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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7/27 분노의 페미니즘에서 위로의 페미니즘으로
  3. 2007/07/25 시어
  4. 2007/07/16 참게
  5. 2007/07/15 조갑제와 강준만
  6. 2007/07/14 길고양이 바탕화면
  7. 2007/07/12 고래 전단
  8. 2007/07/11 고래 바탕화면
  9. 2007/07/03 떠남
  10. 2007/07/02 마르크스주의학교
  11. 2007/07/01 하드테일
2007/07/28 15:28
여전히 나에게서 “김건, 4학년 맞아?” 소리를 듣는 걸 보면 막내는 막내인데, 제 누나 없이 나와 둘이만 어딜 가거나 할 때는 영판 분위기가 달라져서 제법 반듯한 대화를 하게 된다. 어제도 그랬다. 제 생일에 바이오니클을 하나 더 사달라고 했던 걸 사주지 않은 일을 김건이 다시 꺼낸 게 시작이었다. 길게 끌 이야기가 아니다 싶어 “하나도 못 가진 아이들도 있는데 그 정도로 만족하는 게 어때?” 했더니 김건은 깜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 말이 맞아.” 한다.
녀석의 태도가 조금은 뜻밖이라, 또 그동안 생각이 얼마나 컸나 궁금하기도 해서(실은 얼마 전 학교에서 ‘최우수 토론상’이라는 걸 받아왔는데 다들 조금은 ‘어찌된 일인가’ 하는 중이다.) 말을 이어보았다. “어떤 아이들은 굶는데 어떤 아이들은 먹을 게 남아 버리잖아. 하느님은 어떤 아이가 더 마음이 아프실까?” “음... 부자 아이들.” “부자 아이들?” “응.” “설명해 볼래?” “하느님은 사람이 다 평등하게 살줄 아셨을 아냐. 그러니까 하느님은 굶는 아이들 생각 못하고 음식을 버리는 아이를 보면 마음이 아프실 거야.” “음.”
‘가난한 아이들’이라는 정답지를 준비했던 나로선 자못 신선한 관점이었다. “아빠가 예수님 이야기 하나 해줄까?” “응.” “예수님이 회당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걸 보고 있었어. 부자들이 거들먹거리며 많은 돈을 헌금통에 넣고 가는데 어떤 가난한 아줌마가 얼굴이 발개져서 동전 한 개를 넣었어. 예수님이 그 아줌마가 누구보다 많이 냈다고 말했어. 왜 그랬을까?” “응, 부자는 큰돈을 냈지만 자기가 가진 걸로 보면 조금만 낸 거 아냐? 아줌마는 동전 두개를 냈지만 가난해서 자기 걸 거의 전부를 낸 거니까 더 많이 낸 거 아냐?” “김건, 괜히 토론짱이 아닌걸. 언제 그렇게 똑똑해졌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자 녀석은 금세 허리를 꺾으며 자지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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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예수님이 들려준 이야긴데, 어떤 농장 주인이 날품 일꾼을 구해 일을 시켰어. 그 중엔 오후에야 일을 구해 온 사람들도 있었어. 저녁에 품삯을 주는데 종일 일한 사람이나 오후부터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주는 거야. 당연히 종일 일한 사람들이 항의를 했지. 예수님은 그 주인이 옳다고 말했어. 왜 그랬을까?” “응, 조금만 생각해봐도 돼?” 김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후부터 일한 사람들도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잖아. 그래서 똑걋?준거 아냐?” “그래. 그런데...” “틀린 거야?” “아니, 이런 건 수학문제처럼 맞다 틀리다만 있는 게 아니야.” “히히.” “예수님은 아침부터 종일 일했든 오후부터 일했든 하루 먹고사는 데 필요한 돈은 같다는 거야.” “그렇구나.”
“머리가 좋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잖아? 두 사람이 일한 만큼 가지는 게 옳을까?” “아니.” “왜?” “예수님이 말한 것처럼 필요한 만큼 가져야하니까.” “그래. 그런데 세상은 어떻지?” “안 그렇지 않아?” ”그래. 세상은 예수님 생각이랑 많이 다르지. 그래서 아까 김건이 말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이 있는데 부자인 것만으로 하느님 앞에선 부끄러운 거야. 김건은 나중에 어떤 사람들 편을 들 거야?“ ”가난한 사람들.“ ”괴로운 일도 많을 텐데.“ ”괴로워도 그게 맞잖아.“ ”그래 괴로워도 그게 맞지. 그런데 김건, 괴롭기만 할까? 기쁨은 하나도 없을까?“ ”아, 기쁨 있어!“
녀석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어제 승호(김건보다 네 살 적은 이웃) 문병 갈 때 내가 아끼는 카드 삼십 장하고 왕딱지 다섯 개 갖다 주었는데 기분이 참 좋았어.“ ”덜 아끼는 걸로 골라 줄 수도 있었는데 망설여지지 않았어?.“ ”망설여졌어. 그런데 주고 나니 몇 배 기분이 좋았어.“ ”망설이다가 그냥 덜 아끼는 걸로 주었다면 어땠을까?.“ ”부끄러웠을 거야.“ ”아무도 모르는데?“ ”나한테 말야.“ 녀석의 마지막 말에 뭉클했다. 아, 이런저런 지식과 교양과 사상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막내 노릇하는 열 살짜리보다 못한 우리에게. (한겨레21, 일러스트 김대중)
2007/07/28 15:28 2007/07/28 15:28
2007/07/27 18:35
얼마 전 <이프>에서 김신명숙의 신간 서평을 부탁하는 연락이 왔다. <이프>하고는 모종의 구연도 있고 해서 좀 뜻밖이었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서평이 필요하다”고 했고 나는 책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책을 받아 일별해보니 생각보다 조화로운 책이었다. 무엇보다 인텔리, 혹은 페미니스트 여성이 아니라 보통의 여자들(페미니즘이 뭔지 정확하게 모르는 대다수의 여자들)이 읽도록 쓴 책이라는 것이 돋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게 서평을 미적미적 두주나 미룬 이유이기도 했다. 삶의 담론은 지적 담론과는 비할 수 없이 어렵게 느껴진다. 오늘 새벽에야 부랴부랴 써서 보냈다. 프레시안에 실린 제목은 "미성숙한 인간이 성숙한 인간을 지배하는 기이한 세상"

