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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1/03/28 어릿광대
2001/03/28 17:28
별이 두개던가 세개던가. 박정희의 혁명 동지라던, 내가 다닌 경기도 A고등학교 이사장은 참으로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그렇듯) 넘쳐나는 욕심의 근거로 신앙심을 내세우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경기고나 대전고를 능가하는 한국 제일의 명문 고등학교를 만들겠다는 욕심 역시 신앙심을 근거로 한 그의 하고많은 욕심 가운데 하나였다. 내가 중학 3학년이 될 무렵 그 욕심이 벽에 부닥쳤다.

그 도시에 고교평준화 계획이 발표되었고 만든 지 5년밖에 안 된 그의 고등학교에 시험으로 신입생을 뽑을 기회가 한번밖엔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박정희의 혁명동지이자 시련을 더 큰 욕심을 채울 기회라 파악하는 독실한 기독교인답게, 그해 내내 그는 교사들을 풀었다. 울릉도 출신 세명을 포함, 전국 방방곡곡에서 내로라 하는 우등생들이 장학금 약속에 이끌려 모여들었다.

신입생들이 등교하자 학교는 흥분했다. 전교생 조회의 교장연설은 1학년들과 2, 3학년들이 질적으로 얼마나 다른가를 강조하는 내용이었고, 이른바 가장 실력 있는 교사들이 1학년에 배치되었으며, 그 교사들은 난 너희 같은 엘리트들을 가르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쩜 너희들은 하나같이 인물도 좋으냐는 식의 장광설로 수업을 채웠으며, 그 도시의 한 여고 3학년들의 인기투표 결과가 A고 1학년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1학년들은 자연스레 엘리트의 자부를 익혀갔다. 1학년들이 1학기에 치른 시험이 3학년 과정에도 나오지 않는 문제로 채워져 절반 이상이 0점을 받은 일 역시 엘리트만의 해프닝으로 여겨졌다. 문제가 생긴 건 반년이 지나서다. 학교는 2학기를 앞두고 1학년 장학생 수를 40여명으로 줄였다. 장학금을 받아가며 3년 후 금의환향만을 꿈꾸던 1학년들의 분노가 빠른 속도로 모여 갔다. 이사장의 그라나다 승용차가 황급히 학교로 들어 선 어느 날 교장은 운동장에 1학년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손나팔을 한 교장이 말했다. 제군들은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세계 어느 명문 고등학교도 50점 이하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법은 없다. 왜 제군들은 최고의 엘리트인 자신을 모욕하려 하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교장의 희한한 엘리트론은 1학년들의 분노를 누그러트리는 힘이 있었다. 50여명의 1학년들이 짐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1학년들은 매일 자취방에 모여 하릴없이 술과 유흥으로 시간을 죽여 갔다.

졸업한 지 10년 쯤 지난 어느 날, 나는 그 도시의 역 앞에 나붙은 포스터를 보았다. 天下名門 大 A高 6會 同門會. 동기들이 선배와 후배들을 배제한 동문회를 연다는 내용이었다. 참담해진 나는 그 학교에서 만난 모든 것들과 인연을 접었다. 나는 비로소 분노와 분별력을 잃은 엘리트의 자부란 그저 어릿광대의 자부임을, 어릿광대의 자부는 그 어릿광대를 사용하는 세력에 의해 전적으로 관리됨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그 학교를 떠난 지 20년이 된 나는 그런 어릿광대의 자부를 세상의 도처에서 발견하곤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살아가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회적 악행들의 실무는 그런 어릿광대의 자부를 통해 진행된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암, <조선일보>의 어릿광대들이 갖는 최고 신문의 최고 엘리트 기자라는 자부 따위 말이다. 화사한 외양을 한 그 어릿광대들은 저널리스트로서 최소한의 분노와 분별력을 자신들을 사용하는 파시스트들이 전적으로 관리하는 어릿광대의 자부와 하루 한번 등가교환 한다.

추신 : 그런 어릿광대의 자부가 얼핏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는 건 어릿광대 주변에 득실거리는 얼치기 어릿광대들 덕이다. 얼치기들은 어릿광대의 화사한 외양에 매혹된 채 늘상 밑도 끝도 없이 흥분하곤 한다.
2001/03/28 17:28 2001/03/28 1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