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트위터에서 고재열과 허지웅이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 못 바꾼다 티격태격하는 걸 봤다. 세상은 '세상을 바꾸는 운동'에 의해서 바뀐다. 그 운동이 책에 담기는가 인터넷에 담기는가 촛불에 담기는가 트위터에 담기는가의 차이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세상을 바꾸는 운동인가, 다. 지배체제의 숙제는 그 운동을 막는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처럼 모조리 빨갱이와 간첩으로 몰아 없앨 수 없는 오늘, 체제는 좀더 교활하게 숙제를 수행한다. 세상을 바꾸는 운동이 아닌 걸 세상을 바꾸는 운동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 인터넷과 트위터 세상에서 차고 넘치는 ‘카타르시스로서의 반이명박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미 이명박을 반대하는 사람들끼리, 혹은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명박을 욕하고 조롱하는 반이명박 운동 말이다. 그 운동은 사실 세상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이명박을 반대하던 사람들과 이명박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여전히 반대하고 지지할 것이고, 그 중간에서 부유하던 사람들은 그런 욕과 조롱에 설득될리 없으니 말이다. 그 운동의 유일한 의미는 그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꾸는 의미있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착각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노와 싸움이 정작 그 지배 체제, 즉 이건희를 비롯한 자본의 체제를 향하지 못하고 카타르시스되어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이명박 패거리가 지배 체제 아니냐고? 이명박과 그 패거리는 지배 체제의 집행관이자 행동대원일 뿐이다. 우리는 지배 체제가 이명박만 집행관으로 쓴 게 아니라 김대중이나 노무현마저 집행관으로 썼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이를테면 이번에 천신만고 끝에 1심 승소한 KTX 노동자들은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에 의해 부당해고 되었었다.) 그래서 오늘 민주당이나 국참당을 비롯한 '진보개혁진영'이 말하는 ‘정권교체’란 실은 ‘집행관의 교체’를 말한다. 세상을 바꾸는 운동은 그런 사실을 직시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걸 직시하지 않는 모든 운동은 트위터든 촛불이든 인터넷이든 책이든 카타르시스일 수밖에 없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착각을 선사하는 카타르시스 말이다.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공언하는 고재열 씨는 자신이 수만명의 팔로어를 가진 ‘파워 트위터러’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고재열 씨가 이명박 패거리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 지배 체제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했어도 팔로어가 수만명이었을까?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이 질문을 충분히 되새겨 본 다음에 하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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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8/19 통과의례
- 2010/08/18 인문정신의 적
- 2010/08/18 좋은 공부
- 2010/08/18 같은 책, 다른 공간
- 2010/08/18 이 정권만 아니어도
- 2010/08/17 선
Counter clock, Counter clockwise, Left Jap, lowleft, Zappa Blues, 레디컬사운드,Llefty relief(왼손잡이 구원투수), 블루스훅, 그들의왼편, 좌측깜빡이, 좌심방좌심실, LEFT IMPACT, RED IMPACT..

최성각 형이 새로 나온 서평집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를 보내왔다. 정성껏 사인을 하고 거위(맞다와 무답이) 도장을 찍고 또 알뜰하게 적은 작은 엽서까지 든 책을 받는 일은 근사하다. 그의 글씨엔 '낭만'이 느껴진다. 이십대의 절반을 얕디얕은 유물론에 사로잡힌 내 또래의 글씨에선 찾을 수 없는 그런 낭만이..
제목 - 미친세상, 김규항과 미친들이 만나다
시간 - 28일(토) 오후 3시
장소 - 신촌 아트레온 토즈
문의 - 서정민갑 017 290 7663
목수정 씨의 신간에 추천사를 쓰기로 했고 방금 교정지를 받았다. 제목은 <야성의 사랑학>이고 "한국남자들은 왜 더 이상 거리에서 여성들을 쫓지 않나"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게 말이야' 끄덕끄덕..