분노의 페미니즘에서 위로의 페미니즘으로

“규항 씨, 한대숩니다.” “예, 잘 지내시지요?” “아이고, 죽겠어요.” “양호 때문에요?” 예, 이십사 시간 울어대니 잠을 못자 미치겠어.” “그래도 한국 남자들 다 여자한테 떠맡기고 자는데 훌륭하시네요.” “우리 마누라는 서양식이라 국물도 없어요. 그런데 애가 언제까지 이렇게 잠을 안자요?” “넉넉잡아 앞으로 한 달만 고생하면 괜찮습니다.” “그럼 다행이네. 나나 옥사나나 나이만 많지 엄마 아빠는 초보라 뭘 알아야지. 그런데 애가 이렇게 우는 게 괜찮은 건가. 정상이에요?” “애가 안 울면 걱정이지만 우는 건 괜찮습니다.” “그럼 안심이네. 하여튼 잠을 못자니 아무것도 못하겠어. 음악이고 예술이고 잠을 자야 하지, 하하하.”

예순에 첫딸을 얻은 한대수 선생과 유쾌하게 통화하고는 나도 모르게 씁쓸해졌다. 처녀 때는 물론 결혼을 하고도 남자들에 뭐하나 빠질 것 없이 살다가 아이를 낳고 육아를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거꾸러지던, 제 삶의 주인 자리를 아이와 남편에게 내주기 시작하면서 허탈감에 순간순간 공황 상태를 보이던 여자 후배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의 남편들은 “잠을 못자 죽겠다, 미치겠다”고 호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의 남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딱히 비난도 원망도 할 수 없는, 그러나 멀쩡한 한 여자를 서서히 거꾸러지게 하는 거대한 시스템, 바로 그게 페미니즘의 적 가부장제일 것이다.

