인데 말이다. 기껏해야 교조주의자라 불리기 십상이다. 불교나 동양적 수행에서 마음 공부는 없지 않았으나 청바지 입은 마음 공부는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우선 형편되는 대로 심리학 책들을 읽고 있다. 그런데 유익도 유익이지만 이게 꽤 재미있다. 이를테면 트라우마 치료에 관한 최근 내용들은 내 마음 속의 나도 몰랐던(덮어두었던) 상처와 병증들을 하나씩 살펴가는(폭로해가는) 재미가 제법이다. 가오는 하강하고 자유는 상승하는 활공의 재미랄까. 날아라~ 병든 마음!

2013/09/26 12:19 2013/09/26 12:19
2013/09/24 19:30
긍정의 힘, 당신이 옳다, 힐링, 치유 등을 내세운 가짜 위로 상품들이 사악한 이유는 그것들이 문제의 구조적 본질을 은폐하며,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걸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가짜 위로는 그 어떤 보수적 선동이나 공작보다 효과적으로 보수적이다. 그럼에도 보수적 가치나 경향에 거의 생리적으로 반발하는 많은 사람들이 매우 평화롭고 행복한 얼굴로 가짜 위로에 홀려넘어간다. 가짜 위로를 비판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할 것은 가짜 위로를 비판하는 일이 진짜 위로를 낳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위로는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며 오늘 한국같은 생지옥에선 더욱 그렇다. 가짜 위로를 비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진짜 위로다. 자문 겸 다짐으로 적어둔다. 

2013/09/24 19:30 2013/09/24 19:30
2013/09/22 14:41

김단이 장난이 많은 남자에게 끌리는 것 같다고 해서 왜 그런 것 같으냐 물었더니 어릴 때 아빠가 워낙 장난을 많이 해서인 것 같다고 했다. 동의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기억이 베인 건가?’ 하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둘이서 오래 전 장난의 풍경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리고 김건 머리통에 이빨 자국을 낸 사건에 이르러선 박장대소했다. 집에 있을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과 공룡놀이를 하곤 했다. 내가 이빨공룡(티라노사우루스)이 되어 아이들을 쫓고 아이들은 도망치고 숨는, 단순한 놀이인데 아이들은 그렇게 재미있어 했다. 실은 나도 그 놀이의 단순명료한 재미에 꽤 심취했고 어느 날 문 뒤에 숨었다 잡힌 김건의 머리통을 무는 시늉을 하다 이빨 자국을 내버린 거였다. 당시 김건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빡빡머리였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그러나 가슴이 아릴 만큼 즐거운 기억이다. 젊은 아빠들을 대상으로 강연 같은 걸 하게 되면 꼭 장난을 많이 하라고 말하곤 한다. 아이와 놀아준다고 생각하면 오래 놀기도 어렵고 서로 힘들다. 놀아주는 게 아니라 아이가 되어 노는 것이다. 장난은 그 자연스러운 증빙이다.

2013/09/22 14:41 2013/09/22 14:41
2013/09/15 18:21
부채 전쟁에 쓴 추천사.

"신자유주의는 1950~1960년대 케인스주의적인 노동타협으로 형성된 복지와 임금을 공격해 노동 유연화를 확대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끌어내렸다. 그러면서도 소비를 축소하지 않기 위해 부족한 노동자 가계의 소득을 부채 경제로 밀어 넣었다. 즉, 부족한 소득을 메워줄 대출을 통해 ‘부채 인간’을 양산했고 채권과 펀드, 주식시장으로 내몰아 노동자의 미래소득을 전취한 것이다."(본문에서)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가장 부합하는 사회 체제’로 최종 승인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후 2008년, 자본주의는 더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체제임을 스스로 공표했다. 자본주의가 바로 무너진 건 아니지만, 위기를 극복했다거나 건재한 건 더더욱 아니다. 자본주의는 팔다리가 잘리고 심장을 찔렸는데도 다시 일어나 더 포악하게 난동을 피우는 영화 속의 괴물처럼 억지로 살아있다. 그 포악한 난동 속에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스러져간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현실과 미래에 관한 전지구적 화두가 된 건 물론이다.

