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에 해당되는 글 41건

  1. 2010/07/30 이념의 도미노 효과
  2. 2010/07/30 좀 지나서
  3. 2010/07/30 상식 교육감
  4. 2010/07/28 까맣다
  5. 2010/07/28 생태 풍경
  6. 2010/07/28 김규항은 디빠?
  7. 2010/07/28 이견
  8. 2010/07/28 사랑의 매
  9. 2010/07/28 회초리
  10. 2010/07/26 체벌이라는 야만
  11. 2010/07/25 어머니
  12. 2010/07/25 서울불바다
  13. 2010/07/24 일동 웃음
  14. 2010/07/23 반박 글
  15. 2010/07/22 시인의 색
  16. 2010/07/21 머머스룸
  17. 2010/07/20 진정한 댄스곡
  18. 2010/07/20 왜 굳이 좌파가 존재해야 하는가?
  19. 2010/07/20 의미있는 기사
  20. 2010/07/20 자본론 공부?
2010/07/30 20:09

“우리나라에선 상식이 진보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진보(좌빨?)이라고 하기도 하는데요.”

상식을 진보라 하면 안 되는 이유는 ‘이념의 도미노 효과’ 때문이다. 상식을 진보라 하면 진보는 비현실적 급진이 되고 급진(좌파)은 아예 그 존재가 부인된다. 그리고 극우는 ‘멀쩡한 보수’ 행세를 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사회는 앞으로 못나가고 공전하게 된다. 극우가 보수 행세를 하고 상식은 진보 행세를 하고 진보는 급진이 되고..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처럼. 그러니 극우 꼴통들이 뭐라 딱지를 붙이든 상식을 진보라 ‘해주면’ 안 된다. 상식은 상식이라 진보는 진보라 급진은 급진이라 해야 한다. 그럴 때 극우 꼴통들도 더 이상 보수 행세를 할 수 없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부인된다.


2010/07/30 20:09 2010/07/30 20:09
2010/07/30 17:04
씨네21 편집장과 애초 진중권의 글이 잡지 성격에 맞지 않고 나든 진중권이든 관련한 글을 더 싣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데 합의했다. 진즉에 써놓긴 했으나 한창 휴가철에 아저씨 둘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마주 선 그림이 나부터도 숨막히는 일이라, 좀 지나 이곳에 올릴까 한다. 진중권에 대한 반박의 형식이지만 현재 좌파 일반에 대한 근거 없고 악의적인 사회적 편견들과 그 편견들이 생산되고 유포되는 방식과 경로, 그리고 대체 좌파는 뭐 하는 사람들인가 진중권의 말대로 폐기된 도그마에 사로잡힌 화석들인가 실재하는 타자의 고통과 비참을 외면하지 못해 번민하는 사람들인가, 등에 대해 알기 쉽게 적은 글이다.


2010/07/30 17:04 2010/07/30 17:04
2010/07/30 16:20

"진보 교육감은 무슨.. 상식 교육감이지."


2010/07/30 16:20 2010/07/30 16:20
2010/07/28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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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찍은 사진을 보니..
까맣긴 까맣다. ㅎ