은홍 형은 수덕 형(홍릉에서 영화 녹음하는)과 더불어 내가 아는 가장 마음 여린 남자다. ‘누구에게서나 좋은 사람 소리 듣는 인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마음이 여려 그렇다면 용서할 수밖에.(마음이 여리지도 않으면서 누구에게서나 좋은 사람 소리 듣는 인간은 고차원적 악인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며칠 전 은홍 형 트위터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웃겨죽는 줄 알았다. 이를 어쩔까 하다가 은홍 형이 이 글을 읽고 보낸 리플에 리플.
@gyuhang ㅎㅎ 지 쪼인트 지가 깐다는 속담이 생길지도
@soolzan 형.. 사랑하는 동생으로서 하는 말인데 그런 사진 걸어놓고 쪼인트 깐다니 어쩌니 말하면 사람들이 싫어해.
근래 내가 이 정권에 대해 경이롭게 생각하는 건 모든 수가 자충수라는 점이다. 이게 대체 현실 세계에서 가능한 일인가? 물론 보다 경이로운 건 그런 정권을 탄생시키고 그런 꼴을 목도하면서도 여전히 일정한 지지율을 유지하는 사람들이지만..
어떤 이들은 내가 오류와 희망에서 ‘대중성’ 보다는 ‘좌파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고 '근본주의적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듯한데, 실은 그 반대다. 이를테면 “선거에서 연 이은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대중성 강박으로 인한 프레임 오류”라는 내 말은 ‘대중성을 좇느라 좌파적 정체성이 훼손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잘못된 대중성 추구로, 즉 최소한의 정체성조차 포기해버림으로써 대중성을 잃었다’는 말이다. 체제 안에서 활동하는 정당에 ‘선거에서 연 이은 실패’보다 더 ‘대중성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국면이 있겠는가?
현재 상황은 진보신당이 ‘대중적 실용노선’에 성공하여 엄청 잘 되고 있는데, 내가 까탈스럽게도 그 정체성이 흐려지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니다. 분명히 밝히자면, 나는 오히려 현재 진보신당으로선 정체성이 위험하지 않은 수준으로 흐려지더라도 일단 유의미한 수준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문제 삼는 건 ‘대중적 실용노선’이 아니라 ‘실패한 대중적 실용노선’이다. 진보신당이 “진중권 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의 주도로 추구해온 ‘대중적 실용노선’이 매우 대중적인 듯 보이지만 전혀 대중적이지 않으며, 매우 실용적인 듯 보이지만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음을 ‘좌파의 일원’으로서 환기한 것이다.
며칠 전 진보신당 당원인 한 고등학생에게서 편지를 받았다.(전문은 여기에) 그는 진보신당이 대중성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대중들에게 진보신당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자유주의 세력의 위선'을 폭로해 나가는 게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한겨레 칼럼에서, 노회찬 당시 후보가 서울시장 선거 직전 토론회에서 하신걸 보고 비판하신 거에 백번 공감하는 편입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한나라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과 같은 편인 것도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그런 거요.”
그의 말에 내가 진보신당에 하고 싶은 모든 말이 들어있다. 좌파는 물론 이명박을 반대하며 이명박과 싸운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그 싸움의 성과는 모조리 자유주의 세력이 차지하게 된다. “우리는 한나라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과 같은 편인 것도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그런 거”가 중요한 것이다. 사실 노회찬, 심상정 씨가 '고작'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한국사회는 여전히 대중적 인지도가 선거 결과를 좌지우지 하는 사회다. 특정한 사람을 거명해서 안 됐지만, 지난 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된 유정현 같은 사람은 국회의원이 될 어떤 활동이나 이력이 없는 ‘연예’ 아나운서였다.
그런데 노회찬 심상정 씨처럼 대중적 인지도가 높을 뿐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신망이 높은(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최고 수준이 분명하다) 사람들이 고작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보신당 후보이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이라는 당이 왜 굳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대중들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이 민주당 소속이었다면 이미 몇 선을 거듭하며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강력한 대통령후보 노회찬’ ‘박근혜를 압도하는 여성 대통령 후보 심상정’,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지 않은가?)