“악명 높은” 페미니스트 김신명숙의 ‘선택’은 그런 보통여자들의 일상에서 출발한다. 선택은 페미니즘 이론서도 아니고 그가 8년 전에 냈던 전에 냈던 ‘미스코리아 대회장을 폭파하라’처럼 제목부터 격렬한 책도 아니다. <선택>은 사랑, 성, 외모, 결혼, 육아 같은 여성들의 고민들을 조용한 목소리로 상담해주는 책이다. 모든 꼭지는 “사랑하는 언니가”라는 말로 끝난다. 이 책은 김형경을 필두로 하나의 붐을 이루고 있는 ‘내적 치유를 위한 상담서’의 하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여느 상담서들과 다른 건 매우 정치적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의 고민과 고통이 매우 개인적인 문제로 여겨지지만 실은 매우 정치적인 맥락을 갖는다는 걸 차근차근 설명한다. 이 책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된다면 어떤 독자는 위로와 평온함을 얻겠지만 또 다른 많은 독자는 생전 처음 칼을 갖게 될 것이다.

김신명숙은 이런 책을 쓰게 된 연유를 말한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건 이런 열악한 상황에 대처하는 여성들의 태도였다. 그녀들은 대개 분노보다 체념 혹은 합리화 쪽을 택했으며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저항보다는 순응이 주는 당장의 편안함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들 내부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여자들이 자존감이 약했고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었으며 내상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 상처를 어떻게 해석하고 극복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그제야 나는 왜 나를 비롯한 이프 페미니스트들의 ‘급진적인’ 주장들,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하며 비웃고 공격했던 발언이나 행동들이 소수의 마니아층을 넘어 여성대중에게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당장 그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투쟁을 독려하는 분노의 목소리가 아니라 움츠러든 자아를 다독이며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위로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믿어라. 당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격려의 다독임이었다. 이 책의 글쓰기 방식은 이런 깨달음의 결과다.”

<이프>는 페미니즘의 개념을 떠들썩하고 발랄한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유포하려는 잡지였다. 그런데 그 방식은 김신명숙의 말대로 여성대중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지 못했다. 이프는 2006년 4월 ‘완간’했다. 김신명숙은 이프가 그런 한계를 가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아프게 성찰하고 반성한다. <선택>은 그런 성찰과 반성의 산물이다. 말하자면 <이프>는 ‘이게 페미니즘이다’ 라고 떠들썩하고 발랄하게 말하는 책이었다면 <선택>은 고민과 고통으로 얼룩진 사람에게 조용히 다가가선 스스로 ‘이게 페미니즘이로구나’ 깨닫게 만드는 책이다. 김신명숙의 변화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개인적 변화를 넘어서 이런저런 전통적인 선동 방식이 더 이상 대중들에게 호감과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시절에 어떻게 운동해야 할 것인가, 라는 고민에 빠진 전체 진보운동에 소중한 참고가 될 만하다.

