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04/10/29 예수 흉내
  2. 2004/10/28 휴먼 스테인
  3. 2004/10/21 도서관
  4. 2004/10/20 “호산나!”에서 “죽여라!”로
  5. 2004/10/18 좋은 사람
  6. 2004/10/18 포도와 삼겹살
  7. 2004/10/11 옛집을 찾다
  8. 2004/10/06 화합론
  9. 2004/10/03 섬세함
  10. 2004/10/03 의리와 기리
  11. 2004/10/01 학자
2004/10/29 09:09
예수가 정치적인 변혁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우며, 한가로이 앉아 도사 연 방랑자 연 예수 흉내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 심란하다. 그들은 예수가 정치적인 변혁을 선택하지 않았으면서도 정치적인 변혁을 선택한 사람들보다 더 격렬하게 체제와 긴장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정치적 급진성이란 언제나 자신이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그 외양이 정치적인가 아닌가는 본질이 아니다. 제아무리 급진적인 외양이라도 체제와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급진적인 게 아니며, 급진적인 외양이 아니더라도 체제와 정치적 갈등을 일으킨다면 그건 급진적이다. 체제가 예수를 죽인 이유는 무엇인가? '죽여야 할 만큼' 정치적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치적 급진성의 전형적 외양을 벗어나면서도 가장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진정한 예수 흉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2004/10/29 09:09 2004/10/29 09:09
2004/10/28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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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한 중년 남성이 성추행 사건으로 평생 쌓아온 성취와 존경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는데 실은 그가 여성으로서 사회적 불리함을 피하기 위해 남성 행세를 해온 여성이라면? 휴먼 스테인에서 ‘인종 문제’는 그렇게 역설적으로 다루어진다. 영화는 ‘인종문제를 다룬다’고 말하기 불편할 만큼 섬세하지만 (직설적인 방식으로) ‘인종 문제’를 그린 어떤 영화보다 ‘인종 문제’에 대해 섬세한 성찰을 유도한다. 거기에 계급문제(와 여성문제)는 매우 직설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면서 ‘사회 문제’를 ‘인간의 문제’로 느끼게 하는 묘한 변증법적 효과를 낸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런 영화는 21세기, 즉 ‘예술에서 전형적인 표현이 식상해져버린(이젠 누구도 “불타는 분노”라는 표현 앞에서 분노가 불타지 않으며, “뜨거운 사랑”이라는 표현 앞에서 사랑이 뜨거워지지 않는) 시대’에 예술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카리스마를 유지하는 비결에 대한 참고가 된다.

아무리 설정이 좋아도 배우가 후졌다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게 없었을 것이다. 니콜 키드먼이나 안소니 홉킨스야 제쳐두고라도, 총을 잡으면 총이 되고(더 록)와 붓을 잡으면 붓이 되는(폴락) 애드 해리스는 참 근사한 배우다. 이 영화에서도 참전용사 출신 마초로 나오지만 검정 뿔테 안경 하나로 ‘고뇌’를 확보한다. 거 참.
2004/10/28 22:03 2004/10/28 22:03
2004/10/21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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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초리골은 '박정희의 목을 따러' 침투했던 김신조 부대가 나무꾼에게 들킨 곳이다. 초리골 초입에 파주시에서 지은 아담한 도서관이 있다. 워낙 외진 곳이라 사람이 적다.다.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책상에 팔레스타인 지도와 신약성서 들을 펴놓으면 절로 '감사'의 마음이 든다. 창밖에선 산들이 붉게 물들어간다.
2004/10/21 01:15 2004/10/21 01:15
2004/10/20 19:51
복음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호산나!”를 외치던 인민들이 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여라!”라고 외치게 되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대개 예수를 적대하던 헤롯과 제사장들의 선동 때문이라고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그 일은 좀 더 사회적인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밖 사이엔 갈등과 반목이 있었다. 제자들과 갈릴리 부근을 돌아다니며 온 팔레스타인 인민들에게 깊은 신망을 얻은 예수가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일은 예루살렘 밖의 사람들에겐 경사였고, 누구도 함부로 반감을 드러내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축제 기간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의 장사꾼들을 매우 과격한 방식으로 몰아내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예수의 행동은 제사장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격렬한 반감을 일으킨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란 결국 예루살렘이라는 특별한 공간 덕에 먹고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호산나!”는 그렇게 '이해관계의 이동'을 통해 “죽여라!”로 변한다. 물론 누구도 ‘내가 먹고살기 위해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진 않는다. 자기 정당성을 위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유서 깊은 본능이다.
2004/10/20 19:51 2004/10/20 19:51
2004/10/18 14:32
"규항씨~!" 나에게 전화를 하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명랑한 목소리, 한대수 선생이다. "목소리 들은 지 백년은 넘은 것 같아서 전화했습니다. 하하하.(이하 빈번한 ‘하하하’ 생략)" "삼백년은 되었을 겁니다. 건강하시지요?" “양호합니다. 규항씨는 어떠세요?” “저야 늘 같지요. 어디십니까?” "신촌. 아, 우리 마누라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요? 잘 되었군요." "세상이 희망이 안보이고 다 멸망으로 가는 것 같아서 기왕 죽을 거면 같이 죽자고 데리고 왔습니다." "예." "연세대 어학당 다니는데 한국어 다 배우면 이다도시 2탄으로 등장시켜서 내가 매니저로 뛸 계획입니다." "좋지요." "나 책도 하나 나옵니다." "록앤롤에 관한 책이라면서요?." "예 비틀즈와 밥 딜런을 중심으로 하는 건데 써놓고 보니까 내가 봐도 재미있어요. 양호합니다." "그새 책을 쓰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저도 책 하나 씁니다." "무슨 책이죠?" "예수전." "아, 지저스 크라이스트. 그런데 나는 한국 교회가 참 무섭던데 그걸 쓰면 교회 쪽하고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요?" "저야 워낙 그러고 사니깐 괜찮습니다." (...)

