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09/12/31 민주주의의 씨앗
  2. 2009/12/30 의미 있는 일
  3. 2009/12/30 올해의 영화
  4. 2009/12/30 와글와글토론극
  5. 2009/12/30 트루디
  6. 2009/12/26 2010
  7. 2009/12/25 올해의 책
  8. 2009/12/19 8급좌파
  9. 2009/12/17 신청서 보내드립니다
  10. 2009/12/17 숨님
  11. 2009/12/16 천천히
  12. 2009/12/15 평범한 사람
  13. 2009/12/14 아림
  14. 2009/12/14 성규
  15. 2009/12/10 개털 아비의 천국
  16. 2009/12/07 신청서 재중
  17. 2009/12/06 교육, 희망으로
  18. 2009/12/06 하나마나한
  19. 2009/12/03 팔무전, 김경란
2009/12/31 00:01

민주주의의 회복’이니 ‘민주세력의 연대’니,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바야흐로 민주주의라는 말의 홍수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인가? 역시 어원 그대로 ‘인민의 자기 지배’가 가장 보편적인 정의일 것이다. 인민이,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노동자와 서민이 주인인 세상, 그게 민주주의다. 인민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건 단지 인민들이 언론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다. 실제 삶에서, 먹고사는 문제에서 평등하고 공정한 상태를 누리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인 건 인민들이 바로 그 실제 삶에서 끝없이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 노동’은 그 가장 주요한 현실이다. 비정규 노동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한국처럼 완전하게 자본의 이해만을 구현하는 경우는 없다. 한국의 비정규노동엔 두 가지 의미만 존재한다. 총매출에서 노동자 임금의 비율을 최대한 줄여 자본의 몫을 최대화하는 것, 그리고 노동자의 단결과 조직력을 약화시켜 자본이 노동자를 멋대로 부릴 수 있도록 하는 것. 현재 비정규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58퍼센트인 880만인데, 임금은 정규노동자의 49퍼센트이며 노동조합 조직율은 고작 3퍼센트다. 여기에 청년 세대로 갈수록 비정규노동의 비율이 현격히 높아진다는 점을 보태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가 아니라 이미 파탄 난 상태라 할 수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자본의 탐욕 때문인가? 물론 자본은 탐욕스럽지만 탐욕은 자본의 본디 속성이며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한 그 탐욕은 어떤 식으로든 품고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자본의 탐욕 자체가 아니라 자본의 탐욕이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방식이다. 그걸 조정하고 관리하는 게 바로 국가 권력이다. 국가 권력이 자본의 편에 서면 인민들의 삶이 무너지고 적절히 제한하면 인민들의 삶이 살아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정권이란 바로 자본의 탐욕을 적절히 제한하면서 인민들의 살림을 현명하게 꾸려나가는 정권이다.
오늘 비정규 노동의 참상이 불과 10여년 동안 진행된 일이라는 사실은 국제적으로도 경이롭게 여겨지곤 한다. 그것은 한국의 국가권력이 지난 10년 동안 어지간히 열심히 자본의 편에 섰다는 뜻이다. 그 10여년 동안 세 개의 정권이 존재했다. 그 중 두 개의 정권은 민주주의의 껍질을 앞세워 자본의 편에 섰고 한 개의 정권은 그 껍질마저 팽개치고 자본의 편에 서고 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정권을 맡았던 사람들이 그 ‘차이’를 내세워 오늘 다시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어떠세요. 겪어보니까 그래도 옛날이 그립지요?” 근래 그들 가운데 한 주요한 인사가 강연에서 했다는 말은 그들의 태도를 잘 드러낸다. 그들이 마치 인간이 어디까지 파렴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듯한 행태를 지속할 수 있는 건, 그들을‘그래도 현실적인 대안’이라 인정하는 사람들 덕이다. 어떻게든 이명박의 세상에서만 빠져나가면 살 것 같은 싶은 심정이야 누가 다르랴만, 그렇다고 해서‘민주주의의 수호자를 가장한 자본의 수호자’를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인정할 순 없지 않은가?
체험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희망이 없다. 우리가 지난 10년의 체험에서 분명히 배울 때, 이명박뿐 아니라 그 파렴치한 자본의 수호자들 또한 넘어서는 걸 고민할 때, 우리가 좌절과 무력감을 뿌리치고 저 너머 세상을 함께 상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민주주의의 씨앗을 얻을 것이다. (한겨레)

2009/12/31 00:01 2009/12/31 00:01
2009/12/30 16:23
해를 넘기며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생각한다면
고래동무를 고려해보시길.. ^^