그런 방식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사회적 억압 체제에서 피억압자는 억압체제의 일부를 맡는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운동이 절대선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성찰에서 출발하게 한다는 것이다. 억압은 늘 억압자의 일방적인 행위처럼 묘사된다. 이를테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조선인민들’이니 ‘군사파시즘에 신음하던 국민들’이니 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 시절에 신음하던 사람들이 몇이나 되었던가? 마치 지금은 모든 조선인과 국민들이 일본제국주의와 군사파시즘에 대한 분노에 떨며 독립과 민주화를 여망했던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을 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제 식구 건사하며 알뜰살뜰 한 세월을 보냈을 뿐이다. 독립운동을 하고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지지하거나 존경하기는커녕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비웃었기가지 했던 것이다. 바로 그게 일본제국주의가 36년 동안 조선을 강점할 수 있었던 힘이고 군사파시즘이 30여년 동안 남한을 다스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힘이다.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싸우는 오늘 운동도 마찬가지다. 억압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억압은 존재한다. “어차피 자본주의 세상인데” “맞는 말이지만 현실적이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억압을 지탱한다는 사실은 억압과 싸우는 운동에서 대개 생략되곤 한다. 억압자의 비인간성과 사악함을 공격하는 데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을 은폐한다기보다는 사실의 절반만 말하는 것이지만 결국 억압 체제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는 일방적인 한풀이에 머물 가능성을 가진다. 결국 모든 운동의 출발은 피억압자의 각성이다. <선택>은 조용하고 다정하게 그러나 매우 집요하게 ‘당신이 억압체제의 일부를 맡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피억압자는 악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리석다. <선택>은 그런 어리석음을 일깨운다. 그런 어리석음을 질책하거나 훈계하는 게 아니라 그런 어리석음 또한 매우 정치적인 맥락에 의한 것이라는 위로와 함께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우 결혼이 ‘거래’의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입니다. 늙은 갑부와 젊은 미녀의 결혼이 상징하듯 능력(돈)과 외모(몸)가 교환되는 것인데 이때 여자들은 종종 적극적인 주체로 이 게임에 참여합니다. ‘조건 좋은 남자를 낚느라 혈안이 되는’ 것이지요. 성업 중인 결혼정보업체들이 증명해주고 있듯이요. (중략) 그러나 이런 비도덕적 현상의 배후에는 여자들이 경제적 심리적 주체로 자립할 수 없게 만드는 불평등한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결혼이 여자들에게 가장 가능성 있는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남아있는 한 결혼은 ‘순수하게’ 이뤄질 수 없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보는 잡지를 만들고 있는데, 초등학교 아이들을 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쳐진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차분히 자신을 들여다본다든가 조용조용 섬세한 대화를 한다든가 하는 건 대개의 남자 아이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강의 같은 데서 생각없이 까불대며 몰려다니는 남자아이들을 더올리며 종종 “사람이라기보다는 원숭이 새끼들에 가깝다”고 농담하곤 한다. 나도 웃고 청중도 웃지만 사실 그렇게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흔히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보다 늦되다, 고 말들 한다. 그렇다면 중학이나 고등학생 나이를 지나면서 남자 아이가 여자 아이보다 나아진다는 말인가? 그런 일은 없다. 남자 아이들의 특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나 역시 한 남자지만 어른이 되지 않는 경향이야말로 남성의 특징이다.

그럼에도 남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인간적으로 어른이 되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여자보다 훨씬 빨리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남자는 어릴 적부터 세상을 지배하고 훈련하는 훈련을 한다. 요즘 남자 아이들에게 유행하는 유희왕 카드는 자본주의 시장을 연습하는 것이고 비비탄총을 들고 몰려다니는 건 폭력과 지배를 연습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여자 아이들은 매우 돌봄과 보살핌에 관한 인간적이고 섬세한 놀이를 한다. 남자아이들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여자아이들은 인간적으로 성장한다. 결국 초등학교 시절처럼 정치적 위계가 덜 작동하는 시기엔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를 압도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를 경유하면서는 어느덧 남자가 여자를 압도하게 된다.

결국 가부장제는 미숙한 인간들이 성숙한 인간들을 지배하는 기이한 체제이다.(그러니 무슨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겠는가.) 이런 사실은 거창한 이론이나 분석 없이도 주변의 남자와 여자들을 잘 살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나는 남자 후배들이 제 아내와의 문제로 고민을 털어놓을 때, 혹은 여자후배들이 제 남편 문제로 당하는 고민과 고통에 대해 말할 때 절감하곤 한다. 가부장제나 남성우월의식이다, 할 것도 없는 상상하기 힘든 미숙함들이 멀쩡해보이는 남자들에게서 거의 예외없이 쏟아져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 후배들에겐 자신이 얼마나 엉성한 인간인지 인정하게 만들고 여자 후배들에겐 남자란 어른의 외양을 가진 어린아이들이라는 것, 답답함이나 실망은 현재로선 부질없다는 것부터 말해주곤 한다.

