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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2/01/30 강준만
  2. 2002/01/09 존경
2002/01/30 23:46
누군가 강준만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을 때 나는 주저 없이 '근대화의 기수'라 말한다. 그는 '조선일보 문제'를 비롯 지난 50여년 동안 한국사회의 작동원리가 되다시피 해온 이런저런 전근대적인 습속들을 샅샅이 '발견'해냄으로써 한국인들이 비로소 근대적인 정신을 마련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강준만씨는 참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 그는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지점에 끊임없이 의견을 낸다. 그의 의견은 철저하게 제도 시스템의 테두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에는 여러 차원이 있고 늘 제도 시스템의 테두리가 충분한 건 아니다. 제도 시스템을 벗어나거나 벗어날 수 있는 지점에서 강준만씨의 의견은 종종 무리한 훈수가 되기도 한다. 특히 좌파적 활동과 관련한 그의 의견이 그렇다.

근래 그가 좌파에 거듭하는 주문은 이른바 도덕적 순결주의에서 벗어나 시장과 언론 같은 오늘의 제도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것이다. 얼핏 유익해 보이는 그의 의견은 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무리한 훈수일 뿐이다. 좌파란 오늘 시스템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다. 좌파임을 천명한 순간부터 오늘 시스템에서 적극적으로 배제되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시스템을 활용하는 일은 '선택'이나 '적극성'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 언론의 경우를 보자. 한국엔 맨 오른쪽의 <조선일보>에서 맨 왼쪽의 <한겨레>까지 여러 신문이 있다. <조선일보>의 극우성이야 새삼 말할 게 없지만, 맨 왼쪽인 <한겨레>의 이념 역시 좋게 보아 중도보수 쯤이다. <한겨레>에 진보적 기사가 적게 실리는 것은 흔히 말하듯 "<한겨레>가 변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 신문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 제도 언론이란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선전 수단이다. 제도언론이 담을 수 있는 진보성의 최대치는 그 사회의 지배계급이 허용할 수 있는 진보성의 최대치와 같다.

언론학자인 강준만씨가 그런 이치에 닿지 않는 훈수를 하는 건 그가 순진해서가 아니라 그의 이념 때문이다. 자신의 말대로, 강준만씨는 오늘 시스템, 자본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우파다. 그가 제도언론에게 "진보적 기사를 좀더 싣는 일이 자본주의 체제의 건강을 위해 좋다"고 주문하지 않고, 좌파에게 "도덕적 순결주의에서 벗어나 제도언론을 활용하라"고 주문하는 건 더도 덜도 아닌 우파의 좌파에 대한 이념적 공격이다.

나는 강준만씨를 '근대화의 기수'라 부르지만, 정작 그는 '근대'니 '극우'니 하는 개념어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가 세상에 의견을 내는 수단인 그의 글은 언제나 "나쁜놈들을 솎아내자"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쁜놈과 좋은놈'이라는 도덕적 차이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어떤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가의 이념적 차이로 구분된다. 모든 계급에 나쁘거나 모든 계급에 좋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조선일보>처럼 계급을 막론하고 사악해 보이는 신문도 어떤 계급에게는 천사와 같다.

우파인 강준만씨에게 '좋은 놈'은 좌파에겐 '좋지 않은 놈'이거나 '나쁜 놈'일 수 있다. 이를테면 그가 다음 대통령으로 밀고 있는 노무현씨가 97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투쟁에서 보여준 빛나는 활약과, 제 활약에 감격한 노무현씨의 "이제 누구든 노동운동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방자한 선언을 기억해 보라. 좌파로선 제 아무리 '현실적인 고려'를 한다 해도 노무현씨를 지지할 방법이 없다.