한국의 경우 그런 흐름과 그다지 상관없는 듯하다. 근래 한국의 시민들은 어느 사회와 비교해도 정치적인 관심이 많았고 촛불시위 등에서처럼 역동적이었다. 그러나 그 관심과 역동성은 거의 전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 문제에 머문다. ‘자본주의는 나쁘고 신자유주의가 문제’라는 따위의 말은 누구나 하지만, 당면한 정치적 민주주의의 퇴행 앞에서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문제는 후순위의 일로 여겨진다. 과연 오늘 한국인들의 삶은 자본주의 문제가 후순위를 이루며 정치적 민주주의 문제가 뼈대인 걸까. 그렇다면 왜 한국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두 주요한 원인인 노동 문제와 교육 문제는 민주화 정권인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수십 년 퇴행시킨’ 이명박 정권에서 결정적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걸까.

흔히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고 재벌공화국을 만든 것은 흔히 그들의 개혁의지가 후퇴했기 때문이거나 개혁의 애석한 실수로 해석되곤 한다. 그들은 그런 후퇴와 실수의 와중에도 여전히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 애썼으며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보수 세력과 내내 반목했다는 사실에 기대어서도 말이다. 90년대 이후 시민운동 세력이 주도한 ‘경제민주화’가 경제의 민간화와 주주자본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결국 신자유주의에 봉사한 것 역시 애석한 우연이나 실수로 여겨진다. 과연 그럴까. 혹시 그 개혁과 민주화 자체에 그런 면이 들어있는 건 아닐까.

관련하여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민주화(neoliberal democracy)’라는 이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민주화란 제3세계의 독재국가들에서 신자유주의가 도입될 때 ‘정치적 민주화’를 앞세워 인민의 고통과 저항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신자유주의적 민주화가 진행되는 사회에서 신자유주의는 매우 효율적으로 도입되지만 인민의 고통은 한층 배가된다. 민주화가 되면 살기 좋아질 줄 알았는데, 전엔 꿈도 못 꾸던 대통령 욕도 하고 정치적 비판과 행동도 한결 자유로워졌는데 이상하게도 삶은 갈수록 더 불안정하고 막막하기만 한 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기대 수명이 민주화 이후 20년이 줄었다는 사실이나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율과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이게 되었다는 사실은 민주화의 간판을 내걸고 밀려들어온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고 재벌공화국을 만든 것은 개혁의지의 후퇴거나 애석한 실수가 아니라 그들의 개혁이 본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경제민주화 운동이 신자유주의에 봉사한 것 역시 그 경제민주화가 본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적 민주주주의 문제가 급하니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문제는 후순위라는 생각은 ‘현실적인 진보’도 ‘현명한 진보’도 아닌 괴물의 아가리에 내 머리를 들이미는 일인 셈이다.

보수정권 하에서 이런저런 정치적 퇴행들을 소홀히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얼마든 그 퇴행과 싸우면서 우리를 집어삼키는 괴물과 싸울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괴물과 싸우는 일엔 자연스럽게 정치적 퇴행과의 싸움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가 강화된 사회는 노동계급의 힘과 사회적 연대가 약해지면서 정치적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와 싸움과 정치적 민주주의의 싸움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는 걸 넘어, 굳이 둘로 나누어 생각할 이유가 없는 하나이며 그때 비로소 우리의 싸움은 현실적이고 현명한 것이 된다.

그런 현실적이고 현명한 싸움에 꼭 필요한 채비 중 하나는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대한 학습이다. 정신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만날 맑스주의 경제학이나 사회과학 책을 끼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지난 5년이 그랬듯 아무런 학습도 없이 ‘나쁜 대통령’을 욕하는 것으로 충분할 만큼 단순하진 않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그 본래의 작동원리도 희한하기 짝이 없지만, 그간 수많은 사회적 상황에 대응하여 나름의 수정, 보완과 변신을 거듭해왔다.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해, 그리고 현재의 자본주의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져왔으며 앞으론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학습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현실의 얼개조차 보지 못한다면 현실을 현명하게 살아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용도의, 보다 많은 사람들이 되도록 쉽고 실용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이 책은 그에 부합한다. 물론 이 책은 대중소설처럼 술술 넘어가지도 저녁나절에 뚝딱 읽어치울 만큼 얇지도 않다. 완독엔 얼마간의 수고가 따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미래를 집어삼키는 괴물의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 정도 수고는 치를 만한 게 아닐까.


