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8'에 해당되는 글 5건
- 2001/08/22 논평자들
- 2001/08/15 독사의 새끼들 (1)
- 2001/08/09 공인, 그 언어적 몽환
- 2001/08/07 진리는 쉽다 (1)
- 2001/08/07 학교
2001/08/22 23:11
100인위(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에 대한 내 주변의 이런저런 '객관적인 논평들'에 답답함이 쌓일 무렵, 오랜 만에 만난 ㅅ선생이 물었다. "김규항씨, 100인위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물론 지지합니다." "내가 <한겨레>에 쓴 칼럼 봤어요." "못 봤는데요." "지지한다고 썼는데 얼마나 욕들을 하는지 몰라." "100인위의 방법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비판과 토론으로 고쳐나갈 일이지 방법상의 문제로 100인위 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건 바보들이죠." "그러게." "100인위뿐 아니라... 늘 그런 식인 것 같습니다."
크든 작든, 역사의 한 켠은 늘 '논평자들'의 차지다. 화사한 진보적/자유주의적 교양인인 그들은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 앞에선 늘 '객관적'이다. 논평자들의 관심은 문제나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나 문제의 해결에 대한 논평이다. 논평자들의 목적은 실은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논평자들의 논평은 언제나 같다. "뜻은 좋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 그 말의 실제는 이렇다. "나는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핑계로 방법상의 문제를 찾았다."
논평자들은 이른바 '역사적 해석 공정'으로 말끔하게 정련된 역사에 매우 능숙하고 적극이지만(그들은 교양인인 것이다), 온갖 군더더기와 비루함이 드러나 보이는 '역사의 일부로서 오늘'엔 늘 거슬려 한다. 역사보다 역사의 미감에 집착하는 그들은 역사를 모르는 어떤 사람보다 역사에 무지하고 어리석다. 일본제국주의 시절, 논평자들은 항일무장독립운동을 논평했다. "뜻은 좋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탄압의 빌미를 주어 조선 독립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논평의 실제는 이렇다. "일본제국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건 어리석은 꿈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강준만씨를 필두로 한 <조선일보> 반대운동(강준만씨 이전에도 민언련 등의 성실하고 조직적인 언론개혁운동이 있어왔지만 '보수상업언론'이라는 주제를 <조선일보>로 축소조정한 건 강준만씨다. '한 놈만 패는' 강준만씨의 전술은 결국 이 운동에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이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이던 시절, 다시 말해 <조선일보>에 분명한 반대견해를 밝힌 지식인이 홍세화 김정란 진중권 등 고작 '대여섯'에 불과할 무렵, 논평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융성했다. 논평은 역시 같았다. "뜻은 좋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
그 운동이 '대통령도 하는 운동'이 되고 '공익 캠페인'이 되자, 논평자들은 짐짓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편에 점잖게 앉았다. 그들은 홍세화 김정란 진중권 등 '대여섯'이 처음에 그랬듯 "이제야 이 문제에 개입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강준만씨에게 감사한다."는 따위 촌스런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들이 오늘 그 자리에 앉은 건 어떤 종류의 실존적 결단도 아닌 그저 오늘 그 자리가 더 편해서다. 강준만이 '무식한 인간'이 되고 진중권이 '성격파탄자'가 되고 급기야 김정란이 '마녀'가 되어야 했던 이유가 '논평자들의 여백'을 메우기 위해서였다는 사실 또한 그들의 관심영역 밖이다.
언제나처럼, 논평자들은'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에 논평중이다.(이 문제엔 누구도, 이를테면 강준만 등 <조선일보> 문제에 가장 올바랐던 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어제의 문제에 가장 올바랐던 사람들은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엔 논평자일 수 있다. <조선일보> 문제를 최종 도착지라 여긴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역사의 상당 부분은, 몇몇 몽상가들의 어리석은 꿈이 주변을 둘러싼 논평자들의 훼방을 무릅쓰고 '어느새' 현실이 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렇게 얻어진 역사의 열매는 물론 '모두'에게 배분된다.
역사는 늘 그런 식이고, 그럼에도 역사의 한 켠은 늘 논평자들 차지이며, 역사가 계속되는 한 빌어먹을 논평도 계속된다.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는 과연 무엇인가.(2001/08/22)
크든 작든, 역사의 한 켠은 늘 '논평자들'의 차지다. 화사한 진보적/자유주의적 교양인인 그들은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 앞에선 늘 '객관적'이다. 논평자들의 관심은 문제나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나 문제의 해결에 대한 논평이다. 논평자들의 목적은 실은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논평자들의 논평은 언제나 같다. "뜻은 좋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 그 말의 실제는 이렇다. "나는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핑계로 방법상의 문제를 찾았다."
논평자들은 이른바 '역사적 해석 공정'으로 말끔하게 정련된 역사에 매우 능숙하고 적극이지만(그들은 교양인인 것이다), 온갖 군더더기와 비루함이 드러나 보이는 '역사의 일부로서 오늘'엔 늘 거슬려 한다. 역사보다 역사의 미감에 집착하는 그들은 역사를 모르는 어떤 사람보다 역사에 무지하고 어리석다. 일본제국주의 시절, 논평자들은 항일무장독립운동을 논평했다. "뜻은 좋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탄압의 빌미를 주어 조선 독립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논평의 실제는 이렇다. "일본제국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건 어리석은 꿈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강준만씨를 필두로 한 <조선일보> 반대운동(강준만씨 이전에도 민언련 등의 성실하고 조직적인 언론개혁운동이 있어왔지만 '보수상업언론'이라는 주제를 <조선일보>로 축소조정한 건 강준만씨다. '한 놈만 패는' 강준만씨의 전술은 결국 이 운동에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이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이던 시절, 다시 말해 <조선일보>에 분명한 반대견해를 밝힌 지식인이 홍세화 김정란 진중권 등 고작 '대여섯'에 불과할 무렵, 논평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융성했다. 논평은 역시 같았다. "뜻은 좋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
그 운동이 '대통령도 하는 운동'이 되고 '공익 캠페인'이 되자, 논평자들은 짐짓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편에 점잖게 앉았다. 그들은 홍세화 김정란 진중권 등 '대여섯'이 처음에 그랬듯 "이제야 이 문제에 개입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강준만씨에게 감사한다."는 따위 촌스런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들이 오늘 그 자리에 앉은 건 어떤 종류의 실존적 결단도 아닌 그저 오늘 그 자리가 더 편해서다. 강준만이 '무식한 인간'이 되고 진중권이 '성격파탄자'가 되고 급기야 김정란이 '마녀'가 되어야 했던 이유가 '논평자들의 여백'을 메우기 위해서였다는 사실 또한 그들의 관심영역 밖이다.