촛불 광장에서도 두 사람은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의 정치인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망이 높았다. 그들은 반이명박의 스타였다. 그러나 그들은 ‘왜 이명박을 반대하는지’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반이명박의 대안이 왜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인지’를 설득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평범한 한 사람이 진보신당을 지지하게 되는 과정은 두 단계로 이루어질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이명박을 반대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이명박을 반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민주당 지지를 넘어 굳이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조차 이르지 못한 사람이 진보신당을 지지할 가능성은 전무하니, 관건은 두 번째 단계다. 두 번째 단계를 만들어내는 건 진중권 씨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상식의 회복’이 아니다. 물론 ‘상식의 회복’이라는 구호는 어떤 좌파적 구호보다 훨씬 ‘대중적’이지만 대중들을 첫 번째 단계에 만족하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진보신당이 대중들에게 해야 할 말은 ‘상식의 회복’이 아니라 ‘상식의 회복만으로는 부족하다’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라는 ‘상식을 가진’ 자유주의 정권이 서민대중의 편이 아니었음을 대중들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세력은 ‘상식조차 없는’ 이명박과 자신들의 차이를 끝없이 부각함으로써, 즉 ‘김대중 노무현만큼이라도’라는 선전을 거듭함으로써 반이명박 정서를 모조리 독식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들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대승한 것도 오로지 그 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보신당은 뭘 해야 할까? 이 고등학생의 말대로 “자유주의 세력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걸 폭로하지 못하면 죽 쒀서 개주는 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오류와 희망에서 지적하고 이 고등학생이 언급한 노회찬 씨의 서울시장 선거 직전의 인터넷 토론회는 ‘프레임 오류’의 극치였다. 선거를 한참 남긴 상황이라면 모를까, 선거 직전 아닌가. ‘한명숙이 아니라 노회찬이어야 하는 이유’만을 강조해도 모자랄 판에 줄창 ‘오세훈을 막아야 하는 이유’만 떠들어댔으니, 노회찬을 고려했던 사람들조차 ‘한명숙에게 표를 몰아주어야 한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토론회였던 셈이다. 물론, 토론회 자체는 진중권 씨의 독설과 재담으로 매우 ‘대중적’(!)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민노당처럼 일찌감치 자유주의 세력에 줄을 서서 개평이라도 얻지 뭐 하러 독자 출마를 하는가? 이게 고도의 정치공학이 결부된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인가? 이게 ‘대중성을 잃더라도 좌파적 정체성을 사수하자!’는 근본주의적 주장인가? 농담이 아니라, 상황 설명만 있다면 고래가그랬어를 보는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간단한 계산이다.
그런 간단한 계산조차 안 된 ‘대중적 실용노선’이 오늘 진보신당의 위기를 만든 것이다. 그런 ‘대중적 실용노선’이 ‘왜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이어야 하는지’를 대중들에게 설득하는 데 실패하게 하게 한 것이다. 노회찬, 심상정 씨의 한국 정치인 최고 수준의 대중적 인지도와 신망을 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노회찬 심상정, 훌륭하고 능력 있는 정치인들이지만 이명박을 막으려면 그래도 민주당을 찍어야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당시엔 욕도 했었지만 이명박과 비교하면 얼마나 훌륭한 대통령이야!”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대중성 강박으로 인한 프레임 오류”라는 내 말은 바로 그런 이야기다. (계속)
트위터를, 고래 활력부장의 권유로 시작했다가 "도란도란은 좋지만 재잘재잘은 어렵다"며 접었다가 다시 시작한 게 얼마 전이다. 재개한 직접적인 이유는 칼럼 하나가 트위터 세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책임감을 갖기 위해서'였지만, 천천히 적응하고 있고 제법 재잘재잘하고 있다. 며칠 전부턴 고래이모 삼촌임을 밝히는 팔로어는 즉시 맞팔하면서 팔로잉 숫자도 좀 늘긴 했지만 타임라인에 뜨는 글들이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고래동무라는 '소속'은 분명히 어떤 인간적, 지적 경향을 띄는 것 같다. 사실 고래동무가 되기 위해선 매달 9,500원의 현금이 빠져나가는 부담 말고도, 몇가지 일반적이지 않은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아이들 교육 문제가 우리사회의 최전선이자 미래를 결정하는 문제라는 데 적극 동의하는 것, 김규항이라는 어딘가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으로 보이는 빨갱이 대한 거부감을 넘어서는 것, 등..ㅎ
요 몇 년 새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요약하면, 돈이 사람들의 정신을 장악하면서 ‘돈 안 되는’ 학문인 인문학이 괄시받고 있다는 것일 게다. 사실 이제 누구도 대학에서 철학이나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아이를 곱게 바라보진 않는다. 하여튼 그런 위기론 속에 ‘비제도’ 영역에선 인문학 공부가 나름의 붐을 이루고 있다. 여기저기서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나 역시 그런 데 불려가는 일이 전보다 잦다. 사람들은 그러저런 강좌를 꾸리고 참여하면서 자신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 만족감을 얻는 것도 같다.
