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5'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2/05/29 엔엘의 추억
  2. 2002/05/15 그놈들과 그년들
2002/05/29 00:06
대통령이라는 이가 광주 망월동에 갔다가 한총련 학생들 때문에 한 시간 쯤 늦어졌다고 난동이라느니 대통령 못해먹겠다느니 소란을 떠는 광경을 보며 십수 년 전 이 즈음이 떠올랐다. 88년 5월, 갓 제대한 나는 이성욱(지난해 가버린 문학평론가. ‘형은 그렇게 싱겁게 갈 거면서 그렇게 공부했소.’)과 망월동에 가서 인사했다. ‘무사히 제대했습니다. 바로 살도록 님들이 도와주세요.’

그리고 보길도에서 사흘 지냈다. 버너가 고장 났지만 서울서 온 여성노동자 일행에게 얻어먹게 되어 오히려 배불리 지냈다. 그 여성들 가운데 하나가 내게 물었다. 사회에 대해 알고 싶은데 읽을 만한 책을 하나 권해주세요. 나는 갖고 있던 루이제 린저의 북한기행을 주었다. 북한 바로알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이성욱이 마땅치 않은 얼굴이 되어 자리를 떴다.

여행에서 돌아와 서울영상집단에 들어가고 나서야 나는 이성욱이 왜 그랬는지 알았다.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한국의 운동권은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로 갈려 반목하고 있었다. 북한 바로알기 운동은 NL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성욱이나 서울영상집단은 PD였다. 갓 제대한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하지 못했고, 이성욱은 그런 나에게 싫은 소리는 못한 채 자리를 피했던 것이다.

PD는 NL을 ‘주사’라 부르곤 했다. 주체사상, 혹은 북한체제에 경도된 그룹이라는 말이다. NL에 그런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제 부역자들이 다스리고 영화를 누리는 남한에서 자란 청년들이 반공 파시즘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런 정통성에서 우월한 북한체제에 호감을 갖는 건 한편으론 당연한 일이었다. PD 역시 레닌에 경도되었다가 소련이 무너진 후 공황상태를 겪었으니 나을 것도 없었다.

90년대에 NL에 대한 내 거부감은 지속되었다. 미국의 식민지에 살면서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얼빠진 사람이겠지만, 계급이라는 체로 걸러지지 않는 민족주의는 내겐 또 다른 형태의 엘리트주의에 불과했다. 이를테면 나는 NL이 통일운동의 공로자라 여기는 정주영씨를, 돈으로 통일운동의 공로마저 구매한 사람이라 여긴다. 식칼 테러로 노동자들을 앗아 모은 더러운 돈으로 말이다.

오늘 나는 NL을 ‘노선이 다른 동료’라 여긴다. 내가 생각을 고쳐먹을 만한 일이 있었다. 3년 전 나는 한총련의 선봉학교라 할 광주의 어느 대학에 강연을 갔다. 뒤풀이 자리에서 학생회 간부 하나가 남이 들을 새라 조용히 내게 말했다. “선생님, 저희 싫어하시죠.” 나는 천천히 내 생각을 말했다. 내 말은 논리적이었지만 나는 그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NL에 대한 내 거부감이 그 청년의 착한 눈빛에 떳떳할 만큼 섬세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을 바꾸려 싸우는 사람들은 늘 노선이 갈리고 반목한다. 그들의 치열함이 그들의 크고 작은 차이들을 두루뭉실 넘길 수 없게 하는 것이다. (품위 있는 이들은 그걸 두고 ‘운동권의 속성’이라 비아냥거리기도 하지만, 그런 이들이 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단지 그런 이들의 삶이 제 품위를 흐트러트릴 만큼 치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낱개로는 미숙함 투성이인 사람들이 모여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치이기도 하다. 그들은 제 미숙함을 착하게 바치고 제 미숙함을 자책해가며 함께 조금씩 진보를 이룬다. 물론 그 미숙함을 논평하는 이들은 언제나 그 미숙함으로 이룬 진보에 편승한다. NL을 혐오하기엔 내겐 혐오할 인간이 참 많다.(씨네21 2003/05/29)
2002/05/29 00:06 2002/05/29 00:06
2002/05/15 23:53
좌파 남성과 페미니스트 여성 사이의 긴장은 종종 숙명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좌파 남성들은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부르주아'라 밥맛 없어 하고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좌파 남성들을 '가부장 좌파'라 밥맛 없어 한다. 좌파남성 가운데 (여성해방 없는 인간해방을 좇는) '가부장 좌파'가 실재하고 페미니스트 여성 가운데(인간해방 없는 여성해방을 좇는) '부르주아'가 실재한다. 그러나 모든 좌파남성이 '가부장 좌파'거나 모든 페미니스트 여성이 '부르주아'는 아니다.