2009/12/30 16:23 2009/12/30 16:23
2009/12/30 16:20

제목은 거창한데, 며칠 전 한겨레에 실린 ‘전문가들이 꼽은 올해의 영화’를 읽으며 든 잡생각을 끼적거려 보는 것. <마더>는 잘 만든 영화지만(봉준호 아닌가) 그 영화에 등장하는 엄마는 너무나 끔찍해서 힘들었다. 모성애라는 홍보가 있었는데 봉준호 씨가 정말 그걸 모성애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건 모성애가 아니라 병적인 자기애일 뿐이다. ‘고래삼촌’인 나로선 오늘 교육 경쟁과 관련한 한국 엄마들의 모습이 겹쳐져 더 힘들었던 것 같다. 김혜자 씨의 연기는 좋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연기는 아니었다. <똥파리>는 한국 외국영화 통틀어 최고였다. 영화 연출이라는 게 금속공예와 다른 것이라면 양익준의 필모그라피가 단출하다고 해서 그의 역량을 재능이라 바꿔 부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 영화가 새로워졌다는 말은 여전히 동의 못하겠다. 새롭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봤는데 그 새로움을 설득력있게 말하는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홍상수에 대한 인텔리들의 상찬은 아무래도 허위의식의 혐의가 있는데 언제 분석을 해보면 재미있을 것도 같다. 물론 그럴 시간은 절대 없겠지만. 하여튼 홍상수는 행복한 감독이다. 늘 똑같은 소리를 하고 놀면서도 영화 만들기를 지속할 수 있고, 지성적인 감독으로 대우 받으니. 나는 그의 영화보다는 그가 훨씬 더 예민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그의 영화가 늘 실망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걸어도 걸어도>는 좋았다. 몇십년 만에 ‘부르라이또 오꼬하마’를 들으니 눈물이 찔끔 나더라. 가부장제에 충실하게 살아온 늙은 여성이 실은 제 정체를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경외스럽다. 한국영화 같은 독일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에도 그런 여성이 나오는데 한번들 보시길. <파주>는 좀 지루한 예술영화일 거라 각오하고 봤는데 꽤 재미있었다. 이선균의 연기는 무난했는데 간혹 상황에 비해 발성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다보면 발성조차 무너져내리는 순간이 있는 법인데 그런 경험이 아직 없는 걸까. 그밖에 기사에 난 영화들 중 <그랜 토리노>는 좋았고 <체인질링>과 <바스터즈>도 괜찮았다. 자이장커의 영화는 챙기는 편인데 <24시티>는 못 봤다. <킬러들의 도시>는 볼 생각이 있고 <박쥐>는 그다지 보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왜일까. 기사에 나오지 않은 영화들 가운데 <나무없는 산> <처음 만난 사람들>은 이미 적은 적이 있고 <락앤롤보트>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이상한 제목으로 나온), <엘레지>  <낮술> <챠우>  등을 재미있게 봤다. 이밖에도 몇 편 더 있는데 제목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빌 나이는 <러브 액츄얼리>에서 보고 매력적인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들은 좀 다르게 보는 것 같더라. 여자들에게 남자보는 눈이 없는 것과 남자들에게 여자보는 눈이 없는 건 인류의 마지막 유머일지도. <챠우>는 뜻밖에 재미있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영화를 그렇게 재미없어 보이게 포장하다니. 안 볼 뻔 했잖아.

2009/12/30 16:20 2009/12/30 16:20
2009/12/30 06:30

고래하고 벼레별과
와글와글토론극

2009/12/30 06:30 2009/12/30 06:30
2009/12/30 01:45
웍슬로의 채근으로 생각보다 빨리 봤고 그러길 잘했구나 싶다. 아바타엔 쓸모있는 지적 사유와 통찰들로 가득 하다. 생태주의, 영성, 심지어 관념적 비폭력주의에 대한 비판까지. 할리우드 대작영화라는 '죄' 때문에 그 훌륭함이 빛을 발하긴 어렵겠지만 참 근사한 영화다. 요 며칠 사람들과 대화중에 아바타 이야기가 잠깐씩 나왔는데, 그중 한 후배의 말이 특별했다. 등장인물들 가운데 트루디가 가장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인물들은 나비족과 사적인 관련이 있는 반면 이 인물은 오로지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 나비족 편에 선다는 것. 요즘처럼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사라진 시절엔 정말 빛나는 캐릭터라는 데 공감이 갔고 덧붙였다. “사실 영화 속에서 이런 조연 캐릭터가 종종 등장하지만 여자는 없지. 그래서 더 매력적으로 보일 거야.” 오늘 김단에게 트루디 이야기를 했더니 역시 '기센여자클럽'의 일원답게 열렬히 공감했다. 김단은 아바타를 두번 봤다. 제 남친과 한번 나와 한번.