언제나처럼, 논평자들은'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에 논평중이다.(이 문제엔 누구도, 이를테면 강준만 등 <조선일보> 문제에 가장 올바랐던 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어제의 문제에 가장 올바랐던 사람들은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엔 논평자일 수 있다. <조선일보> 문제를 최종 도착지라 여긴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역사의 상당 부분은, 몇몇 몽상가들의 어리석은 꿈이 주변을 둘러싼 논평자들의 훼방을 무릅쓰고 '어느새' 현실이 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렇게 얻어진 역사의 열매는 물론 '모두'에게 배분된다.
역사는 늘 그런 식이고, 그럼에도 역사의 한 켠은 늘 논평자들 차지이며, 역사가 계속되는 한 빌어먹을 논평도 계속된다.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는 과연 무엇인가.(2001/08/22)
2001/08/15 22:55
천대받는 땅 갈릴리 출신의 불한당들, 예수와 그 제자들은 유태교회 지도자들과 사사건건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예수가 죽임을 당하는 계기가 된 그런 끊임없는 갈등의 핵심에 안식일 논쟁이 있다. 유태 사회의 유일한 법이자 윤리인 율법엔 안식일(말 그대로 쉬는 날)에 일하지 말라 적혀 있다. 그것은 신이 엿새 동안 세상을 만들고 하루 쉬었다는 창세기의 에피소드를 근거로 했다. 신이 쉬었으니 너희도 신처럼 쉬어라. 문제는 안식일에 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안식일이고 뭐고 하루라도 쉬면 당장 굶게 되는 사람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는 그들을 교회지도자들은 '죄인'이라 불렀다. 예수는 그런 현실에 분노했고 선언했다. "독사의 새끼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예수는 그 '죄인들'을 사랑했다. 예수는 모종의 기득권을 유지한 채 그 기득권의 일부를 헐어 그들을 돕는 '양심적 행동'을 한 게 아니라 늘 그들과 지내며(알다시피, 예수는 집도 절도 없이 떠돌다 죽었다.) 그들과 '한통속'이었다. 예수는 편파적이었다. 못났다는 것, 못 배우고 가난하다는 것이야말로 예수에게 대우받는 첫째 조건이었다. 잘난 사람들, 많이 배우고 가진 사람들은 예수에게 홀대받았다. 어느 날 한 겸손한 부자가 예수를 찾는다. "선생님, 제가 영생을 얻으려면 뭘 해야 합니까." "신의 계명을 알고 있겠지요." "그건 어릴 적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만." "그럼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 그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돌아간다. 예수가 말한다. "보세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보다 어렵습니다."
예수 이전, 구약의 신은 유태인의 신이다.('시오니즘'이라 불리는 이스라엘인들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그런 신관을 기초로 한다.) 예수는 무슨 짓을 했든 저에게 극진하다면 축복을 내리는 그런 이기적인 신을 부인한다. 예수 이후의 신은 유태인의 신도 교회의 신도 아닌 온 우주만물의 신이다. 모든 인간은 신의 아들딸이며 신 앞에서 인류는 형제자매다. 인종이 무엇이든, 종교가 무엇이든, 신분이 어떻든. 자, 저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 이 순간 굶어 죽어가는 아이가 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그 아이는 바로 당신의 동생이다. 굶어죽어가는 어린 동생을 외면한 채 오늘은 무얼 먹어 이 권태로운 창자를 달랠까 고민하는 당신은, 아버지인 신 앞에 큰 죄인인 것이다.
오늘 대개의 한국 교회는 그런 예수의 메시지를 정확히 뒤집는다. 예수를 빙자하는 한국 교회는 바로 이천년 전 예수가 대결하던 유태교회와 같고 한국교회가 제시하는 신은 저에게 극진한 자식만 챙기는 이기적인 신이다. 한국교회는 예수가 대우하던 사람들을 홀대하며 예수가 홀대하던 사람들에게 늘 편파적이고 그들과 '한통속'이다. 한국교회에서 형제의 고통을 외면하고 제 안락을 좇는 일은 신의 축복이라, 그렇게 성공한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라 해석된다. 한국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라 주장되는 상점'이다. 한국교회에 남은 일은 예수가 성전에서 신을 빙자한 장사꾼들을 내쫓았듯 예수를 빙자한 장사꾼들이 내쫓기는 일이다.
최근 <월간조선> 사장 조갑제씨는 각종 기독교 집회에 단골 강사로 나서고 있다. 한국 교회의 탐욕을 자극하여 오늘 진행되는 일련의 사회개혁적 노력들을 사탄의 사업이라 선동하기 위해서다. "성경에 따르면 사탄은 머리가 좋고, 우상숭배를 요구하며 예술적이고 남을 속이는데 천재라고 묘사되어 있다. 김정일은 바로 그 사탄이다. 그런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간 제자들이 한국에 많다. 이들은 민주투사, 개혁주의자, 민족주의자, 통일주의자, 양심가의 행세를 하면서 사탄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 그저 정신병적 괴변에 불과한 그의 논리는, 그것이 가장 탐욕적인 한국 교회를, 넘쳐나는 '독사의 새끼들'을 선동하려는 술책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완벽해 보인다.(한겨레 2001.8.15)
예수는 그 '죄인들'을 사랑했다. 예수는 모종의 기득권을 유지한 채 그 기득권의 일부를 헐어 그들을 돕는 '양심적 행동'을 한 게 아니라 늘 그들과 지내며(알다시피, 예수는 집도 절도 없이 떠돌다 죽었다.) 그들과 '한통속'이었다. 예수는 편파적이었다. 못났다는 것, 못 배우고 가난하다는 것이야말로 예수에게 대우받는 첫째 조건이었다. 잘난 사람들, 많이 배우고 가진 사람들은 예수에게 홀대받았다. 어느 날 한 겸손한 부자가 예수를 찾는다. "선생님, 제가 영생을 얻으려면 뭘 해야 합니까." "신의 계명을 알고 있겠지요." "그건 어릴 적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만." "그럼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 그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돌아간다. 예수가 말한다. "보세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보다 어렵습니다."