2010/07/28 19:22 2010/07/28 19:22
2010/07/28 15:57

일요일, 두 아이(열일곱 살 딸과 열네 살 아들)와 펜타포트 록페스티벌에 갔다. 에고래핑, 킹스턴루디스카, 김창완밴드, 디르앙그레이, 뜨거운감자, 그리고 그날의 해드라이너 이언 브라운(스톤 로지스의 보컬이던). 자정이 훌쩍 넘어서야 돌아왔지만 아이들은 록페스티벌의 하루를 재미있어 했다. “여행 일정과 겹치지만 않았다면 지산(지산 록페스티벌)도 가면 좋겠는데” 아쉬워도 하면서. 둘은 천천히 록음악에 빠져들고 있고 나는 그게 참 기쁘다. 10대 시절에 록음악에 빠져드는 일은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제 때 하면 좋은 일’ 가운데 하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열다섯 즈음 록음악에 빠져들었다. 그 전율의 순간, 그리고 이후 진행 과정에서 피어오른 에너지와 감성의 결들이 내 삶에 남긴 흔적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안 그랬으면 어쩔 뻔 했나’ 안도하곤 한다.
딸은 꽤 어릴 적부터 나와 함께 음악을 들어버릇 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고 문혜원이 부른 ‘아이러브락앤롤’을 흥얼거리기에 조안 젯의 원곡과 브리타니 스피어스의 것을 함께 비교해서 듣게 했더니 너무나 재미있어하던 기억이 난다. 그는 지금도 주로 여성 싱어송라이터, 혹은 보컬이 여성인 록밴드를 좋아한다. 아들은 작년 초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남학생답게 학교 다녀오면 가방 던져 놓고 동무들과(어지간한 아이들은 다 학원에 가버리고 없으니 자연스레 학원 다닐 형편이 안 되는 집 아이들과) 노느라 음악 따위엔 도무지 관심이 없었는데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많이 바뀌었다. 어제 전기기타를 품고 앉아 ‘스모크 온더 워터’의 리프를 연습하는 그에게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와 깁슨 레스폴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나는 내가 양육을 맡은 두 아이가 록음악에 빠져들고 또 나름의 음악적 취향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게 다행스럽다. 10대의 끓는 피와 ‘10대를 위한 인류의 문화유산’인 록음악이 조우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한국의 10대들은 사정이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록음악이 그들의 끓는 피에 도달하기 전에 그들에게 음악적 취향의 씨앗이 생겨나기 전에, 치밀한 준비를 거쳐 ‘공장 생산’된 기획사 음악들이 그들의 귀를 마비시켜버린다. 아무리 자유시장의 기치가 신처럼 존중되는 신자유주의 시절이라지만, ‘시험 기술을 익히는 짓’을 공부라 강요받으며 종일 따개비처럼 책상에 붙어사는 그들의 우울한 삶을 생각한다면 너무나 잔혹한 일이다. 10대들을 위한 음악적 스크린쿼터라도 마련하자고 나설 법한 진보적인 미디어들도 한류니 뭐니 하며 한 동아리로 돌아가니 설상가상이랄까.
펜타포트에서 만난 후배가 자꾸만 두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는다. 왜 그러냐고 하니 “까맣게 그을린 게 너무 신기”하단다. 여름철에 아이들 얼굴이 까맣게 그을리는 것 또한 수천 년을 이어온 생태계의 한 풍경인데 이젠 그것도 신기한 일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하긴 한국의 10대들이 여름이고 겨울이고 얼굴 그을릴 겨를이 어디 있으며, 행여 잠시라도 그을릴라치면 ‘외모는 경쟁력’이라 생각하는 엄마들이 재빨리 자외선 차단제로 태양과 아이 사이를 가로막아 버리지 않을까. 변해가는 생태 풍경에 분노하는 우리가 왜 이 또렷한 생태 풍경엔 분노하지 않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강이나 산만 생태가 아니라 록음악의 열정에 솟구쳐 오르는 10대들의 몸뚱이도 여름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아이들의 천진스러운 얼굴도 생태의 한 풍경이라는 걸 이미 잊어버린 걸까. (한겨레)


2010/07/28 15:57 2010/07/28 15:57
2010/07/28 15:38

(오래된 일인데.. 지금도 "김규항이 디빠 편을 들었다" "심형래를 칭송했다" 떠들어대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전후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이 여전히 그런 말에 영향을 받는다고도 하고 특히 고래 이미지에도 영향을 준다고 하니 잠자코 있긴 그렇고.. 인터뷰집에 그 이야기가 언급된 부분을 발췌해 싣는다. 찜찜해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빈다.)


영화〈디워〉를 놓고 벌어진 논쟁도 인텔리의 취향과 말하는 방법, 대중의 취향과 말하는 방법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큰 듯합니다.
 
내가 그 당시 타인의 취향이라는 글을 썼어요. 그 글을 보고는 진중권 씨가 디빠(〈디워〉를 추종하는 사람들`- 편집자)의 편에 섰다며 나를 비난했어요.(웃음) 어떤 사회적 문제에 대해 열정을 갖는 건 좋지만 사회적 문제라는 게 한 가지 측면이나 차원만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겁니다.
 
