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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16 17:25
돌팔이 3

서양 의학이 한국의 환자들을 장악한 이래, 의사들은 한국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고소득 전문 직업군이자 일체의 사회 개혁에 가장 비협조적인 반동 집단의 지위를 유지해 왔다. 그런 의사들이 2000년 어느 날 '국민의 건강권을 수호'한다는 고난에 찬 폐업에 강철 대오를 이룬 일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 일은 적어도 모든 일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우리의 상식을 거스른다.

의사들에 따르면, 의사들이 분개한 이유는 한국의료제도의 모순 때문이며 그 모순의 뿌리는 1977년 시작한 의료보험제도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가 종막을 향해 치닫던 시절답게 한국의 의료보험제도는 졸렬한 내용으로 시작되었고 그후 23년이 지나도록 의료보험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사들 입장에서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진료비의 70% 가량만이 의사들 손에 쥐어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의사들은 지난 23년 동안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30%나 빼앗기며 살아왔다.

그런 딱한 처지의 의사들이 23년 동안 여전히 대표적인 고소득 전문 직업군이자 일체의 사회 개혁에 가장 비협조적인 반동 집단의 지위를 유지해 온 비결은 무엇일까. 그 비결은 전적으로 그들이 선택한 범죄 덕이다. 의사들은 약을 먹지 않아도 될 환자에게 약을 먹이는 일로,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의료행위로도 충분한 환자를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의료행위로 유도하는 일로 제 밥그릇의 부족분을 채워 왔다. 소아과 의사는 제 자식을 내맡긴 어미의 가련한 불안감을 이용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들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약을 먹였고 산부인과 의사는 제 몸을 내맡긴 임산부의 본능적 불안감을 이용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산모들을 셀 수 없이 많은 제왕절개 수술대에 눕혔다.

그렇게 23년 동안 국민들의 몸을 더렵혀 가며 제 밥그릇을 채워 온 의사들이 갑자기, 일제히 '국민의 건강권을 수호'하게 된 건 이른바 의약분업 실시로 그들의 주요한 범죄 수단이던 약 조제권이 약사에게 넘어가게 되면서다. 그것이 서울의 잘 나가는 종합병원 원장부터 저 시골의 당구장만 못한 의원 의사까지 강철 대오를 이루게 한 이유다. 그것이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된 지난 23년 동안 단 한번도 그 의료보험제도의 정체를 국민들에게 알린 일이 없는 의사들이, 한달 백만 원을 받으며 하루에 세 시간밖에 못 자는 극악한 노동을 치르면서 단 한번도 그들을 착취하는 선배 의사들을 상대로 싸운 일이 없는 전공의들이 단결 투쟁한 이유다.

(그런 의사들에게 하나마나한 말이겠지만) 의사들이 의약분업 실시로 더 이상 국민들의 몸을 더렵혀 가며 제 밥그릇을 채우기 어려워졌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제 밥그릇을 채우기 위해 23년 동안 저지른 그들의 범죄를 그 범죄의 피해자인 국민들에게 고백하고 참회하는 일이었다. 그 다음 의사들이 할 일은 현재 한국의료제도의 이런저런 모순들을 국민들에게 가장 겸손한 자세와 가장 친절한 방법으로 설명하는 일이었다. 그렇게만 했다면 국민들이 어쩌겠는가. 한국 의료제도의 모순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그런 의사라도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불쌍한 국민들이 말이다.

그러나 한국 의사들이 한 일이란 그들이 23년 동안 제 밥그릇을 채우기 위해 몸을 더렵혀 온 국민들을 아예 외면하는 일이었다. 먹지 않아도 될 약을 먹어도 좋고 안 째도 될 배를 째도 좋으니 제발 진료만 해달라는 국민들을 향해 의사들은 전례 없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국민건강권 수호를 위해 싸우는 겁니다."

추신 : 지난 23년 동안 한국 의사들이 마음놓고 국민들의 몸을 더렵혀 가며 제 밥그릇을 채울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한국 정부의 협조 덕이다. 의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알면서 단 한 명의 의사도 잡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한국 정부는 빌어먹을 통치 자금을 표도 안 나는 사회복지에 헐지 않아도 되었다. 더러운 정부와 더러운 의사가 동침하고 있다. | 씨네21 2000년_11월
2000/11/16 17:25 2000/11/16 17:25
2000/11/05 17:24
텔레비전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어머니'(김혜자씨가 분한) 캐릭터의 변화를 보면 그래도 세상은 진보한다는 생각이 든다. 초기 <전원일기>의 어머니 캐릭터는 많이 배우고도 농부의 아내로 사는 '특별한' 농민 여성이었고 오늘 <전원일기>의 어머니 캐릭터는 그다지 배우지 못한 '평범한' 농민 여성이다. 20년이 넘은 장수 드라마고 작가도 여러 번 바뀐 걸로 알지만 어머니 캐릭터의 그런 변화는 세상의 진보에 조응한 것이다.