김신명숙의 ‘악명’이 많은 사람들이 <선택>을 ‘선택’하는 데 장애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의 악명이나 그에 대한 편견들은 대개 정당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 스스로 토로한 운동과 소통의 방식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런 악명은 되새겨 볼 여지가 있다. 이를테면 페미니즘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남자들도 그의 이름을 아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대개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했다는 군가산점 문제와 관련한 토론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토론에서 그가 보인 한 순간의 태도 때문이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 경박한 대중미디어의 시대엔 말 한마디 표정 하나로 몹쓸 사람으로 매도되기도 하고 별다른 공도 없이 단박에 사회적 영웅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그런 경박한 상황으로 인한 피해나 여론의 악화가 억울하겠지만 현실을 부인할 순 없다. 우리는 그런 경박함을 존중할 수 없지만 그런 경박함 속에 사로잡혀 울고 웃는 사람들 속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김신명숙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라고 밝힌 ‘위로와 격려’에서 말이다. 결국 <선택>은 김신명숙이 자신에 대한의 정당하지 않지만 실재하는 악명에 대해 성찰하는 책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에도 수많은 갈래가 있다. 한국처럼 페미니즘이 본격적이고 공공연한 분화를 시작하기 전인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얼핏 한 동아리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부를 들여다보면 급진주의, 에코페미니즘, 맑스주의 등 페미니즘의 거의 모든 경향이 다 존재하고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과 흑인페미니즘의 갈등과 비슷한 계급적 지향 차이에 의한 갈등도 있다. 엘리트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분화만 있는 건 아니다. 최근엔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들을 성노동자라 선언하고 연대함으로써 그들을 피해자라 보는 페미니즘의 주류적인 태도와 갈등을 빚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런 여성대중들의 역동적인 태도 역시 엘리트 페미니스트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존경에 치명적인 장애를 주었던 이런저런 에피소드들, 이를테면 사회적 남성인 생리적 여성 정치인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지지한다거나 재산을 둘러싼 집안 싸움에 휘말린 여성 자본가를 페미니스트들이 지지 연대한다든가 하는 일은 이젠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경박한 대중미디어의 무대에서 한없이 페미니즘이 매도되는 듯하지만 아랑곳없이 한국의 페미니즘은 진전을 거듭하고 있다.

물론 김신명숙도 한 갈래의 경향을 가진 페미니스트이지만 적어도 이 책에선 그 갈래를 아우르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자신의 경향을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상담하는 여성의 현실을 기반으로, 사례마다 좀 더 적절한 페미니즘의 경향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여성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으로서 매우 바람직한 태도이기도 하고 김신명숙과 그의 동지들이 한결 부드러워졌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택>을 읽으며 앞으론 예의 내 어설픈 상담자 노릇이 한결 수월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문제를 언급하기 위해 구성된 상담 사례들이 아닌가 싶을 만큼 워낙 다양하고 많은 사례가 <선택>에는 담겨 있다. 이혼 문제를 보자면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이혼 못하는 여자부터 체면 때문에 이혼 못하는 여자까지 들어있다. 누군가 나에게 상담을 청해온다면 <선택>에서 해당하는 사례를 먼저 읽어보라고 할 것이다.

추신 - 이 책의 말미엔 한국인 나혜석과 허난설헌을 포함한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32명의 사상과 삶이 실려 있다. 짧지만 매우 재치있게 요약되어 있어서 죽 읽어보면 작은 페미니즘 이론사를 읽는 듯하다. 일별해보면서 가장 호감이 가는 페미니스트를 골라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나는 아는 사람도 있지만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에코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스가 가장 호감이 가더라. (프레시안)
2007/07/27 18:35 2007/07/27 18:35
2007/07/25 14:48
산문은 퇴고를 하는 것이고 시는 퇴고와 정제를 하는 것이라 할 때 산문 수준의 퇴고조차 않은 것을 시라고 내놓는 시인들을 보면 '사람이 어째 저리 둔할 수 있나' 싶어진다. 이시영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시가 사회적 긴장을 잃지 않으면서도 서정적이기 때문이지만 그에 앞서 그의 언어들이 명백하게 시 수준이기 때문이다. (어젯밤과 오늘 새벽, 이시영의 새 시집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를 읽으며 새삼스레 든 생각.)
2007/07/25 14:48 2007/07/25 14:48
2007/07/16 08:34
곡릉천 둑을 달리다 보면 둑을 가로질러 건너는 참게들를 만나곤 한다. 절반 가량은 느긋하게 건너다 달려오는 자전거를 보곤 황급히 나머지 절반을 건너는 녀석들이 아주 정겹다. 처음 발견한 건 두주 전인데 김건과 같이 나가선 일곱 마린가를 잡았다가 도로 놔주기도 했다. 재미있는 건 녀석들이 꼭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건너간다는 것이다. 왼쪽은 논이고 오른쪽은 곡릉천이다. 왜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늘 저녁 무렵에만 달렸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 녀석들은 아침에 곡릉천에서 논으로 건너갔다가 저녁 무렵 다시 돌아오는 걸까?