2009/12/30 01:45 2009/12/30 01:45
2009/12/26 12:2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윤엽 판화.
지금 내 마음을 그대로 담은 듯한..

2009/12/26 12:21 2009/12/26 12:21
2009/12/25 14:34

올해 책 구입 명세를 훑어보니 140권인데 거기에 저자나 출판사에서 증정 받은 책을 합하면 대략 170권이다. 그 중 정독한 책이 5할, 훑어본 책이 3할, 읽다 만 책이 2할 가량이지만 다른 해에 비해 약간 많은 편이다. 책에서 생각을 얻는 게 아니라 생각이 책에 말려드는 느낌이 들면 부러 몇 달씩 책을 끊기도 하는데 올해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시기가 없었다. 인상적인 책들을 생각나는 대로 꼽아보면 이렇다.

변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변하고 있다 (신현칠)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김진호)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서동진)
길은 복잡하지 않다 (이갑용)
날아라 새들아 (최성각)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컨트롤레볼루션 (제임스 R. 베니거)

폴라니의 책이야 고전이니 굳이 코멘트를 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번역자 홍기빈은 내년에 진행될 ‘고래가그랬어 어린이 인문학교’의 첫 번째 강사이기도. 베니거의 책은 또 하나의 각별한 자본주의 분석서인데, 특히 정보화 사회니 디지털이니 들먹이며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변하기라도 한 듯 까불대는 사람들이 읽으면 약이 된다. 신현칠 선생의 책은 책을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이 꼭 사서 읽고 모실 만하다. 지난 10년은 한국의 그나마 남은 좌파들이 대거 자유주의화하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서동진은 되려 한국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교한 분석서를 내놓았다. 김진호의 책은 그의 스승 안병무 선생의 요한복음 강의를 이어받아 쓴 책이다. 내가 쓴 추천 글의 한 토막. “이 책은 예수와 새로 생긴 찻집에서, 참으로 오랜 만에 대화하는 기쁨을 준다.” 생태 이야기를 다룬 산문들은 도탄에 빠진 생태를 살려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 때문에 문장이 딱딱하고 건조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성각은 물 흐르듯 부드러우면서 심지어 익살스럽기까지 한, 매우 생태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이 가운데 한 권을 ‘올해의 책’으로 꼽는다면 이갑용의 길은 복잡하지 않다. 좋은 책은 간간히 있지만 좋은 책이면서 쉽고 재미있기까지 한 책은 얼마나 찾기 힘든가? 이갑용의 책이 바로 그렇다. 오늘 인텔리들이 모조리 '이명박 욕하기 장기자랑 대회' 혹은 ‘09년식 비판적 지지’에 놀아나는 가운데, 이 ‘대학문에도 들어간 적 없는’ 노동운동가는 제 생생한 체험과 곧은 마음만으로 오늘 한국사회의 지적, 정신적 혼란을 꿰뚫어본다. 게다가 무서울 만큼 철저한 자기성찰. 이갑용은 우리로 하여금 꼼짝없이 ‘지성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한다. 선거는 다가오는데, 명박이 얼굴만 봐도 돌아버리겠고, 어째야 할 지 헷갈리는가? 그렇다면 이갑용을 읽어라.

2009/12/25 14:34 2009/12/25 14:34
2009/12/19 11:23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래동무 가입하는 모든 분들에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청서를 가져다 다른 고래동무를 모으는 분들에게 뭔가 작은 선물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의논하다가 <B급좌파>를 사인해서 드리기로 했다. <B급좌파>는 <뚝딱뚝딱 인권짓기>와 함께 고래 운영에 밀려 다시 찍지 못한 지 한참 되었는데, 이번에 찍으면 서점에도 내보낼 수 있게 된다. <B급좌파>의 디자인은 얼핏 투박해 보이지만 깊은 맛이 있어서 나라밖의 전시에도 여러 번 출품된 바 있다. 안상수 선생은 이번엔 표지의 동그라미와 무늬를 겹쳐서 찍어보잔다. 실은 오래 전 언젠가 인쇄 사고로 그렇게 찍힌 것들이 있는데 모르고 그냥 내보낸 적이 있다. 강연 같은 데서 사인을 해달라 내미는 <B급좌파> 가운데 그 버전을 만나면 반가워서 “희귀본을 갖고 계시네요.” 농담을 하곤 한다. 그런데 궁금한 것 하나. 표지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8급좌파’라 적혀 있는데 왜 다들 ‘B급좌파’라 읽는 걸까? ㅎ

2009/12/19 11:23 2009/12/19 11:23
2009/12/17 17:02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래동무 신청서를 만들어 사용하는 분까지 출현하여 ‘깊이 반성하고’(^^) 요청하는 모든 분들에게 신청서를 보내드리기로 했다.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바로 보내드린다. 나 역시 늘 신청서를 휴대하고 다니며 개미처럼 한구좌씩 모으고 있다.

