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06/10/31 팜플렛
  2. 2006/10/29 나, 여행간다
  3. 2006/10/27 만취
  4. 2006/10/26 싸움과 싸움질
  5. 2006/10/25 칼바도스
  6. 2006/10/23 운치
  7. 2006/10/20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8. 2006/10/19 독심술
  9. 2006/10/18 계급
  10. 2006/10/17
  11. 2006/10/15 표현
  12. 2006/10/13
  13. 2006/10/12 루머
  14. 2006/10/11 배너 달아주세요
  15. 2006/10/10 고래 36호 내려받기
  16. 2006/10/06 문학
  17. 2006/10/05 추석, 고양이
  18. 2006/10/04 동두천, 갈릴리
  19. 2006/10/01 두 교사
2006/10/31 14:14
홍기빈은 자신의 책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가 팜플렛이라 말한다. 여기서 팜플렛은 ‘정식 출판물로는 낼 수 없는, 혹은 그렇게 내기엔 너무 급박한 내용을 전하기 위한 인쇄물’이다. 그는 19세기 유럽의 팜플렛 정신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80년대 초의 팜플렛이 떠오른다.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아침드라마보다 유익할 게 없는 책들이 교양서라 여겨지는 시절 팜플렛은 반짝인다.
2006/10/31 14:14 2006/10/31 14:14
2006/10/29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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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여성공감의 정기 연극공연. 올해는 꼭 가볼 생각이다.
2006/10/29 09:39 2006/10/29 09:39
2006/10/27 11:53
양산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오랜 만에 김현식 추모앨범을 듣는다. 들을 때마다 다가오는 곡들이 다르고 그 변화의 이유를 조용히 삭여보곤 한다. 늘 귀기울여 듣지 않던 윤종신이나 조성모도 조금은 새롭게 들리는데 엄인호 김동환 한영애 권인하 정경화가 함께 부른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가 유독 가슴에 들어온다. 잔잔히 비가 내리고 얼마간 색이 바란 충청북도의 산들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일까. ‘순박하고 촌스러운 사람들의 영웅’ 김일 선생이 돌아갔다는 소식 때문일까. 의자를 뒤로 제키며 비스듬히 중얼거린다. “한 시절이 저무는구나.” (26일 14시 36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는 엄인호 씨가 만든 곡이다. 추모앨범을 내며 세종문회회관에서 열렸던 콘서트에서, 그는 이미 만취해있었다. 다른 사람 순서에 무대 뒤를 횡단하는가 하면, 연주를 틀려서 다시 들어가며 연신 킬킬거렸다. “이런 거창한 무대는 영 체질에 안 맞아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고 누군가가 “취했군.”이라 하자 그가 쓸쓸히 대꾸했다. “응, 언제나 그렇듯이..” 엄인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추모식장엔 추모식에 참석하는 사람과 추모하는 사람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우리 삶엔 만취만이 적절한 순간이 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어느 날 문득 혼자 됐을 때 나는 너를 떠올리고 있었어
잊혀진 기억 더듬어서 지난 시절을 생각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나는 너를 이해할 것 같았어
지금쯤 너도 내 생각에 낯선 길을 헤매일 거야
그대의 아름다운 사랑얘기는 조금은 잊혀졌지만
하지만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남아있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우린 서로 후회할거야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게 사랑인줄 알았어
2006/10/27 11:53 2006/10/27 11:53
2006/10/26 02:06
우리 학교는 학생이 갑자기 두 배로 늘었어요. 이웃 아파트단지를 헐고 새로 짓는데요. 그 단지 학교에서 온 아이들 중에 아주 못된 남자아이들이 있어요. 함께 몰려다니며 못된 짓을 하는데 특히 사람들 많은 데서 저를 ‘태권돼지’라고 크게 부르며 놀려요. 제가 우리 학교에서 태권도를 제일 잘하거든요. 그런데 덩치가 좀 크다고 ‘태권돼지’라는 거예요. 관장님은 "태권도는 싸움질하려고 배우는 게 아니다."라고 하셔서 참긴 하지만 어떨 땐 마구 때려 주고 싶어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못된 아이들인데 때려 주면 안 되나요? 이은성(6학년, 여자)

자기는 심각한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일이 있어. 그럴 때 사람은 더 많이 괴롭지. 은성이가 겪고 있는 일도 그런 것 같아. 그 남자아이들이 그 별명을 부르며 놀려도 다른 아이들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 웃고 재미있어 하는 아이들이 있을 지도 몰라. 그래서 더 창피하고 힘들지? 그냥 태권도로 본때를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거야.