그나저나.. 요 싸가지 없는 것들을 대체 어떻게 한담?
2007/07/16 08:34 2007/07/16 08:34
2007/07/15 00:02
교사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게 되면 꼭 빠트리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이제 진보적인 교사상도 달라져야 합니다. 단지 권위주의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아이들과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교사상은 군사 파시즘 시절엔 진보적인 교사상이었지만 이젠 교사의 당연한 요건일 뿐입니다. 오늘 진보적인 교사는 자본의 가치관과 긴장하는 교사입니다. 오늘 아이들에게 자본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교사, 경쟁력을 이야기하고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은 사람을 위인이라 가르치는 교사는 옛날에 아이들을 억누르고 때리며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가르치던 교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한국사회가 미궁에 빠지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은 민주화가 실은 자본화(신자유주의화)였다는 것,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이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한국은 민주화를 통해 국가권력이 자본을 거느리는(박정희가 이병철을 거느리는) 지배체제에서 자본이 국가권력을 거느리는(이건희가 노무현을 거느리는) 지배체제로 변화했다. 지배체제 자체는 그대로인데 그 내부 구조가 달라진 것이다. 그런 변화를 우리는 ‘개혁’이라 부른다.

개혁은 폭압적인 군사파시즘이 더 이상 인민들에게 먹혀들지 않게 되었을 때 지배체제가 내부의 구조를 변화시켜 위기를 넘어서는 방법이다. 개혁은 사악한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군사 파시즘에 시달려온, 그래서 군사 파시즘을 타도하는 게 모든 사회운동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한국에서 그 사악함은 매우 성공적으로 은폐되었다. 선거에서 자유롭게 한 표를 행사하고 대통령을 욕해도 잡아가지 않으며 군인들이 백주대낮에 사람을 때려죽이지 않는 세상은, 인민들로 하여금 심지어 거개의 인텔리들로 하여금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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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지배체제의 목표는 지배의 방식이 아니라 지배다. 지배체제는 한줌의 지배세력이 대다수 인민들의 피를 빨아 한없이 안락한 세상을 목표로 할 뿐, 그런 세상을 만들고 유지하는 방식은 개의치 않는다. 지배체제 내의 가장 강경한 분파가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군사 파시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지배체제 내의 가장 유연한 분파가 전면에 나서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면서 경제적 착취를 강화하기도 한다(개혁). 두 분파는 동지애로 뭉쳐있기보다는 짐짓 죽고살기로 싸우는 적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지배체제 내에서의 권력 다툼이자, 지배체제와 인민 사이의 정당한 갈등을 차단하기 위한 ‘좌우 쇼’일 뿐이다.

사회적 브레인스토밍 삼아 질문을 하나 해보자. 오늘 한국에서 조갑제가 더 해로운가, 강준만이 더 해로운가? 이 질문은 많은 사람에게 불쾌감을 줄 것이다. 아무리 강준만을 조갑제와 비교할까? 그러나 선입견을 버리고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단연 강준만이 더 해롭다는 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오늘 조갑제의 견해(이를테면 “주석궁에 태극기를 꼽을 때까지 진군!” 따위)는 더 이상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너무 낡고 ’구려서’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영감들(살아있는 화석들)에게나 소구되는 것이다.

반면 오늘 ‘양식 있는 한국인들의 영웅’ 강준만은 진지한 사람들, 이기심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진보적인 경향의 사람들에게 소구된다. 강준만은 그런 사람들이 오늘 지배체제의 본질인 개혁을 "실현가능한 최선의 진보"라 여기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개혁에 희망을 걸었다 비로소 현실을 직시하고 민노당이나 그보다 더 급진적인 정치세력으로 옮겨갈 사람을 열우당과 한나라당 사이의 차이에나 집중하게 만들어, 지배체제 손바닥 안에서 맴돌게 만드는 게 강준만의 역할이다.