2013/09/15 18:21 2013/09/15 18:21
2013/09/12 14:23
L1031270

친구가 볼리비아에서 가져온 가죽 십자가.
스탠드에 기대세워놓고는 이따금 들여다본다.
'Paz'는 스페인어로 '평화'.
볼리비아의 수도 이름은 'La Paz'.
2013/09/12 14:23 2013/09/12 14:23
2013/09/12 12:45
이석기와 30년에서 "사상의 자유가 어색하다면 신앙의 자유 차원으로라도"는 주사파에 대한 냉소와 경멸이 담긴 표현인데(너무 심한가 싶어 송고 직전에 뺄까 고민했을 만큼) 놀랍게도 주사파를 감싸는 표현으로 읽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바보들이 멀쩡하게 사회적 견해를 내고 토론에 참여한다는 건 매우 놀라운, 그래서 매우 슬픈 이적이다.
2013/09/12 12:45 2013/09/12 12:45
2013/09/09 22:00
이석기와 나는 동갑내기다. 만난 적은 없지만 우린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초중고를 다녔고 대학에 들어가선 그간 배운 것에 대한 회의와 반감에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접어든 사람들이다. 당시엔 주사파는 물론 반미도 없었다. 운동의 목표는 ‘미국 같은 자유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광주학살의 배후가 미국이라는 게 드러나고서야 운동은 미국이라는 성역을 넘어선다. 85년 무렵 반미의 극단화한 형태로 김일성과 북한을 좇는 주체사상파(주사파)가 출현하면서 운동은 크게 둘로 나뉜다. 주사파와 엔엘(민족해방), 그리고 민족보다는 계급적인 문제를 천착하는 피디(민중민주).

2000년 ‘의회를 통한 자본주의 극복’을 표방하는 피디 계열을 중심으로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진다. 민노당 초기에 주사파는 소수였지만 ‘특유의 생활력’으로 수년 만에 다수파가 되고 결국 당권을 장악한다. 2008년 민노당의 피디 계열은 ‘당권파의 전횡과 패권주의에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다’며 진보신당을 만든다. 2011년 진보신당의 노회찬 심상정 두 대표는 탈당하여 민노당 당권파의 통합진보당에 합류한다. 그들의 희한한 행태는 ‘반이명박 연대’의 깃발 아래 덮이고 두 사람은 의회에 진출한다. 이석기와 주사파 동료들도 의회에 진출한다. 그 과정에서 ‘통진당 사태’가 일어난다. 운동권 내부에서나 통용되던 ‘경기동부’가 대중적 시사용어가 되고 ‘타락한 진보’에 대한 비난이 쏟아진다. 노회찬, 심상정은 당권파를 비난하며 다시 정의당을 만든다.

그 즈음, 민노당에도 참여하지 않고 현장에 남아 30년 이상 견결하게 활동해온 노동운동가 양규헌이 고향에서 농사짓는 형으로부터 "동생도 이제 진보 그만하지"라는 충고를 받고 낙심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와 같은 현장 활동가들이 그리 오랫동안 주사파의 실체에 대해 침묵해온 건 주사파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의견은 모조리 ‘종북’으로 몰아가는 극우세력 앞에서 자기모욕이기 때문이었다. 속깊음 덕분에 그들은 이제 주사파와 한통속으로 취급되고 낙심한다. 그들 개인의 낙심만은 아니다. 희망버스를 비롯한 수많은 삶의 투쟁현장에서 가장 주요하게 활동하는 그들이 꺾이면 결국 대다수 서민과 노동자의 삶이 꺾이는 것이다.