심형래 감독과〈디워〉가 왜 논란이 되었는지를 처음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요.
 
심 감독은 지식인도 아니고 예술영화 감독도 아닙니다. 문화를 앞세운 비즈니스는 언제나 있어요. 그들이 만들어내는 질 낮은 문화상품도 언제나 있어왔죠. 인텔리들이 그런 류의 문화상품을 도마에 올리느냐,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외면하고 무시해버리죠. 그런데 왜〈디워〉는 언급의 대상이 되었을까. 한마디로 말해 아주 평범한 영화가 사회적으로 지나치게 주요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인데요.〈디워>가 대단한 작품인 듯 여기저기 오르내리고, 심 감독은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고, 이런 게 거슬렸던 거죠. 또 지나치게 상업주의적인 흐름이 한국영화에 끼치는 악영향도 생각했고요. 애국주의적인 흐름도 마찬가지예요. 상업주의와 애국주의를 적극 옹호하고 나선 사람들이 이른바 디빠들입니다. 그러나 디워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디빠는 아니죠. 주말에‘어떤 영화를 볼까’그러다〈디워〉를 고른 사람도 있을 테고,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디워〉를 본 사람도 있겠죠. 그런대로 볼 만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혹은 평론가들과는 정반대로 “스토리는 괜찮았는데 CG가 너무 후졌더라”고 말하는 우리 아이들 같은 관객도 있었겠죠.(웃음)
 
‘반디빠가 아니니 당신은 디빠를 옹호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런 욕을 먹은 거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그 글에서 디빠와 반디빠 싸움의 구도가 놓치고 있는 다른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디빠를 옹호한다니요. 난 디빠뿐 아니라 네티즌 전반의 소통방식에 대해 반감이 큰 사람인데.(웃음) 참 어이없는 일이었어요. 인텔리들의 독선과 오만을 엿볼 수 있는 일이었죠.
 
사람들이 영화 한 편을 보면서 사회적으로 긴장하고 그 사회적 의미를 둘러싼 인텔리들의 의견을 충실히 감안해야 할 필요는 없겠죠.(웃음)
 
앞서 말했듯이〈디워〉는 아무 생각 없이 보는 영화고, 비판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도 없는 영화입니다. 인텔리들의 비판엔 보통 사람들에 대한, 말하자면 타인의 취향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없었다고 봐요. 나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디빠를 옹호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그들의 아집이죠. 자신이 집중하는 문제의 틀 안으로 모든 걸 꿰맞추어 ‘내 편이냐, 적이냐’하는 식으로 재단한다면 그건 파시스트들이나 할 법한 행동인 겁니다.
 
인텔리들은 문화적으로 듣고 배울 기회가 많았던 사람들이잖아요. 일반 대중들보다는 아무래도 좀 더 세련된 취향을 갖기 마련이죠.
 
어떤 작품을 경멸하는 것은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쪽으로 연결될 소지가 큽니다. 그런 점을 조심해야 해요. 부르디외는 어디 가서 음악 이야기는 안 한다고 했어요. 음악적 취향처럼 문화 자본과 계급을 또렷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했거든요. 늘 클래식만 듣던 사람이 동네 호프집에 갔다고 생각해봐요. 동네 아주머니랑 아저씨들과 음악 얘기를 하는데, 그는 클래식만 얘기한다고 생각해봐요. 코미디 같은 풍경일 겁니다. 그런 사람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요.(웃음)
 
그 사건으로 인해 젊은 독자들이 많이 돌아섰다고 들었습니다.
 
허지웅 씨가 그랬어요. 그 일로 내 글을 읽던 이십 대 독자들이 많이 떠났다고. '허튼소리를 해놓고도 잘못했다고 인정하지 않아서 실망했다'고들 하더랍니다. 나는 사실 ‘왜 나한테 이러지?’ 싶었을 뿐인데.(웃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맥이 빠집니다. 이 또한 인터넷 우민화 전략의 결실이구나 싶기도 하고요.
 
화법의 차이라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나요?
 