예수 이전, 구약의 신은 유태인의 신이다.('시오니즘'이라 불리는 이스라엘인들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그런 신관을 기초로 한다.) 예수는 무슨 짓을 했든 저에게 극진하다면 축복을 내리는 그런 이기적인 신을 부인한다. 예수 이후의 신은 유태인의 신도 교회의 신도 아닌 온 우주만물의 신이다. 모든 인간은 신의 아들딸이며 신 앞에서 인류는 형제자매다. 인종이 무엇이든, 종교가 무엇이든, 신분이 어떻든. 자, 저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 이 순간 굶어 죽어가는 아이가 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그 아이는 바로 당신의 동생이다. 굶어죽어가는 어린 동생을 외면한 채 오늘은 무얼 먹어 이 권태로운 창자를 달랠까 고민하는 당신은, 아버지인 신 앞에 큰 죄인인 것이다.
오늘 대개의 한국 교회는 그런 예수의 메시지를 정확히 뒤집는다. 예수를 빙자하는 한국 교회는 바로 이천년 전 예수가 대결하던 유태교회와 같고 한국교회가 제시하는 신은 저에게 극진한 자식만 챙기는 이기적인 신이다. 한국교회는 예수가 대우하던 사람들을 홀대하며 예수가 홀대하던 사람들에게 늘 편파적이고 그들과 '한통속'이다. 한국교회에서 형제의 고통을 외면하고 제 안락을 좇는 일은 신의 축복이라, 그렇게 성공한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라 해석된다. 한국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라 주장되는 상점'이다. 한국교회에 남은 일은 예수가 성전에서 신을 빙자한 장사꾼들을 내쫓았듯 예수를 빙자한 장사꾼들이 내쫓기는 일이다.
최근 <월간조선> 사장 조갑제씨는 각종 기독교 집회에 단골 강사로 나서고 있다. 한국 교회의 탐욕을 자극하여 오늘 진행되는 일련의 사회개혁적 노력들을 사탄의 사업이라 선동하기 위해서다. "성경에 따르면 사탄은 머리가 좋고, 우상숭배를 요구하며 예술적이고 남을 속이는데 천재라고 묘사되어 있다. 김정일은 바로 그 사탄이다. 그런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간 제자들이 한국에 많다. 이들은 민주투사, 개혁주의자, 민족주의자, 통일주의자, 양심가의 행세를 하면서 사탄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 그저 정신병적 괴변에 불과한 그의 논리는, 그것이 가장 탐욕적인 한국 교회를, 넘쳐나는 '독사의 새끼들'을 선동하려는 술책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완벽해 보인다.(한겨레 2001.8.15)
2001/08/09 21:50
공인. 이 딱딱하고 멋대가리 없는 중국말 출신 한국말을 떠올리노라니 며칠 전 김건(다섯살짜리 내 아들)과 했던 대화가 생각난다. “김건, 한국말엔 원래는 중국말이었거나 미국말이었던 게 많이 있거든. 김건 생각에 원래 한국말인 것 하나만 말해 볼래.” “음... 햄버거.” (일동 폭소) 나는 한글 전용론 따위를 주장하는 한심한 사람은 아니지만 요즘 아이들이 중국말 출신이든 미국말 출신이든 이런저런 말들이 충분한 화학적 용해과정을 거친 상태의 한국말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아 해본 장난이었다. 에상대로 김건에게 ‘원래 한국말’이란 그저 언어적 몽환이었다.
언어적 몽환은 다섯살짜리 아이에게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다 자란 우리 역시 늘상 들어 익숙하나 곱씹어보면 대체 이게 뭐더라 하는 게 있다. 공인이라는 말이 그렇다. 한국에서 이 말처럼 대대적이고 공공연하게 언어적 몽환을 일으키는 말도 없다. 한국에서 공인이라는 말이 가장 대대적으로,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경우는 이른바 유명연예인의 사적 에피소드와 관련해서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공인이라는 말은 한 유명 연예인이 음주운전하다 적발되었을 때 사용된다. 그 유명 연예인은 어떻게든 처벌을 피해나가려 하고(하루 빨리 돈 벌고 싶어하고) 바로 전 날밤까지 그 연예인에게 환호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공인이 그럴 수 있냐 격분한다. 물론 그 중간엔 그 연예인을 기사거리로 삼다 사건 직후 그 연예인의 추문을 기사거리로 삼기로 작정한 황색언론과 온 세상을 도덕으로만 판단하는 사람들(무슨무슨 시청자 감시단이니 하는 장엄한 이름을 가진)의 요란스런 개탄이 있다.
흥미로운 건 이른바 공인이라는 비장한 잣대를 사용하는 그런 대대적이고 공공연한 격분이 그 유명 연예인이 다시 반성하는 얼굴(‘아뿔싸’의 공식 버전일)을 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일제히 다른 이야기거리로 몰려간다는 것이다.(한국인들이 그렇게 일제히 격분하고, 또 일제히 사그라들고 하는 습성은 반세기에 걸친 파시즘 경험과 관련한 것이다. 파시즘은 대오에서 이탈한 자의 불안함을 근거로 한다.) 그건 확실히 원래의 그 비장한 잣대나 그 격분의 대대적이고 공공연한 외양에 비추어 싱겁기 짝이 없는 경과다. 한국에서 공인이라는 말은 고작 그런 대상에 그렇게 싱겁게 사용된다.
