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3'에 해당되는 글 22건

  1. 2013/03/30 자긍 (8)
  2. 2013/03/29 웃기는 말 (1)
  3. 2013/03/29 선생 (1)
  4. 2013/03/27 봄날 판매 (2)
  5. 2013/03/27 386 (2)
  6. 2013/03/27 현자 (2)
  7. 2013/03/27 트위터
  8. 2013/03/25 좋은 세상 (2)
  9. 2013/03/19 문패 (23)
  10. 2013/03/19 이쪽
  11. 2013/03/18 남무성 (11)
  12. 2013/03/17 RE: 파솔리니
  13. 2013/03/16 고 이응재 (3)
  14. 2013/03/14 전기적 (1)
  15. 2013/03/12 눈곱 (9)
  16. 2013/03/07 깨어있는 인민들 (4)
  17. 2013/03/06 미국미술 3백년전 (5)
  18. 2013/03/06 3가지 (2)
  19. 2013/03/05 우리 시대 (6)
  20. 2013/03/04 어린이를 위한 부동산 강의 (2)
2013/03/30 06:29
사람의 문제는 대개
‘내 인격적 장점이라 자긍하는 부분’에서 생겨나며
그래서 좀더 치명적이다.

2013/03/30 06:29 2013/03/30 06:29
2013/03/29 19:16
법인세 신고 마감날이라 바쁜 광현과 대화.

우린 세금 다 내지?
세무사 사무실에서 최대한 적게 내도록 도와줍니다.
최대한 적게 내려고 하는 거야 당연한 거고, 내야 하는 걸 안 내는 것 말이야.
내야 하는 세금을 안 내는 회사도 있나요?
내야 하는 세금을 다 내는 회사가 없지.
그런가요?
세무조사라고 들어봤지? 그게 세금을 다 냈으면 아무 일도 아닐 거 아냐.
그렇죠.
그런데 세무조사 한다고 하면 진보라는 쪽도 ‘정치 보복’이니 뭐니 그러잖아.
그러고 보니 참 웃기는 말이네요.

2013/03/29 19:16 2013/03/29 19:16
2013/03/29 11:12
선생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미처 알아보지 못할 뿐.

2013/03/29 11:12 2013/03/29 11:12
2013/03/27 15:04
원판 봄날

이윤엽 작가가 '봄날'이라는 작품을 판매한다.
계좌로 입금하고 주문 메일을 보내면 된다.
봄날도 다가오니.. 구입하고 또 선물도 하시길 권한다.

한자에 채색 목판 33*29cm
에디션 120 (120장 한정)
가격 5만원 (택배비 포함)
주문 pparu1@naver.com
농협 237053 52 109253 이윤엽
2013/03/27 15:04 2013/03/27 15:04
2013/03/27 06:23
더 급진화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제 안온한 삶이
그걸 요지부동으로 허락하지 않는, 그래서
최악의 문제, 더 추한 것들에만 집중하며 구조에 안주하는,
인민의 존경을 독차지하며
인민의 억압구조를 지탱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2013/03/27 06:23 2013/03/27 06:23
2013/03/27 06:18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서 빛을 발하는 많은 현자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느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 닿아있던 현자들은 그렇게 크고 유명한 현자들이 아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사람 중 하나일 뿐이지만 삶에서 쌓고 깨우친 지혜와 현명함으로 가득한 지근거리의 현자들이 있었다. 어르신이라 불리든 언니라 불리든 형이라 불리든, 얼크러진 세상과 삶의 고민거리들을 밝혀주고 길을 깨우쳐 주는 현자.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갖는 비극 가운데 하나는 더는 지근거리의 현자를 찾기 어렵다는 것일 게다. 자본주의, 특히 극단화한 오늘의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삶의 공간에서 더 이상 지혜와 현명함을 구하지 않도록 조종해왔다. 지혜와 현명함은 자본주의적 신민의 삶, 나와 내 식구만 생각하며 열심히 노동하고 또 노동해서 만든 상품들을 소비하여 삶의 기쁨을 찾는 삶이 우스꽝스러운 노예의 삶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지혜와 현명함을 소거하고 현자를 소거해왔다.
2013/03/27 06:18 2013/03/27 06:18
2013/03/27 05:39
사람이 입을 지나치게 나불거리는 건 좋지 않다. 입을 지나치게 나불거리면 생각도 나불거리게 마련이다. 말의 속도와 호흡마저 중시하던 옛 선비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시대 어떤 세상이든 사유하는 인간이라면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렇게 볼 때 트위터는 사람에게 그리 좋은 도구는 아니다. 특히 한국처럼 ‘네티즌의 힘’ ‘SNS의 힘’이 시스템에 의해 악의적으로 상찬되는 사회에선 더욱.