물론 더 요령 있게 양비론을 펼 수도 있었겠죠. ‘디빠 정말 문제가 많다, 그러나 취향은 중요하다’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런 요령이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진 않아요. 글쎄, 그런 요령이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어요. 말하는 사람의 신상을 위한 것이지 문제를 사회적으로 명료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거든요. 한국엔‘이게 나쁘지만 이것도 문제고…’하는 식의 논지가 지나치게 횡행합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요. 비판자들이 보기에는 노빠(노무현 전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인사나 그를 적극 지지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편집자)들이 전통적인 개발주의자와 손을 잡으면서 황빠(황우석 박사를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편집자)현상을 불러일으켰고, 다시 디빠 현상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질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논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100분 토론〉에서도 그랬지만, 사회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비판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게 진중권 씨의 용기라고도 보여지는데요.
 
용기일 수도 있고 스스로 늘 말하듯 심한 짜증일 수도 있겠죠.(웃음) 황빠 때와 다른 건 인텔리 영역, 즉 글을 읽고 책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선 디빠 쪽이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한국 토론 문화의 특징과 문제점이 드러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런 거죠. 어떤 일에 A와 B의 가치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누군가가 B를 얘기하면 그것을 바로 A를 부인하는 발언으로 생각해요. B를 이야기하는 건 B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A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단지 A를 이야기하지 않은 것일 뿐이죠. 학교에서 논술은 배우지만 논리는 배우지 못해서 그러는지, 하여튼 네티즌들에게 그런 이상한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또 충분히 구분할 만한 사람들은 논쟁이나 갈등 상황에서 그런 경향을 은근히 이용하기도 해요. 인터넷이 없던 시절부터 우리 사회에 면면히 내려오던 집단주의까지 합쳐지면 더 큰 문제를 낳는 것 같아요. 인터넷 기반의 여론을 보면 뭔가 분노 같은 게 생기고, 그 다음 대열이 생겨납니다. 그 대열에서는 다른 측면을 보려는 태도를 용납하지 않는 것 같아요. 다른 측면을 보고 성찰해야 결점도 보완되고 대열도 더 튼튼해지는 건데요. 지나치게 단순한 정의, 그러니까 집단주의화한 정의는 위험합니다. 언제나 그래요.
 

2010/07/28 15:38 2010/07/28 15:38
2010/07/28 10:48

“교사의 교육 포기라든지 교수권 침해, 여타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가 우려된다.”(교총 대변인)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교육도 교수권도 수행할 수 없는 교사는 교사직을 포기해야 한다.”(고래 발행인)


2010/07/28 10:48 2010/07/28 10:48
2010/07/28 09:25
“사랑의 매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랑의 매는 없습니다. 만에 하나 있다면, 적어도 사랑의 매 같은 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 있겠지요.”


2010/07/28 09:25 2010/07/28 09:25
2010/07/28 02:08
“옛 선비들도 회초리를 들지 않았습니까?”
“그땐 신체에 대한 관념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죄인에게 곤장을 치는 시절이었지요. 체벌이 필요하다는 말은 죄인에게 곤장을 쳐야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2010/07/28 02:08 2010/07/28 02:08
2010/07/26 16:57