고래동무 신청서 요청하기

2009/12/17 17:02 2009/12/17 17:02
2009/12/17 10:44
화엄경강해(김흥호)를 읽다 알게 되었는데, 처음에 성경 번역할 때 성령을 ‘숨님’이라고 했단다. 숨쉬다 할 때 그 숨 말이다. 숨님이라..

2009/12/17 10:44 2009/12/17 10:44
2009/12/16 14:53
고래식구들 밥 사주러 들린 승리가 말하길 다니는 교회에서 설교대신 예수전을 함께 읽는단다. 비슷한 이야기를 몇 번 듣긴 했는데.. 감사할 따름이다. 나 역시 연말에 내 책이라는 생각을 접고 천천히(예수전을 읽는 이들에게 내가 하는 유일한 부탁이기도 한) 다시 읽어볼 생각.

2009/12/16 14:53 2009/12/16 14:53
2009/12/15 14:27

'갈곳이 없어.. 오르고 올라.. 죽어간.. 평범한 사람..' 루시드폴의 신보를 듣는데 첫 곡 '평범한 사람'에서부터 눈물이 핑돈다. 도리없이, 고공농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990년 4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13일 동안의 골리앗크레인 투쟁이 온 나라를 들끓게 하면서 고공농성은 내몰린 평범한 사람들의 중요한 싸움 방법이 되었다. 그러나 2003년 11월, 서민대통령 노무현 씨가 취임한 지 1년이 채 못 된 어느 날 85크레인에 혼자 올라 129일을 농성하던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 김주익은 결국 목을 맸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인간성이라는 말은 그 순간 사멸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이 통장잔고와 아이 성적에만 몰두하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외면 속에 슬프고 외롭게 죽어가는 풍경은 이젠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다.

(타이틀곡' 레미제라블'의 남녀버전을 천천히 듣다보면, 바이올린과 아코디언 선율 속에 자연스레 정태춘의 '5.18'이 떠오른다. 언젠가 라이브 무대에서 두 사람이 함께 이 노래를 부른다면 이 노래에 대한 최상의 해석이 되지 않을까. '고등어'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상생을 노래하는 너무나 예쁘고 지혜로운 노래다. 그 외에도.. 연민과 위로로 가득한 이 앨범의 제대로 된 리뷰를 한번 써볼까 싶다.)

2009/12/15 14:27 2009/12/15 14:27
2009/12/14 22:02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중사 말마따나 '고래 최대공훈자' 아림이 놀러왔다. 주방에서 차를 타고 있기에 손님이 뭐하는 거야 했더니 생긋 웃으며 손님은요 한다. 집에서 전화를 받을 때마다 자꾸만 "고래가그랬어입니다" 해서 혼자 웃는단다. 고래가 가장 어려울 때, 말하자면 고래 운영진 아저씨들이 빚쟁이를 피해 내내 밖으로 돌던 어느날, 혼자 사무실을 지키다 점심을 먹으려하니 5천원이 없더라는, 이쁘장한 아가씨는 몇달 후면 엄마가 된다. 고맙고.. 건강하길..

2009/12/14 22:02 2009/12/14 22:02
2009/12/14 21:58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태춘, 박은옥 그리고 두 사람의 가장 정성스러운 후배인 강성규. 성규는 이미 나에게도 좋은 친구가 되었다.