수다는 휴대전화를 유선으로 바꿔가며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다. 물론 그런 활력은 전적으로 그의 덕이다. 처음엔 고독과 고통만을 노래하는 그가 그럴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해 보였다. 그러나 이젠 그의 그런 활력이 얼마나 눈물나는 분투인지 잘 안다. 어두운 세상을 꿰뚫어보면서도 그 세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볼 줄 아는 그는 좋은 사람이다.
2004/10/18 14:32 2004/10/18 14:32
2004/10/1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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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을 먹고 김단과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누가 벨을 눌렀다. ‘건이 어머니’를 만나러 왔다길래 누구냐 물으니 며칠 전에 건이 하고 사고 난 택배트럭 기사의 부인이란다. 아내도 없고 해서 대신 나가보니 아주머니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정색을 하며 건이 상처가 넘어져 다친 정도일 뿐이고, 설사 좀 더 다쳤다 해도 부인의 남편에겐 전혀 잘못이 없으니 이러면 안 된다고 거듭 말했지만 아주머니는 그래도 머리를 조아린다. “이거 건이 먹으라고...” 큼지막한 상자를 건네주는데 포도와 삼겹살이다. 받을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도로 들려 보내는 것도 강퍅한 일이라 “좋은 마음으로 알겠습니다.” 하며 가지고 들어왔다.

며칠 전 사고란 김건이 킥보드를 타고 가다가 택배 트럭과 부딪힌 일이다. 김건이 서 있는 트럭을 미처 못 보고 달리다 부딪힌 것인데, 시동을 막 건 순간이라 김건이나 택배트럭 기사나 꽤나 놀랐던 모양이다. 택배트럭 기사에겐 걱정 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그날 저녁부터 “과일이라도 들고 찾아오겠다”고 계속 전화를 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 한사코 거절해 왔는데 오늘은 아예 그의 부인이 연락도 없이 찾아와 꼼짝없이 선물까지 받아 챙기게 된 것이다.

삼겹살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포도는 씻어서 아이들에게 내주었다. 천연덕스럽게 포도를 먹느 김건이 마땅치 않아서 한마디 했다. “김건, 너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는 아저씨하고 아줌마가 놀라고 걱정하고 그러시잖아. 포도가 넘어 가냐?” “죄송해요.” 이럴 땐 꼭 존댓말이다. 물론 포도는 아무런 문제없이 입으로 들어간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맛있는 건 맛있는 거니 아이인 게지, 하고 더는 말을 안 하기로 한다.

