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7'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0/07/25 돌팔이 2 (1)
  2. 2000/07/10 돌팔이 (3)
2000/07/25 17:14
"40도에 육박하는 고열에 시달린 두 살배기 우리 아가를 가슴에 품고도, 분명히 의사들 나름대로의 정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애써 눈물을 참고 있던 저를 드디어는 서럽게 눈물을 터뜨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한없이 여린 존재 앞에서는, 더 고귀한 그 무엇도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독자 편지에서)

의사들에 대한 단상, <돌팔이>에 많은 의사들이 항의했다. 의사들(정확하게, 항의편지를 보낸 의사들)은 하나 같이 나더러 의사들이 처한 현실을 아느냐고 했다. 밝히자면, 나는 의사와 관련한 한국 의료제도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기본적인 분별을 할 수 있을 만큼은 안다. 의사폐업을 주제로 한 어느 대담에선 의사들의 입장을 옹호한 일도 있을 만큼 말이다. <돌팔이>는 의사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내 논리적 견해가 아니라, 한국 의사들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정서적 견해였다.

의사들은 <돌팔이>가 정부와 관제 언론의 여론몰이 만큼 악의적이라 했다. 의사들이 악의적인 여론몰이와 여론을 분별하지 못하는 건 딱한 일이다. 이를테면 지하철 파업 노동자들을 '시민의 발을 볼모로'라는 수사로 여론몰이한 세력이 의사 폐업을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라고 비난하는 일과 지하철파업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에 연대하여 기꺼이 불편을 감수한 사람들이 의사폐업을 그렇게 말하는 일을 전혀 다르다.

사회적 억압은 누구에게나(논설위원 김대중이나 국회의원 정형근 같은 막돼먹은 인간들에게도) 있지만 그저 나름의 것일 수도 사회적 연대를 얻을 만한 것일 수도 있다. 근대사회의 성원이라면 특별한 사회적 억압에 처한 다른 성원의 정당한 권리 주장에 사회적 연대를 보낸다. 우리가 지하철 파업 노동자들을 '시민의 발을 볼모로'라 비난하는 일에 반대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지하철 파업과 의사들의 폐업은 경우가 다르다. 의사들의 폐업이 사회 성원들로부터 어떤 연대도 얻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처한 사회적 억압에 비해 그들이 선택한 해결 방법이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지하철 노동자들이 다른 사회 성원들에게 부탁한 건 불편이었지만 의사들이 다른 사회 성원들에게 부탁한 건 목숨이었다.(의사들은 사람이 죽었다는 얘긴 악의적인 과장일 뿐이라 주장한다. 그게 사실이라 해도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 아닌가) 의사들의 비극은 자신들에 대한 사회성원들의 정서적 견해를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회성원들의 의사들에 대한 반감은 의사들이 생각하듯 폐업 사태와 관련한 악의적인 여론몰이로 새롭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체험으로 쌓여온 것이다.

폐업에 나선 의사들은 "이럴 바에는 개업할 돈으로 차라리 카페나 당구장을 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개업하지 말고 카페나 당구장을 하면 될 것이다. 카페나 당구장을 하는 인간은 의사보다 하등하단 건가. 자신들이 더 이상 특권층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특권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의사들의 이중의식은 그들의 권리주장의 공정성을 손상한다.

간호사들이 교대 근무하며 파업할 때 '환자를 볼모로'라 비난했던 의사들은 폐업을 승리로 끝내고도 목숨을 부탁했던 다른 사회 성원들에게 사과하지 않았고 자신들 대신 국민의 정부로부터 분풀이 당한 롯데호텔 노동자들에게도 사과하지 않았다. 90퍼센트가 넘는 의사들이 재파업에 찬성했다.