그래도 관장님 말씀을 듣고 참고 있다니 은성인 참 대단한 걸. 그래, 관장님 말씀이 맞아. 태권도는 ‘싸움질’을 하려고 배우는 게 아니지. 그런데 말이야. 관장님이 말씀하신 ‘싸움질’은 ‘싸움’하곤 조금 달라. 물론 싸움질도 싸움이긴 하지만 아주 나쁜 싸움을 뜻해. 정당한 이유도 없고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싸움 말이야.
은성이는 정의로운 싸움도 있다는 걸 알지?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악당을 혼내 주는 싸움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싸움 말이야. 실제로 그런 싸움을 본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같은 데서 그런 싸움을 보면 저절로 응원을 하게 되고 정말 흥분되잖아? 관장님도 그런 싸움까지 싸움질이라고 하시는 건 아닐 거야.
은성이가 하고 싶어 하는 싸움은 싸움질일까, 정의로운 싸움일까? 그 남자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못된 짓을 한다고 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인지도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해. 사람이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본능이 있거든.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나쁜 사람처럼 느껴지는 거야. 은성이는 그 남자 아이들이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미우니까 그 남자 아이들이 하는 짓은 뭐든 미워 보일 수도 있잖아.
혹시 삼촌 말이 은성이한테 서운하게 들릴지도 몰라. 하지만 삼촌은 ‘싸움은 무작정 나쁘다.’거나 ‘절대 그 아이들을 때려 주면 안 된다.’고 말하진 않을게. 삼촌은 은성이가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해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순 없다고 생각해. 싸움을 하는가 안 하는가 보다는 싸움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또 책임감을 갖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어른들 중에서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게.
삼촌은 은성이가 되도록 싸우질 안길 바래. 하지만 만일 싸울 수밖에 없다면 은성이의 싸움이 정의로운 싸움이었으면 좋겠어. 정의로운 싸움의 조건을 알아? 첫째, 싸움을 하려는 상대가 힘으로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가? 둘째, 그 싸움이 여러 착한 사람들에게 고루 도움이 되는가? 셋째,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빠짐없이 사용했는가? 자, 그럼 마지막 결정은 은성이가 해. 힘 내, 태권낭자! ^ ^ (고래 37호)
2006/10/26 02:06 2006/10/26 02:06
2006/10/25 17:03
홍세화 선생이 갖다 준 칼바도스. 이 유명한 사과 브랜디를 실제로 먹어보긴 처음인데 아주, 좋다.
2006/10/25 17:03 2006/10/25 17:03
2006/10/23 15:11
한겨레21에 실린 고래 기사. 동료들에게 “좋은 말로만 채워져서 그쪽 기자나 데스크한테는 좀 미안한 걸?” 하니 다들 “사실인데 뭘?” 한다. 뻔뻔함도 이쯤되면 운치가 있다고 할까..
2006/10/23 15:11 2006/10/23 15:11
2006/10/20 01:24
한 주에 한 번씩 받아보는 정혜신의 그림에세이는 일상을 되짚어보게 하는 소박하고 잔잔한 그림과 글이 실려 있다. 이번 치는 (사족에 붙은 내 이야기가 좀 민망하지만) 아주 근사한 고래 소개 글이다. 특히 이 부분이 인상적이다.

“우리 아이들이 2, 30년 후에 어떤 종류의 사회적 성공을 이뤘느냐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을 것인지 한번이라도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다면 <고래>의 일독을 권합니다. 이런 종류의 잡지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실 겁니다."