조갑제보다 강준만이 더 해롭다는 말은 얼마나 악하게 느껴지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인정함으로써만 바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한겨레21, 일러스트 김대중)
2007/07/15 00:02 2007/07/15 00:02
2007/07/1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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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바탕화면 길고양이 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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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2 11:30
고래홍보 PDF 전단
2007/07/12 11:30 2007/07/12 11:30
2007/07/11 14:07
유승하의 45호 표지 그림(유승하의 판타지가 성실하게 반영된 ㅎㅎ)으로 만든 고래 바탕화면.
2007/07/11 14:07 2007/07/11 14:07
2007/07/03 13:33
“그리고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를 지나가다가 보니, 시몬과 시몬의 형제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부들이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내 뒤를 따르시오. 당신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 하고 말했다. 그러자 즉시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그를 따랐다.”
성서에서 예수가 첫 제자를 구하는 장면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장면이 예수의 신비능력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도 하지만 예수와 두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던 사이라고 적혀있진 않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마치 영화처럼 앞의 여러 장면이 생략되어 있다.
세례요한이 체포되고 예수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시몬(베드로)과 안드레아 형제는 예수가 고심 끝에 고른 첫 동지들이다. 갈릴리의 수많은 청년들 가운데 유력한 메시아 감으로 지목되던 예수에게서 선택된 두 사람은 얼마나 기쁘고 벅찼을까. 그러나 막상 예수와 함께 떠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식구들 먹고사는 일이 막막해지는데다 밝은 미래가 보장되기는커녕 십중팔구 헤롯 안티파스의 졸개나 로마군에 잡혀 죽임을 당하기 십상인 캄캄한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했던 날 예수가 다가오자 “그물을 버려두고” 떠난다.
온갖 영상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초인적인 영웅담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들의 선택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 장면을 소파에 기대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구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지금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우리 가운데 몇이나 떠날 수 있을까? 우리가 비루한 일상을 박차고 이상과 삶을 일치시키는 초인적인 영웅담을 즐기는 이유는 실은 우리가 그 비루한 일상의 노예로 살기 때문이다. 인문주의니 예술이니 영성이니 온갖 고급한 정신의 액세서리들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우리가 가진 삶의 철학이란 실은 두어 가지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인데’ ‘맞는 이야기지만 현실적이지 않아서’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시체와 같고 세상은 거대한 공동묘지와 같다. 떠남이란 단지 공간이나 시간의 이동이 아니다. 떠남이 그런 거라면 머리 길게 묶고 일 년에 절반은 인도나 히말라야에 머물며 떠남에 관한 책들(싸구려 명상서적들)을 써서 통장잔고를 늘이는 사람이야말로, 욕망과 집착으로 범벅이 된 삶에서 도리 없이 쌓여진 스트레스를 이따금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서 날려버리고 다시 주식과 부동산 시세와 아이 시험 성적 따위를 뼈대로 하는 욕망과 집착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사람이야말로 떠남의 본질에 접근한 사람일 것이다.
그건 떠남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가장 추악한 형태의 집착일 뿐이다. 떠남은 크고 무거운 게 아니다. 한없이 사소해진 우리 삶만큼이나 작은 떠남의 선택들이 우리 일상에 깔려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때론 하루에도 몇 번씩 떠남에 대해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우리는 우리가 고수하는 예의 삶의 두어 가지 철학에 의지하여 떠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로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가짜 떠남, 떠나지 않기 위한 떠남, 떠남 장사꾼들은 고상하게 취급되는 반면 진짜 떠나는 사람들은 아주 쉽게 비웃음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살아있는 시체들은 떠나는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어리석은, 비현실적인, 인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런 곤란과 모멸의 아수라장을 뚫고 떠날 때 우리는 비로소 얼굴에 빛을 내며 고백하게 된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까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몰라.’ 우리는 떠남에서 작은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시체들로 가득한 거대한 공동묘지는 떠나는 사람들에 의해서 조금씩 달라진다. 떠남은 나를 잃는 게 아니다. 떠남은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더께들, 우리를 살아있는 시체로 만드는 온갖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 기득권, 물질적 소유 따위들에서 본디 나를 살려내는 일이다. 떠남은 실은 돌아오는 일이다. (한겨레21)
2007/07/03 13:33 2007/07/03 13:33
2007/07/02 13:14
장정일 씨가 불쑥 전화를 해선 대구의 자기 친구가 무슨 행사를 하는데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고 했는데 알고 보니 ‘제2회 마르크스주의학교’였다. 대구에서 마르크주의학교라.. 이채롭다고 다 존중할 건 없지만 이런 이채로움은 존중할만하다. 흔쾌히 다녀왔다. 장정일 씨의 ‘친구’는 시인 노태맹 씨였다. 그의 끝이 아린 시 한편.