추신 : 의사들의 항의 속에 '당신 공산주의자냐'라는 말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를 낙심케 했다. 의대에선 사회 교양을 가르치지 않는 건진 모르겠으나 이젠 <조선일보>조차도 주저하는 그런 메카시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그들을 다른 사회 성원들이 '선생님'이라 부르는 건 기괴한 코미디다. 의사들의 초라한 사회 교양과 의사들에게 주어진 근거 없는 사회적 권위의 부조화는 "40도에 육박하는 고열에 시달린 두 살배기 우리 아가를 가슴에 품"은 어머니의 가슴을 서럽게 찢는다. | 씨네21 2000년_7월
2000/07/25 17:14 2000/07/25 17:14
2000/07/10 17:12
다섯 살 무렵 아버지는 식솔들을 이끌고 전라북도 옹동 산골로 들어갔다.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빈민들에 야산을 불하하여 개간하게 하는 '후생촌'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종일 바위를 파내고 땅을 골라 농사 지을 땅을 만들었고, 나는 종일 그들 곁에 쪼그리고 앉아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이나 그리며 까맣게 그을렸다. 두 해째 봄이 올 무렵 아버지는 지난가을 수확한 고구마를 묻어 놓은 구덩이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걸 발견했다. 고구마는 모두 썩어 있었다. 낙심한 아버지는 그간의 고생을 뒤로한 채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전주로 떠났다.

후생촌을 기억하는 추억 가운데 하나는 '돌팔이'다. 서른 남짓의 그는 서울 어느 병원에서 어깨 너머로 의료일을 배웠다고 했다. 아픈 사람이 생기면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연락했고 그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자전거에 왕진가방을 싣고 달려오곤 했다. 내가 마루에서 발을 헛딛고 떨어져 눈두덩이 벌어졌을 때나, 무리한 노동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입과 코로 피를 쏟고 쓰러졌을 때도 말이다.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이 오죽했으랴만 희한하게도 마을 사람들이 돌팔이의 의료 실력을 못미더워 하는 일은 없었다. 더욱 희한한 일은 노인들조차 그를 하대하지 않을 만큼 마을 사람들이 그를 존대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아이 덕에 의사를 만나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어릴 적 후생촌 사람들이 돌팔이에 보이던 그 희한한 존경, 돌팔이에 의사 선생님 대접을 하던 이유가 친절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친절이야말로 의사가 의사일 첫 번째 조건이다. 의사를 찾는 환자는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을 망정 절대적인 불안 상태에 있게 마련이다. 자신이 왜 아픈지 그 아픔과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결부될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환자 앞에 선 의사는 절대적인 권위 상태에 있다. 설사 그가 돌팔이보다 못한 실력을 가진 의사라 해도 환자는 그 권위를 거부할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의사의 친절은 절대 불안 상태의 환자와 절대 권위 상태의 의사가 인간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돌팔이 이후 내가 만난 의사들이란 늘 불친절했다. 몸에 좋고 나쁜 걸 잘 구별해 먹어선지(이른바 의사답게) 평균보다 뽀얀 외관을 한 그들은 늘 환자에게 불친절했다. 그들이 그 뽀얀 입을 여는 순간이란 자기들(이른바 의료진들)끼리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할 때뿐이다. 그런 때 그들의 얼굴은 생선 가게 앞에서 생선의 물을 의논하는 아주머니들의 나른한 얼굴과 같다. 답답하다 못한 환자나 보호자가 비굴함을 넘어서는 겸손으로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그들은 그 질문의 비전문성을 사사오입한다. 환자와 보호자는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행여 그들에게 밉보일 새라 끓는 속만 다스린다.

오늘 우리가 의사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유가 그들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특별한 임무를 가진 사람들이라서라는 의견은 순진하다 못해 아둔하다. 오늘 우리가 의사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유는 단지 절대 불안 상태의 환자들 앞에서조차 불친절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유지하는 그들의 절대 권위 때문이다. 몇몇을 빼고라면 오늘 우리 앞에 선 의사들 가운데 히포크라테스나 허준의 정신과 연관된 어떤 특별한 직업관을 가진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다.(최근에 발견된 그들의 특별한 직업관은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선 사람이 죽어나가도 좋다는 숭고한 신념이다.) 알다시피 그들이 의사가 된 이유는 단지 사회의 상층부에 살기 싶은 욕망에서였고 그들의 모든 관심은 그 욕망의 실현 여부에 있다.

의사라는 직업을 생각하면 나는 어린 시절 돌팔이를 떠올린다. 그는 환자에게 친절했고 의사 자격증은 없었지만 환자가 믿고 몸을 내맡길 만큼의 실력을 가졌으며 가난한 환자에게선 적은 돈만을 받았기에 마을 사람 평균의 살림보다 결코 낫게 살지 않았다. 돌팔이는 의사였고, 나는 돌팔이 이후 돌팔이보다 나은 의사를 만나지 못했다. | 씨네21 2000년_7월
2000/07/10 17:12 2000/07/10 1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