2006/10/20 01:24 2006/10/20 01:24
2006/10/19 13:55
박노자 선생이 말하길 내가 자신에 대해 쓴 글이 “독심술을 구사하는 것 같”단다. 다른 이의 내심을 이야기하는 건 적이 불편한 일인데 영 틀리진 않았다니 다행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프다. 부디 그의 조국 러시아가 나아지길. 그의 제2의 조국 한국도..

"언급하셨던 러시아의 비스탈린/반스탈린주의적 "신좌파"는 지금도 투쟁중이고 그 나름의 성과도 있습니다. www.aglob.ru 와 같은 사이트에 들어가시면 그분들의 글들이 많은데 영어가 아닌 러어로 읽으시기 힘들 걸요. 여기에서는 약간의 영어가 있고요: http://www.socialism.ru"
2006/10/19 13:55 2006/10/19 13:55
2006/10/18 22:19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계급의식의 결핍'이다. 사회 문제는 기본적으로 계급 간의 문제인데 사회를 계급으로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으니 사회 문제에 대한 온갖 요란스런 논의는 모조리 헛소리가 되어버린다. '대한민국은 하나'라는 거짓 레토릭이 정당한 현실 비판을 먹어치워버리며 결론은 언제나 '국익'이다. 국익이란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 사이에는 이해관계의 모순이 있는데 어떻게 ‘모든 계급을 아우르는 이익’이 있을 수 있는가. '국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의 거짓 표현일 뿐이다. 계급의식이 결핍된 상태에서, 지금 한국처럼 대다수 인민들이 '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국익'에 열중하는 상태에서 사회 진보는 불가능하다. 한국 사회의 진보는 무엇보다 인민들의 계급의식이 얼마나 늘어나는가에 달려있다. 그러나 유구한 반공주의 파시즘의 역사를 가진 한국에서 '계급'이라는 말은 여전히 '빨갱이들의 말'이며 혐오어다. 그래서 '노동자'라는 말이 '근로자'로 대체되듯 계급은 계층이라는 말로 대체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계급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는다. 특히 상층 지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계급이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을 매우 공격적으로 표시한다. "당신 여전히 계급의식으로 세상을 보나!"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아니 그런 사람들일수록 제 삶에선 계급의식에 철저하다. 이를테면 번듯한 배경을 가진 청년이 보잘것없는 처녀와 결혼하려할 때 그들은 (계급의식을 근거로) 말한다. "안 맞아." 그들은 계급의식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인민들의 계급의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민들이 더 이상 '대한민국은 하나'가 아님을 깨우칠 때, 대한민국을 계급으로 나누어보기 시작할 때 그들의 파국도 시작된다는 걸 그들은 안다. 그들은 정말이지 계급적이며, 그래서 그들은 지배한다.
2006/10/18 22:19 2006/10/18 22:19
2006/10/17 17:41
한국의 교회는 ‘기복(祈福)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사실 그들의 기도는 늘 하느님께 복을 달라는 것이며,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일수록 하느님의 많은 응답을 받은 걸로 선전된다. 그러나 나는 기복적이라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잘것없는 아비인 나도 내 새끼가 복 받길 바라는데 하물며 하느님이 제 새끼에게 복을 주지 않겠는가? 신앙은 복을 구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복이 교회에서 말하는 복은 아닌 것 같다. 교회에서 말하는 복은 물질(돈), 명예, 권력 같은 것인데 그건 실은 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돈과 명예와 권력에 갇혀 영적으로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하느님이 그걸 준다면 그건 복이 아니라 저주를 주는 것이다. 게다가 열심히 믿을수록 더 많은 복(저주)을 준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하느님은 진짜 복을 주신다. 하느님은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부임을 알게 하신다. 하느님은 명예를 얻고 싶어 잠을 못 이루는 사람에게 겸손이야말로 가장 큰 명예임을 알게 하신다. 하느님은 권력을 얻고자 눈이 빨개진 사람에게 섬기는 삶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임을 알게 하신다.
2006/10/17 17:41 2006/10/17 17:41
2006/10/15 14:25
“한번 숨어버리면 아무리해도 찾을 수가 없다. 가까스로 찾아내면 상상할 수 없는 비좁은 공간에 상상할 수 없이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다.”