“고작 그런 대상”이란 말이 연예인을 싸잡아 무시하는 뜻은 아니다. 나는 연예인, 곧 대중예술가를 일종의 공인이라 본다. 대중예술가는 예술가의 일종이며, 예술가는 지식인(학자에서 저널리스트까지 모든 유형의)과 함께 모종의 정신적 육체적 축적물(은 사회 구성원들이 먹고사는 일과 직결되지 않는 유형의 것이다)을 사회에 제출한 대가로 생계를 보장받는다는 점에서 일정한 사회적 책임을 갖는 공인이며 예술가의 일종인 대중예술가는 공인의 일종이다. 그러나 모든 대중예술가가 예술가가 아니듯 모든 대중예술가가 공인은 아니다. 오늘 대중예술가의 상당 부분은 ‘모종의 정신적 육체적 축적물을 사회에 제출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종의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의 콘베이어 라인에서 생산되는 순수한 공산품들’이다. 대중예술가의 외양을 한 그런 공산품들의 사적 에피소드와 관련한 공인 논란은 얼마나 우스운가.
분명히 해둘 건 우리가 대중예술가에게 공인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구체적인 부위는 음주 운전을 했는가, 지방흡입술을 했는가, 혹은 음주운전이나 지방흡입술을 하고도 안했다 잡아뗏는가 따위 시답지 않은 사적 에피소드들이 아니라 그 대중예술가의 예술 자체라는 점이다. 그 배우의 연기는 과연 공인이라 할만큼 성실한가. 그 가수는 그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대가 만큼 심금을 울리는가 등등. 그러나 그런 질문에 이를 때 우리는 대개 머쓱해진다. 그런 머쓱함은 우리가 정색을 하고 공인의 잣대를 들이댄 그 대중예술가들이 실은 예술가도 공인도 아닌 공산품임을 확인하는 머쓱함이며, 그런 공산품의 그런 사적 에피소드에 공인이라는 잣대를 들이댄 일에 대한 머쓱함이다. 우리는 마치 인형을 안고 웃었다 울었다 하는 아이와 같다.
요컨대 오늘 한국 사회에서 공인이라는 말은 공인의 가장 주변 영역(혹은 거의 공인이라 보기 어려운 영역)의, 사적 에피소드에나 사용된다. 한국에서 공인이라는 말은 햄버거가 ‘원래 한국말’이라 주장하는 다섯 살짜리 아이와 다름없는 언어적 몽환에 빠져 있다. 그런 한국인들이 분명히 아는 단 한가지 유형의 공인은 제도적 공인, 즉 공무원들이다. 한국인들은 거만하고 타락한 이런저런 공무원들, 조폭의 상대역으로서 경찰(조폭과 경찰을 그 불량함이나 막되먹음에서 도무지 구분할 방법이 있는가.), 나라를 축구공처럼 다룬 군인들 따위를 분명히 안다. 한국인들이 공무원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건 지난 50여년 동안, 적어도 3대에 걸쳐 그들을 철저하게 일관되고 체험했기 때문이다. 촌스러운 얘기지만, 공무원이란 사회구성원들을 괴롭히라고 있는 게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라 있는 건데 하여튼 대한민국의 공무원들은 오늘까지 대개 그랬다. 제도적 공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그런 체험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모든 공적인 것에 공포를 갖게 하고 공인이라는 말 앞에서 언어적 몽환에 빠지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공인이라는 말과 관련한 언어적 몽환의 또다른 이유는 한국인들은 삶 속에서 어떤 공적 보장이나 혜택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몇년 전 나는 도심 중의 도심이라 할 종로 네거리에서 3중 추돌사고를 냈다. 내 차의 본네트가 시야를 완전히 가릴 만큼 솟아올랐고 앞의 두 차들도 크게 망가졌다. 추둘사고는 기본적으로 뒷차에 책임이 돌아간다는 걸 알았던 나는 그 순간의 ‘시각적 견적’에 낙심했는데(왜 나는 늘 돈이 없는 것일까. 열심히 사는데, 빌어먹을.) 사고를 수습하러 온 경찰의 ‘종합보험 들었으면 다 처리될 것’ 이라는 말이 어떤 축복의 음성처럼 들렸다. 서른몇 해 동안 이 나라에서 살면서 단 한번도 어떤 종류의 공적 보장이나 혜택도 받아본 경험이 없던 나는 내 돈 내고 받는 당연한 보장마저 어색했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이른바 구제금융 시절에 직장과 가정에서 밀려난 그 많은 남자들, 일생을 국가와 자신을 일치시키며 살아온 그들이 국가로부터 아무런 공적 보장을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사그라지는 풍경을 생생히 목도한 바 있다.
지난 50여년 동안 한국인들에게 모든 공적인 것은 어떤 보장이나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통제와 억압의 그물이었고 그런 한국인들은 공인이라는 말 앞에서 언어적 몽환에 빠진다. 공인이라는 말이 그런 처지에 놓인 건 지금까지 얘기했듯 한국인들의 삶의 체험에 의한 결과지만, 뒤집어 보면 가장 충성스러운 국민을 갖되 그 국민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의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국가의 책략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국가는 공인이라는 말의 사용처를 유명 연예인이 음주운전하다 적발되었을 때 쯤으로 한정하는 손쉬운 대중조작만으로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체의 공적 기대를 포기한 일방적 신민으로 만드는 데 성공해온 것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이쯤해서 우리는 공인이라는 말의 정당한 사용처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발견의 유일한 방법은 그 말이 진보적 맥락에서 사용되게 하는 것이다. 아, 진보라는 말에서 거부감을 느낄 건 없다. 진보란 현재를 더 낫게 만들려는 노력이며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은 본디 진보주의자니까. 여기 예닐곱으로 이루어진 동아리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중 한명이 자꾸 엉뚱한 짓을 한다. 모두의 공을 혼자 가로채고 다른 구성원의 몫을 빼앗아 독점한다. 그의 악행이 나머지 구성원에게 확인되자 그 구성원들이 어떤 행동을 취했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때 나머지 구성원들이 취하는 행동, 바로 그게 진보적 노력이다. 사회가 그 동아리와 다른 건 좀더 규모가 크다는 것일 뿐 그 얼개는 전적으로 같다. 모든 진정한 공적 노력은 그렇게 진보적이며 모든 진정한 공인은 그래서 진보적이다. 자,를 읽는 사나이들. 오늘 내가 지껄인 얘기에 기대어 공인이라는 말의 정당한 사용처를 발견해 보는 게 어떤가. 그것은 당신의 정신에 멋진 수트 한벌이 될 것이다
언어적 몽환은 다섯살짜리 아이에게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다 자란 우리 역시 늘상 들어 익숙하나 곱씹어보면 대체 이게 뭐더라 하는 게 있다. 공인이라는 말이 그렇다. 한국에서 이 말처럼 대대적이고 공공연하게 언어적 몽환을 일으키는 말도 없다. 한국에서 공인이라는 말이 가장 대대적으로,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경우는 이른바 유명연예인의 사적 에피소드와 관련해서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공인이라는 말은 한 유명 연예인이 음주운전하다 적발되었을 때 사용된다. 그 유명 연예인은 어떻게든 처벌을 피해나가려 하고(하루 빨리 돈 벌고 싶어하고) 바로 전 날밤까지 그 연예인에게 환호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공인이 그럴 수 있냐 격분한다. 물론 그 중간엔 그 연예인을 기사거리로 삼다 사건 직후 그 연예인의 추문을 기사거리로 삼기로 작정한 황색언론과 온 세상을 도덕으로만 판단하는 사람들(무슨무슨 시청자 감시단이니 하는 장엄한 이름을 가진)의 요란스런 개탄이 있다.