요즘 같은 세상에 돈 아닌 다른 걸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귀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런 귀한 노력들 속에서도 정작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리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가장 간명하게 정의한다면 인문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공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인문학을 여느 학문과 다르게 여기는 것도, 그 위기를 개탄하는 이유도 인문학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인문학 공부는 인문학 책을 읽는 일, 인문학적 개념과 지식들을 습득하는 일만은 아니다. 물론 책을 읽고 개념과 지식을 습득하는 일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중요한 방법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문학 공부의 요체는 끊임없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삶에 있다. 인문학 책을 여러 권 썼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엔 영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고 인문학적 지식은 보잘 것 없지만 언제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답게 산다는 것 무엇인가’로 이어진다.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등 인간의 삶과 관련한 모든 부문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그 질문들은 다시 잔가지를 뻗어나간다. 이를테면 ‘교육이란 무엇인가?’는 아이는 왜 공부를 하는가 학교는 무엇인가 국어 공부는 무엇인가 수학은 왜 공부하는가 등으로 이어진다. 그 질문들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것, 다시 말해서 내 삶에 실천하는 것을 인문정신이라 한다. 진정한 인문학 공부는 인문정신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시작된다.
인문정신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하며 완전히 해방된 삶을 살게 한다. 그러나 인문정신은 갖는 일은 인문학 책을 읽거나 말이나 글에 난해한 인문학적 개념어를 섞는 일처럼 만만하진 않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적어도 사회적 차원에선 넘쳐나 보인다. ‘진보 교육감’이니 ‘시장주의 교육의 폐해’니 하는 말들도 그 질문과 관련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실제 삶에서, 말하자면 아이 교육에서 교육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에 따른 잔가지 질문들을 하고 정직하게 실천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 인문학의 위기를 개탄하고 인문학의 부흥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썩 다르진 않다. 그들은 단지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현실이...”
도저한 인문학적 지식과 여러 진지하고 소중한 인문학적 노력들이 그 한마디로 연기처럼 날아간다. 인문정신의 적은 과연 누구일까? 돈이 삶의 전부라고 돈이 행복의 지표라고 끝없이 주입하는 자본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자본이 인문정신의 적이라 말하려면, 우리는 적어도 “그래도 현실이...” 따위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는 ‘자본 권력에 굴종해야지 어쩌겠어’라는 말, 인문정신의 적에 대한 추레한 투항 선언이기 때문이다. (한겨레)
일요일 전주에서 효빈이(처제의 딸)가 왔다. 단, 건과 고래만화교실도 다니면서 지내고 있는데 틈만 나면 책장에 꽂힌 고래를 뽑아 본다. 자정이 넘고 단, 건은 자러 들어갔는데도 계속 그러고 있다. 제 집에도 있는 고래를 뭐 새롭다고 저렇게 볼까, 싶어 물어보려다 그만 둔다. 같은 책을 다른 공간에서 새롭게 느낀 기억이 순간,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현오에 이어 오늘 또 김재철. 이 정권의 가장 큰 해악은 좌파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 정권만 아니어도’라는 생각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얼토당토 않게도 자유주의 정당은 이 정권의 최대 수혜자가 된다. 이를테면 지난 지방선거에서 자유주의 정당이 승리한 건 알다시피 그들이 뭘 잘해서가 아니라(그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전적으로 이 정권 덕이었다. 좌파가 이 정권에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지성을 가진 좌파라면 그런 당연한 분노와 반감이 ‘이 정권만 아니어도’로 귀결되지 않도록 내적 사투를 벌여야 한다. 트윗 타임라인을 보며 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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