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05/10/31 가을
  2. 2005/10/28 산책
  3. 2005/10/27 심심하다고
  4. 2005/10/24 총구
  5. 2005/10/14 고래 세트
  6. 2005/10/13 좋은 일
  7. 2005/10/13 의견
  8. 2005/10/12 우리의 테레비
  9. 2005/10/12 말러 2
  10. 2005/10/08 모여라 고래동무!
  11. 2005/10/07 가치
  12. 2005/10/05 근본주의자
  13. 2005/10/01 쇼의 정치, 삶의 정치
2005/10/31 13:43
051031.jpg

교하숲. 김단이 찍어 줌.
2005/10/31 13:43 2005/10/31 13:43
2005/10/28 14:11
051028.gif

안개가, 세상 돌아가는 꼴만큼이나 막막한 안개가 이틀 밤 내내 동네를 뒤덮었다. 서둘러 나가봤댔자 반나절은 일손이 안 잡힐 게 뻔해, 동네 숲에 산책을 갔다. 조금 걷다 쪼그리고 앉아 이끼를 들여다보고 조금 걷다 쪼그리고 앉아 낙엽을 들여다보고 또 조금 걷다 쪼그리고 앉아 썩은 나무뿌리를 들여다봤다.
2005/10/28 14:11 2005/10/28 14:11
2005/10/27 12:45
“한국의 등살에 못이겨, 도망치듯 뉴질랜드의 조그만 시골 도시로 와서 사진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 보내 온 편지에서.


'고래가 그랬어' 1-24권 세트 주문해서 며칠 전에 받았습니다. 배송료까지 더하면 저나 같이 사는 파트너(결혼은 아직 안 했습니다)에게는 '엄청난' 지출이었지만 이상하리마치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몇 권은 전에 친구한테 받아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받으니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들처럼 한동안은 걱정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규항님의 블로그와 단행본으로 다시 만나는 규항님의 글들이 반갑고 많은 용기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규항님의 글들을 보고 '아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파트너와 자뭇 심각하게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는 둘 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나저나 이곳은 아이들이 크기엔 정말 좋은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혹은 인간이 인간처럼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전기가 모자라니까 절전하라고는 얘기하지만 핵발전소는 짓지 않는 다고 할 때, 허물어져가는 집에 살면서도 취미는 요트타는 거라고 할 때, 큰 수술하면서 돈 걱정 안 할 때, 학교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급되는 학생들이 젊은 애들하고 재미있게 토론하고 공부할 때.. 이곳이 자동차나 가전제품도 못 만들고 양이 뉴질랜드 인구의 곱절보다 많은 나라고 우리나라보다 인터넷이 빠르지 않지만 이런게 이들이 사는 방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이들의 삶에 대한 낙관과 여유가 부러웠습니다.
이곳으로 한국아이들이 전학 오기만 하면 단숨에 전교 1등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요. 개 버릇 남 주겠습니까. 여기 와서도 한국에서 살던 삶의 방식들을 고스란히 가져와서 한국사람들하고만 만나고 (물론 그 중심에는 항상 교회가 있습니다) 여긴 너무 심심하다고 불평들을 하지요.
2005/10/27 12:45 2005/10/27 12:45
2005/10/24 00:55
황자혜 형은 일본과 한국 사이의 민간 영역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회문화적 프로젝트들의 코디네이터다. 지난 주말 그의 호의로 연극 〈총구〉를 봤다. 〈총구〉는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을 연극으로 만든 것이다. 북해도의 탄광촌 초등학교 교사인 기카모리 류타는 군국주의의 폭압 앞에서 교사로서의 양심과 인간적 위엄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총구〉는 좋은 연극이다. 양심, 고뇌, 신념 같은 고전적인 주제들을 매우 고전적인 기법으로 표현하는데도 묵직한 감동이 있다. 이 연극에 대한 소개를 듣는 사람들은 이 연극에 그다지 흥미로워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총구〉는 오늘 한국에서 십중팔구 촌스럽게 느껴질 만한 이야기를 촌스럽지 않게, 매우 품위있게 전달한다. 창단한 지 40년이 넘은 120여명의 단원을 가진 사회물을 위주로 하는 극단이 가진 ‘한없이 부러운’ 능력일 것이다. 한국에선 영화고 연극이고 이런 정통극, 이야기를 가진 드라마가 사라지고 있다. 정통극의 흔적은 텔레비전 신파극이나 철저한 돈벌이 기획으로 만들어지는 신파영화에서나 발견될 뿐 온통 부조리극을 빙자한 장난으로 넘쳐난다. 이번호 말지에 정성일 씨가 “한국영화엔 왜 이야기가 없는가”라고 썼던데 비슷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야기의 실종은 연극 영화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의 삶에서 ‘흥행 감각’을 뺀다면 뭐가 남을까? 우리 삶은 어느덧 이야기를 잃고 있다.
2005/10/24 00:55 2005/10/24 00:55
2005/10/14 18:36
알라딘에서 고래 1~24호 세트를 팔고 있다.
2005/10/14 18:36 2005/10/14 18:36
2005/10/13 23:04
051014.jpg

아빠 그거 뭐야?
응, 고래동무라고 아이들이 돈 안내고도 고래 볼 수 있게 하는 거야.
어떻게 하는 건데?
어떤 이모들하고 삼촌들이 아이들 대신 돈을 내는 거야.
좋은 일이네?
그럼 좋은 일이지.
나도 접을게요.