흥미로운 건 이른바 공인이라는 비장한 잣대를 사용하는 그런 대대적이고 공공연한 격분이 그 유명 연예인이 다시 반성하는 얼굴(‘아뿔싸’의 공식 버전일)을 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일제히 다른 이야기거리로 몰려간다는 것이다.(한국인들이 그렇게 일제히 격분하고, 또 일제히 사그라들고 하는 습성은 반세기에 걸친 파시즘 경험과 관련한 것이다. 파시즘은 대오에서 이탈한 자의 불안함을 근거로 한다.) 그건 확실히 원래의 그 비장한 잣대나 그 격분의 대대적이고 공공연한 외양에 비추어 싱겁기 짝이 없는 경과다. 한국에서 공인이라는 말은 고작 그런 대상에 그렇게 싱겁게 사용된다.
“고작 그런 대상”이란 말이 연예인을 싸잡아 무시하는 뜻은 아니다. 나는 연예인, 곧 대중예술가를 일종의 공인이라 본다. 대중예술가는 예술가의 일종이며, 예술가는 지식인(학자에서 저널리스트까지 모든 유형의)과 함께 모종의 정신적 육체적 축적물(은 사회 구성원들이 먹고사는 일과 직결되지 않는 유형의 것이다)을 사회에 제출한 대가로 생계를 보장받는다는 점에서 일정한 사회적 책임을 갖는 공인이며 예술가의 일종인 대중예술가는 공인의 일종이다. 그러나 모든 대중예술가가 예술가가 아니듯 모든 대중예술가가 공인은 아니다. 오늘 대중예술가의 상당 부분은 ‘모종의 정신적 육체적 축적물을 사회에 제출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종의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의 콘베이어 라인에서 생산되는 순수한 공산품들’이다. 대중예술가의 외양을 한 그런 공산품들의 사적 에피소드와 관련한 공인 논란은 얼마나 우스운가.
분명히 해둘 건 우리가 대중예술가에게 공인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구체적인 부위는 음주 운전을 했는가, 지방흡입술을 했는가, 혹은 음주운전이나 지방흡입술을 하고도 안했다 잡아뗏는가 따위 시답지 않은 사적 에피소드들이 아니라 그 대중예술가의 예술 자체라는 점이다. 그 배우의 연기는 과연 공인이라 할만큼 성실한가. 그 가수는 그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대가 만큼 심금을 울리는가 등등. 그러나 그런 질문에 이를 때 우리는 대개 머쓱해진다. 그런 머쓱함은 우리가 정색을 하고 공인의 잣대를 들이댄 그 대중예술가들이 실은 예술가도 공인도 아닌 공산품임을 확인하는 머쓱함이며, 그런 공산품의 그런 사적 에피소드에 공인이라는 잣대를 들이댄 일에 대한 머쓱함이다. 우리는 마치 인형을 안고 웃었다 울었다 하는 아이와 같다.
요컨대 오늘 한국 사회에서 공인이라는 말은 공인의 가장 주변 영역(혹은 거의 공인이라 보기 어려운 영역)의, 사적 에피소드에나 사용된다. 한국에서 공인이라는 말은 햄버거가 ‘원래 한국말’이라 주장하는 다섯 살짜리 아이와 다름없는 언어적 몽환에 빠져 있다. 그런 한국인들이 분명히 아는 단 한가지 유형의 공인은 제도적 공인, 즉 공무원들이다. 한국인들은 거만하고 타락한 이런저런 공무원들, 조폭의 상대역으로서 경찰(조폭과 경찰을 그 불량함이나 막되먹음에서 도무지 구분할 방법이 있는가.), 나라를 축구공처럼 다룬 군인들 따위를 분명히 안다. 한국인들이 공무원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건 지난 50여년 동안, 적어도 3대에 걸쳐 그들을 철저하게 일관되고 체험했기 때문이다. 촌스러운 얘기지만, 공무원이란 사회구성원들을 괴롭히라고 있는 게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라 있는 건데 하여튼 대한민국의 공무원들은 오늘까지 대개 그랬다. 제도적 공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그런 체험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모든 공적인 것에 공포를 갖게 하고 공인이라는 말 앞에서 언어적 몽환에 빠지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공인이라는 말과 관련한 언어적 몽환의 또다른 이유는 한국인들은 삶 속에서 어떤 공적 보장이나 혜택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몇년 전 나는 도심 중의 도심이라 할 종로 네거리에서 3중 추돌사고를 냈다. 내 차의 본네트가 시야를 완전히 가릴 만큼 솟아올랐고 앞의 두 차들도 크게 망가졌다. 추둘사고는 기본적으로 뒷차에 책임이 돌아간다는 걸 알았던 나는 그 순간의 ‘시각적 견적’에 낙심했는데(왜 나는 늘 돈이 없는 것일까. 열심히 사는데, 빌어먹을.) 사고를 수습하러 온 경찰의 ‘종합보험 들었으면 다 처리될 것’ 이라는 말이 어떤 축복의 음성처럼 들렸다. 서른몇 해 동안 이 나라에서 살면서 단 한번도 어떤 종류의 공적 보장이나 혜택도 받아본 경험이 없던 나는 내 돈 내고 받는 당연한 보장마저 어색했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이른바 구제금융 시절에 직장과 가정에서 밀려난 그 많은 남자들, 일생을 국가와 자신을 일치시키며 살아온 그들이 국가로부터 아무런 공적 보장을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사그라지는 풍경을 생생히 목도한 바 있다.