2013/03/27 05:39 2013/03/27 05:39
2013/03/25 06:17
‘고래가 그랬어’는 지난해 5월부터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이라는 이름의 서명운동을 진행해 왔다. 내용은 이렇다. 1. 지금 행복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합니다. 2.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는 ‘마음껏 놀기’입니다. 3.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성공입니다. 4. 아이와 노동자가 행복해야 좋은 세상입니다. 5. 교육은 상품성이 아니라 인간성을 키우는 일입니다. 6. 대학은 선택이어야 합니다. 7. 아이 인생의 주인은 아이입니다.

내용 자체로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상식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는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심지어 두렵기까지 한 이야기들이다. 상식이 두려움이 되는 기막힌 상황이야말로 우리의 교육현실이다. 7약속운동은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짓눌리는 부모들에게 반성을 강요하려는 게 아니다. 알다시피 오늘 이 시장주의 교육의 처참한 현실은 구제금융 사태 이후 세 정권에 걸쳐 15년 넘게 진행되어 온 신자유주의 공세에 의한 것이다.

내 아이를 근심하는 부모들이란 그 거대한 상황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그러나 부모들은 사회 현실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종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가진 주체적인 시민이다. 우리는 사회 현실과 사회성원은 유기적 관계라는 걸 되새길 수 있다. 나쁜 사회 현실은 사회성원들을 나쁘게 만들고(좋은 행동은 불리하거나 불안하므로) 나빠진 사회성원들은 다시 더 나쁜 사회 현실을 만들어 낸다. 오늘 한국 교육처럼 말이다. 7약속운동은 그 지긋지긋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작은 노력이다.

7약속운동이 내용 자체로는 대체로 특별할 게 없는 상식적인 이야기들이라 했지만 그중 하나는 좀 다르다. 4번 항목,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노동자’라는 말이다. 그 말이 마음에 툭 걸려 참여가 꺼려진다는 분들이 꽤 있다. 7약속운동 강연을 해보면 질문 시간엔 꼭 그 이야기가 나온다. 두 달에 걸쳐 7약속운동 특집 기사를 진행한 경향신문 역시 협의를 해왔었다. 대중적인 운동이니 대중의 정서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협의에 응했지만 씁쓸함은 남았다. 조·중·동도 아니고 한국 제도언론 중에선 가장 진보적이라는 신문에서의 상황은 오늘 우리 사회의 속사정을 드러낸다.

사실 노동자라는 말은 아무런 특별한 말이 아니지 않은가. 좌파의 말도, 우파의 말도 물론 아니다. 노동자의 편인가 아닌가로 좌파와 우파를 가를 순 있겠지만 노동자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여부와 이념은 무관하다. 성숙한 사회에선 좌우 막론하고 사용하는 중립적인 말이다. 우리가 노동자라는 말을 불편해하게 된 건 반세기 동안의 극우독재 덕이다. 극우독재는 ‘노동자’를 빨갱이의 말로 금지하고 ‘근로자’로 대체했다. 그러나 이제 극우독재가 물러가고 절차적 민주화를 시작한 지 30여년이 되었다. 40대 이하의 시민들은 극우독재의 잔재인 보수세력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노동자라는 말을 꺼릴까. 단지 공포의 기억 때문일까.