붉은 꽃을 버리다

언젠가 나의 사랑도 끝날 것입니다.
아직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흰 꽃 꺾어 매일 당신에게로 윤회하는 푸른 강물도
저 도시 어디쯤에선가 이제 끝날 것입니다.
아시나요, 검은 느티나무 아래
우리 유리의 둥근 구슬 삼키며 온종일 죽음만 생각했었지요.
어쩌면 당신은 당신의 먼 기억에서
우리 슬픔으로 흘러넘치는 만들어진 강물소리 같은 것이어서
언젠가 끝날 내 사랑도 우리의 生도
당신에겐 섭섭지 않겠지요.
검은 느티나무 아래
유리의 둥근 구슬 삼킨 내 몸 붉은 이끼로 뒤덮이고
붉은 꽃으로 부서지고 부서진 뒤쯤에야
먼 강물소리 당신 사랑도 끝날 것인지요.
아직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모르고
당신은 내 사랑도 없이 먼 강물소리 건너
어찌 그리 잘도 가십니까.
2007/07/02 13:14 2007/07/02 13:14
2007/07/01 12:41
산악자전거는 구조상 두 가지로 나뉜다. 앞과 뒤 모두 샥이 달린 풀샥과 앞에만 샥이 달린 하드테일. 풀샥은 노면에서 오는 충격 흡수가 좋아 승차감이 부드럽지만 페달링시 힘손실이 일어난다. 하드테일은 뒷바퀴쪽 노면 충격을 모두 받아내야 하지만 페달을 밟으면 앞으로 쭉쭉 뻗어나간다. 오르막에선 하드테일이 내리막에선 풀샥이 유리한데 오르막에서 풀샥은 뒷바퀴가 덜 튐으로써 접지력은 나은 점도 있다. 산꼭대기까지 매고 올라가 내려쏘기만 하는 다운힐 전용 자전거들은 물론 모두 풀샥이다. 그러나 일반적인의 의미에서 산악자전거, 즉 비포장 임도를 달리는 XC(크로스컨트리) 라이딩에선 두 가지가 병존한다. 산악자전거가 레저 쪽으로 흐르면서 전반적인 추세는 풀샥이다. 이름난 산악자전거회사들은 페달링시 힘손실을 최소화하는, 이른바 바빙 없는 풀샥 자전거를 만드는 데 사활을 걸고 있기도 하다. 자이언트의 NRS나 스페셜라이즈드의 에픽, 캐논데일의 스캘펠, 록키마운틴의 ETX, 산타크루즈의 VPP 따위가 그 결과물들이다. 뭐든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그리고 안락한 것보다는 조금 불편한 것을 오히려 편안해하는 성격으로 볼 때 나는 하드테일 쪽이 틀림없다. 그런데 애초부터 선물 받은 자전거로 시작한 터라 풀샥만 타왔다. 적당한 중고 하드테일로 바꿀 수도 있었지만, 타는 것만으로 호사인데 뭘 알아보고 바꾸고 요란인가 싶어 몇해 동안 그냥 지내왔다.

두어 달 전 마음 다져먹고 하드테일로 바꾸었다. 처음 며칠은 엉덩이도 딱딱하고 지오메트리도 달라져서 허리가 뻐근했지만 얼마 안가 이게 자전거로구나, 하게 되었다. 전엔 자전거가 나와 자연이 소통하기 위한 매개 혹은 도구였다면 이젠 나와 자전거의 관계가 느껴진다. 몸과 기계의 대화, 근육과 금속의 교감 따위를 조금씩 느끼는 것이다. 자전거 정비 공부도 조금씩 하게 된다. 왜 진작 바꾸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서둘러 바꾸었다면 이만큼 깊은 맛은 못 느꼈겠지 싶기도 하다. 신중해서 좋았고 바꾸어서 좋다. 하긴 사는 일이 다 그렇다.
2007/07/01 12:41 2007/07/01 1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