지난 50여년 동안 한국인들에게 모든 공적인 것은 어떤 보장이나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통제와 억압의 그물이었고 그런 한국인들은 공인이라는 말 앞에서 언어적 몽환에 빠진다. 공인이라는 말이 그런 처지에 놓인 건 지금까지 얘기했듯 한국인들의 삶의 체험에 의한 결과지만, 뒤집어 보면 가장 충성스러운 국민을 갖되 그 국민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의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국가의 책략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국가는 공인이라는 말의 사용처를 유명 연예인이 음주운전하다 적발되었을 때 쯤으로 한정하는 손쉬운 대중조작만으로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체의 공적 기대를 포기한 일방적 신민으로 만드는 데 성공해온 것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이쯤해서 우리는 공인이라는 말의 정당한 사용처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발견의 유일한 방법은 그 말이 진보적 맥락에서 사용되게 하는 것이다. 아, 진보라는 말에서 거부감을 느낄 건 없다. 진보란 현재를 더 낫게 만들려는 노력이며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은 본디 진보주의자니까. 여기 예닐곱으로 이루어진 동아리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중 한명이 자꾸 엉뚱한 짓을 한다. 모두의 공을 혼자 가로채고 다른 구성원의 몫을 빼앗아 독점한다. 그의 악행이 나머지 구성원에게 확인되자 그 구성원들이 어떤 행동을 취했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때 나머지 구성원들이 취하는 행동, 바로 그게 진보적 노력이다. 사회가 그 동아리와 다른 건 좀더 규모가 크다는 것일 뿐 그 얼개는 전적으로 같다. 모든 진정한 공적 노력은 그렇게 진보적이며 모든 진정한 공인은 그래서 진보적이다. 자,
2001/08/07 23:10
‘진리는 쉬우며, 쉽게 말할 수 없는 건 진리가 아니다.’ 예수는 군중 앞에서 늘 비유(어느 시대나인민들이 삶의 지혜를 나누는 방법인)로 연설했다. 비유로 전달하는 예수의 진리는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었지만, 대단한 학식을 가진 엘리트보다는 오히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랭이에게 더 충실하게 이해되었다. 말하자면, 예수는 진리를 가장 쉬운 말로 전함으로써 남다른 지적 능력으로 진리에 접근하려는 엘리트들의 특권 의식을 박탈했다. 세상의 바닥에서 솟아오른 예수의 진리는 무서운 기세로 퍼져나가 그가 죽은 지 3백여 년이 지날 무렵 그를 죽인 로마제국을 정복했다.
오늘 한국에서 진리는 여전히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자, 모종의 특별한 지적 훈련을 통해 달성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생각은 대개 자신들의 권위를 확보하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에 기인하지만, 이른바 좌파 영역에선'80년대 지식인들의 독특한 청산'과 관련한 것이다. 90년대 들어 일군의 80년대 좌파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역사의 최종적인 실패라 규정했다. 이어 그들은 진리에 대한 자신들의 모자란 이해를 진리 자체의 모자람이라 규정하고 다시 새로운 진리를 찾아나섰다. 그 이름도 난해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름보다 더 난해한 이론들이 새로운 진리로 채택되었다.
물론, 그 난해한 이론들은 (모든 공인된 니론들이 그러하듯) 나름의 통찰을 가진다. 그러나 그 이론들은 유난히 난해하다는 점만으로도 80년대 좌파들이 일제히 청산하고 자본주의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한 90년대 초반 한국의 정신 상황엔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인민들의 정신적 근대성이 한국 지식인 평균을 상회하는 프랑스에서조차 난해하게 여겨지는 그 난해한 이론들 말이다. 게다가 싱거운 일은 그 이론들이 한국 현실에서 갖는 의미란 굳이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인 그런 난해한 이론들을 동원하지 않고도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이다.(이 점에 대해선 그 이론을 전파한 당사자들의 인터뷰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바란다. 이른바 허무개그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쉽게 전달하긴 커녕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진리조차 최대한 알아먹기 어렵게 만드는 데 혈안이 된 듯한 지식인들의 희한한 행태는 실은 그들이 진리에 접근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책을 통해, 모종의 특별한 지적 훈련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진리에 접근하는 지식인들의 방법이다. 그들은 실제 삶보다 책이라는 간접적 삶에 더 익숙하고 책속의 난해한 개념어들(지식인들끼리의 학술적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임시어. 지식인들은 바로 이 개념어를 마구 사용하는 방식으로 인민들에게서 그들의 지적 권위를 확보하곤 한다. 이를테면 그들은 인문주의적 개념어를 인문주의 정신의 증거라 주장한다.)은 그들에겐 당연히 편리하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진리란 진리의 재료인 삶이 빠져 있기에 십중팔구 '가장 어렵게 표현된 무지'에 머물곤 한다.(그들이 끊임없이 진리를 청산하고 재도입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진리라 여기는 것'이 언제나 '가장 어렵게 표현된 무지'이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의 그런 희한한 행태는 인민들이 진리를 얻는 일(인민들이세상의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는 일)을 차단하려는 자본과 권력의 음험한 욕망과 결합하여 강고한 지적 권위주의를 형성한다. 진리에 접근하는 지식인들의 방법은 진리에 접근하는 유일하고 일반적인 방법이라 주장되며, 진리는 지식인들의 이런저런 마스테베이션이나 변태적 놀음의 재료로 추락하고, 급기야 인민들은 진리에 접근하는 자신의 능력을 아예잊고 살게 된다. 결국 자본과 권력은 지식인들의 품위유지를 보장하는 수고만으로 자신들의 낙원을 힘차게 일구어 간다.