그렇게 말렸는데도 기어코 찾아오다니... 참으로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이구나 싶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오죽 했으면 아무런 잘못도 없으면서 그렇게까지 마음을 썼을까 싶어서다.

요즘 이 나라 사람들을 보면 나쁜 사회가 사람들을 나쁘게 만든다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증명하는 듯하다. 제 이해가 걸린 일이라면 모조리 눈알이 뒤집어져서 악귀처럼 덤벼든다. 위아래도 없고 좌우도 없다. 그러니 제 차에 남의 아이가 부딪혔다면 얼마나 큰일일 수밖에 없는가? 나쁜 사회가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고 나빠진 사람들은 다시 사회를 더 나쁘게 만든다. 이 나라는 이렇게 망해가는 걸까...
2004/10/18 09:32 2004/10/18 09:32
2004/10/11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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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 갔다가 동무들을 만나기로 한 저녁까지 어릴 적 살던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전북 정읍 옹동 후생촌. 박정희 정권이 전라북도 인근의 빈민들에게 산을 개간해서 부쳐 먹게 한 마을이었다. 옹동읍에 도착해 길가에 나락을 널어놓고 담소하던 노인들에게 말을 붙였다. “어르신들, 후생촌이 어딘지 아십니까?” “아 여기 뒤에가 다 기여.” 노인들은 별 싱거운 걸 다 묻는다는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내 기억으론 읍에서 한참 들어간 곳이었는데... 마을 어귀 너머가 다른 세계인 어릴 적의 축척이란 언제나 이렇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이었는데요.” “옛날에야 전기 들어오는 데가 어디 있었간디.” 마을은 이제 '농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옹동에서 제일 잘 사는 마을이라고 했다. 물어물어 내가 살던 집을 찾았다. 텃밭이 되어 있었다. "떳다"고도 하고 "죽었다"고도 하던 옆집 ‘이삐’(예쁜이) 아주머니는 읍에 살고 있었다. “그럼 자네가 항이여? 아이고 어쩨쓰까잉.” 거동조차 불편한 할머니가 된 아주머니는 내 손을 쥐고 눈물바람이 되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40여년 전 우리 부모들의 지독한 가난과 삶의 애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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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이빠이
옹동 가는 길에, 산외면에 차를 세우고 지도를 보고 있는데 할머니 두 분이 창문을 두드렸다. “아저씨, 돈 줄탱께 우리 쪼까 태워다 주실라요.” “예, 어서 타세요.” 할머니들은 집에 가져다 쓰려는 듯 빈 박스 몇 개를 들고 힘겹게 차에 올랐다. 할머니들은 40분이나 차를 기다렸다고 했다. 마을 입구에 세우라는 걸 마을 안까지 모셔다 드렸다. 2천원을 뿌리치느라 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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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칠보를 지나는데 허수아비들이 길에 가득했다. 어린이집 표찰이 붙어 있고 한 걸로 무슨 허수아비 만들기 대회를 한 모양이었다. “쌀 개방 반대” 깃발 옆의 허수아비들은 웃고 있지만 전라도 농민들의 숱한 곡절들로 속을 채운 듯 쓸쓸했다. 전라도는 대체 언제까지 웃을 수도 없는 땅으로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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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극장
공장이 된 옛 태인극장 자리. 오래 전 이곳에서 <범띠 가시네> 같은 영화가 상영되면 근처 미장원에서 머리를 지진 처녀들을 유혹하러 근동의 총각들이 꼬여들곤 했다. 내 고향 태인은, 왜군에 패퇴하던 동학농민군이 11월 27일 마지막 힘을 모아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 전투에서 진 전봉준은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다. 동학전쟁의 패배 이후 저항의 고장은 전남으로 넘어간다. 오래 전 시인 김지하는 영화감독 하길종과 <태인전쟁>이라는 영화를 구상했다. 김지하가 그렇게 근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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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황토현 복판에 세워진 동학농민전쟁기념관은 아기자기 했다. 이 설치물은 ‘진혼’이라는 이름의 스텐인레스 상자 안에 있는데, 두 팔을 흔들면 수많는 내가 사방팔방에서 함께 손을 흔든다. 말 모형을 타면 비디오가 상영되는 장치도 있고 이래저래 오늘 아이들의 흥미를 끌어보려 애쓴 흔적이 보였다. 내 이십대 시절엔 ‘동학란’도 불온한 것이었는데 이젠 이렇게 체제내화 되었다. 아이들이 동학농민전쟁을 아는 것과 그 정신을 아는 것 사이에 우리가 있다.
2004/10/11 22:52 2004/10/11 22:52
2004/10/06 09:58
화합론은 언제나 역사의 적이다. 그러나 화합론도 인간적이라면, 괜찮다.
2004/10/06 09:58 2004/10/06 09:58
2004/10/03 21:13
동이 틀 무렵 들어와 잠자리에 들었다가 열한시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밤새 담배를 많이 피운 탓인지 영 개운치가 않아 눈을 감고 누워 있는다. 김건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아, 할아버지?” “...” “아빠 지금 자는 대요.” “...” “께임하면 아빠한테 혼나요.” “...” 잠시 후 거실에 나가 김건에게 묻는다. “김건, 아빠가 께임하면 무작정 혼냈어?” 김건은 ‘무슨 소린가?’ 하는 얼굴로 제 누나를 바라본다. 김단이 끼어든다. “아빠, 건이가 한 말은 께임이 아니라 아빠 깨우면 혼난다는 말이야.” “아, 그래.” 다시 김건에게 묻는다. “아빠가 자는 데 깨우면 화낸 적 있어? “안 냈나...?” “아빠는 그런 기억이 없지만 아빠도 이유 없이 깨우면 화낼 수도 있겠지. 그런데 할아버지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왜?” “아빠가 왜 늦잠을 잤지?” “새벽에 들어오셔서.” “그래 그 이야기를 해야지. 그 말은 빼고 열한시가 다 되었는데 자고 있고 깨우면 화낸다고 말하면 아빠는 게으르고 나쁜 사람처럼 되잖아.” “맞아.” “다른 사람 이야기를 전할 때는 앞뒤를 잘 이야기하지 않으면 욕하는 것처럼 되거나 듣는 사람이 잘못 생각하게 되는 거야. 알겠지?” “알았어요, 아빠.”