강준만씨는 언제나 '나쁜놈들을 솎아내'는 일로 한국사회를 바꿀 수 있다 주장한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세계가 초국적금융독점자본과 전세계 인민 사이의 사활을 건 싸움의 와중에 있고, 강준만씨가 솎아내려는 '나쁜놈들' 역시 그 잔가지에 연결되어 있을 뿐이며, 그런 모든 맥락을 포괄한 싸움으로만 한국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겠다. 강준만씨는 내 주장을 '공허한 거대담론'이라 할까. 애석한 일이지만, 그와 내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많든 적든 세상의 일부다. 그와 나는 이념적인 차이를 갖는다.(씨네21 2002/01/30)
2002/01/30 23:46 2002/01/30 23:46
2002/01/09 23:45
얼마 전 <한겨레>에 쓴 '얼치기 도사들'은 약간의 소란을 낳았다. 이미 해병전우회나 의사들과 더 큰 소란을 겪기도 했거니와 졸렬하나마 사회적 의견을 제출함으로써 일용할 양식을 얻는 사람으로선 그런 일을 피할 수 없다 생각하는 나로선 대수롭지 않아 할 만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접을 수 없는 불편함이 내내 남았다. 그 글은 내 청년 시절의 소중한 선생 가운데 한 사람을 겨냥하는 패륜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 이현주 목사는 그저 예수를 팔아먹는 크고 작은 보도방들인 한국 교회에서 예수의 삶과 정신을 되새기는 일에 분투했다. 그가 짓거나 옮긴 예수와 복음서에 관한 몇몇 노작들은 서남동 안병무 같은 민중신학자들과는 다른 맥락에서 내게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다. 민중신학자들이 내게 예수를 논증해주었다면 이현주는 내게 두런두런 예수를 들려주었다. 최악의 반동과 최고의 열정이 맞서던 시절, 그와 권정생(<강아지똥>을 지은) 들은 조용한 소금이었다.

10여년이 흘러, 전해 듣는 그의 근황은 나를 적이 답답하게 했다. 우주적 이치를 깨친 듯한 얼굴을 한 그는 건전함을 잃고 있었다. 건전함을 잃는다는 건 대개 지저분한 현실로의 투신을 말하지만 드물게는 현실을 멀쩡히 초월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깨우침이 현실을 둘러싼 대립과갈등이 욕망의 충돌에 머무는 일을 비판한다면 올바랐지만 급기야 그 깨우침이 "부시와라덴은 같은 편"이라는 오만한 중립주의에 이르자 나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를 가장 신중하게 그러나 가장 악랄하게 비판하는 방법으로 그에 대한 내 존경을 표시하기로 했다.

"폭력은 모두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심지어 폭력을 사용하는 어떤 놈도 폭력이 좋은 거라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모든 폭력은 모두 다르며 폭력을 반대하는 일은 그 다름을 세심하게 따지는 일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폭력을 반대하는 이유가 폭력이 우리의 알량한 미감을 거슬러서가 아니라 폭력에 처한 구체적인 인간들과의 연대감 때문이라면 말이다. 수십년 동안 단지 미국에 꿇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들이 죄없이 살해당하고 능욕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사람들의 분노 앞에서 "폭력은 모두 나쁜 것"이라 읊조리는 건 폭력적으로 한가롭다.

그런 말은 단지 그런 말을 하는 이가 그 처참한 현실과 철저히 무관함만을 지시한다. 역사 속에서, 특히 한국의 80, 90년대와 같은 격변의 역사 속에서 인텔리들은 제좌절감을 세상에 치환하여 모면하려 한다. 이를테면, 정치적 변혁에 몰두하던 인텔리는 그 시도가 실패한 뒤 좌절감 속에 제가 생명이나 인간같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들'을 빠트렸음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깨달음이 아니라 그런 깨달음 뒤에도 여전한 오만함이다. 빠트렸던 문제들은 원래의 문제를 보완하지 않고 전적으로 대체된다. 이제 그에게 정치적 변혁은 그저 낡고 부질없는 관념이다. 전에 그에게 생명과 인간이 낡고 부질없는 관념이었듯 말이다.

정치적 변혁을 배제한 생명과 인간의 탐구란 관념적 장난에 불과하며 생명이나 인간의 문제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본디 출발점이라는 총체적 사실은 그들에게 애써 부인된다. 그들은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제 삶이 몹시 고단해질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 깨달음이란 비루한 현실을 초월하고 오늘의 안식을 설명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깨닫고 그 깨달음을 더욱 열심히 광고한다. 혁명가의 이력을 팔아 문화자본가로 행세하려는 싸구려 코미디언에서 현실적 절망감을 우주적 깨우침으로 초월하려는 얼치기 도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오늘도 열심히 세상을 공전한다. 과연, 내 존경은 회복될 것인가.(씨네21 2002/01/09)
2002/01/09 23:45 2002/01/09 2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