추신 : 하방(下放)을 기억한다. 하방은 중국에서 1942년 모택동의 연안문예강화 이후 바로 지식인들의 그런 희한한 행태를 뜯어고치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상산하향(上山下鄕), 말하자면 산간벽지와 북방의 광활한 황무지에 보내 노동하게 한 일이다. 오늘 한국에서, 우리는 하방을 기억한다.(2001/08/07)
오늘 한국에서 진리는 여전히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자, 모종의 특별한 지적 훈련을 통해 달성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생각은 대개 자신들의 권위를 확보하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에 기인하지만, 이른바 좌파 영역에선'80년대 지식인들의 독특한 청산'과 관련한 것이다. 90년대 들어 일군의 80년대 좌파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역사의 최종적인 실패라 규정했다. 이어 그들은 진리에 대한 자신들의 모자란 이해를 진리 자체의 모자람이라 규정하고 다시 새로운 진리를 찾아나섰다. 그 이름도 난해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름보다 더 난해한 이론들이 새로운 진리로 채택되었다.
물론, 그 난해한 이론들은 (모든 공인된 니론들이 그러하듯) 나름의 통찰을 가진다. 그러나 그 이론들은 유난히 난해하다는 점만으로도 80년대 좌파들이 일제히 청산하고 자본주의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한 90년대 초반 한국의 정신 상황엔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인민들의 정신적 근대성이 한국 지식인 평균을 상회하는 프랑스에서조차 난해하게 여겨지는 그 난해한 이론들 말이다. 게다가 싱거운 일은 그 이론들이 한국 현실에서 갖는 의미란 굳이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인 그런 난해한 이론들을 동원하지 않고도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이다.(이 점에 대해선 그 이론을 전파한 당사자들의 인터뷰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바란다. 이른바 허무개그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쉽게 전달하긴 커녕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진리조차 최대한 알아먹기 어렵게 만드는 데 혈안이 된 듯한 지식인들의 희한한 행태는 실은 그들이 진리에 접근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책을 통해, 모종의 특별한 지적 훈련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진리에 접근하는 지식인들의 방법이다. 그들은 실제 삶보다 책이라는 간접적 삶에 더 익숙하고 책속의 난해한 개념어들(지식인들끼리의 학술적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임시어. 지식인들은 바로 이 개념어를 마구 사용하는 방식으로 인민들에게서 그들의 지적 권위를 확보하곤 한다. 이를테면 그들은 인문주의적 개념어를 인문주의 정신의 증거라 주장한다.)은 그들에겐 당연히 편리하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진리란 진리의 재료인 삶이 빠져 있기에 십중팔구 '가장 어렵게 표현된 무지'에 머물곤 한다.(그들이 끊임없이 진리를 청산하고 재도입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진리라 여기는 것'이 언제나 '가장 어렵게 표현된 무지'이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의 그런 희한한 행태는 인민들이 진리를 얻는 일(인민들이세상의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는 일)을 차단하려는 자본과 권력의 음험한 욕망과 결합하여 강고한 지적 권위주의를 형성한다. 진리에 접근하는 지식인들의 방법은 진리에 접근하는 유일하고 일반적인 방법이라 주장되며, 진리는 지식인들의 이런저런 마스테베이션이나 변태적 놀음의 재료로 추락하고, 급기야 인민들은 진리에 접근하는 자신의 능력을 아예잊고 살게 된다. 결국 자본과 권력은 지식인들의 품위유지를 보장하는 수고만으로 자신들의 낙원을 힘차게 일구어 간다.
추신 : 하방(下放)을 기억한다. 하방은 중국에서 1942년 모택동의 연안문예강화 이후 바로 지식인들의 그런 희한한 행태를 뜯어고치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상산하향(上山下鄕), 말하자면 산간벽지와 북방의 광활한 황무지에 보내 노동하게 한 일이다. 오늘 한국에서, 우리는 하방을 기억한다.(2001/08/07)
2001/08/07 23:08
지난해 말부터 혼자 밥지어먹으며 살고 있다. 한국춤을 하는 아내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전라도의 선생들에게 배우려,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김단은 이른바 서울권 초등학교를 피하려, 이도 저도 아닌 김건은 제 엄마와 누나를 따라 전주로 내려갔다. 전주 변두리 초등학교의 소박하고 조용한 입학식 풍경이 내게 얼마간의 안도감을 주었다. 그 풍경엔 서울과 전주가 갖는 작지만 분명한 욕망의 차이가 담겨 있었다. 그 차이는 김단의 유년 시절이 가질 정신적 유익의 작지만 분명한 차이가 될 거였다.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을 들러볼 즈음 안도감은 더 큰 낭패감과 겹쳐졌다. 1학년 교실은 모조리 벽이 터져 있었다. 이웃 교실들의 소리가 뒤섞여 선생의 말소리조차 알아듣기 어려운 이 괴상한 구조의 교실은 이해찬 교육부장관 시절 '열린교육의 구현'으로 마련되었다 했다. (하긴 운동권 이력을 팔아 장관까지 오르고는 대학 신입생들에게 운동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낸 불안정한 인물이니 열린교육을 교실 벽을 트는 일로 구현했다 한들 이상할 거야 없겠다.)
선생들은 대개 반대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배정된 교실 벽을 트기 위한 예산을 집행하지 않는 일은 더 어려웠다고 했다. 그리고 열린 식이든 닫힌 식이든 도무지 기본적인 수업 진행이 어렵다는 게 판명된 오늘엔 다시 벽을 만드는 예산이 배정되지 않는다 했다. 저걸 교실이랍시고 드디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는 기쁨에 겨워 앉은 김단과 그 동무들이 안쓰러웠다. 50대 중반인, 사람 좋아 보이는 김단의 담임선생이 겨우 저런 꼴을 만나려고 기나긴 파시즘의 시절을 아이들과 보냈을 걸 생각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전교조 운동이라는 빛나는 역사가 있었음에도) 한국에서 학교가 여전히 군대와 더불어 국가의 야만이 가장 충실한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국가의 야만을 유지하는 충실한 전위들 또한 여전히 무시 못 할 만큼 남아 있다는 것도. "그 이가 그렇게 돈을 밝히고 아이들을 차별한다 그래요." 아내는 입학식 때 보았던 다른 반 담임선생을 떠올리며 말했다. "단이가 그 선생에 안 걸린 게 다행이군. 그런데 그 반 아이들은 어째야 하지." "단이도 결국 그런 선생을 만나게 되겠죠."