옆에 앉아 이현수가 보내준 노튼3부작을 읽던 김단이 부러 소리 내어 읽는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빙그레 웃음이 나올 만큼 운치 있게 표현하고 있다.

“표현이 좋지?”
“응.”
“글을 잘 쓰게 되는 건 말이야. 지금처럼 좋은 표현을 느끼는 순간이야. 나도 모르게 그 표현이 내 게 되거든.”
“흉내 내는 거야?”
“아니, 그 표현이 나한테 스며드는 거야. 그래서 전보다 좋은 표현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렇구나.”
2006/10/15 14:25 2006/10/15 14:25
2006/10/13 10:24
(추석 연휴 끝 무렵 뒤늦게 다빈치코드를 봤다. 하도 물어오는 사람이 많았던 작품이라 몇 자 적어본다.)

다빈치코드를 둘러싼 기독교와 반기독교 세력의 심각하고 요란한 싸움의 핵심은 사움의 내용이 아니라 싸움 자체에 있다. 문제는 ‘예수가 마리아와 아이를 낳았는가’가 아니라 ‘예수가 마리아와 아이를 낳았는가를 예수의 신성을 가르는 근거로 삼는 것’이다. 싸움은 이미 예수의 어머니에게서 시작되었다. 기독교 교리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동정녀(숫처녀)다. 물론 오늘 성숙한 사람들에게 마리아의 처녀성 여부는 예수에 대한 존경이나 신앙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마리아가 설사 ‘성노동자’였다 해도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고 성(은 불결하며)과 여성(은 인간이 아닌)에 대한 사고방식이 전혀 달랐던 고대 기독교인들에게 마리아의 처녀성은 자못 심각한 문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리스도이자 하느님이 자신들과 같은 방법(삽입성교!)로 태어났다는 걸 인정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그들은 소망을 순진하게 드러낸 것이다. 마치 “우리 선생님은 절대 똥을 누지 않아”라고 우기는 아이처럼 말이다. 그 아이를 붙들고 ‘왜 거짓말을 하는 거냐’라고 따진다면 얼마나 우스운가. 그런데 다빈치코드를 둘러싼 싸움은 바로 그 선생이 똥을 누는가를 근거로 그 선생의 가치를 가르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개똥같은 싸움인가.
2006/10/13 10:24 2006/10/13 10:24
2006/10/12 19:39
지난 몇 해 동안 내내 사업을 해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업(의 형태로 운동)을 해왔다. 사업의 형태로 하는 운동은 종종 ‘운동의 형태로 하는 사업’으로 여겨지곤 한다. 루머를 만들어내려는 사람에겐 딱 안성맞춤이다. 아웃사이더 할 때도 야간비행에서도 고래에서도 크든 작든 늘 루머가 있었다. 루머는 사람들의 인격적 틈을 타고 퍼져나간다. 사정을 꿰는 동무들은 나에게 따져 묻곤 한다. "고생하면서 칭찬은커녕 모욕까지 당해야 해?" 나는 부러 웃으며 말한다. "아웃사이더도 서준식옥중서한도 고래도 꼭 필요하지만 아무도 내지 않잖아. 중요한 건 그걸 내면서 생기는 문제일까, 그걸 내는 걸까?" 며칠 전엔 비슷한 이유로 안타까워하는 한 청년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정당함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정당한 일을 하는 게 아닐까요?” 아직 루머를 적극적으로 해명해본 적은 없다. 무엇보다 그 해명이 루머를 만들어낸 사람들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씁쓸한 건, 그들이 내가 해명하지 않을 거라는 걸 철석같이 믿는다는 사실이다. 이젠 태도를 조금 바꾸려 한다. 다른 건 다 접고라도 고래에 눈곱만큼이라도 피해가 가는 건 더 못 보겠다. 그러니 앞으론 "내가 해명하지 않을 거라 철석같이 믿"는 건 실수일 가능성이 높다.