열쇠는 말의 문제가 단지 말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공자가 ‘정명(正名)’을 설파했듯 세상이 흐트러질 때는 말부터 흐트러지며 흐트러진 말은 흐트러진 세상을 드러낸다. 극우독재는 ‘노동자’를 ‘근로자’로 대체함으로써 보편적 권리의식을 가진 시민으로서 노동자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는 노예로서 노동자로 대체했다. 우리는 당연히 노동자라는 말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가 노동자라는 말을 꺼린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의 삶이 여전히 정당하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아이들의 삶이 정당한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의 행복과 노동자의 행복은 엇나가는 법이 없다. 노동자가 살 만하다는 사회 중에서 한국처럼 아이들이 놀지도 못하고 밤늦도록 학원으로 내몰리는 사회가 있는가. 아이들이 정상범주의 교육환경에서 자라나는 사회 중에 노동자들이 한국처럼 단지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몇 년 동안 길바닥에서 지내고 고압송전탑을 오르고 제 몸을 불사르는 사회가 있는가. 그리고 대부분의 노동자가 고되게 일하는 생산직만 노동자라거나 나는 시민이지 노동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회가 있는가.

노동자의 삶이 갈수록 더 나빠지고 있다면 아이들의 미래는 캄캄할 수밖에 없다. 대개의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세상에서 내 아이만 행복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건 무엇보다 지금 노동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건 무엇보다 현재 노동자의 현실을 바꾸어가는 것이다. 그런 노력에 연대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서울시청 앞을 지나다 새삼 흐뭇한 얼굴로 ‘시장 하나 제대로 뽑았더니 참 좋구나’ 하는 우리가 그 시장이 일하는 건너편에서 단지 노동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6년째 천막농성을 한 노동자들은 외면한다면 그건 어느새 내 아이의 미래를 외면하는 일인 것이다.

좋은 세상이란, 아이와 노동자가 행복한 세상이다.(경향신문)
2013/03/25 06:17 2013/03/25 06:17
2013/03/19 12:29
칼럼 문패는 '혁명은 안단테로'로 결정되었다. 실은 오래 전에 썼던 글 제목인데 현재 시점에서 내가 써(해)나가려 하는 이야기들에 잘 맞는 것 같다. 보내주신 안들도 말은 같지 않지만 대체로 비슷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안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이름 적은 책이라도 보내드릴 생각이다. 거듭 감사드린다.

2013/03/19 12:29 2013/03/19 12:29
2013/03/19 12:24
서칭 포 슈가맨. 이야기가 워낙 극적이라 재미있는 영화지만, 나는 그보다는 로드리게스라는 인물이 참 재미있었다. 현실 세계 속에서 인간의 삶이란 지적인 면모가 있는 듯하면 삶이 흐리고 삶이 정당하면 지성이 없기 마련인데, 그는 어쩌다 삶도 지성도 그리 단단해진 걸까. 그가 어떤 경로로 그런 사상 체계를, 시인이자 노동자로서 사상 체계를 갖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영화 속에 로드리게스를 밥 딜런과 비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사실 이쪽 감성엔 로드리게즈가 더 낫지 않은가?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밥 딜런은 노래를 너무 못하지 않는가? 역시 이쪽 감성으로는 말이다. 이쪽이 뭐냐고? 글쎄 그냥 이쪽 말이다.ㅎ

2013/03/19 12:24 2013/03/19 12:24
2013/03/18 00:41
남무성 씨의 '재즈 잇 업'과 '페인트 잇 록'을 재미있는 책이라 생각했던 건 만화에 개그 코드가 은근하면서도 음악사나 뮤지션의 활동과 관련한 묘사들이 정확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만화로 보는 영화의 역사'는 베르톨루치를 뉴저먼시네마 감독이라 적어놓은 대목에서 멈칫했다. 김건 주려고 샀는데 끝까지 정독해서 틀린 곳이 또 있는지 확인하고 줘야 하게 생겼다. 실수치곤 좀 이해가 안가는 경우.
2013/03/18 00:41 2013/03/18 00:41
2013/03/17 20:18
pasolini

바타글리아의 앨범들을 들어봤고 'RE: 파솔리니'가 좋았다. 영화감독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를 주제로 한 앨범이다. 파솔리니의 '마태복음'이라는 영화를 좋아해서 이따금 꺼내보곤 하는데,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장면이 앨범 자켓에 실려있어 찡했다. 앨범은 두 장으로 되어 있고 관에 현에 현대음악 풍에 다양한 분위기지만 바타글리아식 서정성은 일관성있게 지속된다. 이런 식의 앨범(재즈 피아니스트가 영화감독을 주제로 만든)에 관심이 있다면 프랑수아 쿠투리에의 ‘노스텔지아 - 송 포 타르코프스키’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바타글리아는 곡을 영화에 직접 연결시키지 않은 반면 쿠투리에는 곡마다 영화 이름을 붙였다. 희생, 노스텔지아, 솔라리스, 거울.. 빛나는 영화들.