불가항력적인 야만에 자식을 넘겨 준 둘은 쓰게 웃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학교 문제에 대해 적이 관념적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내 자식이 대개의 아이들이 도리 없이 처하는 야만을 피하게 해선 안 된다는 공정함을 생각했고, 그런 야만이란 단지 한국이라는 국가의 야만의 반영이며 아이가 결국 그런 야만 속에서 살게 될 거라면 사회성은 그속에서 길러져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 공정함이란 아비의 관념적인 정당함을 위해 아이를 방치하는 무책임일 수 있으며, 그 야만 속에서 길러지는 사회성이란 단지 아이의 정신만 돌이킬 수 없이 패게 하는 일일 수 있다. 그 사회성이란 남과 더불어 사는 지혜가 아닌 남을 물리치며 사는 비결일 테니 말이다.
아내와 나는 그런 야만과 싸울 구체적인 방안들을 준비하기로 했다. 학교의 야만을 학교 안에서 극복하는 방안을 알아보는 아내는 며칠 전 학교의 야만을 잘 알면서도 그걸 고치려 연대하기보다는 제 자식만 낫게 만들려 선생과 거래를 시도하는 부모들의 반동적 이기심이 또다른 문제라는 첫 번째 분석을 내놓았다. 학교의 야만을 학교의 바깥에서 극복하는 방안을 알아보는 나는 책장에 꼽아만 두었던 <민들레> 같은 탈학교 관련 자료들을 정독하는가 하면, 자주 교육이나 홈스쿨링에 대한 관한 외국의 이런저런 웹사이트들을 들락거리며 학교가 교육에 관한여러 선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증해가고 있다.
둘은 그런 방안들이 실행되지 않기를 내심 바라지만, 언젠가 닥쳐올 피할 수 없는 전투를 위해 그렇게 준비 중이다.(2001/08/07)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을 들러볼 즈음 안도감은 더 큰 낭패감과 겹쳐졌다. 1학년 교실은 모조리 벽이 터져 있었다. 이웃 교실들의 소리가 뒤섞여 선생의 말소리조차 알아듣기 어려운 이 괴상한 구조의 교실은 이해찬 교육부장관 시절 '열린교육의 구현'으로 마련되었다 했다. (하긴 운동권 이력을 팔아 장관까지 오르고는 대학 신입생들에게 운동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낸 불안정한 인물이니 열린교육을 교실 벽을 트는 일로 구현했다 한들 이상할 거야 없겠다.)
선생들은 대개 반대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배정된 교실 벽을 트기 위한 예산을 집행하지 않는 일은 더 어려웠다고 했다. 그리고 열린 식이든 닫힌 식이든 도무지 기본적인 수업 진행이 어렵다는 게 판명된 오늘엔 다시 벽을 만드는 예산이 배정되지 않는다 했다. 저걸 교실이랍시고 드디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는 기쁨에 겨워 앉은 김단과 그 동무들이 안쓰러웠다. 50대 중반인, 사람 좋아 보이는 김단의 담임선생이 겨우 저런 꼴을 만나려고 기나긴 파시즘의 시절을 아이들과 보냈을 걸 생각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전교조 운동이라는 빛나는 역사가 있었음에도) 한국에서 학교가 여전히 군대와 더불어 국가의 야만이 가장 충실한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국가의 야만을 유지하는 충실한 전위들 또한 여전히 무시 못 할 만큼 남아 있다는 것도. "그 이가 그렇게 돈을 밝히고 아이들을 차별한다 그래요." 아내는 입학식 때 보았던 다른 반 담임선생을 떠올리며 말했다. "단이가 그 선생에 안 걸린 게 다행이군. 그런데 그 반 아이들은 어째야 하지." "단이도 결국 그런 선생을 만나게 되겠죠."
불가항력적인 야만에 자식을 넘겨 준 둘은 쓰게 웃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학교 문제에 대해 적이 관념적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내 자식이 대개의 아이들이 도리 없이 처하는 야만을 피하게 해선 안 된다는 공정함을 생각했고, 그런 야만이란 단지 한국이라는 국가의 야만의 반영이며 아이가 결국 그런 야만 속에서 살게 될 거라면 사회성은 그속에서 길러져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 공정함이란 아비의 관념적인 정당함을 위해 아이를 방치하는 무책임일 수 있으며, 그 야만 속에서 길러지는 사회성이란 단지 아이의 정신만 돌이킬 수 없이 패게 하는 일일 수 있다. 그 사회성이란 남과 더불어 사는 지혜가 아닌 남을 물리치며 사는 비결일 테니 말이다.
아내와 나는 그런 야만과 싸울 구체적인 방안들을 준비하기로 했다. 학교의 야만을 학교 안에서 극복하는 방안을 알아보는 아내는 며칠 전 학교의 야만을 잘 알면서도 그걸 고치려 연대하기보다는 제 자식만 낫게 만들려 선생과 거래를 시도하는 부모들의 반동적 이기심이 또다른 문제라는 첫 번째 분석을 내놓았다. 학교의 야만을 학교의 바깥에서 극복하는 방안을 알아보는 나는 책장에 꼽아만 두었던 <민들레> 같은 탈학교 관련 자료들을 정독하는가 하면, 자주 교육이나 홈스쿨링에 대한 관한 외국의 이런저런 웹사이트들을 들락거리며 학교가 교육에 관한여러 선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증해가고 있다.
둘은 그런 방안들이 실행되지 않기를 내심 바라지만, 언젠가 닥쳐올 피할 수 없는 전투를 위해 그렇게 준비 중이다.(2001/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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