김건은 쉬지 않고 접고 또 접는다.
2005/10/13 23:04 2005/10/13 23:04
2005/10/13 15:37
아빠, 뭐 봐?
응, 아빠 책 읽은 사람들이 올린 글.
그런 걸 꼭 읽어?
그럼, 아빠 책 읽고 의견까지 써주었는데 꼭 읽어야지.
다 좋다는 말이야?
좋다는 말도 있고 좋지 않다는 말도 있고 그렇지.
좋지 않다는 글을 읽으면 기분 나빠?
아니. 사람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잖아.
그럼 언제 기분 나빠?
제대로 읽지도 않고 함부로 쓴 글을 보면 기분 나쁘지.
제대로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보면 알아?
그럼, 딱 보면 알지.
와.
와는 무슨 외야. 단이는 누가 단이가 한 말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말하면 몰라?
알지.
그래, 그런 건 의견이 아니야.
2005/10/13 15:37 2005/10/13 15:37
2005/10/12 10:02
우리가 바보로 살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과정은 세상의 일부를 세상의 전부라, 세상에 관한 소식의 일부를 세상에 관한 소식의 전부라 믿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을 담당하는 체제의 장치가 바로 우리가 세상 소식을 알기 위해 매일 들여다보는 신문 방송 따위 제도 미디어다. 미디어참세상은 바로 제도 미디어가 은폐하고 배제하는 세상을 보여준다. 하루에 한번쯤 들어가 보거나 인터넷 시작화면으로 만들어 놓으면 제도 미디어의 최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의 테레비’도 있다. 시사프로젝트 피플파워는 편안한 얼굴로, 그러나 가장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읽어준다.
2005/10/12 10:02 2005/10/12 10:02
2005/10/12 03:19
오래 전 나에게 말러를 권했던 후배에게 오늘에야 “왜 그랬나” 물었더니 그랬다.
“말러는 제정신이 아닌 낭만주의자라는 점에서 선배와 닮았습니다.”
2005/10/12 03:19 2005/10/12 03:19
2005/10/08 15:22
051008.jpg

고래동무가 출발한다. 이은 형이 처음 제안한 게 족히 한해는 넘었는데, 여느 기부나 자선단체처럼 ‘불쌍한 아이들을 돕는 일’이 되지 않게 하느라, 가장 아름다운 정신과 꼴을 갖추느라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고래동무는 안상수, 김동원, 이은, 이윤호, 김중미, 정혜신, 권해효, 김어준 선생들이 운영을 책임지는 고래와는 별개의 단체다. 고래동무는 한국의 모든 초등학교 도서관과 공부방에 고래가 있도록 하는, 그래서 돈이 있든 없든 모든 아이들이 쉽게 고래를 볼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벌여나간다. 1차 목표는 농어촌 분교와 읍면 이하 초등학교 도서관, 도시 서민지역 공부방 2천 곳에 고래를 보내는 것이다. 고래동무는 고래로 시작하지만 상업주의에 굴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좋은 어린이 책들을 보내는 일도 함께 벌여나간다.

고래동무 안내 내려받기

고래동무가 될 분은 안내에 나오는 신청 내용들을 김규항에게 이메일로 적어 보내거나 고래동무에 직접 신청하면 된다. 홈피도 곧 열린다. 모여라 고래동무!
2005/10/08 15:22 2005/10/08 15:22
2005/10/07 09:34
고래가그랬어가 조용히 창간 2주년을 넘기고 있다. 구독자가 안정화되고 고래동무가 출발하니 항해는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 동안의 항해, 혹은 혈투를 통해 참 많은 공부를 했다. 가장 인상적인 공부는 어떤 존중할 만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정작 그 가치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 것, 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그 일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가치에 대해 말할 겨를이 없다. 물론 이건 개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진실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입에 발린 말은 하지 않는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존경이든.
2005/10/07 09:34 2005/10/07 09:34
2005/10/05 14:49
“그런데 사람들은 왜 땅을 자기 거라고 해?" 김건의 질문에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대화를 하다 보면 아이들은 역시 근본주의자들이라는 걸 종종 깨닫게 된다.
2005/10/05 14:49 2005/10/05 14:49
2005/10/01 12:37
프레시안의 요청으로 쓴 글

지식인이란 적어도 자기 세계관에 따라 발언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제도정치에 뛰어든 지식인들은 으레 자기가 속한 ‘정치적 형편’에 따라 제 세계관을 재조정하곤 한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는 따위 변명은 그나마 낫다. 김대환 씨처럼 방귀 뀐 놈이 성내는 식으로 날뛰거나 유시민 씨처럼 “세상은 다 그런 거야”하며 느물거리는 꼴을 보면 도리 없이 환멸감이 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들은 정치판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세상을 알게 되었다는 걸.