2013/03/17 20:18 2013/03/17 20:18
2013/03/16 02:16
배우 이응재 씨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는 좋은 배우였거니와 고래정치학교에 참여할 정도로 의식 또한 각별한 사람이었다. 내가 주변머리가 없어 소주 한잔 제대로 못했던 게 무척 아쉽다. 지상의 지옥이 분명한 나라에서 줏대있는 배우로 사느라 내내 분투했으니, 부디 편안히 쉬시길..
2013/03/16 02:16 2013/03/16 02:16
2013/03/14 15:42
며칠 전 나온 지미 헨드릭스의 미발표곡 신보 ‘피플, 헬 앤 엔젤스’. 2010년에 나온 미발표곡 신보 ‘밸리스 오브 넵츈’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일은 지미 핸드릭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일종의 '유물 출토' 같은 것이다. 물론 그의 기타 소리는 유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현재지만.  찬찬히 들어보는 중. 역시, 전기기타는 전기적(전자적이 아니라)이어야 한다.
2013/03/14 15:42 2013/03/14 15:42
2013/03/12 15:18
경향 칼럼을 25일자로 시작한다. 강신주와 격주로 돌아가는 지면이라는데 옛날 씨네21에 쓸 때가 떠오른다. 처음엔 고종석과 그리고 김종목, 신현준 들과 격주로 돌아갔었다. 칼럼은 늘 10매 안짝으로 써왔는데 이번엔 15매다. 지면 꼴은 옆으로 길쭉한 게 괜찮아 보인다. 문패는 꽤 많은 분들이 안을 보내주셨음에도 아직 확정되지 못했다. 담당 기자는 ‘촌철활인’을 제안 중이다. 그러나 문패보다 중요한 건 내가 현재 감각이 썩 좋진 않은 상태라는 점이다.(이를테면 요 아래 차베스 글만 해도 베네수엘라의 ‘깨어있는 인민들’을 상찬하면서 굳이 ‘깨어있는 시민들’을 대비했어야 할까. ‘시민의 책임’이라는 걸 부인하지 않지만, 근래 한국의 경우엔 상황을 직시하기엔 지나치게 격렬한 현혹과 기만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시민들은 자유주의 세력의 재집권 프로젝트에 부응한 게 아니라 어떻게든 좀 더 나은 현실을 소망했을 뿐이다. 결국 나의 그런 대비는 무익한 짜증에 가깝다.)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온통 멘붕에 빠져 징징거리는 판에 눈곱만큼이라도 쓸모 있는 소릴 끼적여야 할 텐데.. 생각한다.

2013/03/12 15:18 2013/03/12 15:18
2013/03/07 10:04
‘차베스식 사회주의는 석유 덕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베네수엘라는 석유 덕에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지만 한국은 석유가 없으니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반공주의자나 우파보다는 좌파,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다. 차베스식 사회주의가 석유 덕이라면 차베스 전에는 석유가 없어서 사회주의를 못했다는 말인가? 차베스 전이나 차베스 이후나 베네수엘라엔 석유가 있었고 석유로 인한 부가 있었다. 다른 건 차베스 전엔 그 부가 모조리 소수의 지배계급 차지였지만 차베스 이후엔 인민들에게 분배하고 또 인민들의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쓰는 것이다. 차베스식 사회주의는 석유가 없을 때도 지속되었다. 2003년 ‘석유 테러’, 즉 베네주엘라 기득권 세력과 미국이 혁명을 거꾸러트리기 위해 정유시설을 파괴할 때 가난한 인민들은 오히려 차베스를 응원했다. 아이들이 굶고 식탁과 침대를 땔감으로 쓰는 상황 속에서도 인민들은 ‘물러서지 마라 차베스’를 외쳤다. 차베스는 배네수엘라 인민들의 우상이 아니라 인민들 자신이었다. 온 세상이 그런 선택을 ‘비현실적’이라 논평했지만 2004년 이후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50% 이상, 극빈율은 70% 이상 감소했다. 베네수엘라의 '깨어있는 인민들'은 한국의 ‘깨어있는 시민들’처럼 많이 배운 것도 아니고 저녁마다 인터넷에 들어가 정치토론을 벌이는 처지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의 안락을 위해 다수가 고통받는 과거로의 회귀를 용납하지 않았다. 한국의 ‘깨어있는 시민들’처럼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이라도 선택하는 게 현실적 최선’이라며 끊임없이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차베스식 사회주의를 가능하게 한 건 석유가 아니라 그들, 깨어있는 인민들이었다. '예수와 맑스를 동시에 따른다'고 말하던 사람, 우고 차베스의 명복을 빈다.
2013/03/07 10:04 2013/03/07 10:04
2013/03/06 23:21
L1030805

