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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0/03/15 예수
  2. 2000/03/07 공산품의 길
2000/03/15 16:57
내 친구 석구는 용인의 한 시골 교회 목사다. 지난해 어느 날 카트를 밀며 장 보는 아내 뒤를 좇을 때 울린 전화 속엔 15년만에 듣는 녀석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몇 주 후 나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소박하게 박힌 녀석의 교회를 찾았다. 내가 길을 헤매다 늦게 도착한 탓에 녀석은 이미 설교 중이었고 나는 묵상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광고 시간에 녀석은 나를 불러일으켜 여러분 저의 귀한 옛친구가 찾아왔습니다, 하고 소개했다. 교인들의 평화롭고 따뜻한 박수 소리 때문이었을까. 녀석의 말이 내 귀엔 여러분 여기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하고 들렸다. 탕자는 녀석의 사는 모습에 안도했다. 녀석은 15년을 하루같이 천천히 예수에게 다가가고 있다.

내가 한신에 입학했을 때 녀석은 신입생을 환영하러 나온 2학년들 가운데 하나였다. 녀석은 한신이란 학교가 있는지조차 모른 채 입학한 나와는 달리 일치감치 신학공부를 소망했었다. 내가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역동성을 깨닫고 예수라는 사나이를 인생의 기준으로 삼게 된 데는 녀석의 영향이 컸다. 녀석은 대책 없는 건달에서 엉성한 대학생으로 생활을 전이하고 지리멸렬하던 내게 예수에 대해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제 소망에 대해 조용히 말하곤 했다. 나는 녀석을 따라 한 걸음씩 예수에게 다가갔다.

언젠가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는 소망을 접은 이유가 교회에 대한 낙심 때문이라고 적었지만 다른, 보다 큰 이유는 예수처럼 살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예수에 대해 알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온몸으로 그를 받아들였지만 그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를 따라 사는 일의 얼개를 파악하게 되었을 때 나는 거스를 수 없는 절망감에 빠졌다. 검약한 삶을 넘어, 자기 헌신의 기쁨마저 생략한 채 오로지 남을 섬기다가 완전한 고독감 속에 사라져가기엔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았다.

내가 예수의 삶에서 넘어설 수 없었던 지점은, 그가 보여준 삶의 폭이 인간이 이룬 어떤 선한 그룹에서조차 결국 오해받기 십상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예수는 정치범으로 몰려 죽었지만(당시 로마 식민지령에서 십자가 처형은 민족해방 운동가들에게 사용되었다. 물론 전시 효과 때문이었다.) 정치범이 아니었다. 그를 죽이는 일은 로마 식민정권, 유태 괴뢰정권, 유태교 지도자들 같은 압제자들간의 합의였을 뿐 아니라 예수가 자신들의 정치 혹은 영혼의 해방을 이루어 줄거라 믿고 따르던 제자들과 민중들의 합의이기도 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를 정치 지도자로 혹은 영혼의 지도자로 제각기 받아들였지만 그들이 예수를 좀더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정치 지도자라 여겼던 사람들은 그를 영혼의 지도자라 여겼고 그를 영혼의 지도자라 여겼던 사람들은 그를 정치 지도자라 여기게 되었다. 정치적 해방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영혼의 해방을 되새기고 영혼의 해방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정치적 해방을 되새기는 예수의 방식은 사람들의 욕망을 거슬렀다. 완전한 인간 해방이란 그 둘간의 접점 속에 있는 게 분명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정치 혹은 영혼의 해방 전선이 상할까 두려워했다.