그냥 넘어갈 만한 일을 예민하게 따진 이유는 근래 이 문제가 나에게 꽤 부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이 마흔에 제 소통 스타일이 지나치게 거칠다는 걸 깨닫고 자책하는 후배 덕에 내 소통 스타일도 되새겨 보게 된다. 나 역시 그다지 섬세한 편은 아니다. 아무래도 남성성과 관련한 문제인 것 같고 내 아들은 그렇지 않길 바란다.

(저녁에 돌아온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그랬다. “건이가 분명히 당신 깨울 것 같아서 단단히 단속을 하고 나갔거든.” 잠시 후 아버지가 전화해서 그랬다. “야, 건이 그놈 철저하더라. 아빠 깨우라고 했더니 딱 안 된다고 그러더라.” 이렇게 작은 역사도 사료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진다. 대체 삶이란 얼마나 섬세한가?)
2004/10/03 21:13 2004/10/03 21:13
2004/10/03 02:19
오늘 한국에서 의리라는 말은 대개 남성들의 인간관계에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하는 걸 뜻한다. 그러나 그건 의리가 아니라 ‘기리’다. 기리는 의리와 한자가 같은 일본말로 ‘자신이 받은 만큼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뜻이다.(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기리를 한 장으로 다룬다.) 의리(義理)란 본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뜻한다. 의리는 남성적인 말도 아니고 더더욱 개인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말도 아니다. 개인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면 의리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서 멀어지게 된다. 개인적 관계에 반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하는 것, 손해나 고통을 무릅쓰고라도 원칙과 신념을 지키는 것이 의리다. 알고보면 의리라는 말처럼 귀한 말도 없다. 그리고 이제 '의리있는 사람'은 온 나라를 뒤져도 찾기 어렵다.
2004/10/03 02:19 2004/10/03 02:19
2004/10/01 10:08
“기득이익이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영역은 냉전반공주의나 친일파청산 등이 아닌, 경제와 관련된 이슈영역이다."

한 해에 두어 번 쯤 신문쪼가리 같은 데서 최장집의 시사평론(요약본)을 읽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현실에 대한 의견은 다양할 수 있지만 현실 자체는 언제나 하나라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다. 말하자면 이렇게 중얼거릴 수 있다. ‘씨발, 학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2004/10/01 10:08 2004/10/01 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