기자와의 한담이 빌미가 되어 이 글을 쓰고 있지만 행여 강준만, 조기숙, 윤평중 씨 들이 연루된 논의에 끼어들려는 건 아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당분간 시사현안에는 관심을 접고 있기도 하거니와, 나는 조기숙이라는 분에 대해 학자로든 청와대 직원으로든 아는 게 없다. 이 글은 강준만 선생에게 쓰는 글이다. 강준만 선생이 조기숙 씨에게 쓴 글을 읽고 나는 진작부터 강 선생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로 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언젠가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지식인과 현실 참여’라는 매우 고전적인 주제와 관련한 것이다. 대체 이런 세상에서 지식인이 뭘 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지식인을 통틀어어도 특별한 능력과 열정을 가진 지식인이라 할 강 선생은 대체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몇 해 전 나는 홍세화, 진중권 씨와 함께 강 선생의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연대했었다. 굳이 말하자면 조선일보 반대운동은 좌파적 운동은 아니었다.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조선일보에 대한 계급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윤리적 접근에 가까웠다. 최상층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선일보를 중간이하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신문으로 만들자든가 하는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세 사람이 거리낌 없이 그 운동에 연대한 이유는 조선일보라는 사회적 암을 ‘발견하여’ 골리앗에 맞선 다윗처럼 고군분투하는 강 선생을 존경했기 때문이고, 좌파 진영(특히 강단좌파들)이 조선일보에 보이는 모호한 태도를 앞장서서 성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사람은 조선일보 문제가 “좌파고 우파고 떠난 문제”라는 강 선생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랐다.

그 운동이 대중적으로 어지간히 확산되었을 때 세 사람은 다시 본연의 좌파적 행보에 좀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운동은 폭발을 거듭하며 대대적인 사회개혁 운동으로 발전했고 결국 정권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정권은 이제 임기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 자, 이제 한번 살펴보자. 그래서 세상은 변했는가? 언론이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고 했고 정치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고 했는데 세상은 정말 변했는가?

그렇다면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참혹은 무엇인가?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빈곤층을 비롯한 빈곤의 확대, 가장 충성스러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시장개방과 공공영역의 사유화, 이어지는 민중의 삶의 파탄, 제국주의 침략전쟁 동조와 평택미군기지를 비롯한 반민중적인 국방외교정책... 끝없이 나열되는 이 참혹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이제 개혁의 가장 중요한 기획자였고 여전히 그러한 강 선생에게 이 참혹에 대해 묻고 싶다. 나는 그에게 여전히 이 참혹이 ‘개혁의 후퇴’에서 일어났다고 보는지, 혹은 이 참혹이야말로 개혁의 정체라고 보는지, 개혁이란 “사회문화적 표피를 변화시키지만 경제 질서와 계급 관계라는 본질은 끝없이 후퇴시킨다”는 내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덧붙이자면, 나는 강 선생이 왜 오늘 한나라당과 열우당 따위 보수 정당들을 주요한 출연자로 하는 기만적인 쇼에 왜 그리 적극적인지 묻고 싶다. 노무현 씨조차 “이제 한나라당과 열우당은 정책이나 이념에서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고백하는 판에 왜 강 선생이 열우당과 민주당의 차이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한낱 청와대 직원이 된 지식인의 행보에 왜 그리 관심을 갖는지 묻고 싶다.

나는 매우 성실한 미디어 학자인 그가 이 쇼가 갖는 진정한 의미를 모를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보수 정당 간의 존재하지도 않는 차이를 부각하고 사소하기 짝이 없는 에피소드들을 끝없이 만들어냄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마치 그런 문제들이 세상의 실체이거나 정치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대중들로 하여금 정작 자신들의 문제인 오늘의 참혹은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여기게 만드는 쇼의 의미를 말이다.

나는 알 수 없다. 대중들을 미궁에 빠트리는 조선일보 문제에 그토록 열정적이던 강 선생이 왜 오늘 대중들을 미궁에 빠트리는 그 쇼에 그리 적극적인지, 왜 없는 역할까지 만들어가며 그 쇼에 참여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오랜 휴식 없는 싸움에 지친 걸까? 강 선생이 그 기만적인 쇼의 정치에서 삶의 정치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나는 강 선생이 오늘 우리 눈앞에 펼쳐진 참혹을 “좌파고 우파고 떠난 문제”로 여기고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최초의 우파 지식인이기를 기대한다.
2005/10/01 12:37 2005/10/01 1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