2009/12/14 21:58 2009/12/14 21:58
2009/12/10 08:16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였다. 이른바 이명박식 기독교 신앙이 판치는 한국에서 이 말은 그저 교회에 안 다니던 사람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는 일쯤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그러나 예수가 말한 회개란 종교적 회심을 넘어 더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회심을 뜻한다. 예수는 교회에 다닐 것을 촉구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회개라 번역된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는 ‘길을 바꾸다, 되돌아서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는다는 건 쉽게 말해서 ‘즐거움의 전복’이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남보다 많은 돈을 벌고 여느 사람들과 삶의 외형적 격차를 벌리는 걸 인생의 즐거움으로 알던 사람이 한 순간 벼락을 맞은 듯 가난한 사람을 보면 내가 많이 가져 저렇구나 싶어 민망하고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이 눈에 밟혀 그들과 함께 가는 게 훨씬 즐거운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 그게 바로 회개다.
예수가 그의 공생애의 첫 메시지로 회개를 말한 건 그가 전하려는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즐거움의 전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떤 사회체제에서 살아갈 때 자기도 모르게 그 체제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감염된다. 이를테면 오늘처럼 극단적인 자본의 체제에서 사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돈과 외형적인 가치를 인생의 중심에 놓는 사람으로 변화한다. 즐거움이 전복되지 않는 한 사회 변화를 위한 그 어떤 노력도 무망하다.
오늘 반이명박을 외치는 사람들에게서 그 사실은 또렷하게 드러난다. 물론 그들과 이명박은 전혀 달라 보이며 실제로도 많이 다르다. 그러나 그들의 반이명박 싸움은 이명박과 그들의 다름(이명박은 군사독재를 잇고 자신은 민주화 운동을 잇는다는 사실을 씨앗으로 하는)을 끊임없이 부각함으로써 이명박과 자신의 동일함(돈과 외형적인 가치를 인생의 중심에 두며 그 기준으로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의 동일함)을 은폐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또 그놈의 ‘내 안의 이명박’ 타령이군, 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이들은 행여 오해 마시라. ‘우리’의 이름으로 하는 비판을 자기성찰로 연결시키는 것은 지성의 기초이기도 하거니와, 나는 무슨 광야의 지사라도 되는 양 세상의 위선을 준엄하게 꾸짖거나, 제 이념을 확인하는 걸 목표로 삼는 공상주의자로서 비현실적인 넋두리를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나는 단지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잃어버린 인생의 참 즐거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것을 권유할 뿐이다.
예수는 회개하라는 말과 함께 ‘하느님이 잔치를 열고 우리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즐거움을 전복하면 당장 천국에 들기라도 하듯 말하다니, 너무나 싱거운 말 아닌가 싶겠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사람들로 차고넘치는, 더할 나위 없이 효성스런 자식 덕에 세상에 부러울 게 없던 부자가 어느 날 불현듯 생각한다. ‘내 자식이 나에게 이리도 잘하는 건 내 재산 때문이 아닐까?’ 그 부자는 그 순간 꼼짝없이 지옥에 입장한다.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개털 아비가 어느 날 누군가에게서 자식이 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우리 아버지가 가난한 이유는 그가 자신만을 위해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 개털 아비는 그 순간 천국에 입장한다. (한겨레)

2009/12/10 08:16 2009/12/10 08:16
2009/12/07 15:09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울산의 교사 한분에게서 ‘후원신청서 재중’이라고 적힌 우편물이 왔다. 열어보니 손수 편집해서 만든, 그래서 동료 교사와 지인들에게서 모은 고래동무 신청서들이 들어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자세를 고쳐 앉는다.

2009/12/07 15:09 2009/12/07 15:09
2009/12/06 19:39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9/12/06 19:39 2009/12/06 19:39
2009/12/06 01:55
자넨 늘 나에게 '불편하게 만드는 자'라 말하고 그게 내 역할이라고 하는데 난 그 말을 덕담으로 듣네. 그러나 나에게 그런 주문을 하려면 자네 역시 그래야겠지? ㅎ 하여튼 우린 남들 다하는, 절반은 자기정당화 혹은 자기위안의 목적을 가진, 그래서 하나마나한, 비판은 하지 않도록 하세.

2009/12/06 01:55 2009/12/06 01:55
2009/12/03 01:30

한국춤이라고 하면 리틀엔젤스의 부채춤 같은 관광춤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제대로 된 한국춤은 실은 공연장에서 관람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예술이다. 물론 그 무대에 서는 게 누군가가 관건인데 진옥섭이 꾸린 이번 팔무전은 그 충분한 구성이라 할 만하다. 여덟 명이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명무들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하는 사람은 김경란 선배다. 56년생인 그는 89년 전노협 문화국장을 그만 둘 때까지 변혁운동에 투신한, 우리 위로 운동 좀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특별한 이력보다 더욱 특별한 건 역시 그의 춤이다. 그는 거의 무대에 서진 않지만 오늘 가히 한국 최고 명무라 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리고 수행자로서 면모다. 나는 오늘 서울에 사는 사람 가운데 그만큼 제 마음공부와 삶이 자연스럽게 일치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서울은 절대 그런 상태를 허락하지 않는 악마적 도시 아니던가.

2009/12/03 01:30 2009/12/03 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