반면에 주사파와 함께 못하겠다며 신당을 만들었다가 다시 주사파와 결합해선 국회의원이 되고 여론이 악화되자 "비밀리에 활동해서 그런 사람들인지 몰랐다" 발뺌하는 심상정이나, 주사파와 결합을 반대한 진보신당 당원들을 ‘좌익소아병’이라 비난했다가 이젠 주사파를 ‘정신병자들’이라 비난하는 진중권 같은 딱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이 마땅한 비판과 평가를 받는가, 지금처럼 비판은커녕 오히려 양식있는 진보정치인, 진보지식인으로 행세하는가는 전적으로 시민사회의 비판 능력에, 즉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와 관련하여 꼭 짚고 넘어갈 게 지난 25년 동안 한국의 진보진영을 휩쓸어온 ‘비판적 지지론’이다. 극우의 집권을 막기 위해 진보운동 세력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의 자유주의 세력과 연합해야 한다는 비판적 지지론은 주사파의 ‘인민연합’전술에 기반한 것이다. 비판적 지지를 선택한 많은 사람들을 주사파에 놀아났다고 비난할 순 없다. '극우집권을 막는다'는 대의는 주사파의 기획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중요하다. 문제는 그 대의에 대한 맹목성이 더 중요한 대의, 진보운동과 진보정치의 자주성을 잊게 했고 결국 ‘반이명박 연대’의 깃발을 거치면서는 진보운동과 진보정치가 거의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주사파가 그런 맹목성의 폐해를 무릅쓰면서까지 인민연합 전술을 고수해온 건, 자신을 적대시하는 남한 극우세력의 집권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북한 체제의 의중과 관련되어 있다. 결국 이석기와 주사파는 언뜻 곤경에 처한 듯하지만, 그들의 30년 활동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를 한껏 비난하고 조롱하는 우리는 여전히 그의 영향력과 의도 아래 있는 셈이다.

일반적 차원에서, 모든 사람이 운동권의 역사와 족보를 알아야 할 이유는 물론 없다. 그러나 이 문제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사회문제가 되었고, 양규헌과 심상정, 진중권 예에서 보듯 이 문제와 관련한 비판과 토론들이 터무니없이 왜곡되고 전도되고 있다면 최소한의 사실관계는 드러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기반으로 한 비판과 토론, 그리고 사회성원으로서 내 책임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해괴한 수렁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첨언 - ‘주사파 또라이들은 박멸해야 한다’는 식의 감정적 태도는 두가지 문제가 있다. 진보진영 전체를 ‘종북’으로 몰아가려는 극우의 의도에 부응하는 것이며, 사상의 자유라는 민주주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북한 체제를 존중하는 남한 사람이 주사파말곤 없는데 굳이 박멸할 필요까지 있을까? 사상의 자유가 어색하다면 신앙의 자유 차원으로라도 주사파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이전 서독 공산당(KPD, DKP)은 동독을 지지하는 ‘독일판 주사파’였다. 지지율은 1% 남짓이었으며 ‘비판적 지지’같은 특별한 폐해는 없었다.(경향신문, 혁명은 안단테로)
2013/09/09 22:00 2013/09/09 22:00
2013/09/09 20:50
__[1] (3)
2013/09/09 20:50 2013/09/09 20:50
2013/09/09 19:39
어느 잡지가 6주년을 맞아 66명이 뽑은 책 구절을 싣는다고 했다. 이런 청탁은 대부분 정중히 거절하지만 담당 기자가 고래이모(나 삼촌)인 경우엔 거절할 수가 없다. 즐거운 굴복이랄까.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을 꺼내선 전에 읽을 때 표시해둔 구절 가운데 하나를 뽑았다.

“당신은 이제 자신의 무자비함을 인도주의적 미사여구로 포장하는 따위의 수고를 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2013/09/09 19:39 2013/09/09 19:39
2013/09/07 12:52
소리해다 2집에서 강선아의 피처링은 '저만한 소리가 잘 없지' 싶을 만큼 인상적이다.
강선아 자신의 앨범에서도 그만한 소리는 없다.

2013/09/07 12:52 2013/09/07 12:52
2013/09/07 12:28

편집자들이 보내주는 책들을 다 읽는 건 아니지만 게 중엔 보내주지 않았다면 그 책의 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갔을 책들도 끼어 있다. 보내주는 정성은 같을 터이니 어떤 책은 블로그에라도 언급하고 어떤 책은 하지 않는 게 걸려서 되도록 언급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런 책을 만나면 고마움이 크다. 어제 받은 책들 가운데 ’(박흥용)도 그런 경우다. 20년 전 낸 것을 재출간 했다지만, 난 이런 작품이 있는 줄도 몰랐다. 예수 이야기인데도 말이다. 도입부에서부터 그 서사적 지평에 빨려들어간다.

2013/09/07 12:28 2013/09/07 12:28
2013/09/06 15:17
결국 이석기 사태에 관해 쓰기로 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꼭 써야하는 글처럼 쓰기 싫은 글도 없다.
2013/09/06 15:17 2013/09/06 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