예술작품 속에서 '고귀하지 않은 계급'의 캐릭터를 그릴 때 '평범한'(전형적인) 캐릭터를 피하고 '특별한' 캐릭터를 사용하는 건 한 인간의 가치를 신분으로 결정하는 전근대적 정신의 반영이다. 그런 전근대적 정신은 예술작품 속에서 '평범한' 농민을 주인공으로 사용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 농민여성이되 '원래 신분은 고귀하나 부러 자신을 낮춘' 농민여성이라는 희한한 캐릭터가 사용된다.

'고귀하지 않은 계급'의 캐릭터를 그릴 때 '평범한'(전형적인) 캐릭터를 피하고 '특별한' 캐릭터를 사용하는 건 예술작품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사' 가수, '학사' 권투선수, '학사' 호스티스니 하는 기이한 호칭들을 기억하는가. 전근대적인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은 가수나 권투선수나 호스티스 같은 '고귀하지 않은 인간'을 공중의 의제로 삼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학사라는 사실이 노래부르거나 권투하거나 술시중 드는 일의 전문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알지만, 가수나 권투선수나 호스티스에서 학사 가수나 학사 권투선수나 학사 호스티스를 달리 보는 일은 가수나 권투선수나 호스티스를 계속 경멸하는 일에 도움을 준다.

그런 점에서 <전원일기>에서 '어머니'(김혜자씨가 분한) 캐릭터가 많이 배우고도 농부의 아내로 사는 '특별한' 농민 여성에서 그다지 배우지 못한 '평범한' 농민 여성으로 변한 사실은 작지만 의미심장한 일이다.('전원일기'라는 타이틀마저 '농민일기' 쯤으로 바뀐다면 더욱 좋겠지. '전원'이라니, 그런 돼먹지 못한.) 가장 느리게 진보하는 정신인 공중파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 일어난 그런 변화는 한 인간의 가치를 신분으로 결정하는 전근대적 정신이 청산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문제는 그런 청산이 진정한 인간해방의 방향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신분구조로 대체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특히 한국 같은 전례 없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인간의 신분을 결정하는 전적인 기준은 돈이다. 돈이 신분을 사들이고 돈이 신분을 결정한다. 한국의 일류대학들은 날이 갈수록 부르주아의 자식들로 채워져 간다. 논술이니 수능이니, 대학입시의 방식이 개선될 수록 대학입시는 부르주아의 자식들에게 유리해져만 간다. 대학을 우골탑이라 부르거나 노동자의 자식이 각고의 노력으로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드라마는 이미 지난 시절의 전설이다.

돈은 암세포처럼 한국의 정신세계를 지엽말단까지 잠식해간다. 입시위주의 교육을 혁파한다는 '열린교육'마저 부르주아의 전유물이 되어간다. 저명한 열린학교는 부르주아의 자식들로 채워져 간다.(물론 부르주아들이 제 자식을 거기 보내는 가장 큰 이유는 제 자식이 두들겨 맞지 않고도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보고 때문이다.) 진짜 무공해 먹거리가 부르주아의 식탁으로 직송되듯 진짜 열린교육은 부르주아의 자랑스런 가족사진을 장식하는 일에 봉사한다. 한국의 1세대 부르주아들은 대개 비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부르주아의 자식들은 부자에다 학벌까지 좋으니(혹여 입시에 실패하면 미국 대학으로) 그들은 이제 그 고귀한 신분을 당당히 주장한다.

신분은 철저히 관철되고 철저히 세습된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아파트 평수별로 교우하고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애당초 불가촉 천민이다. 신분은 철저히 관철되고 철저히 세습된다. 부르주아의 인생은 먹거리에서 자식 교육까지 자손만대 '열려' 있고 노동자의 인생은 먹거리에서 자식교육까지 자손만대 '닫혀' 있다. 신분은 철저히 관철되고 철저히 세습된다. | 씨네21 2000년_11월
2000/11/05 17:24 2000/11/05 1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