2006/10/12 19:39 2006/10/12 19:39
2006/10/11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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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널리 알리는 일에 연대할 분들은 '고래 36호 내려받기 배너'를 홈피나 블로그에 달아주세요..^ ^
링크 주소는 “http://www.goraeya.co.kr/new/pdf/gorae_36.zip”
2006/10/11 22:51 2006/10/11 22:51
2006/10/10 11:01
고래 명함을 새로 만드는데 조중사가 제 직함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책 편집장”이라고 적어냈다. 식구들을 둘러보며 “크게 사실에서 벗어난 건 아니지만 명함을 받는 사람 생각도 해야 하지 않겠어?” 했더니 다들 “괜찮은데?” 한다. 이 장난기어린 해프닝엔 고래 식구들의 기쁨이 들어있다. 잡지가 3년 쯤 되면 창간호와 비할 수 없이 짜임새가 생기는 법이다. 아니면 폐간했든가. 그런데 고래는 3년이 되었지만 최근호가 창간호보다 못했다. ‘발간 지속’에 전념하느라 여력이 없어서 그리된 것이지만 고래 식구들에겐 참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석 달 전부터 콘텐츠 정상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36호(창간 3주년호)는 그 첫 결실이다. 정상화 작업은 내년 봄까지 계속된다. 듬직한 36호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다들 한마디씩 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이젠 쪽팔리진 않네.” “고래 홍보를 고래로 할 수 있게 됐군.” “내년 봄이면 정말 좋아지겠는데.”

고래가 대체 어떤 책인지 궁금한 분들을 위해, 36호 PDF 파일을 공개한다. 받아서들 살펴보시고 또 널리, 부디 널리, 유포해주시길 바란다..^ ^
2006/10/10 11:01 2006/10/10 11:01
2006/10/06 17:27
오늘 한국문학은 김영하로 ‘대표’되거나 박민규로 ‘절충’되는 듯하다. 이런 시절 안재성과 김중미의 문학은 얼핏 박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을 읽다보면 박제인 건 그들의 문학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라는 걸 알게 된다. 옛 파시즘은 리얼리즘을 탄압함으로써 우리가 리얼리즘과 만나는 것을 차단했지만 오늘 자본의 파시즘은 우리가 더 이상 리얼리즘에 관심을 갖지 않게 만듦으로써 우리가 리얼리즘과 만나는 것을 차단한다. 우리는 여전히 안재성과 김중미의 문학에 감동할 수 있지만 안재성과 김중미의 문학을 꺼림으로써 그들의 문학에 감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해방은 아주 쉽다. 눈 딱 감고 안재성과 김중미를 읽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을 잃은 문학은 죽었으며 이제 진정한 문학인들은 더 이상 문학을 하지 않는다며 김종철과 아룬다티 로이를 꼽은 바 있다. 나는 고진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만일 고진이 지금 한국의 문학을 김영하나 박민규 정도로 파악한다면 그건 애석한 일이다.)
2006/10/06 17:27 2006/10/06 17:27
2006/10/0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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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차림은 물론 송편도 빚지 않기로 한 추석, 김단은 할머니네 동네 문방구에서 이백원짜리 찰흙을 사다 고양이를 빚었다. 이젠 고양이를 뺀 김단은 생각하기 어렵다.
2006/10/05 15:33 2006/10/05 15:33
2006/10/04 09:23
김중미의 거대한뿌리는 좋은 소설이다. “미군만 보면 군침을 흘리고 쩔쩔매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그토록 동경해마지 않는 미군의 피가 섞인 혼혈아들만 보면 마음 놓고 비난하고 터부시했다.”는 구절을 읽다 2천년 전 갈릴리를 생각했다.
2006/10/04 09:23 2006/10/04 09:23
2006/10/0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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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강연에서 만난 두 교사. 김영진 선생은 최은미 선생의 중 고등학교 시절 “멋진 담임 선생님"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함께 전교조에서 활동한다. 초중고 시절을 통틀어 다시 만나보고 싶은 담임이 없는 나는 두 사람이 어찌나 예뻐 보였는지.
2006/10/01 20:11 2006/10/0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