<그 페미니즘>을 쓰면서 "독자의 2할은 잃겠군" 했다. 좌파 남성과 페미니스트 여성 사이의 긴장이 숙명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상태에서, '좌파 남성 최초의 페미니즘 비판'은 자칫 '페미니즘 일반에 대한 가부장 좌파의 테러'로 오독 되기 십상일것이기 때문이다. 쌓이는 이메일들과 이런저런 풍문들은 그런 내 예상을 크게 비껴가지 않았다. 오독은 대개 '90년대 이후 한국 주류 페미니즘'이라는 말에서 비롯했다. 딱하게도, '주류'라는 말을 '진정한'이나 '중요한' 쯤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그 말을 말 그대로 '큰 영향력'의 뜻으로 썼고 거기에 '90년대 이후 한국'이라는 시공간적 한정을 붙였다.

오독에 대해 말하는 나는 여전히 '90년대 이후 한국 주류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대체할 말을 알지 못한다. '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특정한 유파라기보다는 90년대 이후 한국 페미니즘에 나타난 모종의 강력하고 전반적인 경향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 페미니즘'은 90년대 이후 일군의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에 의해 수입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여성해방을 인간해방과 별개로 진행한다'는 맹랑한 강령에, (한국식 한풀이에서 마초 흉내에 이르는) 이런저런 통속적 정서들을 결합한 그런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언급했던 <이프>나 최보은씨의 에피소드는 흔히 말하는 '자유주의적 도발'이 아닌 '급진주의의 극단적 통속화'라 할 만하다.

씁쓸한 건, 오독이 텍스트에서 뿐 아니라 한국페미니즘의 두리뭉실한 상태에서도 일어난다는 사실 때문이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의 일부(지만 주류라 비쳐지는) 천박한 경향에 분명한 경멸을 표함으로써 페미니즘의 건전한 부분과 떼내어 보이려는 내 시도를 '남 얘기를 내 얘기로' 알아먹었다. 되새기는 바, 한국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건 90년대 이후지만 한국 여성운동/페미니즘의 역사는 이미 한 세기에 가까운 면면한 것이다. 그들은 출발부터 여성해방과 인간해방을 함께 고민하는 건전한 전통을 가져왔으며, 여성평우회, 여성단체연합, 여성노동자회, 여성민우회 등을 조직한 80년대에는 '여성의 문제'를 양보하다시피 하면서까지 사회진보에 몰두했다.

90년대 들어 그들은 '변화한 사회 상황에 발맞추어 좀더 여성의문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여성운동의 그런 노선변화를 '우경화'라 비판할 수 있는가는 좀더 진지하게 고민해볼 문제지만(다른 건 접고라도 80년대에 그들이 보인 양보는 매우 특별한 것이기에), 그런 노선변화가 결국 여성해방과 인간해방을 함께 고민하는 한국 여성운동의 건전한 전통과 90년대 이후 등장한 맹랑한 페미니즘이 갖는 차이를 두리뭉실하게 만들어온 건 사실이다. 바야흐로 한국 여성운동/페미니즘의 면면한 역사는 '내가 누구인지 나도 모르는' 몽환적 상태에 접어들고 있다.

좌파 남성과 페미니스트 여성 사이의 '숙명적인 긴장' 역시 오늘 한국 페미니즘의 그런 상태에서 비롯된다. 여성에 대한 억압이 존재하고 인간에 대한 억압이 분명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런 긴장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나만의 해방'을 믿는 모든 운동은 어떤 절실한 사정을 담더라도 그저 피억압자의 추악한 복수극에 불과하다. 좌파 남성들이 그들 가운데 실재하는 '가부장 좌파들'을 솎아내고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그들 가운데 실재하는 '부르주아들'을 솎아낼 때, 비로소 '숙명적인 긴장'은 '숙명적인 우애'로 바뀔 것이다. 그놈들과 그년들을 솎아내지 않고는, 좌파에게도 페미니스트에게도 미래는 없다.(씨네21 2002/05/15)
2002/05/15 23:53 2002/05/15 2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