미국미술 3백년전. 미국미술 하면 뉴욕 현대미술만 떠오르는 나같은 사람에게 자극이 되는 전시다.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현대미술까지 작품들을 시기별로 모았는데 국립박물관의 조선시대 미술과 교환 전시로 기획되어선지 작품 선정이 꽤 충실했다.(물론 워낙 범위가 넓다보니 한 부분으로 보면 듬성듬성하다고 할 수도.) 휘슬러, 사전트, 카사트처럼 얼핏 이름 정도는 기억나는 작가도 있지만 미국미술에 이런 것도 있었구나 싶은 작품들이 많았다. 사진은 프레데릭 레밍턴의 목동’(1905).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인 추운 겨울밤 쇠약해진 말 위에서 가축을 지키는 원주민 소년. ‘살아내는 사람의 풍경은 언제나 가슴 저리다.


2013/03/06 23:21 2013/03/06 23:21
2013/03/06 21:20

ECM을 싫어하기 어려운 이유는 일단 3가지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1. 담백한 자켓 사진과 간결한 레이아웃 - 동의.
2.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라는 표어 - 동의(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침묵이라는 데).
3. 과장이나 현혹이 아닌 공간감을 위한 리버브 - 동의.

2013/03/06 21:20 2013/03/06 21:20
2013/03/05 10:47

아마도 거의 누구나 상찬하는, 유리 케인의 클래식 리메이크들을 듣다보면 ‘좋네..’ 하다가 ‘그래서 어쩌자고?’ 하는 찜찜함이 남는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었을 때와 비슷하다고 할까. 보통의 책은 감탄이 나올 만큼의 교양과 통찰을 나열하지만 결국 ‘그래서 어쩌자고?’를 남긴다.(상당한 만족감 끄트러미에 붙은 그 약간의 찜찜함이야말로 그의 책을 또 사게 만든다.ㅎ) 그러나 케인이든 보통이든 아마 그 정도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또렷한 사유를 진행하기가 두려운, 진행하지 않기로 합의한 시대의 최선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케인과 보통이 우리 시대의 탁월한 예술가/작가라는 견해가 아니라 '우리 시대'인지도.

2013/03/05 10:47 2013/03/05 10:47
2013/03/04 18:20
손낙구의 역작 부동산 계급사회의 청소년 버전이 있다. 10대와 통하는 부동산이라는 책이다. 이걸 받아만 두었다가 어제야 읽었는데 고민 중인 고래의 경제 꼭지가 풀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어른 책이든 아이들 책이든 경제 교과서가 부동산 문제를 중심으로 되어있는 경우는 아마 없을 테지만, 적어도 한국에선 그럴 수 있거나 오히려 더 실사구시할 수 있지 않을까. 부동산, 즉 땅과 집은 삶의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고. 이 문제에 노동문제를 보태면 아이들 경제 공부에 꽤 쓸모있는 게 나올 수도 있겠구나. 내친 김에 손 씨에게 전화했더니 예의 그 사람 좋은 웃음으로 진행해보란다. 책을 읽으며 오래 전 김건과 나누었던 대화도 떠오르고..

2013/03/04 18:20 2013/03/04 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