사회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다양한 의견들이 오가다보면 가끔은 사회적 논란이 일기도 한다. 민주주의란 그런 소란스러움을 기꺼이 함께 겪는 사회원리다. 그러나 그런 논란 가운데는 그런 논란이 있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경우도 있다. 근래 서울시 교육청의 체벌금지 조처로 인한 논란이 바로 그런 경우다. 지구상에서 나라꼴을 갖춘 사회에선 이미 다 금지하고, 나라 안에서도 군대나 교도소에서조차 엄격히 금지하는 체벌을, 학교에서 그것도 자라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허용하는 야만을, 이제라도 끝내자는 이야기가 어떻게 논란거리일 수 있는가. 
이런저런 궤변들을 늘어놓지만 체벌금지에 반발하는 사람들의 진짜 이유는 하나다. 더 이상 체벌을 못하게 되었을 때의 불편함. 물론 체벌을 통해 아이들을 지도하던 교사가 체벌 없이 아이들을 지도하려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부당한 불편함’이 아니라 ‘교사의 임무’다. 교사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아이들을 지도할 임무가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꽤 많은 교사들이 그 임무를 방기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해 온 것이다. 봉급을 주는 국민들 앞에 엎드려 사과하고 반성할 일이다.
“교사의 교육 포기라든지 교수권 침해, 여타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가 우려된다.” 교총 대변인이라는 이의 말이다. 성찰하지 않는 인간은 말도 안 되는 짓도 자꾸 하면 익숙해지고 심지어 그걸 못하는 걸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교총 대변인의 말은 체벌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상태에 있음을 ‘생태 다큐’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말은 상식의 이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교육도 교수권도 수행할 수 없는 교사는 교사직을 포기해야 한다.’
체벌 금지가 ‘진보 교육감’을 위시로 한 빨갱이들의 도발이라며 보수/진보의 문제로 몰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 ‘망막에 빨강매직을 칠한 지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만 물어보자. ‘당신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는 폭력으로 해결한다는 명제가 들어 있는가?’ 체벌 금지는 애당초 보수/진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반하는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이다. 
우리 사회는 엊그제만 해도 가정과 군대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 야만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금지되는 과정에서 보수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마땅치 않아 했던가? 그런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지금 ‘여자는 사흘에 한번은 패야 해!’라든가 ‘군대는 빳다를 쳐야 돌아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 순간 체벌금지에 대해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도 머지않아 지금 제 모습이 기억될까 노심초사하게 될 것이다. 야만은 ‘인간의 사회’에서 늘 그렇게 하나씩 사라져가는 법이니.

덧붙이는 말: 체벌 금지는 오늘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이나 인권의식에 비추어 이상하리만치 늦게 제기되었고, 이상하리만치 손쉬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체벌이 그것을 대놓고 찬성하는 사람들 외에 어떤 광범위한 암묵적 지지를 가진다는 걸 뜻한다. 지지의 정체는 바로 아이들의 성적, 즉 시장에서 경쟁력을 둘러싼 부모들의 욕망이다. 체벌을 반대하는 사람이 교사가 ‘좀 강하게’ 지도하는 게 아이의 성적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체벌이라는 야만은 그런 욕망에 힘입어 존속되고 있다. (경향신문)

2010/07/26 16:57 2010/07/26 16:57
2010/07/25 07:25
아니나 다를까 이미 가셨다. 가스레인지 위엔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바쁜 사람이 태워다주고 배웅하고 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늘 이렇게 새벽에 슬그머니 가신다. 칠순을 넘긴 노인에게 파주에서 수원까지가 만만한 길이 아니라 이번에는 꼭 신도림역까지라도 태워다드려야지 벼르지만 다섯번에 한번 그러기가 어렵다. 이런 어머니를 보고자란 덕에 내가 그나마 사람 꼴을 하고 살지, 되새기며 상한 속을 달랜다.

2010/07/25 07:25 2010/07/25 07:25
2010/07/25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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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이의 표현을 빌면 "우측 깜박이 켜고 좌회전에 드리프트까지 하는"
2인조 밴드 밤섬해적단의 서울불바다


2010/07/25 03:47 2010/07/25 03:47
2010/07/24 15:07
가장 왼쪽에서 가장 오른쪽까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혹시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아닌가요?
(일동 웃음, 이하 지속적인 일동 웃음)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출판사의 홍보물에도 그렇게 나간 적이 있는 걸요. 책은 좀 어떠셨습니까?
저는 김선생님 책을 다 읽었는데 이 책 하나로 그 모든 내용을 더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말씀대로라면 저는 이제 책을 내지 말아야 할 것 같군요.
제가 다섯 권을 사서 주변에 돌렸습니다.
조금만 더 애써주십시오. 정말 앞으로 책을 내지 않겠습니다.


2010/07/24 15:07 2010/07/24 15:07
2010/07/23 11:06
반박 글 게재 문제로 씨네21에 전화했더니 편집장이 휴가란다. 주초에 다시 통화를 해야겠지만 마감이 목요일이라고 하니 반박 글은 다음 주 목요일까지 쓰게 될 것 같다. 근래 쪽글 형태로 자유주의 이야기를 간간히 적고 있는데 반박 글은 물론 그와 다른, 진중권 씨의 논지를 적시하여 내 의견을 적는 글이다.