이제 예수가 죽은 지 이천 년이 지나 그는 죽음으로 세상의 모든 죄를 사했다는 모호한 신학론의 박제가 된 채 사람들의 욕망의 담보물이 되었다. 예수를 근거로 한다는 기독교 정신이 인류의 주요 부분을 장악한 지 몇 세기가 지났지만 그가 보여준 완전한 인간 해방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천 년 전 그가 죽을 때보다 결코 늘지 않았다. 예수를 배신한 자책감도 이젠 바래어가고, 오늘도 천천히 예수에게 다가가는 내 친구를 바라보는 일로나 추레한 삶을 위무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아무리 둘러봐도 예수의 삶은 대개 헛되었던 것 같다. 예수는 이천 년 전 우리에게 해방을 가르쳤지만 우리는 이천 년째 예수에게 욕망을 요구한다.
2000/03/15 16:57 2000/03/15 16:57
2000/03/07 16:56
종일 아이를 보는 토요일. 내 몸을 짓밟으며 공룡 놀이를 하던 김단과 김건이 잠시 다른 놀잇감을 찾아 물러간 틈을 타 텔레비전을 켠다. 연속극, 스포츠, 쇼, 미국방송, 일본방송, 중국방송... 버릇대로 이리저리 리모콘 서핑을 하다 눈에 밟히는 얻어맞는 고딩의 클로즈업. 쇼트가 바뀌고 HOT가 카메라 앞에 바짝 다가와 팔을 휘젓는다. HOT가 왕따를 노래하고 있다. 언젠가 씨랜드 아이들을 노래하는 걸 본('들은'이 아니다. 이수만은 HOT의 장르가 립싱크라 확인한 바 있다.) 기억이 살아나면서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영혼까지 사고 파는 자본주의라지만 해도 너무 하는군.

한때 통기타를 치며 여린 목소리로 <모든 것 끝난 뒤> 같은 감상적인 노래를 부르던 '트로트 포크' 가수 이수만은 미국 유학에선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단단히 배워왔던 모양이다. 대중음악 상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여느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분명히 한 최초의 한국인일 그는 (현진영 정도를 제외하곤) 지나치게 앞선 시도가 불발에 그치곤 하다 결국 HOT라는 히트상품을 만들어냈다. 나는 HOT 공연실황 클립 속에서 천사 날개를 달고 무대에 선 HOT에 환호하는 10대들을 잊을 수 없다. 그 장면을 보며 내 머리통 속에선 HOT에게 천사 날개를 달아준 이수만의 욕망과 고작 그런 우스운 천사에게서나 안식을 얻는 한국 10대들의 가련한 처지가 대립했다.

알다시피 HOT라는 상품이 순항하는 근거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남긴 공백이다. (박노해가 신영복 모델을 선택하듯) 이수만은 서태지 모델을 선택했고 그런 선택은 이미 오래 전부터 대중음악 시장을 면밀히 분석해온 이수만으로선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서태지 모델을 선택했다는 것은 단지 서태지의 은퇴로 생긴 남성 댄스그룹의 빈자리를 차지한다는 것 외에 몇 가지 세부를 갖는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건 이른바 사회비판이다. 추측컨대 서태지 모델을 선택한 이수만이 서태지의 중요한 구성 요소라 공인된 사회비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수만은 사회비판이라는 요소를 기꺼이 HOT라는 공산품의 외장재로 채택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되는 모든 음악이 상품이 아닐 도리는 없겠지만 그 상품들이 가진 사회비판의 권한은 저마다 다르다. 이를테면 천지인이나 메이데이처럼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상품 시스템을 사용할 뿐인 그룹이나 스스로 음악을 창작하고 집행하는 능력을 갖춘 서태지와, 순수한 공산품인 HOT에게 똑같은 사회비판의 권한이 주어진다면 대체 우리의 삶에 어떤 판단의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가. "돈 속에 썩어버린 양심 너의 그런 한심한 모습은 더 이상 꼴도 보기 싫다. (...) 이젠 제발 돈 때문에 사람 팔지 말고 주위를 둘러봐 너 혼자만 잘살잖아 한편의 허상을 향해 초라한 몸부림에 흐느끼는 영혼들의 울음이 들린다."(Korean pride)

두어 달 전 어느 시사월간지에서 이수만과 대담을 하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 우습게도, 갑자기 불어난 유사 지식인 활동에 치어 사는 나로선 선뜻 응할 형편도 못 되었지만, 허탈함에 쓴웃음이 나왔다. 대담 제목이 <문화는 돈이다>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인생의 적이자 신앙의 적으로 여기는 내가 자본주의의 전사 이수만과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 자본주의는 현실의 법이며 내가 아무리 이수만을 마땅치 않아 한들 합법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그를 공식적으로 비난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나는 꿈에라도 이수만이 욕망을 기초로 한 자본주의의 전사에서 계몽주의를 신봉하는 대중음악 활동가로 탈바꿈하길 바라는 게 아니다. 내가 이수만에게 바라는 건 단지 그의 공산품에 사회비판이라는 외장재는 사용하지 말아달라는 것, 공산품의 길을 걸어달라는 것이다. | 씨네21 2000년_3월
2000/03/07 16:56 2000/03/07 16:56