2010/07/23 11:06 2010/07/23 11:06
2010/07/22 10:00
안상수 선생이 박남준 형과 그의 고향인 법성포를 다녀와 그의 집에서 하룻밤 묵었다고 편지에 적었다. 선생은 작년 언제부턴가 실천문학 시인선의 디자인을 맡고 있는데 작업을 위해 시인과 그의 고향에도 가고 여행도 하고 한다. 남준 형과 통화. “법성포에서 흙도 퍼 담으시고 뭘 주워 담기도 하고 하시던데 다른 시인들 디자인 한 걸 보니 그냥 바탕색에 제목만 들어가 있던데 뭘 어떻게 하시려는 거지?” “결국 시인의 색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가 봐요.” “그런가. 나는 무슨 색이 나올지 궁금해. 아니 겁이 나.” “겁이 나요?” “검정은 아니겄지?” “글쎄, 검정은 아닐 것 같은데. 혹시 바라는 색이 있어요?” “아니. 뭐 굳이 말을 하자면 분홍이나 노랑 같은 거.” “그러더라고 전해드려요?” “아니, 아니.” 함께 크게 웃고..

2010/07/22 10:00 2010/07/22 10:00
2010/07/2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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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실험적인, 그러나 매우 들을 만한 음악을 하는 밴드 머머스룸.


2010/07/21 16:18 2010/07/21 16:18
2010/07/20 21:14

한음파의 200만년 광년으로부터의 5호 계획을 들으면 Pulp의 Disco 2000이 떠오른다. 음악적으로 꼭 유사점이 있다기보다는 춤추고 싶어지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홀랑 벗고 춤추고 싶어지는, 진정한 댄스곡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다.

2010/07/20 21:14 2010/07/20 21:14
2010/07/20 16:58
왜 굳이 좌파가 존재해야 하는가? 가장 간단하고 소박하게 그 이유를 말한다면, 자유주의로 담지 못하는 사회문제와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라는 '최선의 자유주의 정권'을 통해 그 사실을 분명히 경험한 바 있다.


2010/07/20 16:58 2010/07/20 16:58
2010/07/20 16:55

지식인 사회 달구는 자유주의 담론. 한국의 중앙일간지 가운데 우리가 그나마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볼 수 있는 게 한겨레와 경향신문인데, 두 신문이 그간 '보수/진보(=자유주의)' 프레임에 갖혀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기사다.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면, 우리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만들어주려면 보수/진보 논의가 자유주의/좌파 논의로 이행해야 한다. 물론 나도 지속적으로 의견을 개진해갈 것인데, 내 의견의 초점은 대략 두가지일 것 같다. '좌우분별이 있는 사회', 그리고 '배타적 자유주의 비판'.

2010/07/20 16:55 2010/07/20 16:55
2010/07/20 12:48

자본론 공부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는 이들에게 드리는 간단한 안내. 근래 월가의 엘리트들에게 자본론이 필독서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자본주의를 아는 데 자본론을 넘어서는 책은 여전히 없다. 자본론은 자본주의에서 성공하려는 목적에서든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목적에서든 유용하다. 그런 분명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자본론 공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좀더 현명하게 해준다. 이명박이나 조중동과 싸우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뀐다고 믿진 않는다면 자본론 공부는 필수다. 자본론을 공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자본론을 읽는 것이다. 김수행,  강신준 선생의 번역이 있다. 그러나 자본론은 ‘노동계급의 성서’라는 별명과 걸맞지 않게 매우 어렵다. 그래서 좀더 쉽게 자본론을 공부할 수 있는 해설서들이 나와 있다. 내가 내용을 검토한 것들 가운데서(내가 검토하지 않은 좋은 책이 있을 수도 있다) 세 권을 추천한다.

임승수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강상구의 Hi, 마르크스 Bye, 자본주의 
강신준의 그들의 경제, 우리들의 경제학

동영상 강의는
김수행 선생 강의와 영어가 용이하다면 데이빗 하비 선생 강의도 있다.

어떤 식으로 시작하든 최종적으로는 자본론을 제대로 읽어보길 권한다. 해설서들을 제대로 읽은 다음이라면 천천히 읽을 만하고, 읽은 다음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2010/07/20 12:48 2010/07/20 1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